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144화
소년은 떨리는 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폐부에서 신음성이 빠져나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들의 입에서 오가는 이야기는 이 시대를 아득하게 초월한 것이었다.
그것은 결코 허황된 공상에서 비롯된 미래에 대한 기대감 따위가 아니었다.
보다 진보한 세계를 살아왔기에, 그들이 밟아나갈 미래를 앞서 경험했기에 소년은 그녀들의 사상에서 아득한 전율을 맛보았다.
인류의 전쟁은, 곧 원거리 투사 병기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돌에서 창, 활. 석궁. 그리고 총으로 이어지는 차가운 계보.
비록 아직은 연노를 대체할 ‘무언가’에 불과한 탁상공론이지만. 소년은 그 대화의 끝자락에 있을 물건이 무엇인지를 눈치챌 수 있었다.
“이미 제국군에서는 화약 병기를 운용하고 있지요. 바로 대포입니다.”
“하지만 대포는 지나칠 만큼 크고, 무거워요. 충분한 시간과 인력을 투자할 수 있는 공성전 같은 경우를 제외하면…….”
“그렇다면 대포의 소형화, 경량화를 통해 운용의 편의성을 개선한다면?”
“대포를 예로 들자면, 장전 시간과 발생하는 폭음 등을 고려해야 하겠지요.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궁병, 연노병과는 다른 방식으로 병대를 운용해야만 할 거예요.”
그녀들은 단순히 새로운 무기의 개발만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아무리 강력하고 파괴적인 병기라 할지라도 결국 그것을 운용하는 것은 사람.
병사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전략과 전술의 영역까지 확장된 그녀들의 토론을 지켜보며 소년은 심장이 터질 듯이 맥동하는 것을 느꼈다.
‘전쟁의 핏물과 진흙탕을 모르는 이 후궁에서. 이분들은 도대체 어디까지 내다보시는 건가.’
한 걸음 더. 이 제국을, 이 세계를. 이 시대를 앞서나가는 듯한 둘을 사이에 두고 소년의 가슴 속에 파고든 막연한 공포심이 확신에 찬 공포심으로 변화하는 것을 느꼈다.
어린아이가 손가락 한번을 까딱하여 건장한 병사를 죽일 수 있는 마법과 같은 병기.
그녀들의 이야기는 단순히 무기의 개발만을 넘어선 것이었다. 변화할 전쟁, 변화할 시대에 대한 예측이 두 여인의 입속에 담겨 있었다.
하지만.
현장을 모르는, 어디까지나 예측으로만 이루어진 두 사람의 가설에는 허점이 있었다. 그것은 기술의 문제였다.
“실례합니다만, 우선은 두 분께 현 제국군이 운용하는 대포의 불량률에 대하여 말씀드리고 싶군요.”
소년의 솔직한 진언에 부여비와 홍엽비는 귀를 쫑긋 세우고 소년의 말을 기다렸다.
그 과도한 관심과 열기 속에서 소년은 자신의 깃털보다 가벼운 입술과 건방진 혀를 원망해야 했다.
나이를 먹어도 고쳐지지 않는 오지랖과 신중하지 못한 성격은 고약한 질병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미 말을 꺼낸 이상, 책임을 져야 하는 법. 소년은 입술을 열었다.
“제국의 제철기술은 주변국 사이에서도 압도적인 수준입니다만, 그런데도 대포의 불량률은 무시하지 못할 수준입니다. 두꺼운 통짜 쇠로 되어 있는 대포의 몸통도 화약의 파괴력을 감당하지 못하는데, 그렇게 경량, 소형화한 병기가 화약의 힘을 감당할 만큼의 내구도를 가질 수 있을까요?”
홍엽비는 한 대 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이 아무리 뛰어나고 미래적인 생각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구현할 수 없는 기술이 없다면 결국은 무의미한 망상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부여비는 승복하지 못한 듯 손을 번쩍 들었다.
“제국에는 이름난 명장들이 많이 계시잖아요? 그분들이라면.”
“그런 명장은 극소수지요. 과연 그 소수의 명장 개개인이 만들어낼 수 있는 병기는 몇 명의 병사들을 무장시킬 수 있을까요? 설마 그 명장분들께서 아낌없이 자신의 기술을 전수하실 거라 믿으시는 건 아니시겠지요?”
기술은 비인부전(非人不傳)인 법이다. 결국, 부여비마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자 소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래. 기술의 발전이란 그렇게 급작스럽게 일어날 수 없는 것이지. 수천, 수만 명의 기술자, 과학자, 발명가들의 피와 땀 위에 세워진 것. 그것이 문명이고 기술이며 미래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녀들은 소년이 아무렇게 흘린 말 속에서 그녀들에게 필요한 것을 조합해냈다.
“그래요. 군대란 곳 물량. 한 자루의 명검보다 백 자루의 일반 검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지요. 지방팔군과 금군의 규모를 생각한다면, 병기의 양산화가 가능해야 할 텐데.”
“양산화라, 그렇다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장인들의 공동, 협업 체제를 이룬다면…….”
“그럼 우선은 황제 폐하께 인허가를 받아야 할 텐데.”
그녀들의 진취적인 행동력은 소년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 어떠한 것도 자기 뜻대로 이룰 수 없는,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없는 두 사람은 자신들의 힘으로 세상을 바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소년은 자신의 팔에 오소소 돋은 소름을 쓸어넘기며,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목격해야만 했다.
굶주린 짐승에게 피 맛을 보여줘 버린, 우리 안의 맹수의 고삐를 풀어줘 버린 부주의의 실수. 소년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동시에 도망쳐야 한다는 충동을 느꼈다.
아, 이곳은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구나, 아니, 있어서는 안 될 곳이구나.
소년은 인사조차 제대로 올리지 못하고 서난궁을 떠났다. 그 자리에 계속 서 있다면 자신도 모르게 말하지 말아야 할 지식을 풀어놓을 것만 같았다.
그래, 아무리 황후 후보자라 한들 결국은 궁에 매인 몸. 무슨 힘이 있겠어. 소년은 필사적으로 자신의 양심과 이성을 속이려 했다.
하지만 소년의 마음 한구석에선 어쩔 수 없는 체념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녀들은 세상을 바꿀 것이다.
비참하고, 인간을 더욱더 효율적으로 소모할 수 있는 형태로. 그녀들의 천진난만한 발상에서 시작될 시대의 모습을 소년은 알고 있었다.
창과 칼의 전쟁과는 사상자의 머릿수부터가 다른 납과 화약의 전쟁.
소년은 자신이 그 무시무시한 전쟁을, 무시무시한 세계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두려웠다.
서난궁에 내려앉은 기이한 공기를 벗어나자 소년은 차가운 후궁의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치밀어 오르는 독기와 피비린내. 후궁의 공기. 그가 있어야 할 땅. 그 살벌함을 피부로 느끼며 소년은 마음이 놓이는 것을 느꼈다.
“어휴, 살다 살다 여기서 마음 편하다고 느끼는 날이 오다니. 나도 갈 데까지 갔구나.”
“오운 님…….”
뒤따라온 장소와 이삼의 머리에 손을 올리며, 그 부슬부슬한 머리카락의 감촉을 느끼며 소년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어떻게든 되겠지.”
배가 고프다. 자신의 배를 쓸어 만진 소년은 장소와 이삼을 들어보며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오랜만에, 볶음밥이나 해 먹을까.”
볶음밥. 대중적인 중국집부터 고급스러운 중화 레스토랑까지, 그 어떤 주방에서도 빠지지 않는 주방의 친구.
손님들에게도, 주방 식구들의 점심 식사로도. 볶음밥은 요리사에게 가장 먼저 익숙해져야만 하는 요리였다.
준비하는 재료는 변변치 않은 것이었다. 파와 마늘, 거기에 다진 돼지고기, 계란. 간결함이라는 단어를 넘어 청빈함 마저 느껴지는 재료였지만 장소와 이삼은 기대감에 부풀어 오른 얼굴로 소년을 보았다.
“원래 볶음밥은 식물성 기름으로 볶는 것이 원칙이다만…… 오늘처럼 우울한 날에는 극약처방이 필요하지.”
소년이 대답하게 꺼내 든 것은 악마의 씨앗. 건강의 파멸자. 현대 의학의 악몽이라 불리는.
돼지기름이었다.
돼지의 배와 등 쪽에서 두툼하게 썰어낸 기름은 굵직하게 썰어 소량의 뜨거운 물에 삶는다.
“이렇게 끓이다 보면 물은 증발하고 기름만 남게 된단다.”
기름을 끓이다 보면 힘줄 같은 고기 찌꺼기가 바싹하게 튀겨지는데 이게 또 별미였다.
기름은 쓸 만큼 적당하게 덜어낸 다음, 철과에 돼지기름을 넉넉하게 두르고. 본격적으로 요리가 시작되었다.
불꽃을 토하는 화구 위에서 철과가 달아오른다. 돼지기름에 바삭하게 튀겨지는 마늘과 파. 기름에 그 향이 충분하게 배어 나오면 새끼손톱만 한 크기로 다진 돼지고기를 넣는다.
화르르륵 치솟는 불길 속에서 소년이 철과를 돌리기 시작했다. 우아한 포물선을 그리는 돼지고기, 향긋하게 그을린 파와 마늘의 향기.
소년이 손짓하자 대기하고 있던 이삼이 소년의 철과로 찬밥 덩어리를 던져넣었다.
그 순간. 불기둥이 치솟으며 소년의 좌완에서 근육이 솟아올랐다. 찬밥 알갱이가 기름에 코팅되며 한 알 한 알 풀어지기 시작했다.
맹포한 기세로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구수하게 익어가는 밥알, 치명적이기 그지없는 돼지기름의 고소한 향기.
그것은 실로 미치광이나 할법한 짓이었다. 돼지기름으로 볶음밥을 만든다.
이 얼마나 잔인무도하고, 파멸적이며. 유혹적인가. 의사와 영양사들의 비명을 지르밟으며 소년의 국자가 양념 통에서 간장을 조금 떠올렸다.
고추를 우려낸 매운 간장. 랄장유(辣醬油)가 달아오른 철과의 주변으로 흘러내린다.
간장이 열기에 그을리는 향기. 그 향기에 취한 이삼은 자신의 입가에서 침방울이 떨어지는 것조차 잊고 그 향기의 잔향에 영혼을 맡겼다.
“자, 그릇 좀 가져오렴.”
천상의 음률과도 같은 목소리와 함께 지상에 악마의 산물이 떨어졌다. 반지르르하게 윤기가 도는 확정된 타락의 미래.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장소와 이삼은 기꺼이 숟가락을 나눴다.
* * *
옥린비 살해.
그에 대한 안양비의 처벌은 근신 일주일이 전부였다.
당시 상황상 안양비의 행동은 자신의 신병을 보호하기 위한 정당방위였음이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근신 일주일. 사람의 목숨값으로는 터무니없을 만큼 값싼 대가였다.
그 무료한 시간 동안 안양비는 오랜만에 찾아온 휴일을 느긋하게 만끽했다. 주로, 연무장에서.
연무장 위로 부스러진 돌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억겁의 세월 동안 바람과 비의 시간을 견뎌온 자존심 높은 바위가 인간의 손에 무너지고 있었다.
오직, 인간의 손만으로.
안양비의 다섯 손가락이 바위의 표면을 긁어 내렸다. 다섯 줄기의 고랑이 파인다.
조금씩, 천천히. 사람의 손이 바위를 깎았다.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돌가루가 쏟아졌다.
손톱이 닳아버린 그녀의 손은 마치 맹수와 같았다. 투박하고, 일그러진. 싸우는 자의 손. 강인한 손끝이 바위를 부스러뜨린다. 그녀는 오직 맨손으로 조각을 만들고 있었다.
“모양은 잡았군.”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안양비는 팔을 등 뒤로 크게 젖혀 근육을 이완시켰다.
땀에 젖은 무복 아래로 근육이 약동했다. 비상하는 매와도 같은 광배근. 대나무처럼 탄탄한 척주기립근과 야수와 같은 승모근. 가죽 채찍처럼 조여진 복근.
태어날 때부터 강자로 선택받은, 먹이사슬의 정점에 선 맹수와 같은 근육이었다.
땀을 훔친 안양비는 천천히 자신의 두 엄지를 들어 올렸다.
형태를 잡았으니, 이제 정교하게 표현할 시간이다. 우수수 떨어지는 돌가루와 함께 그녀의 땀방울이 연무장의 바닥을 적셨다.
굳은 엄지가 조각상에 눈을 새겨넣었다. 까드득, 까드득 소리를 내며 바위는 점점 작품이 된다.
분노로 일그러진 삼면(三面)과 주먹을 그러쥔 육비(六臂). 그녀가 조각하는 것은 거대한 아수라상이었다. 그녀의 손끝이 바위를 파고들 때마다 분노한 투신은 모습을 드러냈다.
수라에 분노를 담으며, 안양비는 자신의 마음이 차갑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정신적 고요였다.
파문이 번지지 않는 수면처럼, 한없는 정적이 내려앉은 내면에 그녀는 질문이라는 돌을 던졌다.
“살불살조(殺佛殺祖)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스승을 만나면 스승을 죽여라. 그리고 안양비는 지금 수라를 보고 있었다.
뜨거운 피와 시체를 밟고 올라서야 하는 수라의 길. 정적의 죽음과 쓰러진 부하들의 시체의 무게를 버겁다 여기지 않았고 그 핏값이 두렵다고 생각한 적 없었다.
그것이 후궁이고, 그것이 자신의 길이라는 것을 믿었기에, 그녀의 길은 늘 수라의 길이었다.
차갑고 잔혹한 것만을 주고, 받아야 하는 길.
그렇기에 처음으로 느낀 뜨거운 연민과 후회는, 그녀의 가슴을 거세게 진탕 시켰다.
옥린비.
그녀의 빛나는 가능성을 꺾으며 안양비는 태어나 처음으로 후회의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그날 번진 마음의 파문을 일주일이 지난 지금도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남아 그녀의 심장을 옥죄었다.
수라를 올려다보며 그녀는 입술을 비집어 열었다.
“나약해졌는가.”
안양비는 자기 자신의 치부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독기가 흐려졌구나. 날을 세운 칼이 무뎌져 버렸구나.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까. 안양비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렇다면. 나약함을 버려야만 하는가.
끊을 수 없는 번민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던 안양비는 자신이 깎은 아수라상을 들여다보았다.
수라를 보았다면, 수라를 죽여라.
그 순간. 벼락과도 같은 수도(手刀)가 아수라상을 내려찍었다. 뼈와 살점으로 이루어진 손날이 바위를 찍어 갈랐다.
굉음을 일으키며 두 조각으로 갈라지는 조각상을 내려다보며 안양비는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난 나약함을 몰랐기에 사람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그녀를 품에 안지 못했지. 나는 차갑고 냉혈한 강인함만을 추구했기에, 내가 부리는 이들의 나약함과 온기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나약함 또한 사람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긍정하지 못했지.
“사람 위에 서는 자. 사람을 알아야지요. 사람을 모르는 자가 어찌 사람을 다스리겠습니까.”
먼 곳에서 늙은이의 목소리가 들여왔다. 웃음기가 배어 있는 그 목소리는 조롱과도 같았지만, 그 속에는 놀라울 만큼 뜨거운 환희가 깃들어 있었다.
자신의 심복을 돌아보며 안양비는 그의 말에 공감했다.
“그래. 사람 위에 서려면, 우선은 사람의 나약함을 배워야겠지.”
일주일 만이군. 장 태감.
그녀의 말에 장 태감은 입꼬리를 가늘게 올리며 가져온 것을 꺼내놓았다.
“일주일 만입니다. 안양비 님. 근신이 풀린 기념으로 떡을 가져왔는데, 좀 드시지요.”
“설기 떡인가? 내가 뭐 옥살이를 한 것도 아니고…….”
“허허, 이럴 때가 아니면 하얀 백설기를 또 언제 먹겠습니까?”
“이왕 떡을 가져올 거면 좀 맛있는 떡을 가져오지 그랬나.”
그래. 오랜만에 아주 맛있는 떡이 먹고 싶구만. 안양비의 의뭉스러운 말에 장 태감은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떡을 아주 잘 만드는 친구를 하나 알고 있지요.”
“그 친구에게 말 좀 전해주게.”
저번엔 깜빡 속아 넘어갔지만, 이번엔 진솔한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하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