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140화
사지를 쥐어짜는 듯한 찌뿌둥함과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 그 익숙한 징조가 찾아왔음을 느끼며 소년은 한숨과 함께 기상했다.
“염병할, 어제 꿈자리가 사납더라니.”
축축한 이불을 걷어찬 후 침대에 걸터앉은 소년은 곰곰이 이 불길한 징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했다.
“이번엔 독일까, 암살자일까. 설마 저격은 아니겠지?”
후궁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침입할 암살자는 없을 테니, 필연적으로 이번에 닥쳐올 위험은 독일 것이 틀림없다.
논리적으로 추론한 끝에 답을 확신한 소년은 귀찮음과 짜증으로 몸부림치며 침대 위를 굴렀다.
많이 컸구나, 김승조. 독살 위험이 무서운 게 아니라 귀찮게 느껴지다니. 후궁 물이 아주 제대로 들었어.
한참 동안 사지를 비틀던 소년은 닭 울음소리 대신 새벽을 알리는 종소리에 몸을 일으켜 세웠다.
태감. 그 양반은 독살당할 위험이 있어도 밥은 먹어야겠다고 하겠지.
태감의 시큰둥한 표정을 떠올린 소년은 뭉그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년이 방문을 열고 나서자 기다리고 있던 장소와 이삼이 따라붙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꿈자리가 사납더구나. 오늘 뭔가 사달이 날 것 같은데…….”
“흐에, 그럼 어떻게 할까요?”
“저번에 그 옥룡침인지 뭔지, 가지고 왔니?”
장소와 이삼이 각자의 품에서 침을 꺼내 들자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일단 주방에 가자마자 식재료부터 검사 좀 해주렴. 그다음엔 그릇도.”
소년의 께름칙한 표정에 이삼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질문해 왔다. 소년의 표정, 늘어진 어깨. 눈가에 드리워진 그림자에서 그들은 지난날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소년이 암살당할 뻔한 그 날. 그때도 소년은 저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늘도, 감이 안 좋으세요?”
장소와 이삼은 소년의 안색을 살피며 품 안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두 번은 당하지 않겠다는 차가운 결의. 소년은 두 사람의 기세에 소름이 쭈뼛 돋는 것을 느꼈다.
“아침부터 기운 빼지 마라. 설마 황궁에 암살자가 들어올까. 기껏해야 독살 정도겠지.”
“독살이어도…….”
“어허. 괜찮다니까.”
그렇게 걱정되면 빨리 가서 검사부터 해! 소년이 장난스럽게 둘의 엉덩이를 걷어차자 장소와 이삼은 쭈뼛거리면서도 하는 수 없이 무기를 품 안에 갈무리했다.
그 대신 둘은 연좌궁의 회랑을 걸어가는 동안 끈질기게 소년을 설득했다.
“오늘 하루만 연좌궁 지하의 대피소에 계시면 어떨까요?”
“뭐? 거기 고문실?”
“에이, 고문실만 있는 건 아니에요.”
장소가 수줍게 미소 짓자 소년은 떨떠름하게 되물었다.
“그럼 뭐가 더 있지?”
“어…… 수감실이랑…… 심문실이랑…… 또 뭐가 있었지?”
장소를 대신해 이삼이 그가 빠트린 부분을 채워주었다. 그래 봤자 소년의 흥미를 끌 만한 시설은 존재하지 않았다.
“기록물 보관소도 있어요.”
“그것참 재미있겠구나. 너희들끼리 가서 놀고 오렴.”
히잉, 정말 안전한데. 소년의 퉁명스러운 반응에 전전긍긍하던 아이들은 멀리서 태감이 다가오자 헐레벌떡 달려가 소년의 징조를 일러바쳤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태감은 애매한 반응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흠, 역시. 그랬군.”
“뭔가. 제 앞으로 선물이 온 모양입니다?”
별로 반갑지 않은 선물이. 태감의 얼굴에서 그것을 유추한 소년은 뻐근하게 굳은 어깨를 빙빙 돌리며 말했다. 어깨의 관절과 근육이 비명을 지를 때마다 소년은 얼굴을 찡그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그래. 네가 아침에 느꼈던 징조는, 아마 이것 때문일 것 같구나.”
태감이 내민 것은 고상한 청회색 끈으로 밀봉된 편지였다. 정중한 안부 인사로 시작되는 편지는 가는 세필로 적혀 있었다.
그 내용과 끝자락의 서명을 확인한 소년은 편지지를 구겨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편지의 주인은 옥린비였다. 그리고 그녀의 편지지에는 소년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짧은 내용이 길고 장황하게 늘어져 있었다.
“옥린비께서, 저를 부르시는군요.”
그 대담하고 정중한 초청장을 받아든 소년은 사나운 미소로 입가를 일그러트렸다. 편지를 접은 소년은 태감에게 허락을 구했다.
“태감님.”
“옥린비를 만나러 갈 생각이냐.”
“이토록 간절히 저를 찾으시는데, 가야지요.”
소년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태감은 가슴 한구석에 서리가 내려앉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심장이 얼어붙고 빗장뼈에 성에가 껴 버석거리는 듯한. 태감의 뇌리에 죽어가던 소년의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다.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 없지.’
사려 깊지 못한 그의 행동으로 소년을 잃을 뻔한 경험은 한 번이면 족하다. 평생 지워지지 않을 가슴 쓰린 기억을 되새긴 태감은 소년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네가 만나는 것은 그냥 옥린비가 아니다. 모든 지지기반을 잃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을 옥린비지.”
“미치광이는 위험하지요.”
“그래. 위험하지.”
거기에 그 미치광이가 후궁의 비이니, 특히 위험하지. 태감의 말에 소년은 쓴웃음을 지었다. 비록 거세하지 않았다고는 하나 그의 공식적인 신분은 환관이었다.
설령 옥린비가 그를 공격한다 한들, 반격이 허용될 리가 없었다. 그 사실에 염증을 느끼며 소년은 태감에게 물었다.
“여긴 정당방위도 없습니까?”
“법은 있다. 법은.”
이런 염병할 신분제. 이 미개한 놈들은 빨리 민주주의를 도입하지 않고 뭐 하는 거야?
울화에 가득 차 욕설을 내뱉는 소년을 탐탁지 않은 눈으로 보던 태감은 그에게 가장 합리적일 수 있는 제안을 내밀었다.
“여우굴로 들어가기 무서우니, 여우를 굴 밖으로 끌어낼 수밖에.”
태감의 묘한 말에 소년은 주의 깊게 그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에 만족한 태감은 천천히 자신의 계획을 들려주었다.
“보통의 경우라면 환관이 비의 청을 거절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 그런 무례를 범하려면, 그에 걸맞은 이유가 있어야 한다.”
“드러누우라는 말씀이시군요?”
역시, 이해가 빨라. 태감은 자신의 의도를 완벽하게 파악한 소년에게 깊은 만족감을 느꼈다.
“와병(臥病)을 핑계로 든다면 옥린비 측에서도 억지를 쓸 수 없지.”
어제까지 멀쩡했던 놈이 다음날 드러누웠다 하면 믿겠습니까? 미심쩍은 듯한 소년의 질문에 태감은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아쉬운 사람이 지고 들어가는 것이 정치다. 옥린비가 그만큼 다급하다면, 어쩔 수 없이 숙이고 들어오겠지.”
“저는 거동이 불편하니, 정히 만나고 싶으시다면 옥린비께서 직접 왕림해 주셔야겠군요.”
소년은 태감이 내뱉은 말을 입속에 머금고 되뇌었다. 여우를 굴 밖으로 끌어낸다. 옥린비. 소년은 문득 옥린비를 제대로 대면한 것이 고작 한 번뿐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고작 한 번밖에 만나지 못한 사람을 이토록 증오하고, 원망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후궁의 사람이기 때문일까. 소년은 상념을 털어내며 걸음을 옮겼다.
후회와 반성은 일이 끝나고 난 후에 해도 늦지 않는다. 지금은 행동해야 할 때였다.
* * *
소년은 평소에도 병색이 완연한 몰골이었기에 굳이 환자 분장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머리를 조금 헝클어뜨리고, 깨끗하고 하얀 백의를 입는 것만으로도 소년은 충분히 중환자 흉내를 낼 수 있었다.
“기침만 좀 하면 완벽하겠구나.”
“이놈의 면상도 가끔은 도움이 되는군요.”
자신의 모습을 동경에 비춰본 소년은 자신의 추레하고 너저분한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다시 봐도 참 못났구나. 어떻게 이렇게 이쁜 구석이 하나도 없을 수가 있지? 어떤 의미로는 감탄스러운 외모였다.
“뭐, 모두가 잘생길 수는 없지 않으냐.”
“태감께서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
불공평함의 화신과도 같은 태감이 그런 말을 꺼내니 유독 더 얄미웠다. 오늘 저녁상에는 태감이 싫어하는 가시 많은 생선요리를 올려야겠다고 결의하며 소년은 준비해 둔 담요를 어깨에 둘렀다.
“삼아. 부축 좀 해주렴.”
담요를 두르고 이삼의 부축을 받는 소년은 놀라울 만큼 병약해 보였다. 핏기없고 푸석한 피부는 내일을 보장할 수 없는 중환자의 것이었고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는 당장에라도 주저앉을 듯했다.
자신의 병색을 온몸으로 주장하는 듯한 소년의 모습에 태감은 크게 만족했다.
“만약 낌새가 이상하거든, 즉시 핑계를 대고 나오거라.”
“옥린비께서 단검을 꺼내 드시면 말입니까?”
“그러면 이미 늦었지.”
농담을 나누며 긴장을 누그러트린 소년은 이내 표정을 경직시키며 자신의 연기에 몰입했다.
보폭은 좁게, 손과 발은 가늘게 경련하며.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자신의 생명을 깎아내는 듯한 소년의 모습에 이삼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
“저…… 정말 연기하시는 거죠?”
“삼아. 쉿.”
거의 다 왔다. 옥린비가 기다리고 있을 옥린비의 내원이 가까워지며 소년은 밑바닥에서부터 끌어올린 기침 소리로 자신이 왔음을 알렸다.
“쿨럭쿨럭, 후궁의 상호, 오운이옵니다.”
기침 소리와 가래가 끓어오르는 소리 때문에 인사말의 마지막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멍하니 수면의 연꽃을 보고 있던 옥린비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소년을 보았다.
“저런. 많이 안 좋아 보이네요.”
“쿨럭쿨럭. 직접 찾아뵙지 못한 무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신경 쓰지 않아요. 어차피 서로 반갑지도 않은 사이니, 인사는 이쯤 할까요?”
옥린비의 새치름한 반응에 소년은 마른 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시선을 두어야 할 곳을 몰라 고개를 숙인 소년은 아직 다과가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커흠, 아직 다과가 나오지 않았군요. 속히 준비하겠습니다.”
“괜찮아요. 차를 마실 기분은 아니니.”
“그러시군요.”
소년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만약 표독스러운 독설이 날아왔다면 그 또한 독니를 들어냈을 것이고, 교묘한 조롱이라면 의뭉스러운 태도로 모른 척했을 것이다. 소년이 기대한 것은 옥린비와의 독기 어린 설전이었다.
하지만 옥린비의 태도는 차가울지언정 독살스럽지는 않았다. 오히려 시원하고 담백하기까지 했다.
말없이 소년의 수척한 얼굴을 보던 옥린비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소년을 놀라게 했다.
“역시, 차가 있어야겠군요. 부탁해도 될까요?”
“예, 준비해 오지요.”
소년은 환자 시늉조차 잊고 황급히 차를 준비해 왔다. 군산의 명차 백호은침에 호박과 소금에 절인 오리 알을 넣은 월병. 차를 받아든 옥린비는 시녀에게 기미를 맡기지 않고 곧바로 입으로 가져갔다. 소년은 그녀를 해괴하다는 듯이 보았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을까. 벼랑 끝에 몰리게 되자 그간 집착했던 것들이 부질없게 느껴진 걸까? 그것을 계기로 사람이 변한 걸까? 그럴 가능성을 떠올린 소년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사람의 가능성을 믿기엔, 소년은 너무 늙어버렸다.
그는 사람이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때때로 타인의 선의를 믿고 싶어질 때마다, 남을 의심하는 것이 지칠 때마다 소년은 그 사실을 상기하고는 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변한 것처럼 보인다면, 그렇게 보여야만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 의혹의 시선을 눈치챈 옥린비는 월병으로 손을 가져가며 물었다.
“제가 의심스럽겠지요.”
“아니라고는 못 하겠습니다.”
“당신들이 제 팔다리를 전부 잘라, 전 더 이상 아무 힘도, 권력도 없는데 말이죠.”
자신의 약점을 들어내는 옥린비의 말에도 소년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그 대신 소년은 침묵으로 자신의 뜻을 전했다.
옥린비가 다시금 물었다.
“못 믿겠나요?”
“이 우둔한 놈이 믿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소년의 솔직함에 옥린비는 조금 더 입꼬리를 길게 올렸다. 향긋한 차를 입안에 머금고 목을 축인 그녀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믿을 필요는 없어요. 오늘은 그저, 당신에게 궁금한 것이 있어서 온 거니까.”
그 이야기만 들으면, 바로 돌아갈 거에요. 소년은 거추장스러운 담요를 벗어 던지고 자신의 잔에 차를 따랐다. 이야기를 나눌 준비가 되었다는 소년의 신호였다.
짭짤한 노른자를 입안에서 굴리던 옥린비는 소년의 찻잔에 찻물이 차오르자 질문을 꺼냈다.
“숙부님은 어떠셨나요?”
“숙부님이라 하시면…… 식방각주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최소한 숙부님의 마지막은, 듣고 싶어서요.”
바깥에 심어둔 눈과 귀가 모조리 뿌리뽑혔거든요. 누구 덕분에. 소년은 옥린비의 웃음 속에서 쓸쓸한 상실감을 엿보았다.
그 애달픈 감정이 너무나도 진솔했기에 소년은 자신의 경계심이 무너지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기만일까, 아니면. 생각을 정리한 소년은 고집스러운 입술을 비집어 열었다.
“후련해 보이시더군요.”
그날.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긴 식방각주는 후련해 보였다. 자신의 죗값을 받아들인 그는 거리낌 없이 소년에게 자신의 오른팔을 내밀었다.
그것은 체념이었을까. 아니면 속죄였을까. 식방각주의 주름진 얼굴을 그리며 소년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한번 옥린비에게 들려주었다.
“아주 후련해 보이셨습니다.”
“그랬군요.”
소년의 말을 들은 옥린비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일순간 탁자 위로 그녀의 손이 올라오자 소년의 뒤에 서 있던 장소와 이삼은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하지만 그 동작은 단순히 탁자 위에서 깍지를 끼는 것뿐이었다. 깍지낀 손 위에 자신의 이마를 기댄 옥린비는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느릿하게 흘러가는 침묵 속에서 고개를 든 그녀는 가만히 소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의도의 감사였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시. 당신을 선택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함께 옥린비는 소매 춤에서 길쭉한 통과도 같은 것을 꺼내 들었다.
한 뼘쯤 되는 길이의 나무통. 소년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그의 충실한 호위무사들은 옥린비가 꺼내든 물건의 위험성을 눈치챘다.
격렬한 노호와 함께 장소가 달려들고 이삼이 소년을 끌어안는 순간, 옥린비는 가만히 손가락을 방아쇠 위로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