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의 요리사-155화 (155/314)

환관의 요리사 155화

겉은 메마른 듯하지만, 속으로는 촉촉한 육즙이 배어 나오는 머릿살은 기름기가 적고 쫄깃했다.

고기를 칼로 직접 뜯어 먹는다는 호쾌한 식사방식, 손에 묻은 뜨거운 육즙과 소금에 섞인 산초의 아릿한 향기.

이 강렬한 경험은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이다. 격식과 예절을 신경 쓰지 않고, 칼과 손으로 고기를 썰고 뜯으며, 대접에 입술을 대고 직접 들이마시는. 경직된 귀족사회에선 느낄 수 없는 자유로움.

백작은 가슴 깊은 곳에 싹튼 원초적인 갈망을 느꼈다. 얽매이지 않고, 그저 정처 없이 떠도는 삶에 대한 갈망. 동경. 자유에 대한 그리움.

책임과 의무의 족쇄에 매인 백작에게 소년의 요리는 너무나도 아프고, 달콤했다.

큼직하게 썬 고기를 물어뜯으며 백작은 야인으로의 삶을 그려보았다. 만약 그랬다면 어땠을까.

불편하겠지. 부족한 것도 많을 테고. 하지만.

흐르는 강가에 멈춰 서서 물을 마시고. 별빛을 이정표 삼아 유랑하는 삶은 어땠을까.

찬란한 밤하늘을 담요 삼아 덮고, 푸릇푸릇한 초원의 침대에 누워서. 분명,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낭만적인 삶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지금 한순간 정도는. 낭만으로 도피해도 괜찮겠지. 백윤이 건네는 술잔을 받아들며 백작은 자신의 짐에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잔을 가득 채우는 것은 살짝 붉은 기가 도는 갈색의 술이었다.

“포흥에서 온 황주일세. 찹쌀과 수수로 빛은 술이지.”

도수는 약하지만 달고 마시기 쉬워 과음하게 되니, 조심하게나.

백윤의 말대로 황주는 달큰하고 곡물 특유의 고소한 향기가 물씬 풍기는 좋은 술이었다.

술잔을 홀짝거리며 국자를 집어 든 백작은 뽀얀 국물 속에서 각종 건더기를 건져 올렸다. 쫄깃한 염통에 통통한 대창과 소장, 얇게 썰린 간과 야들야들한 허파.

살코기와는 확연히 다른 탱글탱글한 식감과 그윽함이 살아있는 건더기는 좋은 술안주였으며, 훌륭한 반찬이기도 했다. 그렇게 한 솥을 비우고 만복감에 늘어진 백작에게 소년이 후식을 내밀었다.

후식은 무르익어 달콤한 포도였다. 강렬한 햇빛에 농축된 포도는 당장에라도 껍질이 터질 것처럼 통통했고 씹으면 단물이 혀를 흠뻑 적실 정도였다.

“정말 만족스러운 식사였습니다.”

“잘 먹었다니 다행이오. 포도도 좀 드셔보소.”

포도의 달콤함을 만끽한 백작은 나른한 표정으로 벽에 등을 기댄 소년을 향해 깊게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이렇게까지 해주실 줄은…….”

“뭐,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으니. 신경 쓰지 마쇼.”

확실히 예상치 못한 부탁이기는 했지. 잘 이용하면 꽤 그럴듯한 이익을 챙길 수도 있었을 텐데. 기회가 아깝지 않수? 소년의 물음에 백작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선생님께서 제게 보여주신 호의를 어찌 삿된 욕망으로 이용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독실한 사제인 제가 그런 짓을 저지른다면 신께서 저를 용서치 않으실 겁니다.”

“빡빡하시구만.”

“사제 계급에는 보통의 신자보다 엄격한 잣대가 요구되지요. 명색이, 신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자리니까요.”

사제가 부도덕하다면, 민중의 신앙 또한 흔들리기 마련이지요. 백작의 말에 백윤은 감탄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소년은 입꼬리를 흐릿하게 흐리며 웃었다.

“사제와 위정자. 양립하기는 어려울 텐데.”

사제라면 세속의 욕망에 흔들리지 않고 청렴해야겠지만, 위정자는 그럴 수 없는 자리지. 때론 원치 않더라도 오욕에 발을 담가야 하는 자리.

그것이 정치가 아닌가. 깨끗하기만 한 물에는 고기가 살지 못하니. 소년은 몸을 일으켜 세워 젊은 백작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천사와 같은 푸른 눈동자 속에 담긴, 그의 결의를.

“옳으신 말씀입니다. 정치라는 자리에 발을 담근 자가 깨끗하기만 할 수는 없지요. 실제로 본국의 많은 귀족 중에는 위정자의 자리와 사제의 자리. 양쪽의 권력을 이용해 세속의 이득을 채우는 이들이 많습니다.”

위정자는 민중을 돌보는 존재이고, 사제는 민중을 가르치는 존재. 이 사실을 망각한 이들이 늘어날수록 법국의 정계는 어지러워지고 백성들의 눈에선 피눈물이 흐르겠지요. 백작의 말을 듣던 소년은 날카로운 말을 백작에게 건네었다.

“제국에는,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는 말이 있네.”

검은 먹을 가까이하면, 자신 또한 검어진다는 뜻일세. 타락을 경계하는 소년의 쓰디쓴 말에 백작 또한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 역시 한때는 그랬지요. 백작가의 장남으로 태어나, 나름대로 재능도 있었지요. 제가 고귀한 혈통임을 믿었고, 저야말로 아둔한 이들을 이끌 선택받은 고귀한 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수치를 모르는 어린 시절의 일입니다. 담담히 자신의 부끄러웠던 어린 시절을 고백하는 백작의 표정에선 후련함이 엿보였다.

유년기의 껍질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듯이, 홀가분한 그의 표정에선 한 점의 더러움도 묻어나지 않았다.

“전 제 특권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저 태어나는 것만으로도 남들에게 떠받들어지는 삶.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지요.”

“푸른 피의 혈통인가.”

“선생님께선 서방의 문화에 익숙하시군요.”

예. 제 혈관에는 푸른 피가 흐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고귀한 피에 취해 방탕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가문의 권력이 있었기에 승승장구했습니다만. 백작이 말끝을 흐리자 소년은 피식 웃었다.

“재능도 뛰어나셨겠지?”

“크흠, 제 자랑 같습니다만. 전 언어를 배우는 것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습니다. 덕분에 법국의 외교 문제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파격적인 출세에 들뜬 저는 하늘 높은 줄을 모르고 세상을 향해 도전장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저의 작은 세상을 떠나, 바깥을 보게 되었지요. 한없이 넓고, 아득한. 진짜 세계를요.

껍데기를 깨고 나온 계기를 이야기하는 백작의 눈에는 찬란한 별빛이 깃들어 있었다.

“저는 특별하고 고귀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조금 운이 좋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을 뿐인. 얼간이일 뿐이었지요. 저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백성이 희생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천하의 멍청한 놈이었습니다.”

세상을 알게 되고, 자신의 미숙함을 보게 되니. 그제야 제 아래에 선 백성들에게 시선이 돌아가더군요. 백작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걸 생각하니, 제가 먹는 식사가 너무나 사치스럽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가 조금 더 검소하게 먹는다면 백성들에게 돌아갈 것이 더 많아지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천성을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입술을 깨무는 그를 보며 소년은 지긋이 시선을 기울였다.

“본성이라. 그 본성은 뭐였는가?”

“제가 타고난 미식가라는 점입니다. 아름다운 여인보다도 잘 숙성된 포도주에 설레고, 신선한 굴이 제철인 계절이 오면 밤잠을 설치며 첫 굴을 기다리는. 미식가라기보다는 식탐 많은 탐식가라고 하는 게 적절할 수도 있겠군요.”

근묵자흑이라 하셨지요. 검은 것을 가까이하면. 저 또한 검어진다고. 예, 정계에 발을 담근 이상 저 또한 깨끗할 수만은 없더군요. 제게는 재산이 필요했고,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죄책감 없이 식사를 즐길 수 있도록 면죄부 또한 필요했지요.

백작의 말을 듣던 소년은 그가 참으로 어려운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욕심과 백성의 기쁨, 그 양쪽을 모두 손에 쥐려 하는 천하의 멍청이. 참으로 골치 아픈 사람이었다. 소년의 표정을 본 백작은 볼을 붉게 물들이며 미소 지었다. 그 처연한 미소는 누군가에게 용서를 구하는 듯했다.

“예, 저에게는 면죄부가 필요했습니다. 저의 더러움과 죄를 씻어줄 수 있는, 용서와 위안이 필요했지요.”

“그래서, 권력을 이용해 끌어모은 재산을 자네의 백성들에게 베풀었다?”

“그저 자기 위안일 수 있겠지요. 신에게 떳떳할 수 없는 사람이 억지로 베풀며 스스로를 속이는. 그런 종류의 천박한 자기합리화입니다. 하지만.”

“자네의 영지는 풍요로워졌겠지.”

그거면 된 것 아닌가. 소년의 담담한 말에 백작은 고개를 들었다. 소년은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백작에게 말했다.

“그거면 된 거야, 자기 울타리 안의 사람을 지키고, 좋게 해주는 것. 눈물을 멈추게 해주는 것. 그거야말로 위정자의 본분이요 사명 아닌가.”

자네가 정치판에서 더러워진 대가로 영지가 풍요로워지고, 백성의 눈물이 멈추었다면. 신께서도 자네의 죄를 용서하실 걸세. 조용히 이야기를 끝맺으려 했던 소년은, 결국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혀에 옮겼다.

“나는 신도 아니고, 자네의 백성들은 더더욱 아니지. 그럴 수 있는 존재는 아니지만, 잠시만 그들을 대신하여 자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네.”

잘했네. 그간 고생 많았어.

그는 결코 백작이 헌신을 바쳐온 대상이 아니었다. 평생의 신앙을 받쳐온 신도,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해 지키고 발전시켜온 영지의 백성들도 아니었다.

소년은 결코 그들을 대신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지만, 백작의 심장은 잠시나마 소년이 그들을 대신하는 것을 허락했다.

백작은 자신의 눈시울이 붉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다 큰 남자가 눈물을 흘리는 것이 얼마나 꼴사나운지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백작은 복받쳐 오르는 자신의 감정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한참을 소리 없이 흐느낀 백작은 부끄러움으로 상기된 볼을 양손으로 감싸며 발을 동동 굴렀다.

이 나이를 먹고 다른 사람 앞에서, 도대체 무슨 꼴인지.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백작을 측은하게 보던 소년과 백윤은 잠시 그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바닥을 구르며 부끄러움에 몸부림치던 백작은 숨을 헐떡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겨진 셔츠 자락을 피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돈한 백작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멀끔한 모습으로 소년의 앞에 섰다.

“그러고 보니, 아직 선생님의 성함도 듣지 못했군요.”

“그래? 바닥 청소는 다 끝났나?”

“커흠, 선생님.”

그래그래. 없었던 일로 하자고. 느물거리며 고개를 저은 소년은 쉽사리 대답해주지 않았다.

“글쎄, 나중이 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요.”

“선생님.”

“형씨, 이만 일어납시다. 슬슬 돌아가 봐야 하잖수.”

그런 얼굴 하지 마쇼. 근시일 내로 보게 될 테니. 무엇하나 뚜렷한 답이 되지는 않았지만, 소년의 말에는 강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 담백한 말 속에서 백작은 운명을 느꼈다.

“예, 분명 다시 만나게 되겠지요.”

다시 만나게 되는 날, 성함을 알려주십시오.

* * *

마침내 찾아온 만찬의 날. 각국의 정복을 차려입은 대사들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훈장으로 가슴팍을 장식한 채 담소를 나누었다.

“허허, 훈장이 또 늘어나셨군요?”

“크흠, 약소하게 공을 세울 일이 있어서…….”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대사들 앞에서 유독 가슴팍이 초라한 백작은 자신도 모르게 몸이 위축되는 것을 느꼈다.

축 늘어진 백작의 어깨를 본 대사들은 헛기침하며 주제를 바꿨다.

“이제 그만 입실하실까요?”

“예, 그게 좋겠습니다.”

단장님, 저희를 이끌어 주시죠. 빌헬름 후작이 선두에 설 것을 권하자 백작은 입술을 굳게 닫고 당당한 발걸음으로 대사들의 앞에 섰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들을 이끄는 것은 백작. 자신의 의무였다.

백작이 앞으로 나서자 기다리고 있던 시녀가 그들을 준비된 만찬장으로 안내했다.

발목이 잠길 만큼 푹신한 붉은 양탄자에 질 좋은 자단목으로 만들어진 가구와 순금으로 만들어진 촛대.

우아하고 격조 높은 장식품으로 꾸며진 만찬장의 한가운데에는 새하얀 식탁보가 깔린 식탁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 단장님께서 상석에 앉으셔야죠.”

“그……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막대한 심적 부담을 느끼며 자리에 앉은 백작은 장식된 쇼 플레이트(냅킨을 올려두는 장식용 대형 접시)에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거, 비취석일까요?”

은으로 만든 정사각형의 테두리에 옥으로 만든 판을 끼워 넣은 쇼 플레이트에는 은 고리가 끼워진 냅킨이 올라가 있었다.

“예, 제국은 예로부터 비취, 옥의 명산지로 유명했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접시에 이렇게까지 사치스럽게 사용할 줄이야.”

“접시라기보다는 예술품에 가깝군요.”

“식탁 중앙을 장식하는 센터피스(centerpiece) 또한 훌륭하군요. 지나치게 크고 화려하여 시선을 빼앗지는 않지만, 은은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어요.”

거기에 이 식기들 좀 보세요. 전부 순은이군요. 나이프를 들어 올린 루쿨루스 대사는 순은의 투명한 광채와 손잡이의 세공이 찬사를 연발했다.

“대단한 솜씨로군요. 치밀하게 세공이 들어갔음에도 놀라울 만큼 튼튼하고, 안정감이 있군요. 따로 새겨진 마크는 없는데, 장인의 주문제작품인가 봅니다.”

이런 배려라면 음식 맛은 조금 떨어져도 용서가 되지요. 루쿨루스 대사가 농담을 던지자 빌헬름 후작은 맞장구를 쳤다.

“이 배려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배가 부르군요. 빈속으로 나가도 만족스러울 것 같습니다.”

“하하, 이번 주방장님은 서방에 대한 이해도가 있으신 분인가 봅니다.”

만찬장 또한 저희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꾸며주시고, 식기 또한 이리 따로 준비해 주시다니. 만찬이 끝나면 따로 감사 인사라도 전하고 싶군요. 루쿨루스 대사의 말에 백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번 만찬은 분위기가 달랐나요?”

“음, 솔직히 그리 만족스러운 만찬은 아니었습니다.”

저번 주방장께선 타협을 모르는 완고한 분이셨지요. 잠시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 루쿨루스 대사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음, 조금 지나칠 만큼 제국적인 만찬이었습니다. 그렇게밖에 말을 못 하겠군요.”

배려가 조금 부족한 만찬이었지요. 말끝을 흐린 루쿨루스 대사는 빙긋 웃으며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 떠드느라 노크 소리도 듣지 못했군요. 주방장께서 오신 모양입니다.”

“이런, 들어오십시오!”

백작이 조금 큰 목소리로 입실을 허가하자 잠시 후 문이 열렸다.

입실한 주방장을 본 대사들은 침묵 속에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지금 자신이 본 것이 확실한지를 확인하기 위한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하지만 백작만큼은 조금 다른 의미의 놀라움을 느꼈다.

“선……생님?”

상석에 앉은 백작을 확인한 소년은 우아한 자세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오늘 만찬을 담당하게 된 후궁의 상호. 오운이라 합니다.”

부디, 느긋하게 즐겨주십시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