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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149화 (149/314)

환관의 요리사 149화

시리도록 추웠던 밤의 냉기가 가시고, 찬란한 태양이 그림자를 몰아내고 새벽을 알릴 때. 눈을 뜬 소년은 참을 수 없는 위화감에 뇌가 뻑뻑하게 굳는 것을 느꼈다.

혼탁한 뇌리에서는 전날의 기억과 수십 년 전의 기억, 이유 없는 슬픔과 대상 없는 증오. 바닥없는 절망감이 엉망진창으로 구겨져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뇌에 직접 손을 쑤셔 넣고 주무른 듯한 불쾌한 혼돈. 마치 기억의 일부분을 뚝 떼어 잘라버리고 제멋대로 이어붙인 듯한 이질감.

정신을 갉아먹는 듯한 혼란 속에서 방황하던 소년은 침대 모서리를 모루 삼아 머리를 내려쳤다.

쿵! 하고 방 전체를 울리는 육중한 충격음과 함께 무질서한 머리가 깨끗이 비워지는 것을 느낀 소년은 콧잔등을 타고 흘러내리는 비릿하고 뜨거운 액체를 핥았다.

“뭔가를 잊어버렸어.”

망각의 축복은 만인에게 공평하며, 그것은 비교적 노인일수록 더 빨리 찾아오지만, 그렇다 해도 머릿속의 공백은 건망증이라고 넘기기에는 석연치 않은 부자연스러움이 있었다.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무언가. 그 무언가를 떠올리기 위해 소년은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술을 마시고, 궁으로 돌아와서 태감님께 야식을 차려드렸지.

그리고?

“잠이 오지 않았어. 그래서 정원을…… 정원?”

내가 정원에 나갔던가? 한참 동안 골몰한 끝에 소년은 자신이 무가치한 상상에 전력을 기울이는 멍청한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없는 것을 억지로 만들어 입증하려는 것처럼. 그 막연함에 넌더리를 내며 일어선 소년은 갑자기 세상 모든 것이 짜증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힘으론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봉착한 이가 보이기에 가장 적합한 반응이었다.

“대가리는 뒤죽박죽이지.”

안양비 님은 X발 사람 같지도 않지. 몸은 병신이지. 후궁은…… 염병. 자신을 둘러싼 세상 모든 것에 무한한 짜증과 분노, 두통이 샘솟는 것을 느끼며 몸부림치던 소년의 귀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배가 고픈 태감이었다.

“오늘은 날도 영 우울한데, 아침은 기분전환에 좋은 닭튀김이 좋겠…….”

팔자 좋은 소리를 늘어놓으며 소년의 방에 들어온 태감은 소리 없이 발광하는 소년의 꼴을 보고는 조심스럽게 문을 닫으려 했다.

태감의 손가락이 문고리를 당기는 순간. 소년은 심지에 불붙은 폭죽처럼 튀어 나갔다.

“야이 개잡놈의 인간아! 오늘 잘 걸렸다!”

야차의 얼굴을 한 소년을 보며 태감은 오랜만에 내면 깊은 곳에서 공포가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소년의 하극상이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니 익숙해졌다만, 오늘 소년의 광기는 전날의 장난스러웠던 하극상과는 격이 다른 흉포한 것이었다.

주종 간의 두터운 신뢰 관계에서 우러나온 가벼운 장난이 아닌, 진심으로 때려죽이고야 말겠다는 단호한 살의.

팔 위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태감은 마치 맹수를 진정시키듯이 신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양 손바닥을 내보인, 무저항의 표시. 태감은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혹시 연봉이 마음에 안 드는 거라면, 연봉 협상을 통해 상향조정 해주마.”

아니면 혹시 직급이 마음에 안 들었나? 승진시켜 줄까? 소년이 눈을 부라리자 대번에 움츠러든 태감은 조심스럽게 지난날의 잘못을 털어놓았다.

“혹시 밤중에 몰래 주방에서 육포를 가져다 먹은 거 때문에?”

아니면 저번에 생선 가시 발라 달라고 한 거? 아니면 야채 먹기 싫다고 편식한 것 때문인가? 그것도 아니면……. 자신의 과오를 되짚어가며 조목조목 사과하는 태감을 보며 소년은 자신의 짜증이 한 단계 더 높은 곳으로 승화되는 것을 느꼈다. 그의 짜증에는 이제 이유가 생겼다.

흘러내린 핏물을 소매로 훔치며 자세를 낮춘 소년은 거센 포효와 함께 달려들었다.

옆구리에 오른팔을 붙인 자세, 옹골차게 쥔 주먹은 태감의 턱을 으스러뜨릴 것을 결의하고 있었다.

강렬한 쇼트 어퍼컷! 직선 최 단거리로 쏘아진 흉포한 일격이 태감의 유리공예처럼 섬세한 턱을 박살 내기 직전, 바위를 깎아 만든 것 같은 투박한 손이 소년의 주먹을 감싸 쥐었다. 위정이었다.

그 단단한 손아귀에 잡힌 소년이 빠져나가기 위해 몸부림치려는 순간. 그의 시야가 삽시간에 백팔십도 돌아갔다.

뒤집힌 시야에 천장의 나뭇결이 들어온 순간 소년은 자유로운 왼팔로 머리를 감쌌다.

온몸을 짜르르 울리는 충격에 소년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하지만 그의 손목을 쥔 위정은 순간적으로 낙법을 취한 소년의 판단력이 마음에 들었는지 수염 아래로 슬쩍 미소를 지었다.

“진정되었느냐?”

“예, 그럭저럭.”

“그럼 치료를 해야겠구나.”

자신의 이마를 가리키는 위정의 손가락을 올려다보며 소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을 내려다보던 위정은 바닥에 늘어진 소년의 목덜미에 발등을 대고는 가볍게 소년을 일으켰다.

마치 강제로 사출되듯이 일으켜 세워져 두 발로 서게 된 소년은 그 소름 끼칠 만큼 부드러운 기술에 속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상처는 어쩐 일이냐.”

소년이 깨끗한 물로 핏자국을 씻는 것을 보던 태감은 상당한 출혈량에 질린 듯 인상을 찌푸렸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피를 씻어낸 소년은 깨끗한 천을 가져다 상처를 감쌌다.

“별일 아닙니다. 그냥 머리가 좀 복잡해서.”

“박았다?”

“예, 개운하더군요.”

소년의 명쾌한 답을 들으며 태감은 참담한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다른 이었다면 미치광이의 광증이라 치부하고 무시하였겠지만, 소년은 그렇게 대할 수 없는 존재였다. 태감은 인내심을 발휘하여 다시 한번 물었다.

“진정으로, 그 때문이냐?”

소년이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입을 다물자 태감은 소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옷 위로 배어 나오는 식은땀은 소년의 긴장과 흥분을 말해주고 있었다.

“네가 그 이유를 말하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너의 안전을 위협하기 때문이냐? 아니면. 나의 안전을 위협하기 때문이냐.”

태감의 말을 들으며 갈등하던 소년은 이내 자신의 갈등까지 모조리 태감에게 고백했다.

“그것을 판단할 수 없어서 그렇습니다.”

하지만 혼자 끙끙 앓고 있어 봐야 뾰족한 수가 나올 리 없겠지요.

소년은 스스럼없이 자신이 느낀 불안감과 혼란. 그로 인하여 빚어진 걱정을 숨김없이 말했다. 그리고 그의 말을 들을수록 태감과 위정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태감의 얼굴에 떠오른 것이 뚜렷한 경계심이었다면, 위정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숨길 수 없는 공포였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둘의 표정을 볼 수 없었던 소년은 한숨과 함께 자신의 이야기를 끝냈다.

소년의 초라한 어깨를 내려다보며 위정은 무언가를 외치고 싶어 했다. 숨이 막힌다는 듯이, 당장에라도 그것을 토해내고 싶어 했다.

“흐음, 도저히 이유를 모르겠구나.”

하지만 태감의 단호한 손짓은 위정의 비명을 가로막았다. 입으로는 거짓을 말하는 태감의 눈동자는 차갑게 타오르고 있었다.

주인의 냉엄한 눈동자 속에서 평정심을 회복한 위정은 침묵으로 주인의 뜻을 존중했다.

“하여튼, 그 일은 내가 따로 알아보마.”

“예이. 그럼 전 아침이나 준비해야겠군요. 뭐가 드시고 싶으십니까?”

“말하지 않았느냐? 닭튀김이라고.”

“하여간, 아침부터…….”

혀를 차며 허리를 두드린 소년은 태감을 따라 방을 나서려는 위정의 소매를 쥐었다. 잡아당기는 손길에 위정이 고개를 돌리자 소년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따가, 잠시 시간 좀 내주시겠습니까?”

상담하고 싶은 게 있어서.

* * *

“어쩐 일이냐?”

“그냥, 여쭙고 싶은 것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가능하면 도움도 좀 받고 싶고요.”

소년이 능청스럽게 술 한 병을 내밀자 위정은 헛기침을 하며 병을 받아들었다. 병의 내용물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무난한 백주였다.

“그리 좋은 술은 아니구나.”

술 창고를 힐끔거리는 위정의 시선에 소년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좋은 술은 분위기가 살지 않지 않습니까.”

소년의 기묘한 술 철학에 공감한다는 듯 위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무 좋은 술은 진지한 이야기의 몰입을 깨뜨리지.”

이 정도 술이 딱 좋아.

위정은 잔에 술을 가득 따라 한입에 털어 넣었다. 소년이 무슨 이야기를 하든 자신은 취한 채이니 기억하지 못한다는.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위정의 서투른 표현에 미소 지은 소년은 미리 준비해둔 고기를 꺼내왔다.

“안주가 곧 나오니 좀 기다리십쇼.”

“호오, 안주는 뭐지?”

“덴뿌랍니다. 음…… 그러니까. 고기튀김이라고 해야 하나?”

젊은이들에게는 익숙하지 않겠지만, 조금 나이가 있는 이들이라면 소년이 말하는 덴뿌라가 일본식 튀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챌 것이다.

덴뿌라.

혹은 고기튀김이라 부르는 오래된 중국 요리는 말 그대로 탕수육처럼 고기를 튀겨 소스 없이 그대로 먹는 요리였다.

‘옛날에는 꽤 있었지. 덴뿌라 한 접시 시켜놓고 빼갈로 한잔하는 어르신들.’

지금은 오래된 노포에서나 볼 수 있는 요리를 준비하며 소년은 쌍팔년도 시절의 추억을 떠올렸다.

그가 전 세계를 무대로 자신의 실력을 뽐내던 시절. 자신만만하고, 뜨거웠던 시절의 추억은 이미 빛이 바랜 지 오래였다.

회상은 잠시뿐이었다. 뜨거운 불이 넘실거리는 현실로 돌아온 소년은 지체 없이 기름 솥에 기름을 채우고 고기를 준비했다.

덴뿌라를 만드는 법은 사실 탕수육을 만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대신, 소스 없이 먹어야 하는 만큼 밑간을 조금 더 진하게 해줄 뿐.

전분 반죽을 입은 고기가 기름 위로 떨어진다. 기름이 튀어 오르고 반죽이 튀겨지는 그 자극적인 소리. 고막을 가득 채우는 자글거리는 소리는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안주가 되어주었다.

위정이 두 번째 잔을 비우고 세 번째 잔을 따를 때쯤, 요리 또한 완성되었다.

노릇노릇한 황금빛으로 튀겨진 고기. 콧속에 치밀어오르는 고소한 향기.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에 불을 지르는 한 접시였다.

요리에 대한 기대감으로 침을 삼켜본 것은 얼마만의 일인가. 나이를 먹어갈수록 식사에 대한 욕망은 희미해졌건만.

참으로, 먹음직스럽구나.

젓가락이 입으로 튀김을 옮긴 순간, 위정은 그 경쾌한 식감에 두 눈을 부릅떴다.

바삭바삭한 튀김옷 너머로 송곳니를 희롱하는 아삭한 고기의 식감. 혀 위에서 통통 튀는 듯한 차진 고기는 틀림없이-

“항정살이구나.”

“오늘 좋은 게 들어와서 한번 튀겨봤습니다.”

뜨거운 기름으로 달궈진 목에 백주가 흘러 들어갔다. 씁쓸하고 독한, 취하기에 좋은 술. 취기 섞인 숨을 토해내며 위정이 탁자에 팔을 걸쳤다.

“이제, 들을 준비가 됐다.”

부탁하고 싶은 게, 뭐지?

불콰하게 취한 듯 보였지만 위정의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 냉혹한 눈동자를 보며 소년은 각오를 굳게 다졌다.

“제가.”

제가, 안양비 님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 황당무계한 발언에 위정은 성대한 박장대소를 보여주었다. 단언컨대, 그의 주인인 태감조차 보지 못했을 경쾌한 홍소였다.

한참을 껄껄거리며 웃은 위정은 술 한 모금을 입으로 넘기며 소년에게 답해주었다.

“꿈은 크게 가지라고 해주고 싶다만, 지나치게 큰 꿈은 포기하라고 권하는 것도 어른의 일이지. 그러니 솔직하게 말해주마.”

자살행위다. 소년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의가 선 소년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위정이 길게 입꼬리를 올렸다.

“안양비 님은 이미 무인으로서 경지에 오르신 분이지. 고금을 통틀어 그분만큼 무인으로서 완성된 분도 드물다.”

지금 그분의 일검을 받을 수 있는 무장은 금군과 지방 팔군을 통틀어도 많지 않을 거다. 글쎄, 비룡대주 악진평이라면 일검 정도는 받을 수 있겠지.

위정의 냉혹한 판단에 소년은 지난날의 악진평을 떠올렸다. 수라와 같은 무용을 자랑했던 그 악진평이.

“고작, 일검입니까?”

“만약 말을 탄 상태로 겨루는 기마전이라면 악단주에게도 승산은 있겠지. 하지만 오직 무기 한 자루를 쥐고 싸우는 거라면.”

소년은 침묵하며 고개를 숙였다. 승복할 수 없는, 승복해서는 안 되는 소년의 절박함을 보며 위정은 질문했다.

“굳이, 그분을 꺾어야 할 이유가 있느냐?”

너는 태감님의 요리사다. 네가 칼을 쥐는 이유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살찌우기 위해서가 아니냐. 위정에 말에 소년은 입술을 달싹이며 한참을 망설였다.

만약에, 만약에 말입니다. 목젖까지 치밀어오른 말을 되뇌던 소년은 결국 고개를 저었다.

“역시, 이유를 말씀드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위정은 굳이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 대신, 술 한 모금을 넘긴 그는 소년이 안양비를 이길 수 있는 수단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분은 무서울 정도로 완벽한 검수다. 공격할 때는 사나운 야수와 같지만 물러서고 방어해야 할 때는 굳건한 거목과 같지. 그 정도 수준에 오른 무인에게 잔재주는 통하지 않아. 겨룬다면 오로지 정공법이다.”

위정의 단호한 결론에 소년은 음습한 웃음을 드리웠다.

“단 한 칼만, 작은 생채기라도 좋으니 단 한 칼만 먹일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합니다.”

정정당당한 대결을 꿈꾸는 것도 아니니까요. 소년의 웃음 속에 스며든 독기를 바라본 위정은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피비린내가 짙은 소년의 각오는 알량한 걱정으로는 흔들 수 없을 만큼 굳건한 것이었다.

“설령 운 좋게 한 번 공격을 성공시켜 중독시킨다 한들, 안양비 님 정도의 무인이 그 정도로 무력화되지는 않는다. 설령 독기가 골수까지 치밀었다 한들, 네 목 정도는 우습게 치시겠지.”

넌 반드시 죽을 거다.

위정의 말을 들으며 소년은 번복할 수 없는 미소를 띄웠다. 그것을 바라고 있다는 듯이, 후련함마저 느껴지는 소년의 태도는 순교를 결심한 교인과도 같았다.

흔들림 없이 고요한 소년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위정은 무거운 입술을 열었다.

“그렇다면, 한가지. 방법이 있을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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