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143화
옥린비는 태감과 소년에게 자신의 시녀를 부탁했다. 그토록 독하고 자존심 강했던 그녀가, 최후의 순간 고개를 숙인 이유. 소년은 그녀를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악랄하고 탐욕스러웠던, 권력 지향적인 여인이 자존심을 꺾어서라도 미래를 열어주고자 한 사람. 과연 그녀는 옥린비를 위해 울어주었을까.
자신을 위해 고개 숙인 주인을, 그녀는 기억해 주었을까.
그 희미한 의문을 품은 채 봉렴을 만난 소년은 담담하고 건조한 태도로 그를 맞이하는 그녀의 태도에 거북함을 느꼈다.
그녀의 태도는 지나칠 정도로 차분하여 마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옥린비 님의 시녀였던 봉렴이라고 합니다.”
“직접 뵙는 것은 처음이군요. 말씀은 들었습니다만…….”
그녀는 울지 않았다. 옥린비의 마지막을 떠올리며 오열하지 않았고, 그녀와의 즐거웠던 추억을 떠올리며 한탄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그리고 격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타오르는 증오를 들여다보며 소년은 그녀가 자신의 증오를 유지하기 위해 지불해야 했던 대가를 알 수 있었다.
슬픔과 비탄, 눈물 한 방울까지. 그녀는 모든 것을 내놓았다.
그녀의 차가운 결의는 소년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소년은 가만히 찻잔을 들어 올렸다. 차는 어느새 미지근하게 식어있었다. 소년이 차를 입안에 머금은 채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봉렴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침묵의 재촉을 받으며 소년은 입술을 열었다.
“옥린비께서, 당신을 부탁하셨습니다.”
“예.”
“원하시는 게 있습니까?”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지 말씀해 보십시오. 소년은 조건 없는 수용을 약속하며 두 팔을 벌렸다. 그들은 그녀를 위해 많은 것을 내어줄 수 있었다.
새 출발 할 수 있는 새로운 신분. 두 팔로 다 끌어안을 수 없을 만큼의 어마어마한 황금.
수많은 소작인을 거느릴 수 있는 광대하고 풍요로운 토지. 소년은 마치 꿈과도 같은 이야기를 약속했다.
“원하신다면 경사를 떠나셔도 좋습니다. 새로운 땅에서, 모든 것을 잊고 살아가는 것 또한 나쁘지 않겠지요. 부족함 없이 지원해 드릴 것을 약속드리지요.”
“모든 것을 잊고, 말입니까?”
“예.”
더는 남의 피를 볼 필요도, 고통받을 필요도 없이. 좋은 사람과 좋은 곳에서, 눈앞의 행복만을 보며 사십시오. 아무것도 걱정할 것 없는 곳에서.
당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소년의 이야기를 듣던 봉렴은 생기 없는 눈을 들어 소년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엄청난 행운을 약속받은 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마치 그 제안은 자신과는 아무 연과도 없다는 것처럼. 봉렴은 메마른 입을 열어 소년에게 물었다.
“옥린비 님께서, 그것을 원하셨습니까?”
소년은 그 어떤 대답도 그녀를 만족시킬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렇다고 입을 다물 수는 없었기에 소년은 궁색한 대답을 꺼냈다.
“예. 옥린비 님께선 오직 당신의 행복을…….”
원하셨습니다.
소년은 말꼬리를 흐리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런 무의미한 말로는 그녀의 완고한 각오를 꺾을 수 없을 것이다.
입술을 깨문 소년은 자신조차 납득시킬 수 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옥린비께선, 복수를 원치 않으실 겁니다.”
소년은 자신의 말이 공허한 울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죽은 자의 바람이 어떻단 말인가. 복수는 죽은 자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니었다. 복수는.
“복수는 오직, 산자를 위한 것이죠.”
봉렴은 가만히 입꼬리 끝을 살짝 올렸다. 그녀의 미소는 마치 어슴푸레한 달무리처럼 덧없이 빛나고는 스러졌다.
그것이 생의 마지막 미소였던 것처럼, 표정을 굳힌 봉렴은 자리에서 일어나 소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무엇이든 도와주시겠다고 하셨지요.”
그렇다면 도와주십시오. 복수할 수 있도록. 제 원한을 값을 수 있도록.
그녀의 목소리에는 끓어오르는 증오와 비통한 애원이 담겨 있었다. 자신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단 하나의 목표만을 향하게 된 이들. 소년은 그녀에게서 위정의 모습을 보았다.
자기 자신을 바쳐야만 이룰 수 있는 숙원에 집착하게 된 이들. 소년은 그 비극적인 운명을 향해 뛰어들려 하는 그녀를 그냥 놓아줄 수 없었다.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소년의 목소리는 단말마처럼 희미하게 들렸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조금만 눈 돌리고, 외면하고. 참으면. 달콤한 일상 속에서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을 텐데. 굳이 가시밭길을 밟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외면하고 살아도 괜찮지 않습니까.”
“오상호 님.”
“평생 웃지 못할 겁니다.”
소년의 마지막 말은 마치 유치한 분풀이와도 같이 들렸다. 그 속에 스며든 염려의 감정을 느꼈기에 봉렴은 그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녀는 더욱더 깊게 머리를 숙였다. 이마로 전해지는 차가운 감촉을 느끼며 그녀는 다시 한번 간곡히 부탁했다.
“평생 웃을 수 없더라도 좋습니다. 복수를 완수하는 날 제 목숨이 끊어져도 좋습니다.”
옥린비 님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직 저 자신만을 위한 복수입니다.
도와주십시오.
소년은 더 이상 침묵을 지킬 수 없었다. 그의 손짓에 따라 장소와 이삼이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들에게선 평소의 상냥함을 찾을 수 없었다.
엄숙한 표정으로 소년의 등 뒤를 지키는 그들은 사례 태감의 호위무사였으며.
동창의 요원이었다.
장소와 이삼을 따라 서서히 방 안의 어둠 속에서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염집의 아낙네, 돼지를 잡고 있었던 백정, 국수를 팔던 국수 장수, 장돌뱅이, 텃밭을 일구던 노파, 대장장이, 약초꾼. 사람들 속에 숨은 황실의 눈과 귀. 동창의 요원들은 깎아낸 듯한 무표정으로 봉렴을 굽어보았다.
그 차가운 무리 속에서 소년은 봉렴을 향해 다가왔다. 절뚝거리는 왼 다리를 질질 끌며 봉렴의 앞에 선 소년은 굳은살 박인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잡고 일으켜 세웠다.
“마지막으로 번복할 기회를 주겠다.”
소년의 핏발선 눈동자는 그녀에게 포기를 종용했다. 그 새카만 눈동자는 그녀의 심장에서 말라붙은 줄 알았던 공포심이란 감정을 끄집어냈다. 만약 이곳에서 포기하더라도, 그녀를 매도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옥린비 님도, 분명 그것을 바라실 것이다. 공포심에 흔들린 뇌리에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봉렴은 자기 자신을 향한 분노가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냉혈한 무리의 시선을 받으며 봉렴은 천천히, 소년에게 고개를 숙였다.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소년은 한숨과 함께 손을 내밀었다.
* * *
여름꽃처럼 풍성하고 화려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가을의 꽃은 그들만의 단아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으로 서난궁의 정원을 가득 채워주었다.
국화에 자주쓴풀. 부용과 분꽃. 꽃향유와 방울꽃과 해국 등 아담한 크기의 꽃들로 채워진 정원은 흐르는 시간을 부드럽고 달콤하게 만들어주었다.
손끝으로 꽃망울을 스치며 한없이 산책만 해도 좋으리라.
난화비가 기다리고 있을 화원으로 걸어가는 그 짧은 시간은 소년의 경직된 심장에 잠시 여유를 되찾아 주었다.
한숨지을 만큼 아름다운 풍경은 소년의 발걸음을 자꾸만 느리게 했다.
‘연좌궁의 정원도 아담하니 나쁘지 않지만, 사방궁의 정원은 정말 일품이란 말이야.’
다음 생에는 정원사를 꿈꿔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또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코끝으로 스치고 지나가는 꽃향기의 잔향에 취한 소년은 멀리서 난화비가 손 흔드는 모습이 보이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난화비 한 명만이 아니었다. 각자의 궁에 있어야 할 부여비와 홍엽비가 두꺼운 서적과 죽간을 든 채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그녀들의 기세에 압도당한 소년은 인사조차 올리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어야 했다.
“잠시, 자리를 옮길까요?”
“예? 아. 예. 그러시죠.”
난처한 듯 뺨에 손을 얹은 난화비는 잠시 자리를 피해 정원의 더 깊숙한 곳에 마련된 은밀하고 조용한 장소로 소년을 이끌었다.
“허허, 두 분께서 친분이 두터우신 것을 보니 가슴이 든든하군요.”
“후후, 그러게요. 저도 덕분에 심심하지 않은 나날을 보내고 있답니다.”
홍엽비 님도 많이 밝아지셨죠? 따사로운 오후는 한가한 사담을 나누기에 가장 좋은 시간대였다. 하지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차와 과자를 즐기기 위해선 거북한 공적인 문제를 먼저 끝내야 했다.
소년이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난화비는 천천히, 감사의 의도가 분명히 드러나도록 고개를 숙였다.
“우선은, 감사를 드리고 싶어요.”
“난화비 님.”
“덕분에 저희 상단이 큰 이득을 볼 수 있었습니다.”
금화 상단의 파멸로 이득을 챙긴 것은 표가 상단뿐만이 아니었다. 사전에 언질을 받을 수 있었던 난화비의 상단 또한 초기에 자본을 투자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고 그 대가로 경사의 노른자위 땅과 건물을 상당수 확보할 수 있었다.
경사와 거리가 먼 복건성에 자리 잡은 상단으로서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만큼의 호재였다.
“하지만 감사 인사 한마디로 입을 씻으려 한다면, 세인들에게 배은망덕하다 욕을 먹겠지요?”
“저런. 다른 분도 아니고 난화비 님께 감사 인사를 들었는데, 더한 것을 바란다면 제가 탐욕스럽다 백안시될 겁니다.”
이미 충분히 배가 부릅니다.
소년이 배를 두드리며 웃자 난화비는 곤란한 듯 간곡하게 되물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제 마음 또한 편치 않아요. 부디 원하시는 것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겠어요?”
“허…… 조금 천천히, 시간을 두고 고민해 봐도 괜찮겠습니까?”
“그럼요. 얼마든지요. 평소 원하시던 물건이나 필요하신 게 있다면 얼마든지 말씀해 주세요.”
소년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윗사람에게 가지고 싶은 선물을 말하라니, 상상만 해도 심장이 오그라들 만큼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소년은 피로에 찌든 중간관리직의 얼굴로 난화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두 눈동자는 의욕과 호의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이런 부분은 아직 소녀 시구만. 물이 덜 들었어.’
아니, 오히려 물이 너무 들었기 때문인가.
후궁은 남에게 악의를 전하는 것에 익숙해지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한시도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추악하고 살벌한 세계는 사람의 정신은 악랄하고 비정한 것으로 바꿔놓는다.
그렇기 때문에, 후궁의 사람들은 남에게 선의를 전하는 것이 낯설었다.
선물 받은 과자에 독이 들어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별것 아닌 도움에 빛을 지우려는 수작이 아닌지 경계한다.
순수한 호의를 믿지 못하게 되고, 스스로를 기만하는 법을 깨우친 이들에게 남는 것은 적과 나만이 존재하는 파멸적인 이분법의 세계였다.
‘그러니 난화비 님도, 선물을 준다는 것에 정신이 팔려 윗사람이라는 위치를 고려하지 못하신 게지.’
참담함에 씁쓸해진 입안으로 차를 흘려 넣으며 소년은 한껏 꾸며낸 미소를 지었다.
매부리코 아래로 가늘게 휘어진 입술이 괴기스러움을 자아내자 난화비는 순간 등허리 쪽을 기어오르는 한기를 느꼈다.
“가을도 어느새 중반을 넘었군요.”
“네? 네. 그렇네요. 이제 곧 겨울이 오겠어요.”
“가을에는 참 많은 행사가 있지요.”
머지않아 찾아올 사절단. 그리고 겨울의 문턱에 있는 제국의 명절. 황실이 들썩이는 큰 행사를 이야기하는 소년의 목소리는 낮고 음산했다. 마치 당장이라도 피를 부를 듯한 소년의 말에 난화비는 마음을 다잡고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정도, 파벌의 비 분들과 친목을 도모해야 할 필요가 있겠지요?”
“네, 안 그래도 한번 다과회를 열 생각이었어요.”
“마침 잘 되었군요. 이번에 새로 재미있는 과자를 개발해 보았는데…… 한번 시식해 주시겠습니까?”
소년은 마치 달콤한 독약을 권하듯이 과자를 권했다. 그런 소년의 표정에 난화비는 긴장된 표정으로 신중하게 과자를 집어 들었다.
정 사각형에 짙은 갈색. 겉으로는 달콤한 향기만 날 뿐 특정할 만한 위험성은 느껴지지 않았다.
“후후, 도톰한 것을 보니, 안에 속이 들어간 과자인가요?”
“깜짝 놀라실 겁니다.”
“어머나, 기대되는걸요?”
과연 어떤 속이 들어있을까. 팥소? 아니면 견과류? 아니면 달게 조린 호박일지도. 두근거리는 마음을 품고 난화비는 과자를 베어 물었다.
바삭하게 부스러지는 겉 부분과 그 속으로 느껴지는 쫀득함. 혀끝으로 퍼지는 유려한 신맛과 절제된 단맛에 난화비는 탄성을 질렀다.
그것은 무더운 그녀의 고향에서 즐겼던 과일의 맛이었다.
“봉리(鳳梨)! 봉리과(鳳梨果)를 달게 조렸군요?”
“예, 봉리수(鳳梨樹)라 하옵니다.”
봉리수. 중국어 발음으로는 펑리수라 부르는 대만의 명물은 공항 면세점에 들르면 가장 먼저 고르게 되는 대만 여행의 필수 기념품이었다.
너무 달지 않으면서도 상큼한 파인애플의 풍미와 파삭한 과자의 만남. 그 조합은 실로 악마적이었다.
‘지금까지 막심에서 제공하는 과자들은 전부 기름진 것들이었지. 이제 변화를 꾀할 때가 되었다.’
정신없이 두 번째 봉리수로 손을 옮기는 난화비를 보며 소년은 성공을 확신했다. 방금 만든 바삭바삭하고 따끈한 봉리수. 이 달콤한 마약을 누가 거부할 수 있으랴.
“그럼 부여비 님과 홍엽비 님께도 의견을 여쭤볼까요?”
“분명 좋아하실 거에요!”
살랑거리는 가을바람에 달콤한 과자와 따스한 차. 이보다 더 즐거운 시간이 또 어디 있으랴.
남은 시간은 일의 부담감을 잊고 여유롭게 보내려 했던 소년은 열렬한 학술적 토론을 넘어 거의 난투에 가까운 논쟁을 벌이고 있는 둘을 보며 식욕이 휘발되는 것을 느꼈다.
분명 문명적으로 우월한 세계에서 온 것은 자신일 텐데, 둘의 대화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순전히 내가 멍청하기 때문인 걸까?
둘의 지나치게 전문적인 대화는 소년의 머리에 격렬한 거부반응을 일어나게 했다. 역시, 그는 공부한 팔자는 아닌 모양이었다.
“마침 잘 오셨어요. 오상호 님! 상호 님의 의견도 꼭 듣고 싶어요!”
“예? 저…… 저 말입니까?”
아이고, 저 같은 무지렁뱅이가 무슨…….
떨떠름한 웃음을 지으며 둘의 대화에 참여한 소년은 이내 막막한 공포심이 자신의 심장에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아득히 먼 미래를 보는 천재를 목도한 범인의 두려움. 둘의 대화에서 소년은 그것을 느꼈다.
두 천재의 대화 주제는, 제국군의 주력 투사 병기를 대체할 화약 병기 개발의 필요성에 관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