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158화
황금과 은. 동서양의 화폐와 진귀한 보물. 욕망이 끓어 넘친다. 돈이 움직이고, 요동치고, 부풀어 오른다.
서류에 기재된 숫자는 이미 현실성을 잃어버렸다. 지나칠 정도로 거대한 금액의 움직임에 표자승은 자신이 진정 돈을 벌고 있는 것인지를 의심하게 되었다.
이게 정말로, 사람이 움직일 수 있는 황금인가. 그냥 누군가가 장난삼아 낙서한 것 아닐까.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 숫자를 계산해 보고자 의미 없이 휘갈긴 것 아닐까.
끝없이 이어지는 숫자들의 사이에서 현기증을 느낀 표자승은 서류를 탁자에 내던지고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파묻었다.
수십 년간 서방과 제국을 떠돌아다니며 교역을 성사시켰던 그조차 처음 만져보는 단위의 돈이 움직이고 있었다.
“과연, 이번 교역단의 규모가 역대급이라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이 정도였을 줄이야. 아득해지는 금액에 진저리를 친 표자승은 이미 몰락해버린 자신의 적을 떠올리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 정도 규모의 돈줄을 놓쳤으니, 금화 상단은 배가 아프겠군.
“아니, 더 이상 배 아플 일은 없겠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으니.”
한때 상계의 거물로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금화 상단은 모든 이권과 재산을 빼앗긴 채 몰락했다.
상단주의 직계 혈족은 모조리 참수당했고, 남은 식솔들은 뿔뿔이 흩어져 소식조차 전해지지 않았다. 그들이 떠난 빈자리를 차지한 자신은 그들에게서 빼앗은 이권으로 배를 불리며 호의호식하고 있다.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저.
“무섭겠지.”
길게 늘어지는 상념 속에서 어린 스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쇠못으로 철판을 긁는 것처럼 날카로운 목소리에 표자승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스승이 그를 굽어보고 있었다.
“높은 자리에 올라보니 어떠냐. 무섭지? 아찔하지?”
금화 상단의 최후는 비참한 것이었으니까. 너 또한 그런 최후를 맞이할까 봐. 두렵고, 떨리겠지. 소년의 말에 표자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스승님. 무섭습니다. 몸이 아플 만큼, 손발이 저릴 만큼 두렵습니다.”
“올라간 자리가 높을수록, 떨어질 때의 아픔도 큰 법이지. 지금 네가 떨어진다면 산산조각이 날 거다.”
가래가 끓는 것처럼 탁한 소년의 웃음소리에는 외면하고 싶은 진실이 담겨 있었다.
소년은 그 아프고 불편한 사실들을 조금도 여과하지 않았다. 그리고 표자승 또한 그런 쓸모없는 배려는 원치 않았다.
“이것이, 왕좌를 지킨다는 것이군요. 늘 두려움과 긴장감 속에서 살아야 하겠지요.”
“빼앗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어려운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지. 넌 이제 사냥꾼이 아니라 사냥감이야.”
이제 세상 모든 것이 너의 적이다. 네가 왕좌를 지키고 있는 동안은. 넌 이제 평생 사람을 믿지 못할 거다.
소년의 말은 확정적인 예언과도 같았다. 그 차갑고 불길한 말을 들으며 표자승은 물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왕좌에서 내려오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 사냥감으로 지목되기 전에 내려온다면. 살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왕좌를 지키겠다면. 독하게 마음을 먹어야 한다. 소년의 입꼬리가 기묘하게 위로 올라갔다. 결코, 웃음이라고는 부를 수 없는 기묘한 표정이었다.
세상 모든 불화와 증오가 담겨있는 듯한 그의 입을 보며 표자승은 표정을 굳혔다.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간단하지. 이미 업계에는 먼저 왕좌에 앉았던 이들이 있지 않으냐. 앞선 선배의 발자취를 따라가야지.”
“사대상단 말씀입니까?”
“그래.”
몸집을 불려라. 표자승. 탐욕스럽게 이득을 취하고 상계에 뿌리를 내려, 그 누구도 너를 사냥할 엄두를 내지 못하도록 세력을 키워라. 사냥당하고 싶지 않다면, 사냥꾼을 잡아먹어야지.
“표자승. 상인의 본분에 충실해라. 고집을 부려. 인정에 휘둘리지 말고, 도리에 흔들리지 마라. 돈을 벌어, 네가 욕했던 이들처럼, 탐욕스럽고 구차하고 비열하게 돈을 벌어라. 그리하여 네 상단을 번창시켜라. 그 누구도 너를 넘볼 수 없도록. 제국 제일의 상단을 만들어라.”
“스승님.”
저에게는 너무나도 과분한 짐입니다. 저는 그럴 만한 재목이 아닙니다.
표자승의 눈은 그렇게 부르짖는 듯했다.
그의 야망은, 그의 숙원은 이미 끝났다. 평생을 집착해 온 사대상단의 일각을 무너뜨렸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자신은 이미 대상단의 주인이었다.
여기서 무엇을 더 원해야 한단 말인가. 얼마나 더 가지고, 얼마나 더 쌓아야 멈출 수 있단 말인가.
그 아득한 미래를 보고 겁에 질린 표자승에게 소년은 담담히 이야기했다.
그의 목소리는 기묘하게도 회한에 가득 차 있었다. 마치 자신의 실패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어느새 노인의 눈을 한 소년은 표자승에게 말했다.
“고집을 부려라. 표자승. 넌 이미 어처구니없는 꿈의 절반을 이뤘다. 사대상단에 견줄 만한 대상단의 상단주이고, 경사에서 가장 존경받은 사람 중 한 명이기도 하다. 넌 많은 것을 이루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너무 많은 적을 만들었지. 소년은 빙그레 웃었다. 소년을 따라, 표자승도 웃었다. 울음에 가까웠지만, 그것은 분명 웃음이었다.
“그래. 누군가의 승리는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패배일 수밖에 없다. 네가 이기기 위해 눈물을 흘리게 만든 이들. 피를 토했던 이들이 너를 잡아먹으러 올 거다. 너는 평생 달리고, 싸워야 해.”
왕좌를 버리고 내려오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 그 말은 거짓말이었어. 소년의 말에 표자승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의 턱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선택지는 처음부터 하나밖에 없었다. 잡아먹히고 싶지 않다면 뛰어야만 한다. 힘을 키우고, 싸우고, 탐욕스럽게 부를 쌓아 올려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그것이.
“이것이, 업보로군요.”
“그래. 우리 모두 피할 수 없는 굴레지.”
“그렇기에, 평생을 싸워야만 하는 겁니까? 살아남기 위해?”
“그래.”
지금까지의 삶이 찬탈하기 위한 삶이었다면, 남은 삶은 끝없이 쫓겨야 하는 삶이다. 끝없이 돈을 벌어라. 상인으로서 정점에 올라. 제국 제일의 부자를 꿈꿔라. 그래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고.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하지만.
여지를 주는 듯한 소년의 말에 표자승이 소년을 바라보았다. 씁쓸한 듯 입꼬리를 일그러뜨린 소년은 그에게 도망쳐도 좋다고 말해주었다.
“만약에 정 견딜 수 없을 것 같으면. 도망쳐도 좋다.”
사례 태감께서 내 뒤에 계시지 않느냐? 지금까지 모은 재산을 들고 한적한 곳에서 새로운 삶은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새로운 이름으로, 수더분하고 마음 잘 맞는 여자랑 가정을 이루고. 원한도, 업보도 없는 곳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라.
그리하고 싶다면. 도와주마.
표자승은 멍하니 소년의 제안을 입안에서 굴려보았다. 새로운 삶. 새로운 이름. 싸울 필요도, 악의를 짜낼 필요도 없는 삶. 표자승은 이를 악물었다.
어째서입니까. 어째서 마지막에, 도망쳐도 좋다고 말씀해주신 겁니까. 왜 미련을 남기신 겁니까. 차라리 끝까지 싸우라고 하셨으면. 도망치지 말라고 하셨으면.
저도 각오를 다질 수 있었을 텐데.
표자승은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최후의 순간에 모질지 못한 스승의 배려는 그에게 너무나도 아프고, 뜨겁게 느껴졌다. 표자승은 마치 흐느끼듯이 말했다.
“저는 나약한 놈입니다.”
“그래.”
“끝없이 싸워야만 하는 삶을 견딜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
“분명 고통스럽고, 힘들겠지요.”
“……그래.”
그렇다면. 표자승이 고개를 들었다. 벌겋게 충혈된 눈동자로 소년을 보며 표자승은 이를 악물었다.
“만약에, 긴 싸움의 나날 속에서 타성에 젖는다면.”
스승님께서. 저를 꾸짖어 주시겠습니까. 제가 다시 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다시 싸울 수 있도록.
그의 물기 어린 각오를 들으며, 소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만약에 네가 잘못할 때는 언제든지, 내가 널 꾸짖어 주마.”
언제든지. 언제라도.
* * *
백작이 떠나기 전 거나한 식사를 차려주기로 약속한 소년은 태감에게 경사 외곽에 있는 고풍스러운 장원을 빌렸다.
자갈을 깐 정원에는 모양 좋게 뻗은 소나무와 주목이 심겨 있었고 뒤편으로는 대나무가 있어 눈이 시원했다.
너른 정원에 상을 놓고 가을바람을 즐기며 식사할까. 아니면 안채에 창을 열어놓고 정원을 바라보며 식사를 할까.
바람을 즐기기에는 날씨가 조금 쌀쌀하군.
장원을 돌아다니며 시설을 점검한 소년은 마지막으로 껌딱지처럼 들러붙어 있는 불청객에게 쓴소리를 뱉었다.
“안 나가고 뭐 하십니까.”
“내 집에 내가 있는 게 뭐 어때서 그러느냐?”
뭐, 그렇긴 합니다만.
소년이 반박할 말을 생각하는 동안 태감은 품속에서 새카만 가면을 꺼내 들었다.
태감이 정치인의 가면을 뒤집어쓰자 소년의 눈동자는 차갑게 가라앉았다. 가면을 쓴 이상, 그것은 태감의 사적인 투정이 아니었다.
사례 태감이자 동창 제독으로서 나서야만 하는 공적인 일이었다.
“그 친구를 봐야 할 이유가 있으십니까.”
“이유. 그래. 있지.”
그 친구는. 샤를 에두아르 아르농 백작은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인물이다. 이 동창 제독이 직접 관리할 만큼.
태감의 말에 소년은 지난날 그와 만났던 일들을 떠올렸다. 그는 똑똑하고, 사려 깊은 인물이었으며. 조금 푼수기가 있기는 했지만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주의해야 할 만한 인물이었을까?
소년의 의문을 알아차린 태감은 빙그레 웃었다.
“그래. 개인으로서의 그는 그저 좋은 사람일지 모르지. 하지만 그는 정치인이다. 그것도 십 년 내로 법국의 정계에 핵심적인 인물로 떠오를 만한.”
“그 정도입니까?”
“그러니 법국의 대사 자리를 맡게 된 것이지. 너는 대사라는 자리를 너무 무시하는구나.”
국가 간의 협상에서 재량권을 가질 만큼 막대한 책임과 권리를 가진 것이 외교관, 대사라는 자리다.
본래대로 라면 이제 막 스물 중반을 넘은 애송이가 넘볼 만한 자리가 아니지.
“그 양반, 생각보다 대단한 사람이었군요?”
“대단한 사람이지. 그뿐만이 아니다. 전해 들은 소문에 의하면, 교황청에서는 그를 곧 추기경으로 추대할 계획도 있다 하는구나. 만약 사실이라면 역대 최연소 추기경이 될 거다.”
그런 중요한 인물이니, 미리 알아둬야지. 제국과 함께 설 수 있는 인물인지, 아니면 미리 꺾어두어야 할 인물인지.
태감의 말에는 아무런 기복이 없었기에 더욱더 섬뜩했다. 가면 안쪽에서 번뜩이는 태감의 눈을 들여다본 소년은 코웃음을 치며 태감의 가면으로 손을 가져갔다.
예상 밖의 행동에 그가 멈춰 서자 소년은 그의 가면을 쥐고는 속삭이듯이 물었다.
“그것뿐입니까?”
소년이 가면을 벗기는 순간 태감은 정치인으로서의 자신을 유지하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그를 굽어보는 소년의 눈동자는 냉담했다.
“정말로?”
“뭐, 사적인 이유도 조금은…… 있지. 아주 조금.”
“뭔 이윱니까.”
“그, 겸사겸사 맛있는 것도 먹고.”
네가 외근을 나가면 난 또 혼자서 쓸쓸히 밥을 먹어야 하지 않느냐.
태감의 투정에 소년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럼 위정 나으리랑 드시던지요.”
“그리고 궁 밥은 맛이 없단 말이다.”
“그럼 나가서 사드시고 오시죠.”
“바깥에서 먹는 밥도 맛이 없는 걸 나보고 어쩌란 말이냐.”
너 때문이다. 너 때문에 혀가 너무 고급이 되었단 말이다. 그럼 응당 네가 책임져야지.
태감이 떼를 쓰자 소년은 인상을 찌푸리며 쌍소리를 내뱉었다.
“세끼 뜨거운 밥 잘 차려드린 것도 죕니까?”
“흥, 너 때문에 다른 밥을 못 먹게 됐으니까 책임져.”
토라진 듯 고개를 팩 돌리는 태감을 보며 소년은 내면의 깊숙한 곳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참나. 가뜩이나 오늘은 쇄양육(涮羊肉)을 만들 거라 시간도 부족해 죽겠는데.
소년의 짜증을 들은 태감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물었다.
“쇄양육이라고?”
“예? 예. 그 마침 날도 추우니 딱 좋지 않습니까.”
쇄양육은 중국 베이징에서 유명한 양고기 샤브샤브로 본래 원나라 황실의 궁중 요리였다.
다른 세계인 제국에서도 겨울철 별미로 사랑받는 요리였지만 만드는데 번거롭고 손이 많이 가는 요리이기도 했다.
소년의 말을 들은 태감은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바쁜 사람을 너무 붙잡고 있었구나. 어서 가서 볼일 보거라. 백작이 오면 내가 안내할 테니.”
“평소에도 이렇게 협조적이면 좀 좋습니까. 아무튼, 잘 좀 부탁드립니다.”
피식 웃은 소년은 주방으로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쇄양육을 끓일 냄비를 찾아 물에 씻었다.
쇄양육에 쓰는 구리냄비는 꼭 한국의 신선로와 비슷한 모양으로 가운데 굴뚝 부분에 숯을 넣어 물을 데우는 구조였다.
“아, 씻는 건 저희 들이 할게요.”
“그래? 그럼 삼이는 이거, 냄비 좀 씻어주고 장소는 창고에서 숯을 가져다주렴. 바싹 말라 있고 두드리면 깡깡 소리가 나는 거로.”
때마침 그를 도우러 온 장소와 이삼에게 잡일을 맡긴 소년은 도마 위에 양고기 덩어리를 올렸다.
쇄양육의 핵심은 질 좋은 양고기를 최대한 얇게 써는 것. 오늘 준비한 양고기는 육 개월간 키운 어린 양고기였다.
힘줄과 근막을 제거한 양고기는 종잇장처럼 얇게 썬다. 운철 칼을 쥔 소년의 손이 섬세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쇄양육에 들어갈 고기는 얇으면 얇을수록 좋다.
그래야만 뜨거운 물에 재빨리 익어 야들야들한 식감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어중간하게 두꺼우면 고기가 익다가 육즙이 다 빠져 퍽퍽하고 질겨지지.”
“헤에, 그럼 어떻게 해야 고기를 얇게 썰 수 있을까요?”
“이건 비법 같은 게 없단다. 무조건 연습해서 익숙해지는 수밖에.”
물론 현대에는 슬쩍 냉동해서 육절기로 썰어내지만. 문명의 이기를 누릴 수 없으니 손이 고생할 수밖에 없었다.
고기를 얇게 저며내고 나면 다음 재료를 준비한다. 배추는 큼직하게 썰고 당면은 물에 불려 먹기 좋게 자른다.
파와 고수는 잘게 다지고 고기를 다 먹은 다음 우러나온 육수에 끓여 먹을 국수와 물만두도 함께 준비한다.
“채소는 배추 한가지뿐이에요?”
“채소가 잡다하게 들어가면 양고기의 맛이 가려지잖니.”
“아하!”
저도 고기가 많은 게 좋아요!
옳지, 우리도 내일 쇄양육을 먹자꾸나. 고기를 잔뜩 준비해서.
장소의 머리를 슬쩍 쓰다듬어준 소년은 고기를 싸 먹을 참깨빵(芝麻燒餠) 까지 준비한 후에야 허리를 펴고 숨을 돌렸다.
“자, 이제 소스만 준비하면 끝이군.”
육수에 간을 하지 않는 쇄양육의 특성상 맛을 좌지우지하는 핵심은 바로 소스에 있었다.
우선은 기본 베이스인 간장과 고수에 고소한 참깨 소스인 지마장(芝麻醬), 부추꽃으로 만든 구화장(韭花酱), 고추기름, 순두부를 갈아 체에 거른 두부장, 그리고 새우 소스. 새우 소스는 새우젓의 국물을 말하는 것이었다.
“원래는 삭힌 두부를 으깨서 만든 취두부장도 있어야 하지만, 외국인인데 좀 거북하겠지?”
그럼 이제 슬슬 손님을 맞으러 가볼까. 느긋한 발걸음으로 응접실로 향하던 소년은 복도까지 울리는 성난 목소리에 달음박질을 쳤다. 그 성난 목소리는 틀림없이 태감의 것이었다.
‘설마, 둘이 싸움이라도 난 건가?’
그렇다면 대형 사고였다. 절뚝거리며 뛰어간 소년은 노크고 없이 응접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간절한 표정으로 두 손을 모은 백작과 목에 핏대를 세운 태감이었다.
“태감님, 부탁드립니다. 선생님을 제게 주십시오!”
“어림없는 소리! 너 같은 근본 없는 놈한테 내 요리사를 내줄 것 같으냐!”
이건 또 뭔 지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