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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154화 (154/314)

환관의 요리사 154화

“일단 이것부터 물어볼까.”

내게 부탁한 이유는? 소년의 직설적인 질문에 백작은 막힘없이 자신의 복심을 내보였다.

“저를 도와주실 만한 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굳이 귀찮음을 무릅쓰고 제게 말을 거셨겠죠. 말이 통할지 안 통할지도 모르는 상대에게. 그리고 그 이유는.

“사절단과 서방의 이권에 밀접하게 연관이 있으신 정계, 혹은 재계의 분이시기 때문. 아닙니까.”

도대체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길래 여기까지 추리해냈을까. 허술해 보였던 사내가 보여준 의외의 추리력에 소년은 조용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누가 보아도 정치판의 늙은 괴물로만 보이는 음험한 미소였다.

“그렇게 생각한 근거도 좀 들어봐야겠는데.”

묵직한 소년의 목소리에 백작은 마른 침을 삼켰다. 단두대의 칼날이 목덜미에 드리워진 것만 같은 긴장감 속에서 백작은 입술을 열었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우선은 겉은 허름하게 입으셨지만, 속에 입으신 옷은 무척이나 좋은 재질이라는 점. 저에게 위험하다고 하신 이 뒷골목 길이 익숙해 보이신다는 점. 그리고, 얼핏 보면 귀여운 아이들 같지만, 사실은 잘 단련되어 있는 호위를 거느리고 계신다는 점.”

백작의 말이 이어지자 이삼과 장소의 얼굴에 서늘한 긴장감이 떠올랐다. 슬며시 품속으로 손을 가져가는 둘에게 제지하는 신호를 보내며 소년은 질문을 던졌다.

“그것만으로는 아직 근거가 부족해. 형씨. 보충 설명이 필요하겠는데.”

“설명을 더 하자면 제가 사절단의 일원인 것을 단번에 알아차리신 것 또한 근거 중 하나가 될 수 있겠지요. 하지만.”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감이었습니다. 찍어 맞춘 거죠.

농담과도 같은 백작의 말에 소년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이 바닥에서 살다 보면, 남들보다 감이 날카로워지지. 합리적이고, 이해할 만한 근거로군.”

그렇다면 이제 부탁도 들어봐야겠는데. 소년의 말에 백작은 우아한 태도로 허리를 숙이며 자신을 소개했다.

“엘 마라 법국의 대사이며 서방 사절단의 단장. 아르농의 백작이자 태양정교회의 사제 샤를 에두아르 아르농이라 합니다.”

호오, 그냥 조금 지휘가 있는 수행원이신가 했더니, 단장님이셨나? 이거 큰 실례를 했구만.

과장된 태도로 어깨를 으쓱거리는 소년을 보며 백작은 은밀한 밀어를 속삭이듯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굳이 제게 존대를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선생님과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는 증거로 생각하지요.”

부탁을 들어주신다면, 더욱더 친밀한 관계가 될 것 같습니다. 백작의 은근한 목소리에 소년은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백작을 관찰했다.

“이거 말재간도 좋은 형씨일세. 점점 부탁을 들어주고 싶어지는구만. 조금 무리한 일이더라도.”

하지만 자네도 정치가인 만큼 알겠지. 부탁을 들어준다. 이 말이 얼마나 무섭고, 어려운 말인지.

소년이 백작에게 한 걸음 다가서자 그의 호위 기사 기욤은 본능적으로 백작의 앞을 가로막았다.

제국어에는 소양이 없었기에 지금까지 묵묵히 듣고만 있었지만, 소년의 기세는 호위 기사로서 간과할 수 없을 만큼 험악한 것이었다.

한눈에 보아도 확연히 알 수 있을 만큼, 소년은 약자였다.

절뚝거리는 왼 다리와 굽은 허리. 못 먹고 자라 살집이 붙지 않은 왜소한 몸. 하지만 샤를마뉴의 기사. 기욤의 본능은 맹렬하게 소년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었다.

그것은 타고난 강자, 맹수들이 가지는 강력한 힘에서 나오는 위압감이 아니었다.

약자가 자신의 신체를 지키기 위해, 자신이 죽는 순간 적의 목숨도 함께 가져가기 위해 품은 맹독의 위험성이었다. 독사나 독충과 같은. 음습하고 차가운 종류의.

그리고 그런 것들은, 맹수의 송곳니보다도 위험하다. 희번덕거리는 소년의 눈동자를 보며 기욤은 입술을 굳게 닫았다.

그 이유는 장난스러운 것이었을 지라도. 기사의 맹세는 절대적이다. 주먹을 쥐고 자세를 잡는 젊은 기사를 보며 소년은 짙은 흥미를 느꼈다. 그 자세는 소년에게도 익숙한 것이었다.

“권투인가.”

그것도 사우스포(southpaw). 길이 잘 들어 있군.

비록 투박하고 고전적인 자세였으나, 기사의 자세는 틀림없이 복싱의 그것이었다.

희귀한 왼손잡이 권투사를 보며 소년은 오래전 자신이 배웠던 현대의 복싱을 떠올렸다. 그래. 확실히, 이렇게 하는 거였지. 다리는 어깨너비로 벌리고, 오른손잡이는 오른발을 조금 뒤로 빼서. 그리고는 눈높이까지 가드를 올린다.

이 상태가 기본. 이 자세에서 소년은 천천히 양손을 턱 아래로 맞추고 겨드랑이를 좁혔다.

마이크 타이슨을 상징하는 자세, 피카부(Peek-a-boo). 소년이 그 자세를 취하는 순간 기욤은 순간적으로 반걸음 물러서며 자신의 몸으로 백작을 가렸다.

소년이 자세를 잡은 순간, 기욤의 눈에 보인 것은 절름발이의 왜소한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크군, 적어도 190㎝, 어쩌면 그 이상.’

몸무게는, 100㎏? 아니, 비정상적으로 두꺼운 대퇴근과 승모근 등을 생각하면, 적어도 110㎏ 이상으로 봐야겠지.

터무니없이 두꺼운 승모근과 강철과 같은 이두근, 황소와 같은 대퇴근. 철판을 깔아놓은 것처럼 두껍게 단련된 복근과 감탄만이 흘러나오는 대흉근. 그 순간 기욤의 눈동자에 비친 것은 전성기의 김승조의 모습이었다.

상하이의 뒷골목에서 날뛰며 미친개라 불리던 시절의 무시무시한 피지컬. 그 압도적인 존재감이 소년에게서 드러나자 젊은 기사는 본능적인 공포감을 느꼈다.

잘 단련된 기사의 근육을 못 미덥게 만들어버리는 압도적인 신체. 그야말로 신이 빗어낸 전사와 같은 근육 앞에서 기욤은 처음으로 신체적 차이에 의한 절망감을 맛보았다.

그렇다면.

이대로 도망칠 것인가? 기사 된 자가. 맹세한 자가. 지켜야 할 대상을 두고서? 그렇게 묻는 듯한 소년의 눈을 마주 보며 기욤은 견고하게 주먹을 쥐었다.

‘아니, 이것은 어디까지나 허상일 뿐이다. 내 마음속 두려움과 긴장으로 인한 과대망상에 불과해.’

겁먹은 그에게 상대는 190㎝의 거인일지 모르나, 현실은 초라한 아이일 뿐이었다.

샤를마뉴의 기사가 어린아이에게 겁을 먹어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텐가? 기사는 혀끝을 지그시 깨물었다. 아릿한 통증이 뇌리에 번지자 압박감에 위축되었던 전의도 다시 고개를 들었다.

“좋은 호위를 두셨군.”

“선생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저의 기사가 무슨 오해를…….”

“걱정하지 마쇼. 그냥 좀 노는 거니까.”

단련만 하다 보면 긴장감이 떨어지거든. 빙긋 웃은 소년은 이내 잇몸이 드러날 만큼 길게 입꼬리를 찢으며 자세를 풀었다.

갈고리처럼 휜 손가락, 낮은 자세. 앞으로 돌진하기 위한 그 자세에 기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레슬링……!”

“이쪽이 내 전공이거든. 젊은 친구.”

좀 놀아달라고. 그 숙련된 자세는 젊은 기사에게 김승조의 모습을 더욱 뚜렷하게 각인시켰다. 팔뚝에 드러난 성난 핏줄, 투쟁 욕구로 충혈된 눈동자. 굳은살 박인 주먹. 터무니없는 망상이 머릿속을 잠식하는 것을 느끼며 기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계속 두려움에 떨며 신경전을 벌이느니, 차라리.’

기사의 눈동자에 투쟁심이 깃들고, 소년의 발이 바닥에 깊게 파고드는 순간. 그, 둘의 사이를 누군가가 가로막았다.

“그만! 그만하게 기욤 경!”

둘 사이에 고조되는 열기를 보다 못한 백작은 자신의 호위 기사에게 매달리듯이 그를 끌어안았다. 당황한 기사가 자세를 풀자 소년 또한 김이 샜다는 듯 손을 내렸다.

“쳇, 재밌을 뻔했는데. 아쉽군.”

“선생님.”

“미안허이. 젊은 친구가 솜씨가 제법이라, 그만 과하게 흥을 냈어.”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소년이 넉살 좋게 웃으며 사과하자 백작은 이마의 식은땀을 훔치며 손사래를 쳤다. 오히려, 사과해야 할 사람은 자신이었다.

비록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지만 먼저 위협적인 자세를 취한 것은 기욤이었다.

만약 흥분한 그가 섣부르게 주먹을 날리기라도 했다면 어찌 되었겠는가.

그렇게 판단한 백작은 급하게 고개를 숙이려 했다. 하지만 백작의 행동보다 소년의 말이 조금 더 빨랐다.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뭔가 약소하게라도 보상이 있어야겠는데.”

가벼운 부탁을 들어준다든가. 끌끌거리는 소년의 웃음소리에 백작은 한 대 맞은 듯한 멍한 얼굴이 되었다. 그제야 백작은 소년이 벌였던 기행이 이해가 되었다.

정치인에게 부탁을 들어준다는 일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부탁을 들어준다는 행위는 곧 상대와 자신의 관계가 그만큼 친밀하다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각인시키는 것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소년은 어쩔 수 없이, 부탁을 들어줘야 할 명분을 만든 것이었다.

남들이 보기에 오해할 여지가 없도록. 백작이 부탁을 들어주었다는 ‘사실’을 이용할 수 없도록.

그 주도면밀한 심계에 백작은 전율했다.

“말해보시게. 형씨, 아니, 백작 나으리라고 불러드릴까.”

부탁이란 게, 뭐지?

소년의 말에 백작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우선은, 저를 계속 형씨라는 호칭으로 불러주시겠습니까?”

“거, 특이한 양반일세. 그리고?”

소년의 헛웃음을 들으며 백작은 자신의 흉금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열망을 끄집어냈다.

* * *

“거 참 특이한 양반일세.”

“그러니까. 별난 양반 다 봐.”

젊은 백작의 황당한 소원을 들은 백윤은 곰방대를 입에 물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참 별난 걸 다 바란다는 듯한, 어처구니가 없다는 웃음. 그에 소년 또한 공감했다.

“참나. 제국 서민가정의 요리가 먹고 싶어? 뭐 특별할 것도 없는데?”

“뭐, 서방에서 오신 양반이니 궁금할 수도 있겠지.”

“근데 왜 하필 내 집으로 끌고 왔냐?”

“만만해서.”

뭐? 이 개부랄 같은 놈이? 아웅다웅하며 서로를 헐뜯는 소년과 백윤 사이에서 난감한 듯 진땀을 흘리던 백작은 둘의 욕설이 끝날 때쯤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어르신, 갑작스럽게 찾아와 죄송합니다.”

“허, 대사라더니 제국 말도 잘하네. 암튼, 뭐 들어오쇼.”

“영감탱이, 뭐 먹을만한 거 있수?”

“처먹고 뒤질 것도 없다 잡놈아.”

하여간, 갈 날도 얼마 안 남았음 처먹기라도 잘 처먹고 가야지. 투덜거리며 창고를 뒤진 소년은 먼지만 날리는 쌀독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장 봐오길 잘했네.”

“뭐 만들 거냐?”

“늘 먹던 거.”

소년이 광주리에 담아온 것들을 확인한 백윤은 떨떠름한 듯 허연 연기를 뿜어냈다.

“뭐, 우리 같은 놈들이야 좋아한다만. 귀하신 나리신 것 같은데 입에 맞으려나 모르겠다.”

“아 몰러. 알아서 먹겠지.”

백윤의 반응을 본 백작은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에게 물었다.

“어르신, 어떤 요리길래 그러시나요?”

“그, 뭐시기냐. 내장탕이라고 해야 하나.”

나 같은 촌놈들이야 늘 먹던 거고, 좋아한다만…… 백윤의 오묘한 반응에도 백작은 가슴에 품은 기대감을 꺼트리지 않았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직접 요리를 해주실 줄이야.”

“응? 저놈이 아니면 누가 요리를 해?”

“예?”

“설마, 저놈이 뭐 하는 놈인지 모르나?”

별 멍청한 놈을 다 본다는 듯이 백작을 흘겨보던 백윤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낄낄거릴 때마다 곰방대에서 불티가 흩날렸다.

“그러고 보니, 아직 선생님이 뭐 하시는 분인지를 듣지 못했군요.”

“그럼 직접 들으쇼. 내가 말해주기도 뭐하니까.”

한참 후, 요리를 끝낸 소년은 큼직한 솥째로 요리를 상에 올렸다. 뿌연 김을 모락모락 피워올리는 솥 안에는 큼직한 건더기와 뽀얀 국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한눈에 봐도 알 수 있는 내장들, 고기가 조금 붙은 뼈들, 그리고…….

“서…… 선생님?”

국물에 반쯤 잠겨있는 양의 머리통을 본 순간 백작은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소년을 불렀다.

창백해진 백작의 얼굴을 본 소년은 그럴 줄 알았다는 코웃음 쳤다.

“말씀하신 제국 가정의 서민 요리. 양잡탕(羊雜湯) 이우. 차린 건 없다만 많이 드쇼.”

“거, 너무 무리하진 마쇼. 이게 늙은 양고기랑 내장을 끓이다 보니까 누린내가 심해. 늘 먹던 사람이야 좋아하지만, 바깥사람은 영.”

백윤은 파가 둥둥 뜬 국물을 가득 떠 한 사발 들이켰다.

“크어, 좋다. 시원하네.”

근데 누린내는 좀 약하구만. 냄새가 좀 부족해. 백윤이 이죽거리며 내장을 건지자 소년은 백윤의 입맛을 비웃었다.

“요즘 누가 그렇게 누린내 풀풀 나는 탕을 먹나. 이 정도가 딱 좋지. 하여간 노인네 입맛하고는.”

“뭐 인마? 네 탕에는 전통의 깊이가 없어!”

“전통은 얼어 죽을 전통. 요즘 젊은 놈들한텐 안 먹힌다니까!”

또다시 이빨을 드러내는 둘의 사이에서 백작은 조용히 탕의 국자를 집어 들었다.

백작이 신중한 표정으로 국물을 뜨자 금방이라도 주먹을 휘두를 것 같았던 둘도 입을 다물었다.

한 모금.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뜨겁고 노릿한 액체를 마신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진하고 구수하군요. 누린내가 나야 제맛이 난다는 말이 이해가 갑니다.”

“허, 입에는 좀 맞으시나?”

“예? 아. 아주 괜찮군요. 이 냄새가 오히려 맛에 풍미를 더해줘서, 고소한 맛을 배가시키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없으면 섭섭할 것 같군요.”

사실 저희 영지에서도 양을 많이 키웁니다. 양 누린내는 꽤 익숙한 향기지요. 후루룩 국물을 마시며 백작이 건더기에까지 손을 뻗자 소년은 큰 쟁반을 가져와 그 위에 양 머리를 올렸다.

“그럼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 볼까?”

제국의 맛이라 하면 뭐니 뭐니 해도 상 위에서 칼 한 자루로 직접 뜯어먹는 양 대가리지. 소년이 짧은 단검을 내밀자 백작은 망설임 없이 칼을 받아들었다.

“확실히, 제국 사나이의 호방한 기상이 느껴지는 요리입니다. 저도 한 수 배우고 싶군요.”

“이거, 제대로 된 사나이시구만.”

손이 베이지 않도록 신중하게 머리에서 살점을 떼어낸 백작은 소년이 내민 산초 소금에 고기를 쿡 찍었다.

“양고기는 즐겨 먹었지만, 양의 머리는 처음 먹어보는군요.”

“원래 고기든 생선이든 머리가 제일 맛있지. 보기가 좀 그래서 그렇지만.”

소년의 말을 들은 백작은 기세 좋게 한입에 고기를 밀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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