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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160화 (160/314)

환관의 요리사 160화

양고기가 익어간다. 묽었던 육수가 진해지고, 그 육수에 배추와 당면이 더해진다.

배추는 아삭한 식감이 남아 있도록 살짝, 당면은 육수를 흠뻑 빨아들여 부드러워질 때까지 충분히. 백작은 양고기와 배추를 포크로 찔러 소스에 찍은 다음 소스 방울이 떨어지기 전에 서둘러 입으로 넣었다.

자극적인 소스의 맛과 섞이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배추와 고기. 그리고, 그 맛이 남아 있는 혀 위로 스며드는 피처럼 붉은 포도주.

샤를마뉴의 포도주. 축복받은 06년산. 그 극상의 환희를 입에 머금은 백작은 조심스럽게 그 희열에 정신을 맡겼다.

오감이 한없이 날카로워지고 단단한 육체의 막에 쌓여 있던 정신이 해방되는 듯한 감각.

곤두선 솜털을 스치는 바람마저도 생생히 느껴지는 날카로움으로 백작은 포도주를 탐닉했다.

가장 먼저 연상되는 것은 흐드러지게 핀 붉은 꽃. 그 꽃을 한가득 모아서 만든 꽃다발.

거기에 고산지대에서 자라는 나무딸기류의 톡 쏘는 향기. 그 밑으로는 오래 묵은 참나무통의 중후함과 풍요로운 토양의 흙냄새가 옅게 깔려 있었다.

치밀하게 얽혀있는 풍미는 어느 것 하나 과하게 자신을 과시하지 않는다.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이 절묘하다.

찰나의 순간 혀끝을 스치고 지나간 천국의 여운에 백작은 등받이에 기댄 채 몸을 늘어뜨렸다.

“이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겠지요. 행복하지만, 너무 행복해서 걱정스럽군요.”

내일부터는 무엇을 기대하며 살아야 할까요. 몽롱한 눈동자로 잔에 남은 한 모금의 포도주를 응시하던 백작은 지금껏 한쪽에 밀어두었던 의문을 떠올렸다.

“이제 그만 말씀해 주시지요. 도대체 어떤 마법을 부리신 겁니까?”

도대체 어떤 마법을 부리셨길래 긴 여행길을 거쳐온 포도주가 이다지도 완벽할 수 있죠?

백작의 물음에 소년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딱히, 마법 같은 건 없었다. 그저 넘치는 돈과 인력을 아낌없이 투자했을 뿐.

“이중 삼중으로 완충재를 채워 넣고, 포도주가 진동에 상하지 않도록 평탄한 길로만 운송했지. 원래는 만찬을 위해 스무 병을 주문했지만, 아쉽게도 살아남은 것은 이 한 병뿐이야.”

그 험한 길을 넘어온 것이니, 한 병이라도 건진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겠지.

녹색 병 속에서 찰랑거리는 포도주를 들여다본 소년은 새로운 잔을 꺼내 한 모금이 조금 안 되게 따라 태감에게 권했다.

“태감님도 한번 맛보시죠. 고기 요리에 잘 어울립니다.”

“호오, 색이 아주 곱구나.”

고기와 배추. 당면으로 가득 차오른 자신만의 천국에서 허우적거리던 태감은 소년이 내민 잔을 받아들고는 그 우아한 빛깔에 무심코 입맛을 다셨다. 과연, 맛은 어떨까.

조심스럽게 한 모금을 입에 머금은 태감은 당황스럽다는 듯 입술을 움찔거렸다. 한참을 우물거리며 맛을 느끼려 한 태감은 결국 애매한 답을 내놓았다.

“으음, 익숙한 맛은 아니구나. 생각보다 떫은맛이 강하고. 으음, 단맛이 나기는 하지만…….”

“흐음, 형씨. 태감님께선 포도주가 별로라고 하시는군.”

안타깝지만 술은 혼자 마셔야겠어. 소년의 말에 백작은 볼을 발갛게 물들인 채 애써 아쉬운 척 마음에도 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요. 입에 맞지 않는 술을 억지로 마실 필요는 없으니까요.”

“정말 아쉬운 것 맞나?”

백작의 너스레에 헛웃음을 터트린 소년은 그의 앞접시에 고기와 배추를 듬뿍 담아주었다. 고기는 아직 넘치도록 남아 있었고 두 사람의 식욕은 왕성했다.

고기가 부족하면 고기를 더 썰어오고, 탕이 식으면 숯을 더 채워가며 그들은 석양이 저물고 별이 빛날 때까지 식사를 이어졌다.

마무리 국수까지 먹고 난 후, 태감은 배를 만복감과 함께 찾아온 식곤증에 작게 하품을 하며 배를 두드렸다.

“그건 그렇고, 마무리 면이 도삭면일 줄이야. 확실히 생각도 못 한 면이기는 하다만.”

“맛있었지요?”

“확실히 괜찮더구나. 맨날 납면(拉麵)이나 절면(切麵)만 먹다가, 마무리 국수로 도삭면을 먹으니 참신해.”

단장님께선 괜찮으셨습니까? 태감의 말에 알딸딸하게 취기가 올라있던 백작은 조금 늦게 고개를 들었다.

“아주 좋았습니다. 쫄깃한 면도 아주 좋았고. 육수도…… 음…….”

“만족하셨다니 다행이군요.”

취기가 섞인 숨을 내쉬며 백작은 자신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이대로 방으로 돌아가 아침까지 코를 골며 잘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따스한 솜이불을 덮고, 푹신한 베개에 고개를 파묻은 채로. 식곤증에 꺾이려는 의지를 힘겹게 부여잡고 백작은 태감에게 무언의 양해를 구했다.

시선과 표정으로만 이루어진 부탁이었지만 태감은 어렵지 않게 그 뜻을 알아차렸다. 그러고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정말 즐거웠습니다. 단장님.”

“아, 정말 훌륭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태감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무의미하고 형식적인 인사를 끝으로 태감은 자리를 피했다. 떠나는 그 순간까지 태감은 소년에게 어떠한 말도 남기지 않았다.

소년이 온전히 자신의 의사로 결정할 수 있도록. 조용히 떠나는 태감의 등을 지켜보던 소년은 이내 꾸며낸 듯한 웃음을 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 슬슬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때군.”

태감님의 허락도 얻었으니, 이젠 온전히 우리만의 시간이군. 벌겋게 취기가 오른 백작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소년은 잠시 산책할 것을 권유했다.

“술도 좀 깰 겸, 잠시 걸을까.”

“예? 아. 예.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

소년에게 이끌린 백작은 천천히 달빛이 드리운 정원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가을밤의 서늘한 공기는 취기에 달아오른 백작에게 딱 기분 좋게 느껴졌다.

하늘에는 별이 반짝였고, 초승달을 구름 속에서 흐릿하게 빛나고 있었다.

대나무 사이를 스치며 춤추던 바람도 멈추고 첨벙거리며 튀어 오르던 잉어도 침묵하는 시간. 고요하게 가라앉은 정원은 마치 백작이 각오를 다지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뭐라고 이야기해야 할까.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말없이 자신의 발끝만을 내려다보던 백작은 조리 있게 자신의 말을 포장하는 것을 포기했다.

취기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고 그의 정신은 지나치게 격정적이고 혼탁했다. 결국,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소년이었다.

“오늘 요리는 괜찮았나?”

“예. 아주 좋았습니다.”

“그거 다행이군.”

“만찬에서 먹었던 요리도 정말 훌륭했습니다. 아니, 훌륭하다는 말로는 부족하겠지요. 뭔가 아까부터 계속 훌륭하다는 말밖에 하질 못하고 있군요. 분명 대체할 만한 다른 말이 있을 텐데.”

“자네 너무 취했군. 역시 한 병을 다 마시는 건 너무 과했어.”

어느새 소년은 처음의 껄렁한 말투 대신 자연스러운 노인의 말투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취기가 쌓인 백작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게 적당히 마시지 그랬나. 미련하게 그 병을 다 비우다니.”

“하하. 그러게요. 예. 조금 남길 걸 그랬습니다.”

그 큰 병을 혼자 다 비웠으니 취할 만도 하지. 잠시 기다리게. 소년은 백작을 나무 그늘에 앉혀놓은 다음 주방에서 꿀물을 타왔다.

따뜻하게 데운 꿀물을 마신 백작은 조금 취기가 가셨는지 한결 선명한 눈동자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정신이 좀 드나?”

“예, 선생님. 한결 개운하군요.”

“그럼 이제, 지난날의 대답을 해도 되겠나?”

소년의 희미한 웃음에서 백작은 소년이 할 말을 깨달았다. 분명 듣고 싶지 않은, 외면하고 싶은 말일 것이다.

하지만 백작은 더 이상 취기를 변명 삼아 도피하지 않았다. 백작이 차분히 고개를 끄덕이자 소년은 입술을 열었다.

“미안하네.”

그것은 백작의 생각 이상으로 아픈 말이었다. 한순간 통증이 자신의 가슴을 뚫고 지나간 것만 같다는 생각에 백작은 자신의 가슴께를 더듬었다. 예상하였지만, 역시 거절의 말은 가슴 아팠다.

그 순간 백작은 자신도 모르게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래선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태감을 향한 질투의 감정이 가슴에 스며 나왔다.

동시에, 성직자로선 해선 안 되는 추악한 상상까지.

죄책감으로 얼룩진 백작을 올려다보며 소년은 그가 어떤 충동을 느꼈는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그 한순간의 악의에 그가 얼마나 괴로워할지도. 그는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이었다. 높은 도덕성이 요구되는 관직과 성직을 겸하며, 남들에게 항상 모범이 되도록 애를 써왔으리라.

‘참 인생 어렵게도 산다. 애가 융통성이 없네.’

조금쯤은 자신에게 관대해도 좋으련만. 지나치게 자신에게 관대하게 살아온 소년은 그에게 어떤 위로를 해줘야 할지를 고민했다.

유감스럽게도 그는 말재주가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살아생전 남을 위로해 본 경험엔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고민하던 소년은 결국 백작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양심의 가책에 짓눌려 있던 백작은 소년의 투박한 손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악수. 모르나?”

백작이 조심스럽게 손을 마주 잡자 소년은 기세 좋게 손을 흔들려 했다. 하지만 신장 차이 때문에 그 꼴이 퍽 우습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씁쓰름한 표정으로 손을 내려야 했다.

뭔가 그럴듯하게 위로해 주고 싶은데. 역시 안 풀리는군.

소년은 결국 그다운 방식으로 백작을 위로해야 했다.

퍽 소리가 나게 엉덩이가 걷어차인 백작은 뜻밖의 상황에 말문이 막힌 듯 말없이 자신의 소년을 돌아보았다.

소년은 진작에 이랬어야 했다고 생각하며 기세 좋게 목소리를 높였다.

“야 임마. 사람이 살다 보면 좀 나쁜 맘도 먹을 수 있지, 뭘 그런 걸 가지고.”

어? 대범하게 넘어갈 줄도 알아야지. 자고로 인생이라는 건 말이다. 한없이 늘어지는 소년의 설교에 백작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말을 경청했다.

소년의 고루한 인생 설교는 백작의 가슴 속에 맺힌 죄책감이 전부 해소될 때까지 이어졌다.

* * *

교역단의 교역이 끝나고 제국에서의 용무가 모두 마무리되자 사절단은 본국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여행길을 버틸 식량과 물, 독한 증류주. 그리고 기름 등. 긴 여행길을 준비해야 했기에 사절단의 모두가 막바지 점검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런데 사절단의 단장인 자네가 이렇게 놀고 있어도 되나?”

“아무리 바쁘더라도 선생님을 만날 시간은 내야지요.”

“핑계는 좋구만.”

이튿날 느닷없이 잠이 깰 만한 걸 찾아달라 부탁해온 백작을 위해 소년은 하는 수 없이 다관 막심의 특실로 그를 데려와야 했다.

“훌륭한 커피군요. 설마 제국에서도 커피를 마실 수 있을 줄이야.”

“비교적 최근에 유행한 거긴 하지만, 지금은 경사 사람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삶의 일부분이지.”

“확실히, 바쁜 도시인들에게 커피는 매력적인 친구지요. 과하게 남용하면 불면증에 시달리게 되지만.”

“잠은 충분히 자야지.”

그렇지요. 비록 어제는 잠들지 못했지만, 오늘은 푹 자야지요. 마차에서라도. 묘하게 뼈가 담긴 백작의 말에 소년은 시선을 돌렸다.

“그건 그. 자네가 어제 너무 궁상을 떠니까.”

“그러고 보니 이번엔 형씨라고 하지 않으시고 자네라고 하시는군요.”

“왜, 형씨가 듣기 더 편한가?”

아니요. 선생님께서 불러주시는 호칭은 다 듣기 좋습니다. 백작의 말에 소년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진하게 우려낸 가배를 들이켰다.

그가 잔을 내리기를 기다린 백작은 잔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소년에게 고개를 숙였다.

“선생님께는 늘 가르침을 받는군요. 저번에도 그랬고, 전날 밤에도 그렇고.”

“저번에는 그렇다 쳐도, 전날 밤은 가르침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

전날 밤엔 설교라기보다는 늙은이의 꼰대 짓에 가까웠으니까.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젊은이들에게 꼰대 짓은 하지 않기로 했건만. 결국, 나이를 먹으면 어쩔 수 없이 꼰대가 되는 건가.

새삼스럽게 자신의 나이를 실감하며 소년이 우울함에 잠겨있는 동안 백작은 커피를 추가 주문하고는 곁들이로 나온 쿠키와 페이스트리로 시선을 돌렸다.

“호오, 이것 참 결이 잘 살아 있는 페이스트리군요. 향기를 맡아보니 버터는 아닌 것 같고. 라드인가요?”

“그래. 돼지 등기름을 정제한 라드로 만들었지. 먹을 때마다 살이 한 뭉텅이씩 옆구리에 붙으니 조심해.”

“어쩐지, 그래서 더욱더 고소했군요. 어쩐지…….”

이토록 고소하고 향긋할 수가. 거기에 버터로 만든 페이스트리와는 차원이 다른 이 바삭함.

입에 넣으면 천사의 깃털처럼 가볍게 바스러지고 입에 남는 기름기는 고소하고 달콤했다. 이것이 정녕 내가 아는 페이스트리인가? 달콤한 페이스트리의 기름진 풍미에 취한 백작은 이내 탄식하며 외쳤다.

“지금껏 버터로 만든 페이스트리에 만족하며 발전을 게을리한 법국의 제빵업계는 반성해야만 한다. 아아 세상에, 제국의 국민들이 이토록 훌륭한 페이스트리를 즐기는 동안, 우리는 도대체 무얼 하고 있었나!”

“건강상으로는 그쪽이 더 좋을걸.”

뭐 크게 다르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이왕 먹을 거면 돼지기름보다는 버터가 낫지. 백작과 웃고 떠드는 동안 소년은 다가오는 의식하지 않으려 했던 백작과의 작별이 점점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참 짧은 시간 만에 친해졌구나. 신기할 정도로. 그 이유를 생각해본 소년은 이내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태감과 비슷한 점이 많았다.

소년이 자신도 모르게 친근감을 느낄 만큼. 소년이 자신도 모르게 백작에게 태감을 대입해보는 동안 백작은 마지막이 될 인사말을 준비했다.

“아쉽군요.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조금 더 배우고. 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그래.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짧은 시간이지만 즐거웠네. 소년의 말에 잠시 대답을 미룬 백작은 이내 결심을 굳힌 듯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 결의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소년은 짧은 순간 그가 한 선택이 그의 인생을 고난의 길로 밀어 넣을 거라는 확신을 느꼈다.

“남은 이야기는, 제가 다시 한번 사절단으로서 제국을 찾는 날 하도록 하지요.”

“괜찮겠나? 대사 자리가 그리 녹록한 자리는 아닐 텐데.”

“선생님을 다시 뵙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 시련은 넘어 보겠습니다.”

만약 제가 다시 제국을 찾는다면, 그땐 저를 이름으로 불러주시겠습니까. 그 순진한 백작의 부탁에 소년은 천천히 입속에서 그의 이름을 굴려보았다.

샤를. 샤를 에두아르 아르농.

고작 이름을 불러주는 일이 무엇이 어려울까. 하지만 소년은 고집스럽게 백작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그러지. 백작. 기쁜 마음으로 그날을 기다리고 있겠네.”

다시 만나는 날. 자네의 이름을 부를 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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