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148화
부디 저녁을 대접하고 싶다는 표자승에게서 도망친 소년은 나른한 숨을 내쉬며 경사의 대로를 걸었다. 괜히 비싼 돈을 주고 부담스러운 밥을 먹기 싫었기 때문이다.
홍등가 옆을 지나던 소년은 빙당호로 가게를 발견하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장소를 불렀다.
폴짝 뛰어내린 장소에게 동전을 쥐여준 소년은 부슬부슬한 장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심심하지? 가서 간식이라도 사 오렴.”
“오운 님 것도 사 올까요?”
“내 건 괜찮아. 입이 영 텁텁해서.”
총총걸음으로 달려가는 장소의 등을 보며 소년은 오랜만에 찾아온 평온한 일상을 즐겼다.
삼이도 데려왔으면 좋았을걸. 후궁에서는 절대로 즐길 수 없는 경쾌한 생명력으로 가득 찬 공기는 가라앉은 소년의 기분도 조금은 들뜨게 했다.
“여기 거스름돈 받아왔어요.”
“그건 용돈으로 넣어두렴.”
하여간 착하기도 하지. 설탕 옷을 입힌 시큼한 산자나무 열매를 아삭아삭 갉아먹는 장소를 보며 소년은 허기를 느꼈다.
모처럼 시장에 나왔는데 가볍게 점심을 때우고 들어갈까. 국수라던가. 아니면 양 내장탕 같은 것도 좋겠지.
시장통의 북적북적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하는 것은 특별하고 유쾌한 경험이었다.
시장을 둘러보며 맛있어 보이는 집을 찾던 소년은 오랜만에 만나는 지인을 발견하고는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이야, 이게 누구야. 포교 나으리 아닙니까.”
“사…… 사…… 사…… 상호 어르신?”
음산한 소년의 목소리가 귓바퀴를 파고들자 누군가와 이야기를 주고받던 포교는 저승사자가 뒤에 있는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았다.
사시나무 떨듯이 떨며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숨기려는 모습에 소년이 음습한 미소를 지었다.
“호오, 이번에 새로 사귀신 친구분이신가 봅니다.”
“예? 아…… 아. 아하하. 예. 그럼요. 친구입니다. 친구.”
“허허, 이거 친구분과 계시는 데 방해를 한 건 아닌지, 죄송하군요.”
“아닙니다! 상호께서 부르시는데 어디든! 어떤 때라도! 괜찮고 말고요!”
자네는 어디 갈 데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어서 가보게나! 어서! 포교의 호들갑에 인상이 좋지 않은 사내는 어물쩍거리며 자리를 피했다.
사내가 자리를 피한 것을 확인한 포교는 입꼬리를 가식적으로 올리며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저도 공무 중이기에,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허어. 하긴, 공사가 다망하신 포교 나으리를 너무 오래 잡고 있었군요.”
“어허허 아닙니다! 그럼 전 이만…….”
“말로 할 때 멈춰. 새꺄.”
아구창에 들어 있는 거 다 털어버리기 전에. 소년의 흉흉한 협박에 포교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야 말았다.
마치 목 관절이 녹슬어버린 것처럼 삐걱거리는 동작으로 고개를 돌린 포교의 얼굴은 공포와 절망으로 얼룩져 있었다.
“거 적당히 해 처먹으라고 말하지 않았나? 관리로서 최소한의 직업윤리는 있어야 할 거 아냐.”
얼굴 펴라 X벌 새끼야. 쌍판 밀어버리기 전에.
소년의 눈동자에 살기가 깃들자 포교는 강제로 자신의 입꼬리를 끌어 올려야 했다.
포교의 얼굴을 노려보며 평생 죽만 먹고 살게 해줄지, 아니면 평생 앉은뱅이로 살게 해줄지 고민하던 소년은 고민할 것 없이 둘 다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보다는 추궁이 먼저였다. 희번덕거리는 소년의 눈동자가 포교의 허리춤을 향하자 그는 숨기지 못하고 주머니를 꺼내고야 말았다.
“이게 전분가?”
주머니에 들어 있는 것은 대부분 철전이었지만 드문드문 은도 섞여 있었다. 포교의 얼굴에 떠오른 체념을 올려다보며 소년은 주머니 끈을 조였다.
“제법 알뜰하게 긁어모으셨는데? 살림에 보탬 좀 되셨겠어.”
“상호 님, 그런 것이 아니라.”
“상관 뒷주머니로 전부 들어갔다?”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소년의 웃음에 포교는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필사적으로 자신이 아는 것을 모조리 털어놓았다.
새로 부임한 상관이 전임 상관보다 더욱더 지독한 놈이라는 것, 아예 부하들에게 할당량을 부과해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인사고과에 반영하는 쓰레기 자식이라는 것.
마치 하소연하듯 털어놓는 포교를 굽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렇다면 포교 나으리는.”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나?
이죽거리던 소년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혹시 오상호 아니시오?”
“악 대주님?”
때마침 끼어든 것은 비룡대주 악진평과 그의 친구인 흑철단주 배금성이었다. 올려다보기도 두려운 거물들의 등장에 포교는 완전히 탈색되어 주저앉았다.
“역시, 오상호셨군.”
“오오? 상호 님! 어쩌신 일입니까?”
“예? 아아 잠깐 상담을 들어주고 있었습니다. 포교 나으리가 고충이 많으시더군요.”
호오, 그렇다면 그냥 둘 수 없겠구려. 악진평이 두려움에 떠는 포교를 끌고 골목길로 들어가는 것을 보며 소년은 일이 자신의 손을 떠났음을 깨달았다.
뭐, 악 대주께서 어련히 알아서 잘하시겠지.
개운하게 기지개를 켜던 소년은 배금성의 얼굴을 올려다보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수염이 덥수룩한 그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불안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아니, 세상에 소도 때려잡는 금군의 무장이 불안할 일이 뭐가 있을까? 소년이 의아하게 생각하며 묻자 배금성은 고개를 떨구었다.
“표정이 영 안 좋으신데, 뭔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크흠, 이게 미신적인 이야기인지라 영 부끄럽습니다만…….”
“고민은 나누면 반이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미력하지만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 한번 말씀해 보시지요.”
배금성은 주저하면서도 결국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최근에, 식방각주께서 돌아가셨지요. 그 때문에…….”
“식방각주. 아. 아아! 그러고 보니.”
그러고 보니, 둘이 동명이인이었구나! 왜 진작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자신의 무관심함에 부끄러움을 느낀 소년은 엄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의 진지한 태도가 위로가 되었는지 배금성은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예. 비록 일면식도 없는 사이지만 저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하니 어딘가 영 찜찜해서…….”
“확실히, 그럴 수 있겠군요.”
“그래서 저 친구와 술이나 한잔하며 떨쳐낼 생각입니다만. 상호께서도 함께 가시겠습니까?”
배금성의 제안에 잠시 고민에 잠긴 소년은 이내 악동 같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야 좋지요. 하지만 이왕 먹는 거, 제대로 먹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호오, 그렇다면 혹시 상호께서?”
“제가 솜씨를 한번 부려보지요. 괜찮으시다면.”
“괜찮다마다요! 식방각주를 쓰러뜨린 상호께서 술상을 대접해 주신다니, 가문의 영광입니다!”
이야, 그때 경합도 직접 보고 싶었는데, 하필 그날이 당직 근무라. 넉살 좋게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 배금성은 이미 불안감 따위의 어두침침한 감정을 모조리 떨쳐낸 듯했다.
경합부터 시작하여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늘어놓던 배금성은 악진평이 오자 호들갑을 떨었다.
“진평 이 친구야! 상호께서 대접해 주신다는데 어떻게 생각해!”
“어떻게 생각하긴. 그야 감사한 일이지. 하지만, 괜찮으시겠소?”
“괜찮지요. 뭐 드시고 싶으신 것 있으십니까?”
날이 쌀쌀해지니 뜨끈하고 푸짐한 전골도 괜찮군. 일단 장을 보는 것이 어떻소? 장에 뭐가 좋은 게 있을지 모르니. 악진평의 말에 배금성이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마침 힘 좋은 놈이 둘이나 있으니 무거운 물건은 맡겨 주십쇼!”
“이런 세상에! 금군의 용맹한 장군님들을 짐꾼으로 부리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니.”
“오히려 오상호 님과 장을 볼 수 있는 저희가 영광입지요.”
덩치 좋은 무장들 사이에 껴서 껄껄거리며 웃던 소년은 어색하게 서 있던 장소를 불러와 귀에 속삭였다.
“태감님께 전해. 오늘 저녁은 알아서 드시라고!”
* * *
좋은 음식과 좋은. 술. 그리고 좋은 친구. 사람의 영혼을 살찌우는 즐거움 속에서 시름을 풀어놓은 소년은 궁에 돌아오자마자 태감의 투정을 받아주어야 했다.
다 큰 양반이 밥 정도야 좀 알아서 먹을 것이지. 툴툴거리면서도 지은 죄가 찔렸던 소년은 결국 거나한 야식을 차려주고 나서야 태감에게서 해방될 수 있었다.
“쯧, 한 끼 정도야 적당히 때우면 좀 어때? 하여간 세끼 다 못 챙기면 죽는 줄 알아요.”
새벽달을 올려다보며 허리를 쭈욱 편 소년은 뼈마디가 쑤시는 피로감을 느끼면서도 쉽사리 잠이 오지 않음에 의아함을 느꼈다.
당장 침대 위에 쓰러져 곯아떨어져야 할 노곤함이건만. 이상할 정도로 심장이 두근거려 도저히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석연치 않은 불편함 속에서 침대 위를 굴러다니던 소년은 결국 머리를 긁으며 일어났다.
“달이 너무 밝아서 그런가. 확실히 그냥 자기엔 아까운 달이긴 하군.”
환하게 뜬 보름달은 기이하게도 창백한 푸른빛을 내고 있었다. 창백한 달빛에 물든 지상의 모든 것이 기이한 푸른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사람의 세상이 아닌 것만 같은 기묘함에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발은 연좌궁의 정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기이한 밤. 그 속에서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이 소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오늘도 잠이 오지 않으신가 보군요.”
“어르신.”
정원사 노인이 손짓하자 소년은 홀린 듯 그에게로 다가가 낮은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빛나는 별들이 흩뿌려진 밤의 융단을 올려다보며 한숨짓는 소년을 향해 노인은 빙그레 웃음 지었다.
“잠이 오지 않으시면, 이 노인네가 잠시 말동무가 되어드릴까요?”
노인의 단조로운 목소리에 소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의 이야기는 흥미롭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유익한 것들이었다.
계절 꽃 이야기. 후궁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소문들. 이야기를 늘어놓던 노인은 이번엔 소년에게 발언권을 넘겼다.
“이번엔 상호 님의 이야기를 듣고 싶군요.”
“허허, 별로 변변찮은 이야깃거리가 없어서.”
“그렇다면 살아오신 인생 이야기는 어떨까요?”
수많은 비밀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그의 인생은 신중하고 주의 깊게 다뤄야 하는 것이었다.
잠시 신음성을 흘린 소년은 노인의 눈동자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별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그의 인생은 비참하고 비굴하며 고통스러운 것이었지만 특별히 재밌는 이야기 주제는 아니었다.
이름도 모른 채 후궁의 밑바닥을 구른 이야기. 그 힘겨웠던 나날들. 추위와 굶주림에 허덕였던 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슴속에 한으로 맺힌 이야기를 꺼내며 소년은 쓴웃음을 지었다.
“우울한 이야기지요?”
소년의 입술을 지긋이 닫은 채 침묵하던 노인은 소년과 눈을 마주했다.
“힘들고, 고통스러우셨겠군요.”
“예? 뭐. 그렇지요.”
“원망스럽지는 않으셨습니까?”
“어르신?”
당신을 그런 처지로 만든 상대가, 원망스럽지는 않으시던가요. 폐부를 찌르는 노인의 예리한 질문에 소년은 웃음을 거두었다.
그 말은 도저히 웃으며 말할 수 없었다. 폐부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뜨겁고 격렬한 증오를 표출하지 않기 위해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소년은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원망스럽지요. 어찌 원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찢어 죽이고, 골백번 찢어 죽이고. 갈아 죽여도 시원치 않은데.”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도대체 누가 그랬는지를 모르는데. 안다면, 알기만 한다면. 소년은 얼굴을 손으로 감쌌기에 노인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한참을 침묵하며 소년의 원한과 저주를 듣던 노인은 눈을 조용히 눈을 감았다.
부자연스러운 침묵 속에서 손을 내린 소년은 노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런,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허허, 아닙니다. 그럴 수 있지요.”
한참 동안 소년의 말을 곱씹으며 달을 올려다보던 노인은 소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달빛의 그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기에 소년은 노인의 표정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혹시, 이런 생각은 해보신 적 없으십니까?”
“예?”
“사실은 좋은 집안의 자식인데. 여기서 이러고 있을 사람이 아닌데. 혹시 내가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말입니다.”
노인의 황당한 발언에 소년은 웃음을 터뜨렸다.
“예, 확실히 어린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할 만하군요.”
순진무구하고 세상을 모르는 어릴 때라면 누구나 한 번쯤 그런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사실 진짜 부모님은 따로 있고, 그 부모님이 어느 나라의 왕이라던가, 재벌이라던가. 그런 진짜 부모가 나타나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거라는. 황당무계하고 순진한 꿈.
그런 꿈은 너무 이미 세상과 타협한 지 오래인 노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꿈을 꾸며 현실을 비관하기에 소년은 너무 많은 것을 이루어냈다. 소년의 쓴웃음을 보며 노인은 다시금 질문했다.
“만약 그렇게 되신다면. 어떠실 것 같습니까?”
“그야……. 기분 나쁘겠지요.”
“허어? 어째서 그렇습니까?”
단번에 신분 상승이 되면, 기분이 좋지 않을까요? 노인의 일반론적인 말에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소년은 솔직한 대답을 꺼냈다.
“이렇게 말하면 건방지다 생각하시겠지만, 전 꽤 난 놈입니다.”
다리도 병신에 허리도 굽었지만, 그래도 악착같이 살아서 아등바등하며 이 자리까지 기어올랐습니다. 그래도 정오품 자리지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사례 태감님의 전속 요리사 자리에도 올랐고, 실력 하나로 이곳저곳에서 인정도 받았습니다.
“심지어 황제 폐하께서도 제 음식을 인정해 주셨으니, 이 정도면 제법 괜찮은 놈이지요.”
경사에 이름난 다관 막심의 고문 역할도 맡고 있고, 비룡대주 에 오르신 장군님의 독을 치유한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식방각주도 꺾었지요.
자신이 이룩한 것들을 하나하나 말하며 소년은 고개를 위로 들어 올렸다. 자신의 얼굴에 들러붙은 그림자가 달빛에 씻겨지길 바라는 것처럼.
“이 정도면 나름 괜찮은 인생이었다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렇게 이뤄 놓았는데, 목숨 걸고 살아왔는데. 누가 나타나서 갑작스럽게 저보고 좋은 집 자식이라고 치켜세우며 신분을 상승시켜준다면.
그건.
“그건 제 인생을 기만하는 일이 아닙니까. 그렇게 되면 참지 못할 것 같습니다.”
노인은 그저 침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