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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145화 (145/314)

환관의 요리사 145화

달갑지 않은 손님은 늘 갑작스럽게, 예고 없이 찾아오는 법이었다.

연좌궁의 내원에 마련된 정자를 찾은 소년은 먼저 온 불청객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느긋하게 잉어에게 모이를 주던 불청객은 소년이 지척까지 다가왔음을 알아차렸으면서도 능청스럽게 모이를 뿌리는 거에만 열중했다. 결국, 먼저 백기를 든 것은 소년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장 태감님.”

“오, 자네 왔는가? 이거 잉어에 정신이 팔려 자네 온 줄도 모르고 있었군.”

잉어들은 장 태감이 모이를 뿌릴 때마다 튀어 오르며 물보라를 일으켰고 고요했던 수면에는 흰 포말이 일어났다.

잉어가 첨벙거릴 때마다 연잎이 흔들린다. 모이를 먹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잉어들을 굽어보던 장 태감은 빙그레 웃음 지으며 소년에게 물었다.

“잉어가 아주 튼실하게 자랐군그래.”

“살이 오르는 계절이지요.”

“허허, 그래. 가을은 좋은 계절이지. 봄여름의 흘린 피와 땀을 수확하는 계절이니, 마음이 들뜨는 계절이고 말고.”

그래. 자네의 가을은 어떤가? 지난여름 피땀 흘리며 고생했으니, 좋은 결과가 있었겠지?

장 태감의 덕담에 무심코 장 태감님 덕분이라고 대꾸하려 했던 소년은 움찔하며 입술을 닫았다.

어디에서나 무난한 겸양의 표현도 상황과 관계에 따라선 무례한 조롱이 될 수도 있었다. 그와 정적 관계라는 것을 떠올린 소년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운이 좋았습니다.”

“겸손한 대답이군. 조금 더 자신을 과신해도 좋을 나이지 않은가.”

너털웃음을 터뜨린 장 태감은 난간에 몸을 기댄 채 소년에게 모이가 든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는 반쯤 비어 있었다.

소년이 무료하다는 표정으로 모이를 수면에 흩뿌리기 시작하자 장 태감은 시선을 수면의 파문에서 소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운이 좋은 것만으로 쓰러트릴 수 있을 만큼, 식방각주. 그 친구가 호락호락한 친구는 아니지.”

“태감님.”

자네는 정말 탐나는 인재라네. 장 태감과 시선이 마주치자 소년은 시선을 아래로 돌렸다.

그의 눈동자는 뜨거운 열망으로 타오르고 있었고 혀는 달콤하고 부드러웠다.

심장을 움켜쥐는 듯한 그의 목소리가 귓바퀴에 감기자 소년은 혀를 지그시 깨물었다.

고통으로 정신에 자극을 주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장 태감의 말에 이끌려 고개를 끄덕일 것만 같았다. 소년의 침묵을 지켜보던 장 태감은 혀끝으로 독을 풀어놓았다. 진득하고, 향기로운 독이었다.

“자네는 아직, 자네가 이룬 일이 얼마나 대단하고, 엄청난 일인지 감을 잡지 못하는 것 같아.”

그것은 소년이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진짜 정치의 세계였다. 세 치 혀로 사람을 밀고 당기며 고꾸라트리는, 여우의 머리와 뱀의 혀를 가진 이들의 세계. 장 태감의 말은 그만큼이나 달콤했다.

“이십 년일세. 식방각주. 그 친구가 황실의 주방을 책임져온 것이 벌써 이십 년이야. 그 누구도 끌어내리지 못한, 아니, 올려다보지도 못한 자리였단 말일세. 그는 요리의 신이었어. 외궁의 식방각에서. 황실의 주방에서. 요식업계라는 분야에서 그의 입지는 그 정도였네.”

근데, 신이 패배했군. 자네에게. 장 태감의 목소리는 강력한 힘이 깃들어 있었고, 그의 눈빛에는 소년을 향한 경의가 가득 차 있었다.

그의 작은 동작 하나하나, 혀끝으로 자아내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소년의 영혼을 한없이 떠오르게 했다.

그 속내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리고 그럴 의도가 조금도 없는데도 소년은 뇌리에서 행복감과 전능감이 샘솟는 것을 느꼈다.

그의 말은 사람의 자의식을 한없이 비대하게 만들었다. 자신이 대단한 사람임을 알게 되고, 믿게 되며. 다른 이들을 내려다보게 만든다.

그것은 전혀 다른 형태의 공포였다. 세 치 혀가 사람을 어디까지 기쁘게 만들 수 있는지, 치켜세울 수 있는지, 조종할 수 있는지.

소년은 장 태감의 밑바닥을 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어리숙하고 무식한 자신 따위가 감히 잴 수 없는 심연이었다.

나는 별 볼 일 없고, 무식하고, 나이만 처먹은 병신 새끼다. 그 사실을 잊지 말자. 소년은 혀끝을 깨물며 그 사실을 강하게 인식했다.

장 태감의 혀끝에 놀아나지 않도록. 통증을 삼키며 소년은 음울한 그림자가 드리운 미소를 지었다.

“과찬이십니다.”

“허허. 자넨 정말 탐나는 인재야.”

아직도 겸손함을 유지할 수 있다니. 그 음흉한 속내를 혀 밑으로 감추며 장 태감은 텀벙거리는 잉어들을 향해 모이 한 줌을 뿌렸다.

한 줌의 모이. 그것만으로도 잉어들은 치열하게 얽히며 몸부림친다. 고작 한 줌의 모이를 위해서.

“자네는 잉어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예?”

“참 치열하지 않은가. 모이를 먹기 위해서 애를 쓰는 꼴이.”

사실, 잉어나 우리나 별다를 바가 없어. 똑같은 처지지. 소년에게 모이 봉투를 건네받은 장 태감은 봉투를 뒤집어 모이를 모조리 쏟아버렸다.

수십 마리의 잉어들이 요동치자 흙탕물이 연못을 부옇게 물들였다.

그 꼴을 멍하니 내려다보는 소년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장 태감이 속삭였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자네는 잉어는 아닌 것 같아.”

자네는 이미 용일세. 장 태감의 확신에 찬 목소리를 들으며 소년은 소름이 척추를 타고 기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하하, 이런 비루한 꼴을 한 용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육신이란 허물은 자네의 흠이 되지 못하네. 자네는 이미 자네의 가치를 만천하에 증명하지 않았는가. 그렇기에 아쉬워. 여의주를 입에 물면 능히 날아오를 천상의 존재가 이렇게 지상에 매여 있다는 사실이.”

자네는 용인데도, 받는 대접은 연못의 잉어와 다를 바가 없군. 일그러진 입속에서 꺼내든 차가운 비수를 소년의 손에 쥐여주며 장 태감은 그가 찔러야 할 상대를 알려주었다.

“이번 일로, 태감께서 얼마나 큰 이득을 보았는지, 자네는 아나?”

“어느 정도는…… 알지요.”

“아니. 자네는 모를걸세. 만약 알고 있었다면, 지금 자네 처지에 만족할 수 없었을 테니까.”

알려주지 않으셨겠지. 의심암귀(疑心暗鬼)의 씨앗을 심는 장 태감의 얼굴은 상쾌할 정도로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기분 좋은 덕담을 해주듯이. 장 태감의 가는 손가락이 소년의 어깨를 두드렸다.

“사례 태감께서 얻으실 정치적 입지. 그리고 서역의 교역단과의 거래도 얻으실 막대한 재보. 그것이 얼마나 대단할지, 아직 어린 자네는 가늠이 되지 않을 거야. 그러니 자네가 어떤 대접을 받아야 할지도. 잘 모르겠지.”

그러니 자네보다 조금 더 오래 후궁 물을 먹은 이 늙은이가 자네의 가치를 알려주겠네. 장 태감은 엄숙한 표정으로 소년에게 후궁의 담장 너머를 가리켰다.

“용의 혀를 만족시킨 최고의 요리사라면, 그에 걸맞은 최고의 자리에 앉아야 하지 않겠는가.”

자네는 좀 더 융숭한 대접을 받아야 해. 자넨.

그럴 만한 가치가 있어.

만약 그가 스무 살의 청년이었다면 장 태감의 혀에 놀아나 춤을 췄을 것이다. 젊은 시절의 그는 야심가였고, 하늘 높은 줄을 모르는 건방진 놈이었으니까.

소년은 자신이 노쇠했음에 감사했다. 저런 제안에 심장이 두근거릴 만큼 젊지 않아서. 찬란한 미래에 대한 기대감조차 시들어버릴 만큼 늙어버려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소년은 세월에 찌들어버린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 같은 놈에겐 과분하신 말씀입니다.”

“허어, 자네는 정말로 욕심이 없군.”

“그저 멍청한 놈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완고한 소년의 태도가 탐탁지 않은 듯 혀를 차던 장 태감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발 뒤로 물러났다.

“자네의 충성은 정말 대단하군. 내가 졌네.”

“죄송합니다.”

“자네가 죄송할 게 뭐 있겠나.”

하지만 정 죄송하다면, 이 늙은이의 부탁 하나만 들어주겠나? 장 태감의 말에 소년은 목에 탁 걸리는 불편한 예감을 받았다.

소년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장 태감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호탕하게 소년의 어깨를 두드렸다.

“별것 아니니 표정 풀게나. 그저, 안양비 님께서 언제 한 번 얼굴 좀 보자 하시더군.”

“태감님.”

“자네는 똑똑한 친구이니, 무슨 뜻인지 알 거라 믿네.”

저 멀리서 성난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은 장 태감은 짓궂게 입꼬리를 올리며 소년의 어깨에서 손을 내렸다.

“한번 잘 생각해 보게나. 그리고, 사례 태감께 안부 좀 전해주겠나?”

“예, 전해드리지요.”

살펴 가십시오. 장 태감님.

장 태감이 바삐 자리를 피하는 것과 동시에 태감이 정자에 들이닥쳤다.

오랜만의 운동에 폐가 놀랐는지 씩씩거리며 숨을 몰아쉰 태감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 땀에 젖은 가면을 벗었다.

“장 태감은 갔나?”

“안부 전해달라 하시더군요.”

“안부는 무슨…….”

목덜미에 달라붙은 머리를 쓸어넘기며 숨을 몰아쉰 태감은 불안감이 깃든 눈동자로 소년을 보았다.

태감의 입에서 나올 피곤한 말들을 예상한 소년은 인상을 와락 찌푸리며 그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그가 무슨…….”

“일단 주방으로 가서 말합시다.”

다짜고짜 주방까지 태감을 끌고 간 소년은 그가 엉거주춤하게 자리에 앉는 동안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풍로의 바람에 불이 기세 좋게 타오르기 시작하자 화구에 철과를 얹은 소년은 그제야 태감에게 의견을 물었다.

“볶음밥 먹을 겁니까?”

“나야 좋다만…….”

“저번에 만든 돼지기름을 슬슬 다 써야 할 때라서…… 계란은 몇 개 먹을 건데요.”

“어? 음…… 네 개?”

파와 마늘의 향기가 고소한 돼지기름 냄새를 타고 물씬 피어오르고, 불꽃을 휘감은 찬밥이 노릇하게 익으며 금세 짭조름하고 고소한 볶음밥 한 접시가 완성되었다.

넉넉한 기름에 튀기듯이 지져낸 계란후라이 네 개가 올라간 볶음밥은 잠시지만 근심을 잊게 할 정도로 먹음직스러웠다.

불에 그을린 간장의 구수함과 돼지기름의 달콤한 향기가 자아내는 합주에 취한 태감은 홀린 듯이 숟가락을 들어 올렸다. 숟가락이 가장 먼저 파고든 것은 주황색 선명한 노른자였다.

숟가락이 파고든 순간 반숙으로 익은 노른자가 볶음밥 위로 흘러내렸다. 마치 황금빛 태양이 깨져 그 속의 액체가 흘러나오는 듯한 광경에 태감은 전율했다.

사 인분 분량의 볶음밥이 사라지는데 걸린 시간은 그야말로 찰나였다. 태감의 공복이 해소되고 예민하진 신경이 누그러지자 소년은 천천히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뭐. 이미 예상은 하셨겠지요. 별 영양가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장 태감이 그에게 약속한 풍요로운 미래를 생각하며 소년은 코웃음 쳤다. 그가 태감에게 바친 충성을 바친 이유는 물질적인 보상을 원해서가 아니었다.

그가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한 이유는.

차갑게 가라앉은 소년의 눈동자가 희번덕거리며 빛났다. 얇은 입술이 길게 찢어지는 흉측한 미소를 입에 건 소년은 담대한 제안을 꺼내놓았다.

“안양비께서. 저를 청하시더군요.”

기회 아니겠습니까.

소년이 품속에서 비수를 꺼내 탁자 위에 내려찍었다. 혈옥비수. 황실의 비고에 잠들어 있던 상고시대의 보물. 그 핏빛의 비수만큼이나 소년의 눈 또한 피를 갈구하고 있었다.

“놓치기 아까운 기회입니다. 태감님.”

제가 안양비를 암살하겠습니다. 소년은 송곳니를 드러내며 사나운 말을 토해냈다.

하지만 그 말에는 숨길 수 없는 피로감이 찌들어 있었다.

“안양비 님께 간신히 한 번, 승리를 거뒀습니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안양비 님께는 손실이, 저희에게는 이득이 된 유의미한 승리는 이번 한 번뿐이지요.”

이 한 판의 승리를 따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인력을 투자해야 했습니까. 지불해야 했던 예산은 또 어떻고요. 소년의 억지스러운 주장에 태감은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네 목숨값에 비하면 싼 것이다.”

“제 목숨값을 비싸게 차주신 것은 늘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태감님. 안양비 님과 독대할 기회입니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그리고 가장 빠르고 즉각적인 효과를 볼 수 있는. 한 번뿐인 기회 말입니다.”

소년은 한탄하듯이 말하며 품 안에서 패를 꺼내 들었다. 참주패. 그 어떤 죄라도 사면받을 수 있다고 황제에게 약속받은 신패를 꺼내든 소년은 억눌렀던 지친 숨을 토해내었다.

그런 소년을 보는 태감의 시선은 기이한 것이었다. 마치, 소년이 빠뜨린 무언가를 지적하고 싶다는 듯이. 한참을 망설인 끝에 태감은 신중하게 말을 입에 담았다.

“저번에 분명, 안양비를 한번 보고 오지 않았느냐?”

“한번 뵙기는 했지요?”

“근데,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느냐?”

“예?”

안양비가 숨긴 것인가? 하긴, 상대를 얕잡아 보더라도 가진 것의 반은 숨기는 음흉한 자이니, 일부러 감추었겠지.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던 태감은 소년을 보며 코웃음 쳤다.

“장담하건대, 네가 지척에서 비수를 뽑아 든다 한들 안양비에게는 손끝 하나 대지 못할 거다. 내 말이 믿기지 않거든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 보아라.”

네가 장소나 이삼쯤 되는 실력자라면 모를까. 지금으로서는 어림도 없지. 태감의 호언장담에 소년은 의문을 느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만난다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소년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태감은 피로에 젖은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물었다.

“지쳤느냐.”

“예?”

“그리하여 그런 생각을 한 것이냐. 안양비를 암살하겠다고. 그리하여 너의 책임을 다하겠다고. 그리 생각했느냐?.”

그리하여 모든 것을 끝내고 싶다고. 그리 생각한 것이냐.

태감은 소년의 진짜 나이를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쳤을 것이다. 지칠 수밖에. 사실은 누구보다도 노쇠했을 나이에 칼날 위를 뛰고 구르며 싸워왔으니. 눈앞의 달콤한 결과에 취하여 그를 배려하지 못한 자신의 우둔함을 한탄하며 태감은 고개를 숙였다.

그것이 아무런 위로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의미한 사과일지라도 태감은 그에게 고개를 숙이고 싶었다.

“거참…….”

고개를 숙이는 태감의 앞에서 난감함을 느끼며 소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안양비를 암살하고자 한 이유는. 그렇게 해서라도 태감에게 승리를 안겨주고 싶었던 이유는 그것이 아니었다.

태감에게는 털어놓지 못한 이유를 가슴속에 묻으며 소년은 태감의 손을 잡았다. 자신의 굳은살 박인 투박한 손과는 다른, 따뜻하고 보드라운 그의 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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