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157화
혼돈과 광기, 퇴폐적인 환락이 지나고 남은 자리엔 어색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채 고개를 푹 숙인 대사들을 보며 소년은 한숨을 쉬었다.
‘평생 점잖게 살아온 양반들이 그런 꼴을 보였으니. 나 같으면 접싯물에 코 박고 죽었지.’
그나마 백작은 아직 젊고 미숙하다는 핑계라도 댈 수 있겠지만, 다른 대사들은 다 머리가 회색으로 물들어가는 중년의 나이들이 아닌가.
그런 추태를 보였으니, 고개를 들 수 없겠지. 소년은 입술을 굳게 닫고 무표정한 얼굴로 대사들의 찻잔에 따스한 차를 채워주었다.
조용히 찻잔을 감싸 쥔 루클루스 대사는 결심한 듯 표정을 굳혔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년에게 고개를 숙였다.
“오늘, 주방장님께 큰 가르침을 얻었습니다.”
“대사님?”
“좋은 옷을 입고 거드름을 피우고 있지만, 결국 저희의 본질은 이런 것이지요.”
탐욕스럽고, 나약하며. 쉽게 흔들리는. 이것이 사람의 본질이지요. 저는 제가 이토록 쾌락에 약한 사람인지 처음 알았습니다.
신을 모시는 성직자로서,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희열에 젖어 탁하게 물들어 있던 루클루스 대사의 눈동자에는 어느새 맑고 투명한 결의가 깃들어 있었다.
자신의 나약함을 알고, 그것을 이겨낼 각오를 한 이의 눈동자. 깨달음을 얻은 이의 눈이었다.
“그런 저희의 나약함을 깨우칠 수 있도록, 오늘 만찬을 준비해 주신 주방장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커흠, 저는 그저 만찬을 준비했을 뿐입니다.”
조금, 아주 조금 과한 것 같기는 하지만요. 변명하듯 손사래 치는 소년에게 대사는 빙긋이 웃어 보였다.
루클루스 대사의 말에 무언가 깨달은 점이 있는 듯, 대사들은 한결 후련한 표정으로 농담을 나누었다.
자신의 밑바닥을 숨김없이 보여준 것이 진솔한 우정의 계기가 된 것이리라.
만찬장의 분위기가 나른하게 풀리고 대사들의 얼굴에 평온이 깃들자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절단의 단장으로서, 만찬을 준비한 소년에게 감사 인사를 할 차례였다.
“오상호 님. 상호 님의 배려와 헌신 덕분에 매우 뜻깊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사절단을 대표하여 감사드립니다.”
“허허, 단장님. 아직 만찬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감사 인사는 조금 이르지 않습니까?”
“예?”
세상에, 후식 없이 끝나는 만찬이 어디 있겠습니까. 소년의 말에 백작은 자신이 큰 실수를 했음을 알아차렸다.
식사의 마침표이자 꽃, 후식을 먹지 않고 어찌 떠날 수 있겠는가. 백작과 대사들의 얼굴에 비장한 각오가 서리자 소년 또한 그에 맞는 엄숙한 표정으로 후식을 내왔다.
“만찬의 마지막을 장식할 후식, 매괴과작(玫瑰鍋炸)입니다.”
큰 접시에 담긴 과자가 상에 오르자 대사들은 그 독특한 모습에 호기심을 느꼈다. 엄지손가락 크기의 직사각형의 과자들은 짙은 갈색의 향긋한 시럽이 묻어 있었다.
손으로 집어 먹는 과자일까? 아니면 포크로? 대사들의 시선을 느낀 소년은 과자를 먹을 도구로 숟가락을 권했다.
“대단히 뜨겁고 부드러워 집기 어려우니, 숟가락으로 드시는 것을 추천 드립니다.”
“예? 도대체 어떤 과자이길래?”
“흠,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뜨거운 커스터드 크림 튀김일까요.”
뜨겁고 달콤한 커스터드 크림 튀김. 매괴과작을 만드는 법은 이러했다.
계란을 듬뿍 풀어 물과 밀가루로 반죽한 다음, 약불로 달군 냄비에서 걸쭉한 크림 상태가 되도록 고루 섞어가며 익힌다.
걸쭉하면서도 윤기가 흐르는 크림이 완성되면 땅콩기름을 바른 평평한 접시에 펴서 겉이 굳을 때까지 서늘한 곳에 놔둔다.
겉이 살짝 꾸덕하게 마르면 표면에 녹말가루를 뿌리고 평평하게 고른 다음 엄지손가락 크기로 썰어 준비한다.
“그다음엔 간단합니다. 전체에 녹말가루를 뿌려준 다음, 저온의 기름에서 한번 튀겨 겉 부분을 굳히고, 다시 고온의 튀김에서 한 번 더 튀겨냅니다. 마지막으로 향기롭고 달콤한 시럽에 골고루 굴린 뒤, 시럽이 살짝 마르면 완성이죠.”
참 쉽지 않습니까? 소년의 농담에 대사들은 흐리멍텅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평생 먹을 줄만 알지, 식칼 한번 쥐어본 적 없는 이들에겐 소년의 레시피가 마치 연금술사의 비술처럼 들렸다.
물론 소년 역시 대사들이 고국으로 돌아가 요리를 시도하리라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굳이 장황하게 요리법을 설명한 것은 뜨거운 튀김이 딱 좋게 식기를 기다리기 위해서였다.
고온에 튀겨 뜨거운 시럽에 굴린 매괴과작은 잘못 먹으면 화상을 입을 만큼 뜨거운 데다 잘 식지도 않았다.
“이제 드셔도 좋습니다.”
소년의 허락이 떨어지자 가장 먼저 상석에 앉은 백작이 사기 숟가락을 들었다. 과자는 조금만 힘을 주면 뭉개질 것처럼 부드러웠다.
조심스럽게, 천천히. 입안으로.
따스한 과자가 혀 위에 안착한 순간 백작은 세상을 전부 얻은 것만 같은 만족감을 느꼈다.
고작 엄지손가락만 한 크기였는데도 과자는 묵직하게 혀를 내리눌렀다. 마치 녹아내린 황금이 가득 차 있는 것 같은 무게감이었다.
거기에 과자를 입에 담은 순간, 백작은 마치 두 팔 가득 끌어안은 꽃다발에 얼굴을 파묻은 듯한 향기로움을 느꼈다.
입안 가득 차오르는 달콤한 꽃향기. 늦가을 피는 금목서꽃을 꿀에 절여 만든 시럽의 향기였다.
온몸 가득 차오르는 향긋한 달콤함에 취한 백작은 자신도 모르게 슬며시 혀로 입천장에 과자를 뭉개었다.
그 순간 얇은 껍질을 찢고 흘러나오는 농후한 황금빛 크림이 그의 혀 위로 쏟아졌다.
마치 용암이 흘러내리는 것처럼 무겁고 진한 크림은 의외로 단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달지 않은 크림과, 달콤한 시럽. 그 두 가지가 하나로 섞이는 순간 백작은 내면에 평화가 깃드는 것을 느꼈다.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내면의 소우주를 채워주는 조화로운 맛. 그 따스함 속에서 눈을 뜬 백작은 마치 마음을 비운 구도자와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그 어떤 말로도 지금 제가 느끼는 감동을 표현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리고, 굳이 말로 표현할 필요도 없겠지요.”
직접 느껴보십시오.
세상에 체험을 이기는 설명은 없는 법이다. 두근거리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감동의 여운을 즐긴 백작은 벽에 기대선 채 빙그레 웃고 있는 소년에게 다가갔다.
“여어, 형씨. 식사는 입에 맞으셨나?”
“말에 무엇 하겠습니까. 제 인생 최고의 식사였습니다.”
“거 다행이구만. 솔직히 조금 걱정했어. 너무 과하게 힘을 줬나 싶어서.”
소년의 말에 백작은 타락의 늪에서 허우적댄 지난 시간을 떠올리고는 등골 저릿한 한기를 느꼈다.
‘과연 그 쾌락이 다시 한번 나를 찾았을 때, 나는 단호하게 그것을 거절할 수 있을까.’
불가능할 것이다.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도저히 소년의 음식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 끝이 타락일지라도, 분명 기쁘게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다. 어느새 백작의 얼굴에는 슬픔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곧 돌아가야 할 사람이니까. 어쩌면 이번이, 소년의 음식을 즐길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르니까. 그의 얼굴을 올려다본 소년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쓰게 웃었다.
“그냥 가면 섭섭하겠지.”
마지막 가는 길, 거하게 먹고 가야 미련이 남지 않을 거 아니오. 말만 하쇼.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드릴 테니.
소년의 약속에 슬프게 미소 지은 백작은 이내 결심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었다.
“선생님.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소년과 눈을 마주치며, 백작은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마치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기사처럼. 대사들의 말소리가 멈추고, 소년이 뒷걸음질 치려는 순간 백작이 입술을 열었다.
“선생님, 이대로 당신을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께 모든 영광을 바치고 싶습니다. 부디, 저와 함께해 주십시오.
* * *
별이 잡힐 듯 가깝게 내려앉고, 어둠 속에서 오늘이 내일로 배양되는 시간. 연좌궁의 주방에선 태감이 부루퉁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흥, 그래서 받아들였느냐?”
“그 자리에서 거절하긴 좀 그래서 일단 생각만 해본다고 했습니다.”
백작 나으리 체면도 있는데, 그 자리에서 매몰차게 끊으면 서로 껄끄럽지 않습니까.
나름 어른스러운 대처였다고 생각했던 소년은 입술을 비죽 내민 태감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또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지랄입니까. 피곤해 죽겠는데.”
“별것 아니다.”
“별거 아니면 그놈의 주둥이 좀 집어 넣으십쇼.”
열심히 일하고 온 사람한테 칭찬은 못 해줄망정.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시위야, 이 양반아. 소년의 거듭된 채근에 태감은 하는 수 없이 입술을 비집어 열었다.
“그…… 걱정된단 말이다.”
“뭐가 걱정되는데요. 예?”
“그 백작의 제안을, 네가 받아들였을까 봐 걱정돼서 그런다. 왜!”
씩씩대며 자신의 불안과 걱정을 털어놓은 태감에게 소년은 콧방귀를 뀌어 보였다.
또 지랄병이 도졌구만. 그 얄미운 입술을 때려줄까 했던 소년은 태감이 자신의 상관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간신히 손을 내렸다.
소년의 퉁명스러운 반응에 태감은 처량하게 고개를 떨구었다.
태감의 우울한 얼굴을 본 소년은 인상을 팍 쓰며 씹어 뱉듯이 말했다.
“안 갑니다. 안 가요. 이제 좀 마음이 놓입니까? 예?”
그럼 이제 가서 잠이나 주무십쇼. 피곤한 사람 붙들고 안달복달하지 말고. 소년에게 확답을 듣자 태감은 언제 울상을 지었냐는 듯이 발랄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암, 그럴 줄 알았다. 네가 그럴 사람은 아니지. 난 너의 충성을 늘 믿고 있었다.”
“예, 예. 그러시겠지요. 하이고, 가문의 영광입니다. 만족하셨습니까?”
“그리고 사실, 세상에 나만큼 널 대접해 주는 사람이 또 어디 있겠느냐? 나 정도 되니까 네 성격 버티고 품고 사는 거지.”
네 괴팍한 성격 버티며 살 사람은 세상에 나밖에 없을 거다. 태감의 교묘한 인신공격과 자화자찬에 소년은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역시, 태감님과는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퇴직금은 언제쯤 나옵니까?”
“퇴직금은 무슨, 우린 정년퇴직자 외에는 퇴직금 없다.”
정 받고 싶으면 정년까지 버티던가. 경쾌하게 웃으며 농담을 던진 태감은 이내 자세를 바로 펴고 진지한 태도로 소년에게 말했다.
그 표정은 실로 엄숙하고 진중한 것이었기에 소년 역시 자세를 고치고 태감의 말을 경청했다.
“그래, 이제 슬슬 중요한 이야기를 하자꾸나.”
성공적으로 사절단을 대접했느니 큰 공을 세웠다. 사절단을 대접하였으니 이제 남은 것은 교역단의 독점거래를 통해 이득을 취하는 것. 그것뿐이다.
하지만, 태감과 소년은 그런 물질적인 재화를 넘어 보다 진귀한 보상을 노리고 있었다.
서방 십이 개국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대사들과 친분이라는, 재물보다도 값진 인맥이라는 재산. 소년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신 대로, 각국의 대사분들과 교분을 나누는 데 성공했습니다. 대단한 인맥은 아니지만, 우선은 얼굴을 익혀뒀다는 게 중요하지요.”
그리고 대사들은, 그의 요리를 먹었다. 열과 성을 다해서 만들어낸 요리를. 비록 이겨냈다고는 하나 맛에 취했던 그 경험은 그들의 뇌척수에 배어들었을 것이다.
쾌락 앞에 무너져 내리는 그 감각을, 유혹 앞에 흔들렸던 배덕의 희열을. 그들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확신에 찬 소년의 앞에서 태감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어허,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겠느냐? 너는 아직도 나를 잘 모르는구나.”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겁니다.”
“커흠, 그러지 말고. 대사들의 만찬에는 무엇을 올렸느냐?”
아아, 이럴 줄 알았지. 소년은 피로에 찌든 숨을 내쉬며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귀찮은 티가 팍팍 나는데도 태감은 개의치 않고 소년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러니까…… 일단 차슈랑 사슴고기 햄 같은 거로 사품 전채요리에 닭고기 밤 조림, 불도장이랑 농어찜, 전복과 거위 발 조림에 굴 튀김. 그리고 꿀을 발라 구운 메추라기랑 거위 통구이. 양다리 구이에 찻잎과 함께 볶은 민물새우, 동파육, 자라 튀김. 새끼돼지 통구이. 대충 이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참고로 남은 거 하나도 없습니다.”
냉정하기 그지없는 소년의 말에 태감은 풀썩 쓰러졌다. 일말의 온기마저 빼앗긴 듯 창백한 얼굴에는 허망함만이 남아 있었다. 조용히, 한 방울 눈물이 그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 네가 그렇게 손이 작은 사람이 아니지 않으냐. 분명 넉넉하게 준비했을 텐데.”
“아, 예. 넉넉하게 준비하기는 했지요.”
그런데 다들 어찌나 잘 드시던지, 아주 싹 비우고 가셨습니다. 비아냥거리듯 낄낄대는 소년의 목소리에 태감의 고개가 꺾였다.
모든 희망이 사라져버린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사절단. 사절단만 없었더라면, 그 만찬은 나를 위한 거였을 텐데.”
“아니, 사절단이 없었으면 굳이 만찬을 준비할 일도 없었겠죠.”
“그 만찬의 주인은 나였어야 했어. 아아, 그들만 없었더라도, 나는 미식의 천국을 거닐었을 텐데.”
그의 선홍빛 입술로 원망과 저주의 몸을 쏟아내며 태감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마치 분노에 떠밀린 듯한 그는 남아 있는 모든 것을 팔아 증오를 산 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피로감에 입을 쩍 벌리고 하품한 소년은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에게 약속했다.
“거, 주접 그만 떨고 가서 주무십쇼. 나중에 거나하게 차려드릴 테니까.”
그렇게 한참을 아옹다옹한 둘은 새벽 별이 빛나는 시간이 되어서야 주방을 나섰다.
졸음이 싸여 눈이 아른거리자 둘은 잠기운에 대항하기 위해 시시한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걸었다.
후궁 담벼락 그늘에 늘어져 있는 고양이 이야기. 정원에 핀 꽃 이야기. 날씨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태감과 갈라서야 할 갈림길에 들어선 소년은 그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그럼, 안녕히 주무십쇼. 좀 이따 봅시다.”
이미 오늘이 와버렸으니 내일 보자고는 못 하겠군요.
피식 웃으며 등을 돌린 소년을 말없이 바라보던 태감은 잠겨있는 목소리로 그를 불러세웠다. 하품하며 등을 돌아보는 소년에게, 태감은 하지 못했던, 하지만 해야만 하는 말을 꺼내놓았다.
“만약에 말이다.”
정말로, 정말로 그를 따라 서방으로 가고 싶다면.
차마 끝맺지 못한 말의 뒤를 소년이 이어받았다.
“일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