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123화
가을이 내려앉은 돌담길. 옹졸한 노인과 옹졸한 소년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서로 참 보기 흉한 흉물들인지라 코웃음을 친 둘은 천천히 서로를 향해 다가섰다.
속살거리는 가을바람에 응어리진 독기를 풀어내며. 두 명의 환관은 서로의 목소리가 잘 들릴 만한, 하지만 손을 뻗어도 닿지 않을 거리까지 걸음을 좁혔다.
‘좋은 눈이군. 아주 제대로 숙성되었어.’
빙그레 웃은 장 태감이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었다.
“안녕하신가. 큰일을 겪었다 들었는데, 건강한 모습을 보니 기쁘구만.”
“그야 장 태감님 덕분이지요. 덕분에 좋은 경험도 했습니다.”
혀 밑에 숨겨둔 칼은 은밀하고도 독살스러웠다. 후궁의 사람인 것이다. 더운 여름날 풋풋하고 정치를 모르던 소년은 무르익어 고개를 숙인 벼처럼 후궁의 물이 흠뻑 들어있었다.
장 태감은 어쩐지 소년의 옛날 모습이 그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 오래 사귄 것도 아닌데. 신기한 일이군.’
기이한 일이었다. 그를 직접 본 것은 두세 번을 넘지 않은 텐데도. 어째선지 장 태감은 소년이 대단히 친밀하게 느껴졌다.
마치 말이 잘 통하는 동년배를 보는 것만 같은 기묘한 감각. 장 태감은 스스로의 생각에 헛기침하며 웃었다. 정말 나도 다 된 모양이야.
소탈하고 감정 실린 웃음을 멈추고. 입꼬리를 부드럽게 올린다. 사람 좋은 노인과 같으면서도 어딘가 가슴 한구석에 서늘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미소.
“자네도 후궁 물이 많이 들었구먼.”
“적응이 빠른 편이라 그런가 봅니다.”
“난 자네의 풋풋하고 직설적인 면을 좋아했는데.”
장 태감의 은근한 말에 소년 또한 웃음을 띄웠다. 얇은 입술이 길게 찢어지는 그 미소는 장 태감을 닮아있었다.
“그래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곳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 그렇지. 방금 그 대답은 제법 옛날 냄새가 나서 좋았네.”
“만족스러우셨다니 다행입니다.”
잠깐, 걸을까. 장 태감의 제안이 소년이 뒤를 따랐다. 낙엽을 지르밟을 때마다 버스럭 소리를 냈고 바람은 때때로 장난스럽게 나뭇잎 무더기를 뒤흔들어 작은 회오리를 만들었다.
“참 잘 꾸며진 길이야. 그렇지 않나?”
“정원사들과 석공들의 노고가 느껴지지요.”
“하하. 자네 말이 맞아. 아깝지 않나? 이 고즈넉하고 운치 있는 돌담길을 많은 사람들이 누릴 수 없다는게.”
소년은 잠시 말을 고르며 장 태감의 표정을 살폈다. 사람을 꼬드기는 간사하고 요사스러운 표정은 아니었고 흉금 안쪽을 들여다보려는 독살스러운 표정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의견을 구할 뿐이었다.
소년은 대답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하지만 안타까워하기보다는 이 길을 거닐며 풍류를 즐길 수 있다는 사실에 즐거워하고 싶습니다.”
“현실적이군. 아주 좋아. 그래서, 즐거운가?”
탁 트인 푸른 하늘 아래에선 달콤하게 무르익는 추수의 향기가 바람을 타고 실려 왔다. 소년은 장 태감을 힐끗 돌아보았다.
당신이 아닌 좋은 사람들과 보내면 더없이 좋겠지만, 당신과 함께 보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예, 좋습니다. 평소 흠모하던 장태감님과 함께 산책할 수 있으니 분에 넘치는 영광이지요.”
“이 친구 후궁 물이 아주 제대로 들었군. 혀가 아주 달콤하고 유연해.”
이거 아주 크게 되겠어. 너털웃음을 터뜨린 장 태감은 입술을 고집스럽게 닫았다. 그리고 잠시 후, 굵고 힘있게 가다듬은 목소리로 물었다.
“자네 꿈이 뭔가?”
꿈이라! 젊은 시절의 고민거리를 설마 여기서 다시 듣게 될 줄이야.
소년은 저 질문을 할 수 있는 이들 중 가장 의외의 인물이었다고 생각했다.
그 막연한 질문 앞에서, 이미 그런 고민을 하기엔 너무 지쳐버린 소년은 담백한 대답을 내놓았다.
“먹고살기 바빠 딱히 생각해 본 적없군요.”
“허허, 그런가? 하긴, 젊을 때는 바쁘니 미래를 생각할 여유가 부족하겠지.”
“태감님은 어떤 꿈을 꾸고 계십니까?”
그것은 예상치 못한 역공이었다.
한 방 먹었다는 듯이 소년을 본 태감은 유쾌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꿈이라. 나이를 먹다 보니 젊은 친구들 꿈은 신경 써도 정작 자신의 꿈은 모른 체하게 되지. 그래. 꿈이라.”
세월이 저물어 푸르고 싱그러웠던 잎사귀가 메말라 떨어지듯이 장 태감의 입가에서도 미소가 스러졌다.
지난 날을 떠올린 것일까.
그의 지난날은 어떠했을까. 뜨겁고 강렬했을까. 시리도록 춥고 힘겨웠을까. 후궁에서 가장 큰 돈을 움직이는 자리까지 올라오기까지. 그는 어떠한 고락을 겪어왔을까.
그의 입가에 다시금 웃음이 떠올랐다. 힘겹고 애달픈, 그런 미소였다.
“흑룡강성을 아는가?”
그의 대답은 그렇게 시작했다.
“석이버섯이 유명한 곳이지요.”
“맞네. 잘 아는군. 그 외에 제국에서 가장 춥고 척박한 땅. 정도의 수식어가 어울리는 곳이지.”
난 거기서 버섯을 따는 채취꾼의 아들로 태어났다네. 가족이 지지리도 많았어. 내가 셋째인지, 넷째인지도 잘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말이야.
나름의 우스갯소리였겠지만 소년은 웃을 수가 없었다. 이제는 가물가물할 시간이지만 그 힘들었던 기억만큼은 선명했다.
“석이버섯을 따는 것은 정말 힘겨운 일이야. 맨손으로 절벽을 올라서 변변한 도구도 없이 버섯을 캐내지. 온종일 고생해서 캐봐야 한 줌 되지도 않아. 그걸 팔면 간신히 식구가 멀건 죽이나마 먹을 수 있었지. 흰쌀? 그런 건 구경도 해본 적 없었어.”
결코, 추억이라 부를 수 없는 이야기지만 나이가 들어보니 그 고된 삶마저 조금은 미화가 된 모양이었다.
돌아보기도 싫었던 고향.
하지만 지독한 후궁 생활이 길어지니 가끔은 그 생각이 났다.
“그래. 그러다 사달이 났지.”
추락사고로 아버지가 덜컥 죽어버리고, 풀칠할 입은 많으니 별수 있나. 남아도는 아이라도 팔아야지. 덩치가 좋은 형제들은 머슴살이를 보내고, 나이가 찬 누이들은 시녀로 보내고.
“그리고 난 그나마 똑똑한 편이라 궁으로 들어왔지.”
그저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매달리고, 나이가 차고 눈이 떠지니 돈이 눈에 들어왔지. 높은 곳에 올라가고 싶었어, 아니, 정확히는…….
“내 꿈이 뭐냐 물었는가? 간단하다네. 배고프지 않은 것. 늘 배부르게 먹는 것. 그게 내 꿈이었네.”
그 한마디는 틀림없이 진짜였다.
다른 모든 말은 다 거짓이더라도, 저것 한마디는 진짜였을 것이다. 소년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림자가 드리운 장 태감의 씁쓸한 옆얼굴은 진실했다. 그 순간만큼은.
“그렇다면 꿈을 이루셨군요.”
“그래. 이뤘지. 이루었고말고.”
꿈을 이루어 공허해졌기 때문인가.
아니면 아직도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인가. 이제는 내려놓을 나이가 되었음에도 내려놓지 못하는 것은 어째서일까. 장 태감은 소년을 통해 스스로에게 물었다.
“자네는 내가 어째서 은퇴하지 못하는 거라고 생각하나?”
“아직 올라갈 자리가 남아 있어서 그러신 게 아닐지요.”
“올라갈 자리라. 환관의 신분으로 오를 자리는 이제 하나밖에 없네만.”
“그 하나뿐인 자리에 오르신다면 뭔가 보이시는 게 있지 않겠습니까.”
장 태감은 홍소를 터뜨렸다. 자신과 정치적 대립 관계에 놓인 이에게 하는 조언치고는 지나치게 직설적이었다.
“그 위에 계신 분이 자네 상관 아니신가?”
“그렇지요.”
“근데 자네가 그렇게 말해도 되는건가?”
“딱히 못 할 말도 아니지요.”
“그건 그렇군.”
담대한 것인지, 무신경한 것인지.
소년의 경쾌한 발언에 장 태감은 한 순간 우울했던 자신의 기분이 확 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의 직설적이고 투박한 말을 듣고 있으면 자신이 괜한 쓸모도 없는 해괴한 고민과 망상에 잠겨있는 머저리처럼 느껴졌다.
그 머저리는 젊은 친구에게 조금 더 명쾌한 해답을 구해보고자 했다.
“한 가지만 더 대답해 주겠나?”
장 태감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두세 걸음 더 앞으로 걸어간 후, 소년 또한 걸음을 멈추었다. 사려 깊은 침묵 속에서 장 태감은 오랜 시간잠 못 이루며 고민해온 문제를 털어놓았다.
“나는 많은 것을 가졌네. 남부럽지 않은 재산을 축적했고, 천대받는 양물도 없는 놈이 권세를 얻어 그 대단하다는 문무관들이 먼저 고개를 숙이는 자리까지 올라왔네. 사실, 여기까지면 충분한 것 아닌가.”
“충분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어째서 멈추지 못하시는지요. 소년은 그 말을 입에 담지 않았지만, 그의 눈빛에는 그런 질책의 뜻이 담겨 있었다.
그리 생각한다면 그만 두면 될 일이다. 그만 두지 못했다는 것은 미련이 남았기 때문 아니냐.
미련일까. 과연 난 올라가지 못한 자리에 대한 미련이 담아 내려가지 못하는 거란 말이냐. 장 태감은 고개를 저었다. 스스로에게 전하는 부정이었다.
“모르겠네. 이 나이를 먹었는데도 여전히 난 모르는 것 투성이야. 그러니 자네가 대신 좀 알려주겠나?”
알고 있다면.
소년은 그가 어째서 고민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사람은 나이를 먹었다고 현명해지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몸담은 분야에 대해서 조금 더 아는 것이 많아질 뿐이다.
사람은 나이를 먹었다고 배려심이 깊어지지 않는다. 그저 피로에 지쳐 젊었을 때보다 조금 더 쉽게 타협하게 되는 것뿐이다.
여전히 모르는 것 천지에 자신에게 솔직해질 수도 없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고민하고, 그렇기에 망설이는 것이다. 더 이상 젊지 않기에. 도전이 두려워질 만큼 노쇠하였기에.
그렇기에 소년은 적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함께 늙어가는 동년배 친구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보다 더 고민 덩어리였던 삶을 살아온 얼간이 선배답게 적절한 조언을 해주기로 했다.
“산이 거기 있다면, 굳이 올라야 할 이유를 고민할 필요는 없지요. 이미 정상을 눈앞에 두고 있는데 내려가는 것은 바보짓 아닙니까.”
헛웃음이 나올 만큼 명쾌한 답이었다. 안일한 도덕성과 체면을 불 싸지르는 원초적인 답에 장 태감은 말을 잃었다.
“그렇다면, 산에 오른 다음엔 어찌해야 하는가?”
장 태감의 질문에 소년은 막힘없이 답을 내놓았다. 바보 같을 만큼 단순했고, 장 태감의 마음에 쏙 들 만큼 시원한 답이었다.
“정상이 마음에 안 들면 내려오십시오. 마음에 드시면 주변 풍경 구경 좀 하며 한세월 살지요. 어려운 일 아니지 않습니까.”
“자네 말이 옳네. 같잖은 문제를 쥐고 늘어지는 늙은이를 부끄럽게 하는군. 이것 참, 오늘 자네를 설득하려고 온 것인데 오히려 자네에게 내가 설득당해 버렸어.”
기껏 부끄러운 옛날 이야기까지 꺼내놓았건만, 영 신통치가 않구먼. 입은 섭섭해했지만, 그의 눈에는 이미 충분한 만족감이 떠올라 있었다.
이대로 좋은 분위기로 끝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장 태감에게는 아직 용건이 남아 있었다. 잰걸음으로 돌아선 소년의 앞을 가로막은 장 태감은 그에게 최후의 질문을 던졌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제안을 하지. 혹시, 그 산 나와 함께 오를 생각있는가?”
소년은 장 태감이 예상한 답을 내놓았다.
“죄송합니다. 이미 함께 오르기로 약속한 분이 계시는지라, 함께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분에 넘치는 영광으로 기억하겠습니다.”
“그리 답할 줄 알았네.”
한 번에 넘어왔다면 오히려 실망했을 게야. 어느새 후궁의 늙은 괴물로 돌아온 장 태감은 의뭉스러운 웃음으로 소년을 떠나보냈다. 그리고 절뚝거리는 소년보다 빠른 걸음으로 북림궁으로 향했다.
그와 같은 산을 오르는 주인이 있는 곳으로. 한껏 일그러진 표정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안양비는 그가 들어서자마자 탕! 소리가 나게 탁자 위에 찻잎이 든 항아리를 내려놓았다.
“기분 좋아 보이는군.”
“좋다마다요.”
“그래. 좋을 수밖에. 내기에 이겼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지.”
안양비는 마치 굶주린 호랑이처럼 으르렁거렸다. 그런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장 태감은 선물 받은 차를 뜯었다. 봉례옥침(鳳酸玉針) 같은 부피의 금을 줘도 구할 수 없다는 안휘의 명차였다.
“찻잎이 채 펴기 전에 따 말려 마치 가는 바늘과 같은 모양이라더니, 과연 그렇군요. 안양비 님 덕분에 팔자에도 없는 좋은 차를 마셔보게 되었습니다.”
봉례옥침은 돈이 있다고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황산(黄山)에 자리 잡은 어느 비밀스러운 일족이 황산의 협곡에서만 자라는 차나무에서 아주 소량씩만 채취하기 때문에 특별한 연줄이 없다면 구경은 커녕 이름도 들어보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거대한 상단을 후원자로 둔 옥린비였기에 구할 수 있는 선물인 것이다.
장 태감은 가느다란 찻잎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입술 사이에 가볍게 물어 침을 적시니 부드러운 향기는 비단결 같고 상쾌한 쓴맛 사이로 수줍은 단맛이 고개를 드니 봄날 고개를 든 새순의 깨끗함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허허, 좋은 차가 손에 들어오니 마셔보지 않을 수 없지요. 안양비님도 한잔 드시겠습니까?”
“아주 인심이 후하군. 자알~ 마시겠네.”
미간에 핏줄이 서고 눈동자에는 광기가 일렁거렸지만 장 태감은 개의치 않고 품위 있는 자세로 따뜻한 물을 다관에 흘려 넣었다.
너무 뜨거우면 향이 죽고 너무 미지근하면 찻잎이 열리지 않으니 물의 온도는 사람의 마음이 풀어질 만큼 따뜻해야 한다.
다도 명인 향림 거사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장 태감은 정성스럽게 차를 우려냈다.
도르르 말려있던 찻잎이 따스한 물에 풀리며 넓은 제 모습을 되찾자 방안에 차 향기가 가득 차올랐다.
그 향기를 들이마실 때마다 내년 봄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좋은 향기였으나 안양비는 부루퉁한 표정으로 차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저런, 뜨거우실 텐데.”
“흥, 미적지근 한 차군.”
“저런, 다음엔 더 뜨겁게 준비하겠습니다.”
장 태감은 안양비가 먼저 용건을 꺼낼 때까지 한사코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 점 또한 입살스럽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결국 먼저 백기를 든 것은 안양비였다.
“내가 졌소. 그러니 태감께서 원하는 대로 하시오.”
“저런. 포섭은 제가 아니라 안양비님께서 하시기로 한 것 아니었습니까.”
“그래. 그랬지.”
저번에 바스러진 흑단 탁자를 대신해 가져다 놓은 자단목 탁자가 또 다시 바스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