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153화
“단장님. 괜찮으십니까?”
묵직하고 정중한 목소리가 젊은 백작의 반고리관에 맴돌았다. 지금부터 황제를 배알해야 한다는 긴장감에 정신이 반쯤 나가 있던 백작은 익숙한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어? 루쿨루스 대사님?”
“예,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안 좋으시군요.”
“괜찮습니다. 속이 약간 울렁거리기는 하지만…….”
그보다 어서 황제 폐하를 뵈어야 할 텐데. 걱정이군요. 백작의 말에 루쿨루스 대사는 해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치 주정뱅이를 의심하는 듯한 대사의 표정에 백작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대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물었다.
“조금 전에 황제 폐하를 배알하지 않으셨습니까. 사절단의 대표로서.”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으십니까? 루쿨루스 대사의 말을 들으며 백작의 몽롱했던 표정은 차갑게 얼어붙었다.
아른거리며 흔들리는 기억의 파편 속에서 위엄 넘치는 황제의 얼굴과 화려한 용포를 떠올린 백작은 차라리 졸도하여 도피하고 싶은 아득한 절망감을 느꼈다.
“제가, 황제 폐하를 뵈었단 말씀입니까?”
“예, 교황 성하께 받으신 서신도 전달하지 않으셨습니까.”
급하게 품 안으로 손을 가져간 백작은 그 텅 빈 안주머니의 공허함 속에서 우주적인 공포를 맛보았다.
그렇다면 설마, 무의식 속에서 대제국의 지배자를 만나고, 인사를 올렸단 말인가?
창백하게 질렸던 백작의 얼굴이 새카맣게 변하기 시작했다.
독사에 물린 사람처럼 벌벌 떠는 백작을 보며 불안감을 느낀 루쿨루스 대사가 그의 어깨를 잡아 흔들자 백작은 텅 빈 눈으로 저항 없이 흔들렸다.
신에게 날개를 빼앗긴 천사처럼 애처로운 모습에 지나가던 시녀들의 입에선 애달픈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아, 난 끝이야.”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목덜미를 매만지며 백작은 단두대 앞에 설 자신의 초라한 최후를 떠올렸다.
지금껏 성공 가도를 달려온 자신의 마지막이 이렇게 비참한 것일 줄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명예 따윈 거들떠보지도 말걸.
그냥 물려받은 영지를 잘 가꾸며 평범하게 살았더라면. 그의 입에서 쓰디쓴 인생의 회한이 흘러나오자 루쿨루스 대사는 백작의 상태가 몹시 위중함을 깨달았다.
“백작, 몸이 많이 안 좋으신 모양이군요.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대사님. 혹시 제가 폐하의 어전에서, 어떤 무례를 저질렀습니까?”
만약 죄질이 가볍다면 단두대가 아니라 좀 더 온건한 방법으로 처형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럼 시체는 온전히 남길 수 있겠지. 아아, 영지의 포도밭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묻힐 수 있다면. 하지만 용서받을 수 없는 무례를 저질렀다면, 책임을 져야겠지. 이 목 하나로 용서해 주실까.
실성한 듯한 백작의 모습에 루쿨루스 대사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무례라니요. 그렇게 훌륭하고 품격있는 모습을 보여주셨으면서, 도대체 어디가 무례했단 말씀입니까?”
“예? 그랬나요?”
“장담컨대, 법국의 위신에 누가 될만한 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황제 폐하께서도 단장님의 품위 있는 예법에 감탄하셨을 겁니다. 루쿨루스 대사의 거듭된 칭찬에 아직 젊고 어리숙한 면모가 있는 백작은 금세 활기를 되찾았다.
뺨을 상기시킨 채 활짝 웃는 백작은 마치 만개한 장미꽃과 같았다.
“그리고 만찬은 내일 저녁으로 일정이 잡혔다는군요.”
“오오, 드디어! 전설적인 천재 요리사의 음식을 맛볼 수 있겠군요!”
대번에 기운을 차린 백작을 보며 루쿨루스 대사는 푸근한 웃음을 그렸다.
마치 손주를 바라보는 듯한 뜨뜻미지근한 대사의 시선에 백작이 민망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자 대사는 헛기침하며 화제를 돌렸다.
“이제 중대사도 마무리를 지었으니, 오늘 하루 정도는 자유롭게 제국의 거리를 걸어보시는 건 어떠십니까. 그전까지는 궁에만 매여 계셔서 지루하셨지요?”
마침, 제가 아는 제국의 관리에게 허가를 받아 두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잠시 바람 좀 쐬고 오시지요.
루쿨루스 대사가 넌지시 등을 떠밀어 주자 백작은 난처한 척을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사절단의 단장으로서 사절단 여러분의 편의를 봐 드려야 할 의무가…….”
“허허, 다 이빨 빠진 노인네들만 있는데 불편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개의치 말고 다녀오시지요.”
제국 측의 대접도 융숭하니, 불편한 점 하나 없습니다. 루쿨루스 대사가 거듭 판을 깔아주자 백작은 못 이긴 척 고개를 끄덕였다.
어흠, 대사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더 거절하는 것도 실례겠지요.
기대감으로 씰룩거리는 백작의 입꼬리를 보며 루쿨루스 대사는 백작에게 배움의 기회라는 면죄부를 안겨주었다.
“단장님은 식문화에 관심이 많으시다죠? 그렇다면 이번이 좋은 공부의 기회가 되겠군요. 황실의 식사도 훌륭한 것이지만, 역시 식문화의 뿌리를 알고자 한다면 그 지역의 시장을 방문하는 것만큼 좋은 공부가 없지요.”
루쿨루스 대사의 감미로운 허락은 젊은 백작의 심장에 뜨거운 감동을 심어주었다. 대사의 주름진 손을 부여잡으며 백작은 폐부에서 끓어 오르는 열정과 감사를 담아 열변을 토했다.
“그 말씀이 맞습니다! 거리 음식, 시장 상인들이 가볍게 배를 채우는 음식, 아이들이 즐기는 군입거리. 일상에서 즐기는 평범한 가정의 식탁. 이를 모르고 어찌 그 나라의 식문화를 깨우쳤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자고로 문화란-”
커흠, 단장님. 단장님?
루쿨루스 대사의 헛기침에 정신을 차린 백작은 깊게 고개를 숙였다. 점잖지 못한 모습을 보인 것에 대한 부끄러움에 고개 숙인 백작은 루클루스 대사에게 거듭 사죄와 감사를 전했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드렸습니다.”
“허허,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전 이만 쉬러 가볼 테니, 마음껏 즐기고 오십시오.”
루클루스 대사를 배웅한 백작은 발걸음을 재촉하며 회랑을 궁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단장님. 어딜 그리 급하게 가십니까?”
“마침 잘됐네. 기욤 경.”
복도 끝자락에서 마주친 사내는 밝은 갈색 머리와 건장한 체격이 인상적인 청년 기사였다.
비록 무장은 갖추지 않았지만 잘 단련된 팔뚝과 굳은살 박인 투박한 손은 그의 실력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라면 뒷골목 무뢰배 따윈 우습지도 않겠지? 백작이 젊은 기사의 어깨에 손을 얹자 그의 화사한 금발이 물결치며 흔들렸다.
진중한 백작의 얼굴에 기사는 굳은 표정으로 경례를 올렸다.
지나칠 만큼 절도있는 자세를 취한 기사를 보며 의아함을 느낀 백작은 이내 자신의 용무를 떠올리고는 낮게 깔린 그윽한 목소리로 물었다.
“기욤 경. 나와 함께해 주겠는가.”
그 영광스러운 제안에 기사는 신의 이름으로 성전에 참전하는 전사처럼 단호한 결의를 내비쳤다.
“기꺼이, 당신의 뒤를 따르겠습니다. 제가 필요하시다면.”
“기욤 경. 바위보다 무거운 침묵과 강건한 두 팔로 나의 뒤를 지켜주게.”
“아르농의 젊은 백작이시여. 사절단의 단장이시여. 고난의 길을 가려 하십니까.”
그렇다면 샤를마뉴의 기사, 기욤 오레놀. 기꺼이 칼과 방패가 되어 단장님의 등을 지키겠습니다. 찾아올 영광의 그 날까지.
젊은 기사의 눈동자 속에 깃든 강렬한 자긍심을 들여다보며 백작은 지지하게 그의 맹세를 들었다.
“그렇다면 기욤 경. 가세. 시간은 우릴 기다려주지 않으니.”
“단장님. 그런데 어디로 가시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저 바깥으로.”
활기 넘치는 식문화의 최전선. 제국의 시장으로 갈 걸세. 백작의 패기 넘치는 발언에 기사는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 * *
“여기 꼬치구이 두 개 주세요. 하나는 매운맛으로 주시고, 하나는 소금구이로요.”
“아이고 세상에, 잘생긴 서방 총각이 제국 말은 어쩜 이리 잘한대?”
“하하! 감사합니다, 아리따운 아가씨.”
“어머, 어쩜 이리 듣기 좋은 말만 골라서 하지? 기분이다, 하나 더 가져가요!”
잘 익은 닭꼬치 하나를 추가로 챙겨주는 아주머니께 감사의 윙크를 날리며 백작은 기분 좋게 꼬치를 베어 물었다.
발음이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 그래도 명색이 법국의 대사인 만큼 백작은 능숙하게 제국어를 구사했다.
“기욤 경, 양념 맛으로 들겠는가? 아니면 소금 맛으로 들겠는가? 개인적으로 추천하는 건 매콤하고 알싸한 양념 맛이네만, 익숙하지 않다면 무난한 소금 맛을 선택하는 것이 좋겠지.”
“죄송하지만…….”
기욤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신의 품을 내려다보았다. 백작이 가는 곳마다 덤을 잔뜩 얻어왔기 때문에 그의 품에는 이미 남는 자리가 없었다.
도저히 팔을 비울 수 없는 기사를 위해 젊은 백작은 그의 입가로 꼬치를 들이밀었다.
“그렇다면 내가 먹여주겠네. 어떤 맛을 선호하는가?”
“……소금구이로 주십시오.”
얼굴을 붉히는 기사에게 꼬치구이를 먹여준 백작은 손끝에 묻은 기름을 핥으며 시선을 돌렸다.
꼬치구이에 설탕 옷을 입힌 과일 꼬치, 뜨거운 돼지 뼈 국물의 국수와 기름에 지져낸 고기 경단. 제국의 거리 음식은 싸고 맛있을 뿐만 아니라 양 또한 넉넉했다.
“역시, 제국의 식문화는 대단히 수준이 높아. 정성이 듬뿍 담겨 있고, 꾸밈없이 소박하고 진솔하지.”
“저는 약간…….”
기사의 떨떠름한 목소리에 백작은 그럴 수 있다며 그를 위로했다.
“아마 향신료와 발효시킨 양념 때문이겠지. 특히 발효 식품은 익숙해지기 힘드니까.”
왜. 향이 강한 치즈나 소금에 절인 청어도 처음에는 거북하지만 익숙해지면 그 향을 즐기게 되지 않나. 삭힌 취두부를 흥미롭다는 듯이 관찰하던 백작은 그것을 덥석 입에 넣었다.
젊은 기사의 경악이 담긴 시선을 받으며 취두부를 씹어 삼킨 백작은 놀라움으로 눈을 부릅떴다.
“처음에는 악취에 가까운 구린내 때문에 역겨움이 밀려오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윽한 고소함이 느껴지는군. 좋은 경험이야. 기욤 경도 하나 들겠나?”
“전 사양하겠습니다.”
쇠도 씹어 삼킬 듯한 강건한 기사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물러서자 백작은 아쉽다는 표정으로 두부를 먹어치웠다.
텁텁한 입을 씻어내기 위해 새큼한 과일 꼬치를 빼먹은 백작은 배를 통통 두드리며 위장의 여유 공간을 확인했다.
“흠, 이제 슬슬 식사를 해 볼까.”
“아직 배가 안 차셨습니까?”
“무슨 소리, 지금까지는 본 식사를 하기 전 입맛을 돋우는 전채요리였을 뿐이라네.”
어디, 나의 위장과 영혼을 채워줄 따스한 음식은 어디에 있을까? 무엇이 좋을까?
이국적이면서도 어딘가 친숙한, 그런 요리가 먹고 싶다. 향기 좋은 술 한잔을 곁들여서.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백작은 음습한 골목길로 이어지는 입구를 발견하고는 강렬한 호기심을 느꼈지.
“흠, 때론 이런 뒷골목에 숨은 맛집이 있는 법이지.”
“위험할 수 있습니다. 단장님.”
“하하, 경이 날 지켜줄 텐데, 무엇이 두렵겠는가.”
거기 형씨. 잠깐 멈추지.
의기양양하게 골목길에 들어서려 한 백작은 섬뜩한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쇠를 긁는 듯 날카롭고 탁한 목소리. 뒤를 돌아본 백작은 건조한 눈동자로 자신을 응시하는 이를 발견하고는 목덜미를 기어오르는 소름 끼치는 한기를 느꼈다.
“거, 제국어는 알아듣나? 익스큐즈미? 젠장, 영어가 통할 리가 없지.”
백작을 부른 자는 참으로 기이한 사람이었다. 허리는 굽고 체격은 왜소했으나 백작은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날카롭고 사나운 눈동자와 매부리코. 그 아래로 가늘고 길게 찢어진 입은 독과 칼날을 품은 것처럼 음험하고 지독해 보였다.
백작은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자가 어린아이라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비록 세월의 풍상과 험난한 환경에 닳고 깎여 사나워졌으나 그의 얼굴에는 군데군데 아이 특유의 모습이 남아 있었다.
목소리 또한, 가래가 낀 것처럼 탁하고 갈라져 있었으나 아직 어린아이의 고음이 느껴졌다.
“내 말 듣고 있나? 어이!”
하지만 백작은 도저히 그에게 말을 놓을 수가 없었다. 허물없는 반말로 말을 걸기에는 소년의 기세가 두려울 만큼 지독하고 강렬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타고난 위엄 같은 것이 아니었다. 긴 세월 수없이 많은 시련과 고통 속에서 자연스레 갈고 닦이며 배어 나오는 노련미. 풋내기를 자연스레 위축시키는 노장의 기백이었다.
자신의 허리춤에나 올법한 아이에게서 받은 그 기이한 느낌에 당황한 백작이 허둥지둥하는 동안, 소년은 인상을 일그러트린 채 다가왔다.
“이보쇼, 형씨. 제국어는 할 줄 모르나?”
“아, 아니요. 할 줄 압니다.”
“뭐야, 제법 능숙하구만.”
백작은 자신도 모르게 공손히 대답했다.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는 화려한 금발에 소년은 잠시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 정도로 잘생긴 양반은 오랜만에 보는구만. 흠, 그래도 역시 우리 집 양반에 비할 바는 아니군. 잠시 태감과 젊은 백작의 외모를 비교해 본 소년은 태감의 손을 들어주었다.
금발의 서양인은 마치 천사가 내려온 것이 아닌가 의심될 만큼 수려한 외모를 자랑했지만, 태감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태감님의 인간 같지 않은 미모에 비하면, 이쪽은 제법 사람 태가 나는군.’
슬며시 웃음 지은 소년은 이내 목소리를 낮게 깔고 질문을 던졌다.
“뭔 볼일이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쪽은 댁처럼 고상한 인간이 드나들 만한 거리가 아니우.”
사절단의 일원인가 본데, 괜히 험한 꼴 보기 전에 적당히 돌아가쇼. 소년의 말에 백작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제가 사절단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척 보면 알지, 두 눈깔 달고 다니는 놈이면.”
간편하게 차려입었다고는 하지만 옷의 재질이 무척 좋고, 목에 걸고 있는 것. 순금이지? 거기에 문양을 보면 장식용 물건은 아니고, 딱 봐도 종교적인 상징물 같은데 그런 건 어지간한 사람은 차기 어렵지. 결정적으로.
“저렇게 교양 있어 보이는 떡대를 호위로 데리고 다니는 양반이면 뻔하지.”
소년의 말에 그만 웃음을 터뜨린 백작은 옆에서 멀뚱히 서 있는 그의 호위 기사에게 슬쩍 고개를 숙였다.
‘기욤 경이 제국어를 못해서 다행이야.’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은 백작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렇다면 선생님. 아, 선생님이라 불러도 되겠습니까?”
“좋으실 대로.”
“그렇다면 선생님. 초면에 실례지만, 저를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백작의 당돌한 부탁에 소년은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초면에 실례군.”
일단, 들어나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