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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139화 (139/314)

환관의 요리사 139화

아무리 불만족스럽더라도. 찜찜하더라도. 납득할 수 없더라도.

승리는 승리였다. 비록 당장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밀려 있었지만, 소년과 태감은 조촐하게나마 축하연을 열기로 했다.

“뭐, 축하연이라고 해봤자 남은 불도장이나 먹어치우자는 취지입니다만.”

불도장은 일 인분만 끓여낼 수 없는 요리였다. 하지만 아무리 먹고 남은 요리라 한들 황금을 물 쓰듯 쓰며 끓여낸 사치스러운 탕을 그냥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마치 어제 남은 거나 대충 먹고 때우자는 것처럼 매가리가 없는 소년의 말에 태감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 정도면 충분히 호사스러운 축하연 아니냐.”

“뭐, 생각하기 나름이지요.”

소년은 커다란 솥을 탁자의 중앙에 올렸다. 상석에 앉은 태감을 중심으로 위정과 장소. 이삼. 늘 모이던 사람들끼리 단출하게 모여앉아 소년의 요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 안경 쓴 나으리는 오지 않으십니까?”

“아아. 백량? 그 친구는 채식주의자라.”

“허어.”

어쩐지, 밥 한 끼 먹자고 해도 자꾸 사양하더니만, 이유가 있었네. 소년은 깐깐하고 고지식한 안경잡이의 얼굴을 떠올리며 뚜껑에 손을 가져갔다.

뚜껑이 비스듬하게 열리자 수천 명의 관객을 사로잡았던 극상의 향기가 서늘한 가을 공기를 타고 방 안에 퍼졌다.

“일단 국물을 먼저 음미해 보시죠.”

작은 은 국자가 불도장을 휘젓자 그윽한 향기는 마치 꽃봉오리가 열리며 향기가 스며 나오듯 농밀하게 피어올랐다.

사람들의 목울대가 움찔거리는 것을 보며 소년은 느릿하게. 천천히 한 국자를 떠올렸다.

진한 갈색의 투명한 국물은 공기와 맞닿으며 온도가 변할 때마다 새로운 향기를 뽐내었다. 짙은 가금류의 향기. 농축된 건해산물. 우육의 달콤함과 버섯의 그윽함. 코가 저릴 만큼 진한 향기의 향연 속에서 태감은 극한의 자제력으로 그릇 대신 숟가락을 들어 올렸다.

“이것이, 식방각주를 쓰러뜨린 불도장인가.”

숟가락이 입술 속으로 들어오는 그 찰나의 시간조차 그에게는 한없이 길게만 느껴졌다. 그릇과 입술 사이의 거리가 이토록 멀었던가. 한없는 기다림 속에서 태감의 입술은 갈증을 호소하며 메말라갔다.

그 순간. 영원할 것만 같았던 가뭄 속에 단비가 찾아들었다. 한여름 밤을 식혀주는 소나기처럼 기껍고 사랑의 약속만큼이나 달콤한, 그리고 너무 빨리 끝나 버리는 야속한 행복.

그 한순간을 붙잡을 수 없는 무력한 이는 한숨으로 자신의 무력감을 삭여야 했다.

“혀가 아릴 만큼 진하고 농후하지만, 기름지고 느끼한 것은 아니야. 고기와 해산물, 버섯의 감칠맛이 조화롭고 치밀하게 얽혀 있어.”

입술이 쩍 달라붙을 만큼 농후하고 끈적하면서도 마시고 나면 개운한, 완벽하게 맞물린 맛의 황금비. 그 맛에 이끌려 한없이 가라앉던 태감은 한 숟갈의 국물에 배어든 소년의 집념을 보았다.

한순간의 행복을 위해서 그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를. 보고, 느끼고, 맛보며 태감은 소년에게 속삭이듯이 말했다.

“정말로, 내 인생 최고의 불도장이구나.”

별것 아니라는 투박한 말로 포장된 소년의 무한한 호의를 태감은 자신의 심장에 단단히 새겼다. 이 한 그릇의 탕을 우려내기 위해 며칠을 고생했을까. 그의 노력을 당연하다고 여기지 않도록, 그의 희생에 익숙해지지 않도록 태감은 다짐을 굳혔다.

“몇 번이나 말해서 담긴 의미가 무뎌지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정말 고맙다. 태감의 감사를 멀뚱히 보던 소년은 긴 젓가락을 솥으로 넣어 건더기를 건져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인데, 인사가 과하십니다.”

“네가 나를 위해 보여준 열의와 정성만큼 너에게 충실하지 못한 나의 부덕을 용서해 다오.”

“밥상머리에서 오그라드는 말은 그만합시다.”

소년은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이 몸을 떨며 솥에서 전복과 해삼을 건져 올렸다.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접시에 올린 다음에는 국물을 자박하게 끼얹는다. 국물이 끼얹어진 전복과 해삼은 보석처럼 투명하게 빛났다.

“좋은 날 아닙니까. 마음 무거워지는 말들은 내일로 미루고, 오늘은 먹어야지요.”

“그래, 그래야지.”

“안줏거리가 좋은데 술이 빠질 수 없지요.”

좋은 날이니, 그에 어울리는 좋은 술을 가져오겠습니다. 소년의 호언장담에 위정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좋은 술이라. 어떤 술일지 궁금하구나.”

“소곡주(小麯酒)라는 술인데, 얼치기로 만들었지만 맛은 꽤 괜찮습니다.”

선비의 다리를 잡아채는 앉은뱅이 술. 한산 소곡주가 잔에 담기자 위정은 탄성을 질렀다. 미식가가 좋은 요리를 알아보듯이, 애주가는 명주를 알아보는 법이었다.

“색이 참 곱구나.”

향기도 그윽한 것이, 그 향기만으로도 천하 이름난 명주가 부럽지 않구나.

맑고 고운 치자 빛에 감탄 한번. 그 그윽한 술 향에 감탄 두 번. 술잔을 받아든 위정은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평소의 근엄함과 진지함은 어디에 갔는지, 소년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의 잔에 술을 부어주었다.

“단맛이 진하고 곡주 특유의 무르익은 고소함이 입안에 감도는군. 그러면서도 술 특유의 비릿한 맛이 없어. 목구멍을 넘어가는 향기는 꼭 쌀을 볶는 것 같고 끝부분에 살짝 쓴맛이 도는군. 마치 도라지나 칡을 연상시키는 개운한 쓴맛이야.”

안주의 화려함에 밀리지 않는 힘 있고 좋은 술이다. 혀끝에 아련하게 감도는 술의 은은한 향취에 전율하며 위정은 태감을 노려봤다.

이 좋은 술을 아무렇지 않게 벌컥벌컥 마시다니! 좋은 술을 음미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었다. 태감의 후안무치함에 치를 떨며 위정은 탁자 밑으로 주먹을 그러쥐었다.

호위무사로서의 나인가. 아니면 애주가로서의 나인가!

“야, 술이 참 달구나.”

“천천히 좀 드십쇼. 은근히 도수가 셉니다.”

“괜찮다. 난 잘 안 취하는 체질이라. 달콤한 게 입에 짝짝 붙는구나.”

이런 술맛도 모르는 얼간이가!

위정은 순간 태감을 후려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술맛을 모르는 이에게 주기에 이 술은 너무 훌륭했다. 명품은 그에 어울리는 주인이 있는 법이다.

식탁 위에서 불붙은 갈등의 도화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년은 솥 안에서 메추라기와 오리 다리를 건져 장소와 이삼에게 나눠주었다.

평화롭고, 걱정 없는 시간이었다. 묵직했던 솥을 비워나가며 소년은 자신의 책임 또한 조금은 가벼워짐을 느꼈다. 새로운 짐을 지기 전까지, 잠깐 정도는 쉬어가도 좋으리라.

하지만 그에게는 아직 매듭지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태감과 눈을 마주친 소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온화한 허락에 태감은 주저하고 있었던 말을 입에 담았다.

“폐하의 제안, 어떻게 생각하느냐?”

“식방각주 자리 말입니까?”

“그래.”

황실의 역사상 유례가 없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천시받는 환관에게 외궁의 관직을 맡긴다는 것은 황제로서도 쉬이 도전하기 어려운 모험이었다.

“비천한 환관과 같은 직급에 놓이게 된다니. 관리들에게 이보다 끔찍한 일이 또 있을까.”

품격에 손상을 입었다며 길길이 날뛰고, 상소문을 올리겠지. 하지만 그 정도로 끝날까. 태감은 고개를 저었다. 그 단호한 태도와 확정적인 미래에 소년은 마른 침을 삼켰다.

“관리들은 어느 순간 알아차릴 것이다. 자신들의 자리가 위험하다는 것을.”

양물도 없는 천한 놈이 관직에 올랐으니, 그다음에는 무지렁뱅이 개백정도 관직에 올리려 하실지 모른다. 그 후의 일은 불 보듯 뻔했다.

충을 부르짖던 자들은 자신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뭉칠 것이다. 국정 운영이 어려워질 것이고, 군주와 신하 간의 차가운 냉전이 시작될 것이다.

황제는 그 위험을 감수하는 한이 있더라도 소년을 품에 안겠다 한 것이다. 그것이 황제의 각오였다. 흐를 피와 쌓일 주검을 두려워하지 않는 철혈의 각오.

황제의 사람이 되겠다면 소년 또한 같은 철혈의 심장이 필요했다.

“오운. 식방각의 각주 자리에 오를 각오가 있느냐?”

태감의 엄중한 시선을 받으며 소년은 솔직한 자신의 심정을 이야기했다.

“없습니다.”

“그래, 없구나. 없다고?”

“이 나이에 감투를 써서 뭐하겠습니까. 지금도 아등바등 살고 있는데.”

완장질 할 나이는 지나지 않았습니까. 소년의 부루퉁한 대답에 태감은 떨떠름하게 되물었다.

“그래도 식방각의 각주다. 황실의 주방을 총괄하는 자리. 그 명예를…….”

“또 뭔 놈의 명예. 그런 시답잖은 거 따질 만큼 한가한 놈 아닙니다.”

사람이 나잇값을 해야지, 뭔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시큰둥하게 솥을 휘젓던 소년은 태감의 그릇이 빈 것을 보고는 짜증스럽게 물었다.

“비둘기 알 먹을 겁니까?”

“비둘기 알? 그래. 먹으마.”

소년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태감은 입속에 비둘기 알을 쏙 집어넣었다.

탱글탱글한 흰자를 깨물면 혀끝에 사르르 녹아드는 진한 노른자의 맛. 달콤한 승리의 맛이 입안에 퍼지자 태감은 자신도 모르게 헤실헤실 웃음 지었다.

“폐하께서 섭섭해하시겠구나.”

이거 죄송해서 어쩌나. 단 1푼의 죄송함도 포함되어 있지 않은 태감의 낯짝을 보며 소년은 코웃음 쳤다.

* * *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하고, 돈으로 흥한 자 돈으로 망한다. 그 공평한 잣대 앞에서 옥린비는 한없는 절망감을 느꼈다.

망망대해에 홀로 남겨져 말라 죽어가는 막막함.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상황을 타개할 수 없어 누군가의 구원을 바라야만 하는 무력감. 그 누구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불안감. 그것은 눈앞의 죽음보다도 두렵고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그녀는 늘 패배자를 비웃는 위치였다. 자비를 바라는 패배자의 애원을 짓밟고, 경멸하고. 패배자의 목을 조르며 그 귓가에 조롱을 속삭이는. 그녀는 늘 승자였다.

그렇기에 옥린비는 자신의 위치에 참을 수 없는 수치심을 느꼈다.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으로 잠 못 이루며 허덕이던 옥린비는 결국 자신의 자존심을 꺾어야만 하는 순간이 왔음을 인정했다.

“봉렴.”

“예, 옥린비 님.”

수척해진 주인이 자신을 부르자 봉렴은 재빠르게 그녀의 침상으로 다가왔다. 피부는 푸석해지고 뺨은 여위었으나 옥린비의 눈동자 속에는 아직 꺼지지 않은 불씨가 타들어 가고 있었다.

“옷을 준비하거라. 안양비 님께 가야겠다.”

“안양비 님께? 하지만…….”

“준비해.”

독기가 차오른 옥린비의 명령에 봉렴은 감히 불복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가장 화려하고 값비싼 것으로 가져오라는 주인의 명령에 옷가지를 챙기며, 봉렴은 흘깃 뒤를 돌아보았다.

겁먹은 개일수록 크게 짖고, 요란스럽게 행동한다. 창백하게 메마른 그녀가 한껏 꾸민다 한들 과거의 위엄을 찾을 수 있을까? 오히려 우스꽝스럽게 보이지 않을까?

입술을 달싹거리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주제넘은 짓이었다.

창백한 피부 위로 진하게 화장을 하고 옷을 차려입은 옥린비는 이를 악물고 궁을 나섰다. 옷의 무게에 힘겨워하는 그녀를 보며 봉렴은 그녀에게 가마를 대령하겠다 나섰다.

“차라리 가마를 타고 가시지요.”

“되었다. 가마를 탄다면 후궁에 내가 약해졌다는 사실을 광고하는 꼴 아니냐. 내가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줘야지.”

당차게 말하며 앞장서는 옥린비에게선 더 이상 그 옛날의 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눈가에 진 짙은 그늘과 숨길 수 없는 체념을 보며 봉렴은 그녀의 몰락이 다가왔음을 받아들였다.

그녀와 함께해 온 시간을 되새기며 회한에 잠겨 있던 봉렴은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북림궁에 도착한 그녀를 맞이한 것은 안양비가 아닌 장 태감이었다. 능글능글한 인사로 옥린비를 맞이한 장 태감은 초췌한 그녀의 모습에 교활한 뱀과도 같은 미소를 지었다.

“어쩐 일로 오셨는지요.”

“안양비 님을 뵈러 왔습니다.”

“허어, 혹시 선약이 있으신지요?”

“제가 안양비 님과 선약을 잡아야 할 사이입니까?”

옥린비가 표독스럽게 쏘아붙이자 장 태감은 눈을 가늘게 뜨고 미소를 지웠다. 그의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온 말은 칼날보다도 매섭고 무정했다.

“잡으셔야지요. 옥린비 님께선.”

그 한 마디의 칼날은 옥린비의 가슴을 헤집고 마지막 남은 자존심에 상처를 남겼다. 무너지려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고 버티며 옥린비는 소리를 질렀다.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충성을 다했는데!”

봉렴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 말은 옥린비의 패배 선언이자 자비를 바라는 구걸이었다. 자존심마저 땅에 떨어지고 허울조차 남지 않은 패배자의 비명. 자신에게 더는 쓸모가 없음을 스스로 시인하는 꼴이었다.

장 태감의 눈에선 일말의 조롱마저 사라졌다. 그녀의 무가치함을 깨달은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시간을 소모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정중하게 축객령을 내렸다.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그것이…… 그것이 정녕 안양비 님의 뜻입니까?”

“옥린비.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마치 바닥에 굴러다니는 바위나 나무 따위의 무정물을 보는 듯한 장태감의 시선에 그녀는 도망치듯이 자리를 피했다.

마치 쫓기듯 달음박질친 그녀는 북림궁에서 한참을 멀어진 후에야 담벼락을 짚고 숨을 골랐다.

숨을 고르고, 폐부에 산소가 공급되자 왈칵 서러움이 몰려왔다. 사람을 한없이 나약하게 만드는 감정이 폐부를 찌르자 옥린비는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이젠 정말 끝이구나.”

“옥린비 님.”

“안양비 님께서 날 버리셨어. 숙부님은 패배하셨고, 상단은 날 지원해 줄 수 없어.”

끝이야.

허망함 속에서 시들어가는 자신의 주인을 보며 봉렴은 입술을 깨물었다. 모든 희망을 빼앗긴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을 지탱할 수가 없었다. 일어설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대로 두고 봐야만 하는가? 천하의 옥린비가 이토록 초라한 최후를 맞이해야 한단 말인가?

허물어지는 주인의 어깨를 부축하며 그녀는 모진 결심을 했다.

그녀에게는 분노가 필요했다.

“옥린비 님. 이대로 무너지시면 안 됩니다.”

“봉렴. 어차피 이젠…….”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상단주께서 맡기신 물건이 있지 않습니까.”

봉렴의 말에 옥린비의 흐느낌이 멈췄다. 모든 것을 빼앗겼으나, 단 한 가지. 빼앗기지 않은 것. 그녀에게는 아직 책임이 남아 있었다.

숙부를 통해 건네어 받은 상단주의 선물을 떠올린 순간 그녀는 자신의 가슴속에 새카맣게 응어리진 증오가 꽃피는 것을 느꼈다.

“그래, 아직 그게 남아 있었지.”

은혜는 살아서만 갚으나 원수는 죽어서도 갚는다. 금언과 함께 상단주는 그녀에게 마지막 쓸모를 다할 물건을 보냈다.

상단의 미래라는 책임으로 포장된 그녀의 죽음을. 그것을 가슴에 새기며 옥린비는 자신의 분노를 쏟아내야 할 마지막 대상을 정할 수 있었다.

“상단주께서. 아버지께서 나의 죽음을 바라시는구나.”

그렇다면, 이루어 드리는 게 자식 된 도리겠지.

분노로 몸을 일으켜 세운 주인을 바라보며 봉렴은 마른 침을 삼켰다. 이미 파멸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최소한, 화려하게 스스로를 불태우시기를. 옥린비의 이름에 걸맞은 최후를 맞이하시기를.

차마 그녀를 똑바로 볼 수 없었던 봉렴은 고개를 떨구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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