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147화
“생각이 바뀌었네.”
입맛을 다시며 소년을 보던 안양비는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강렬한 기세에 가려져 있던 그녀의 미모가 빛을 발하자 소년은 당혹스러움마저 잠시 잊고 멍하니 그녀를 보았다.
“본래 사례 태감을 쓰러뜨리기 위해 자네를 포섭하려 했지만. 생각이 바뀌었어.”
사례 태감을 쓰러뜨리고, 자네를 갖겠어.
그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안양비의 선언에 소년은 순간 자신이 소설 속 비련의 여주인공이 된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안양비 님이 나의 영웅인가? 역경과 고난 끝에 나를 쟁취하는? 불쾌하기까지 한 망상에 헛웃음을 터뜨린 소년은 떨떠름하게 되물었다.
“예? 제가 지금 잘못 들은 것 같은데.”
“제대로 들었네. 자네는 내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매력적이고 가치 있는 사람이었어. 그저 사례 태감을 견제하기 위한 장기 말로서 쓰기에는 너무 아까운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네.”
사례 태감을 이겨서라도. 어떠한 희생을 치러서라도 품에 안고 싶은 보물이지. 정열적인 고백과도 같은 안양비의 말에 소년은 한숨을 쉬었다.
앞으로 다가올 고난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찌들어 있는 소년의 눈동자를 들여다본 안양비는 상쾌한 웃음으로 소년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지나친 강권은 역효과만 부를 테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지.”
하지만 이대로 돌아가면 섭섭하니, 사례 태감께 제안 한가지 전해주겠는가? 안양비의 말에 소년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시지요.”
“사례 태감께도 나쁘지 않은 제안이니, 걱정하지 말게나.”
이렇게만 전해주게. 반반씩 갈라서 먹자고. 뜻 모를 말에 소년이 의문을 표하자 안양비는 사례 태감께 전하면 이해할 거라는 모호한 말을 할 뿐 소년에게 속 시원히 답을 알려주지는 않았다.
연좌궁의 주방에 도착해 태감의 저녁상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소년은 안양비가 어떤 의도로 그 말을 했는지를 계속 고민했다.
저녁상에 대한 기대감에 부푼 채 주방을 찾아온 태감은 뚱한 표정으로 건두부를 채 썰고 있는 소년을 보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건두부구나?”
“예? 아. 예. 오늘은 대자간사(大煮干絲)입니다.”
청나라 건륭제가 극찬했다는 회양(淮揚)의 건두부탕 대자간사는 진한 닭고기 육수에 가늘게 채 썬 건두부를 익혀낸 요리였다. 살짝 쌀쌀한 기운이 도는 가을 저녁에 잘 어울리는 요리였다.
“여기에 생선찜도 하나 곁들이고. 좋은 돼지고기기가 들어왔으니 매콤하게 볶아서 저녁상을 올리지요. 어떠십니까?”
“나야 좋다마다.”
소년의 솜씨를 구경하고 싶다는 듯 태감이 주방 한편에 의자를 놓고 앉자 소년은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칼을 들었다.
[대자간사(大煮干絲) 만들기.]
대자간사에 들어가는 모든 재료는 바늘 굵기로 가늘게 채 썰어야 한다. 건두부, 짭짤한 향장(香肠), 해삼, 표고버섯과 목이버섯, 죽순은 가늘게 채 썰고 닭고기는 한번 삶아낸 후 가늘게 찢는다.
새우는 껍질을 벗기고 내장을 빼낸다.
“건두부는 통통하고 가능한 하얀 것을 고르는 것이 좋고, 향장은 살코기로만 만든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국물에 기름이 뜨지 않고 개운하지요.”
두부는 우선 칼을 가로로 뉘여 얇게 포를 떠낸 다음 가늘게 채 썬다. 채 썬 두부는 콩 비린내를 빼내기 위해 뜨거운 물에 두 번 데쳐내 물기를 짜낸다.
모든 재료가 준비가 끝났으면 오지 냄비를 화구에 올리고 달군 다운 돼지비계로 기름을 두른다.
“우선은 연한 새우를 먼저 살짝 익혀내고, 새우를 건진 다음 나머지 재료를 넣으면 됩니다.”
“향기가 좋구나.”
새우를 집어먹으려는 태감의 손을 막으며 소년은 노란 기름이 뜰 정도로 진하게 우려낸 닭 육수에 나머지 재료를 넣고 건두부가 육수를 흠뻑 머금을 때까지 끓여냈다.
재료의 맛이 배어 나와 국물이 진해지면 소금과 간장으로 간을 하고 새우와 완두 싹을 올려 상에 올린다.
“허어, 꼭 국수 가닥 같구나.”
두부에 닭고기에, 온갖 재료가 듬뿍 들어가 몸에도 좋겠지. 환자식으로도 괜찮겠어. 그럼, 맛은 어떨까.
태감은 젓가락을 들어 국수 가닥 같은 건두부를 듬뿍 집어 올렸다. 건두부와 함께 가늘게 채 썬 해삼과 닭고기, 향장 등이 함께 딸려 올라왔다.
“향긋하군.”
“식기 전에 드시지요.”
태감은 지체 없이 젓가락을 입으로 옮겼다. 볼 안쪽을 가득 채우는 건두부의 쫄깃한 식감과 함께 스며들어 있었던 직한 육수의 감칠맛이 혀 위로 쏟아졌다.
“결코, 혀가 아릴 만큼 진하지는 않아. 하지만 그만큼 자극적이지 않은 순한 감칠맛에 혀가 느슨히 풀어지는군.”
쫄깃쫄깃한 건두부와 오돌오돌한 목이버섯과 해삼, 아삭아삭한 죽순과 야들야들한 표고버섯과 닭고기. 단단한 향장.
자기주장이 강한 재료들의 서로 다른 식감 또한 별미였다. 태감은 그쯤에서 숟가락을 들어 진한 육수를 마셨다.
진한 감칠맛 속 살며시 느껴지는 향장의 소금기. 육수는 부드럽고 목 넘김이 좋았다.
마치 위장을 보호해 주는 듯한 은은한 맛에 태감은 지난날 자극적인 음식들로 위장을 혹사했던 자신의 아둔함을 반성했다.
진정한 요리란 이런 것이지. 담백하고 향긋하며 상냥한, 진정으로 사람을 살찌우는 요리. 자신이 건강해지는 것을 느끼며 태감은 내면의 소우주로 빠져들었다.
자극적인 요리는 혀만을 만족시키지만, 담백하고 건강한 요리는 오체를 만족시킨다. 그런 태감을 보며 소년은 시큰둥하게 물었다.
“그래서 매운 건 안 드실 겁니까?”
“누가 안 먹는다고 했느냐? 말이 그렇다는 거지.”
청고추가 듬뿍 들어간 호남식 돼지고기볶음으로 젓가락을 돌린 태감은 밥 다섯 공기를 먹고 나서야 후식을 먹어야겠다며 젓가락을 놓았다.
그의 후식은 매화청으로 향기를 낸 시럽에 담근 새알심, 탕원(汤圆)이었다.
쫄깃쫄깃한 새알심 안에는 향긋한 검은깨 소와 잣이 듬뿍 들어 있었다. 후후 불어서 단물을 한 모금 마신 태감은 그 향긋함에 배시시 미소 지었다.
“그러고 보니, 곧 탕원을 한 번 더 먹어야겠구나.”
“예. 입동절(立冬節)에는 탕원을 먹어야지요.”
입동절은 한국의 추석, 중국의 중추절에 해당하는 큰 명절이었다. 겨울이 시작되기 전. 한해의 수확을 모두 마무리하면 조상신께 풍년을 감사하는 제사를 올리고, 다가올 추운 겨울을 대비하기 위해 기름진 음식으로 몸보신을 하는 날. 그날 빠지지 않은 음식이 탕원이었다.
“입동절은 황실에서도 큰 행사지. 후궁의 비들도 빠지지 않는.”
소년은 그제야 안양비가 한 제안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가 되었다. 소년이 안양비의 제안을 태감에게 전하자 태감은 고려할 만한 제안이라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옥린비가 죽으며 안양비의 세력은 크게 흔들렸다. 재정비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하지만 입동절은 놓칠 수 없는 중요한 행사다. 의석수가 정해져 있는 행사에 얼마나 자기 파벌의 비를 채울 수 있는가. 이것은 파벌의 위신이 걸린 문제이다.”
평소였다면 탄탄하게 파벌을 다져둔 난화비 님의 파벌이 많은 의석수를 차지했겠지. 하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우리에게 껄끄러운 문제가 남아있구나. 태감의 말에 소년은 한숨을 내쉬었다.
“서방 교역단 말이군요.”
“교역단을 맞이하는 것은 나라의 위신이 걸린 문제다. 안양비가 독하게 마음을 먹고 암살자를 보내거나 독을 푼다면 상황이 곤란해지겠지.”
결국, 안양비의 제안은 한시적인 불가침 조약과 다를 바 없었다. 독이든 잔을 눈앞에 둔 것처럼 심사숙고하던 태감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내줘야 할 것은 내줘야겠지.”
“하지만, 안양비 님의 제안을 신뢰할 수 있습니까?”
“쌍방의 이익이 걸린 문제라면 안양비도 약속을 지킬 수밖에 없을 거다.”
“찜찜하군요.”
소태를 씹은 것처럼 일그러진 소년의 얼굴을 보며 태감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찜찜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정치지. 알면서도 속아주고, 손익의 저울에 따라 어제의 적과 손을 잡아야 하는 것.
“원래 간 쓸개 빼놓고 하는 것이 정치다. 아니꼬워도 어쩌겠느냐.”
나른한 숨을 내쉬며 태감은 안양비에게 쓸 편지지를 준비했다. 아주 잠깐. 등 뒤에 칼을 숨긴 채 협정이 이루어졌다.
* * *
이튿날. 모처럼 후궁을 나선 소년은 표가 상단으로 향했다. 다관 막심만큼이나 인산인해를 이루는 표가 상단의 현판을 올려다보며 소년은 잠시 감회에 젖었다.
“스승님, 오셨습니까?”
“넌 참 변한 것이 없구나. 이제 대상단의 단주이니 옷도 좀 번듯하게 입어야지.”
표자승은 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소년을 맞이했다. 산적처럼 덥수룩하게 기른 턱수염과 검소한 삼베옷.
새로운 사대 상단의 일원으로 주목받고 있는 표가 상단의 단주치고는 지나칠 만큼 검박한 모습이었다.
소년의 타박에 표자승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난처하게 웃었다.
“평생을 이렇게 살아왔더니 습관을 고치기가 쉽지 않더군요. 그래도 중요한 자리에 입고 나갈 비단옷 한 벌은 있습니다.”
“뭐, 네가 좋다면 상관없겠지.”
낄낄거리며 시선을 돌린 소년은 표자승이 도끼 자국을 남긴 바닥을 보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아직 보수도 안 했구나.”
“해야 한다고 생각은 했는데, 영 일이 바쁘다 보니 신경을 못 썼습니다.”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는 표자승을 보며 소년은 지난날의 일을 떠올렸다. 가배를 사기 위해 이 상단을 찾아오고, 참 많은 일이 있었구나.
“참 많은 일이 있었어.”
“예. 그렇지요.”
자국을 내려다보며 감상에 젖어 있던 소년은 이내 고개를 들고는 표자승의 허리를 쳤다.
“장사가 이렇게 잘 되는데, 슬슬 본점을 옮겨야 하지 않겠어? 이제 사대 상단 진입이 코앞인데.”
“커흠, 안 그래도 알아보고 있습니다. 사대 상단으로 올라서면, 그에 어울리는 품격 있는 건물이 있어야지요.”
태감께 한번 여쭤볼까? 괜찮은 건물이 있으신지.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조금 싸게 주시겠지.
그럼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음산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은밀하게 이야기를 나눈 둘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자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한참을 낄낄댄 둘은 그들에게 몰리는 사람들의 시선에 머쓱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다.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하시죠.”
“그래. 대로에서 이러고 있으면 민폐지.”
간소한 책상과 장식 없는 의자. 그 흔한 족자 하나, 화병 하나 없는 단출한 공간이 표자승의 집무실이었다.
소년이 잠시 기다리는 동안 표자승은 하인을 부르는 대신 직접 둥근 탁자와 그럴듯한 의자 두 개를 날라왔다.
“이제 슬슬 사람을 부리면서 살아야지.”
“허허, 아직 여력이 있는데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해야지요.”
굵직한 팔에 알통을 만들어 보이는 표자승의 모습에 소년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며 가져온 과자를 꺼내놓았다.
“봉리수(鳳梨酥)다. 막심의 새로운 주력 상품이 될 과자지.”
“호오, 봉리과를 이용한 과자인가 보군요? 마침 이번에 운남과 복건성 쪽의 거래 양을 늘릴 생각이었는데, 잘되었군요.”
스승님께서 만드신 과자이니 맛은 확실하겠군요. 수염투성이 입을 벌린 표자승은 거침없이 과자를 입으로 던져넣었다.
파삭한 속이 부스러지며 입안에 퍼지는 상큼한 열대의 향기에 표자승이 감탄사를 연발하는 동안 소년은 나른한 숨을 내쉬며 표자승과의 추억을 떠올렸다.
“열심히 했구나. 표자승.”
고작 중견쯤 되는 상단을 이만한 위치까지 끌어올리고, 경사에서 가장 유명한 다관의 주인이기도 했지. 네 대에 상단을 사대 상단의 위치까지 끌어올렸으니 이는 대단한 위업이다. 혼자서 그 많은 일을 해냈으니, 힘들고 고단했겠지.
정말 고생 많았다.
소년의 다정한 말을 들은 순간 표자승의 퉁방울 같은 눈에서 굵은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어린 스승의 입에서 떨어진 인정을 들은 순간 표자승은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인정받았던 날을 떠올렸다.
자신의 아들뻘이나 간신히 될 법한 어린 스승의 목소리에는 세월을 초월한 포용력과 인자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것이 어찌, 저 혼자 이룬 일이겠습니까.”
사례 태감께서 절 지원해 주시고, 제 직원들도 애를 많이 써줬지요. 그리고. 그리고 스승님께서. 표자승은 이를 악물고 무릎을 꿇었다.
“스승님, 이 불민한 놈의 절을 받아주십시오.”
“이럴 것 없다.”
“아닙니다. 스승님께서 저를 이끌어주시고, 저에게 빛을 보여주시지 않았으면 전 여전히 그 자리에 안주한 채 허송세월만을 했을 겁니다. 나아갈 용기를 잃고, 그 자리에서 천천히 말라 죽었겠지요.”
스승님께서 저에게 불을 붙여주시지 않으셨다면, 전 영원히 패배자로 남았을 겁니다.
스승님께선 저를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다시 일어서게 해주셨고, 다시 싸울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이 은혜를 모른다면 이 미련한 놈은 사람이 아니라 짐승 새끼일 것입니다. 스승님. 부디 제 절을 받아주십시오.
표자승을 굽어보며 뭐라 말해야 할지 고민하던 소년은 이내 애매한 덕담으로 상황을 모면하려 했다.
그는 이런 자리에서 멋들어진 말을 줄줄 늘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커흠, 그래. 고생 많았다.”
“예!”
경애의 감정으로 차오른 표자승의 눈을 보며 소년은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불편함을 느꼈다.
생각 같아서는 눈깔 똑바로 뜨라며 후려치고 싶었지만, 소년은 주먹을 쥔 손을 뒤로 숨기며 요란스럽게 헛기침을 했다.
“그럼 이제, 일 이야기를 해볼까?”
“일! 어떤 일이든 말씀하십시오!”
“너에게도 제법 구미가 당기는 일일 거다.”
소년의 말에 표자승은 자욱하게 깔리는 황금의 향기를 맡았다. 코끝이 저릴 만큼 농밀한 황금의 향기. 서방의 사절단과 함께 교역단이 오고 있었다.
“서방의 진귀한 물산은 모두 모이겠군요.”
일각수의 뿔에 서방의 비단. 백곰의 가죽. 코끼리의 상아. 서방의 술. 진귀한 향신료. 연금술사가 만들었다는 기묘한 묘약까지. 거대한 황금의 물결이 넘실거리며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취급하게 된 게 태감님의 유령 상단이란 말이지.”
하지만 태감께선 공사다망하신 분 아닌가. 소년의 말에 표자승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태감님 같은 귀하신 분께서, 장사 같은 천한 일에 신경을 쓰실 수는 없지요.”
“자신 있나?”
소년의 불타오르는 눈동자를 마주 보며 표자승은 당당히 야심을 드러냈다.
“부디, 맡겨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