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146화
수백 개의 돌기둥과 위령비. 건조함과 황량함만이 감도는 북림궁에도 규모는 작지만, 정원이 존재했다. 잔디를 밟으며 소박하게 핀 꽃들을 내려다본 소년은 실소를 터뜨렸다.
“참……. 독살스러운 것들로 모아두셨군.”
투구꽃에 복수초, 협죽도, 독말풀. 그리고 은방울꽃. 어쩜 이리 독성이 있는 꽃들만 모아 정원을 가꾸셨는지. 악의가 자라나는 듯한 정원의 광경에 정신이 팔려 있는 소년에게 누군가가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다들 실용적인 꽃들이지.”
등 뒤에 들려온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소년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는 태연함을 가장했다. 낮고 힘 있는 여인의 목소리. 그가 기다리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확실히. 후궁에서는 무척 실용적인 꽃들이군요.”
“그간 격조하였습니다. 안양비 님.”
최소 두 시간은 기다려야 할 줄 알았는데. 관례를 거추장스러워하는 그녀의 불같은 성격에 기꺼움을 느끼며 등을 돌린 소년은 그 순간 뇌리를 타고 흐르는 전율을 느꼈다.
강자를 눈앞에 둔 약자가 본능적으로 위축되는 그 감각. 뒷덜미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우선은, 초청을 받아준 것에 대해 감사를 하고 싶군. 고맙네.”
안양비의 인사를 받으며 소년은 떨리는 입술을 굳게 닫았다. 정중한 인사와 품위 있는 자태.
고상한 비의 탈을 쓰고 있었으나 소년은 그녀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느낄 수 있었다.
맹수였다. 그녀는 참으로 아름다운 맹수였다. 어째서 알아차리지 못했던 걸까?
지난날의 안양비를 떠올리며 안심했던 소년은 지난날의 멍청한 자신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비단옷을 우아하게 차려입었지만 숨길 수 없는 야수와 같은 근육. 타격부에 굳은살이 단단히 박인 손. 마치 거목처럼 흔들림 없는 자세.
그때의 난. 어째서 안양비 님의 강함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걸까. 이토록 강렬하고, 이토록 소름 끼치는 기세를. 소년은 자신의 안목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소년 또한 무수한 싸움을 겪어온 사람이었다. 비록 뒷골목의 개싸움이었지만 뜨거운 피와 주먹. 때로는 술병과 의자 같은 것들을 나누며 소년의 본능에는 한가지 감각이 심어졌다.
바로 강자를 알아보는 감각.
자신이 감히 손대서는 안 되는, 납작 엎드려야 하는 대상을 알아보는 안목.
그리고 지금 소년의 감각은 미친 듯이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도망치라고. 그렇지 않으면 죽을 거라고.
참혹한 죽음의 예견을 목구멍 안쪽으로 밀어 넣으며 소년은 경련하는 입꼬리를 억지로 올렸다.
“감추셨군요? 그때는.”
식은땀을 흘리는 소년의 눈을 들여다보며 안양비가 웃었다. 먹잇감을 포착한 굶주린 호랑이와 같은 웃음이었다.
“감추어야만 하는 곳이 아닌가. 후궁은.”
아무리 미천한 자라도. 아무리 보잘것없는 자라도. 누군가의 눈과 귀일 가능성이 있지. 그러니 숨겨야 하지 않겠는가.
안양비는 지긋이 소년을 보았다.
자네의 것도 한 번 볼까.
그 순간 소년은 머리털이 쭈뼛 서는 한기를 느꼈다. 뇌척수에 직접적으로 내려꽂히는 위험의 감각.
안양비의 눈동자에 떠오른 한 가닥의 살심을 포착한 순간 소년은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직감했다.
포식자를 눈앞에 둔 피식자가 느끼는 절망적인 공포. 몸이 떨려올 만큼 아픈 두려움 속에서 소년은 떨리는 손을 천천히 그러쥐었다.
소년은 주먹을 쥐었다.
막막한 공포 속에서 소년의 본능은 도피나 애원이 아닌 투쟁을 선택했다. 소년의 눈동자에 떠오른 불길과 같은 감정을 들여다보며 안양비는 송곳니를 드러내었다.
“역시. 자네 또한 전사였군.”
조금만 더 무르익었다면, 제법 재미있었겠어.
흉포한 미소를 지으며 입맛을 다시던 안양비는 이내 부드러운 동작으로 정원 한가운데에 마련된 탁자를 가리켰다.
“하지만 오늘은, 날이 아니지.”
좋은 날이니, 칼보다는 말을 나눠야지.
안양비의 말에 소년은 마치 거대한 짐승의 아가리에서 탈출한 것만 같은 해방감을 느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소년이 자리에 앉자 안양비는 기대감으로 눈을 빛내며 말했다.
“장 태감이, 자네가 맛있는 떡을 가져올 거라고 하던데.”
“떡은 아니지만, 마음에 드실 겁니다.”
“호오, 그대가 자랑하는 서방의 과자인가?”
한번 먹어보고 싶다고 생각했지. 입술을 핥은 안양비는 그야말로 살코기를 씹는 맹수와 같았다.
그 긴장감에 소년이 마른침을 삼키자 안양비는 부드럽게 손을 내저으며 적의가 없음을 표했다. 소년은 안양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천천히 함의 뚜껑을 열었다.
모서리에 놋쇠를 댄 흑단 함이 열리자 안양비는 처음 보는 독특한 과자에 묘한 감탄사를 흘렸다.
“호오. 신기하군.”
“커피 크림을 듬뿍 넣은 롤케이크입니다.”
“커피?”
“제국에서는 가배라 부르지요.”
“호오, 최근 제국의 다도 시장을 장악한 그것인가. 그러고 보니 아직 마셔본 적이 없군.”
자네가 그걸로 재미를 좀 봤다지?
안양비의 짓궂은 농에 소년은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롤케이크를 꺼내 상에 올렸다.
통통한 롤케이크는 연갈색 커피 크림이 듬뿍 들어가 있었고 길이는 두 뼘이 조금 안 되었다.
프랑스식 버터크림인 크렘 오 뵈르를 베이스로 이탈리안 머랭과 커피를 넣은 크림은 부드럽고 살살 녹는 식감에 진한 버터의 풍미가 일품이었다.
케이크를 말 때 크림에 고소한 헤이즐넛과 호두를 듬뿍 넣었기 때문에 케이크에서는 향긋한 커피 향기와 견과류 향기가 물씬 피어올랐다.
“그럼 바로 자르겠…….”
빵칼을 꺼내려던 소년은 경악 속에서 손을 멈추어야 했다. 안양비가 롤케이크를 통째로 집어 들었기 때문이다.
처음 맡아보는 오묘한 향기에 감탄한 안양비는 기쁨 속에서 새로움에 도전에 뛰어들었다. 남들의 시선 따윈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호방하게 롤케이크를 베어 무는 안양비의 모습에 소년은 묘한 쾌감을 느꼈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규범에 얽매이지 않는 그녀의 자유로움은 소년에게 신선한 만족감을 안겨주었다.
크게 베어 물어 한 입, 두 입. 숨도 쉬지 않고 롤케이크를 먹어치운 안양비는 크림이 묻은 선홍빛 입술을 핥았다.
아쉬움이 느껴지는 그녀의 시선에 소년은 기꺼이 두 번째 케이크를 내놓았다.
“기쁘게 받겠네. 오상호.”
“잘 드셔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본래 한 번은 사양하는 것이 예의겠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군. 나의 무례를 용서하시게.”
아직 여운이 남아있는 입속에 두 번째 케이크를 밀어 넣으며 안양비는 무관심했던 미식의 충족감이 깊숙한 곳에 쌓이는 것을 느꼈다.
혀끝으로 보드랍게 퍼지는 달콤 쌉싸름한 향기. 매끄러운 감촉. 안양비는 달콤한 숨을 내쉬며 가슴에 손을 얹었다.
“참으로 오묘한 향기군. 뭐라 표현해야 할까. 밀이나 보리 등을 태운 듯한 고소한 향기. 아궁이에서 타들어 간 숯의 향기. 그런 강렬하고 묵직한 향기 속에 보드랍고 상냥한 꽃과 과실의 향기가 스며들어 있어. 거기에 풍성하게 사용한 견과류의 아삭아삭한 식감과 묵직한 듯하면서도 혀끝에서 미끄러지며 사르르 녹아내리는 이 감촉, 유질감. 절제된 단맛과 절묘한 쌉싸름함.”
그리고 그것들을 감싸 안은 폭신한 빵의 감촉. 연상되는 단어들을 말하며 안양비는 매끄러운 크림의 감촉이 녹아든 혀끝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그것은 틀림없는 낙원의 맛이었다. 영원히 안주하고 싶은 안락함 속에서 안양비는 천천히 눈을 떴다.
“품에 안고 잠들고만 싶군. 그런 포근한 맛일세.”
“영광이옵니다.”
“맛좋은 과자와 향긋한 차. 선선한 날씨. 한가로운 잡담이나 하기엔 최고의 날이군. 하지만.”
이제 슬슬, 공적인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겠나.
안양비의 눈동자에 강렬한 야심이 드러났다. 사뭇 유쾌하고 가벼웠던 분위기가 엄숙함과 진중함 속에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소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청자의 자세가 되어있는 소년의 모습에 만족을 느끼며 안양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디, 솔직하게 대답해 주겠나?”
“약속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대답에 따라 다르다는 뜻인가? 신중하군. 마음에 들어. 대답하지 않더라도. 혹은 터무니없거나 무례하더라도 괘념치 않겠네. 부디 부담 없이 말해주게나. 사례 태감은 자네게 무엇을 제시했지?”
안양비의 직설적인 질문에 소년은 한참 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무엇이라 대답해야 할까. 혀끝으로 자신이 대답해야 할 것들을 굴려보며 고민하던 소년은 탁자 위에서 양손을 깍지끼며 애매한 대답을 내놓았다.
“많은 것을 약속해 주셨지요. 경사에 으리으리한 장원. 수천 명의 소작인을 부릴 수 있는 농지와 곳간 열 개를 가득 채울 수 있는 재산. 그리고 아리따운 삼처사첩을 품에 안겨주신다는군요.”
“호오, 사례 태감의 배포가 대단하군.”
안양비 님께선 저를 위해 그만한 지출을 감당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소년이 도발적으로 입꼬리를 비죽이자 안양비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제아무리 대단하다는 황후 후보자라도 움직일 수 있는 현금은 후궁 제일의 권력자를 넘을 수 없었다.
“과연. 사례 태감 이상으로 좋은 제안은 어렵겠군.”
“저는 속물적인 사람입니다. 안양비 님.”
“더욱더 마음에 드는걸.”
나는 속물적인 사람을 좋아한다네. 다루기 쉽거든.
오른손으로 턱을 괸 안양비는 소년과 시선을 마주했다. 세상 모든 것에 질려버린 것처럼 무료함과 피로함만이 느껴지는 무채색의 눈동자.
안양비는 소년의 말이 지금, 이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황금과 여자.
소년은 그따위 것으로 움직이는 자가 아니었다. 그를 이끄는 것이 의무감에 가까운 감정임을 간파한 안양비는 소년의 심장을 두드릴 제안을 준비했다.
“명예는 어떤가.”
“그것참 감동적인 제안이십니다.”
모멸적으로 일그러진 소년의 표정에도 안양비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허리를 굽혀 소년에게 얼굴을 가까이하며 안양비는 타오르는 불꽃처럼 뜨겁고 전장의 북소리처럼 두근거리는 제안을 내밀었다.
“역사에 이름을 남겨주지.”
단순히 높은 지위를 약속하는 것이 아닐세. 이 안양비의 심복으로서. 정치판을 주름잡던 거인으로서 제국의 역사서에 이름 석 자를 새겨주겠네. 자네의 이름이 수천 년 후까지 회자될 수 있도록. 역사가들이 자네의 이름 석 자를 외울 수 있도록.
“이 안양비가 자네를 책임지지.”
안양비의 담대한 제안은 사내의 본능을 충동질하는 것이었다.
번쩍이는 황금보다도, 천상의 미녀보다도 사내의 심장을 뛰게 하는 것. 공명심. 소년은 늙고 노쇠한 심장에 젊은 피가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사람을 꿈꾸게 했다.
번쩍이는 안양비의 눈을 마주 보며 소년 또한 조금 고개를 숙여 그녀와 거리를 좁혔다.
“어째서, 황후 자리를 노리십니까?”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는지 순간 그녀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어째서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인지, 가만히 소년을 들여다보던 안양비는 입술을 열었다.
“사내로 태어나 천하를 노리는데, 이유가 필요한가?”
“장부로 태어나 천하를 꿈꾸는 것은, 어찌 보면 필연적인 일이지요.”
“그래. 천하의 자리를 꿈꾸는 것에 이유는 필요가 없지. 그것이 이룰 수 없는 꿈이라 할지라도. 천하제일이라는 자리는 꿈꾸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으니까.”
어째서 황후의 자리를 노리느냐고? 그것이 천하이기 때문이라네. 위대한 용의 여인이 되어 천하를 경영하는 자리. 여인으로 태어났다면 누구나 꿈꿔볼 자리가 아닌가.
말을 끝낸 안양비는 싱긋 웃어 보였다.
“만족스러운 대답이 되었으면 좋겠군.”
소년은 침묵하며 안양비의 대답을 곱씹었다. 안양비는 소년의 충분히 고뇌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었다. 뜨거운 찻물에 냉기가 서릴 만큼의 시간이 흐른 후. 소년은 고개를 숙였다.
“만약 태감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기꺼이 안양비 님을 따랐겠지요.”
“아쉽군. 거절인가?”
“안양비 님의 제안은 매력적이었지만. 태감님을 배신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소년을 굽어보며 안양비는 다시금 되물었다.
“자네가 고작 재물 따위에 연연할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아네. 사례 태감이 자네에게 한 제안이 뭐였지?”
소년은 잠시 망설였지만, 안양비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미로 솔직하게 대답했다.
“의미 있는 죽음.”
“죽음이라고?”
“예, 태감께서는 그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도저히 어린아이가 담을 만한 이유가 아니었다. 그런 것을 위해서 그녀의 제안을 물렸다는 사실에 안양비는 충격적인 황당함을 느꼈다.
멍하니 소년을 바라만 보던 안양비는 탁자 끄트머리를 움켜쥐며 말했다. 그녀의 악력에 곱게 무늬가 들어간 참나무 탁자의 끄트머리가 뭉개졌다.
“내 제안은 무의미한 죽음이란 말인가?”
“물론, 역사서에 이름을 남긴다면 그 또한 더없이 의미 있는 죽음이 되겠지요. 하지만 제가 원하는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자네가 원하는 것은 뭔가!
격노하여 포효하려 했던 안양비는 소년의 눈동자에 쌓인 해묵은 감정을 직시하며 입술을 닫았다.
기나긴 세월의 풍화로 닳고 닳은 체념과 피로. 그리고 간절한 소망. 안양비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누군가의 기억에 남는, 그런 죽음인가.”
소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의 긍정을 보며 안양비는 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것이 약관도 넘기지 못한 죽을 날을 받아둔 노인네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지금까지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날이 몇 배는 더 남은 어린아이가 어째서 죽음을 바라는가? 어째서 그토록 간절하게 원하는가?
안양비는 그제야 소년의 나이가 실감이 나게 느껴졌다. 그녀가 등용하길 원한 실력자가 아직 부모 품을 떠나지도 못할 나이의 어린아이라니.
천의무봉의 솜씨에만 눈이 멀어 의식적으로 방관해 왔던 문제가 떠오르자 안양비는 허탈한 숨을 내쉬었다.
“믿을 수 없군. 자넨 아직 어리지 않은가. 어째서 삶의 목표를 죽음으로 선택한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
“죄송합니다.”
소년의 사죄에 무미건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안양비는 떨치지 못한 미련을 한 번 더 입에 담았다.
“내가 자네를 기억하겠네. 영원히. 그걸로는 안 되겠는가.”
“저를 기억해 줄 사람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태감님의 기억 속에 남기를 바라는 거지요. 안양비 님께선 그 차이를 아시리라 믿습니다.”
헛웃음을 지으며 탁자 조각을 털어낸 안양비는 이내 탐욕스러운 미소를 입에 띄웠다.
“이거, 더욱더 자네가 탐나기 시작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