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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122화 (122/314)

환관의 요리사 122화

하루 이틀 안정을 취하고 움직일때마다 꿰맨 상처에서 핏물이 배어나오지 않을 때쯤 소년은 후궁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안가라고는 하지만 역시 동창의 요원들이 깔린 후궁만큼 안전하지는 않다는 것이 태감의 판단이었다.

결국, 으리으리한 가마가 준비되었고 소년은 왕후장상과도 같은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후궁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여덟 명의 가마꾼이 짊어지는 거대한 가마는 작은 방 하나를 그대로 가마로 만든 듯했다. 내부의 호화찬란한 장식에 깔아놓은 양탄자는 누우면 뺨을 간질거릴 정도로 털이 길고 푹신했다.

거기에 후궁으로 돌아오고 나서는 또 네 명의 환관 가마꾼이 드는 작은 가마가 또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방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땅에 발을 디뎌보지 못한 소년은 침대 위에 누워 몸이 간지럽다는 듯이 벅벅 긁었다.

“거 참, 황송할 지경이군요.”

“원한다면 대소변 가리는 걸 도와 줄 시녀도 붙여주마.”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그것만은 거절하지요.”

이 나이를 먹고 똥오줌을 못 가리면 치매가 아닌가. 설령 복압 때문에 내장이 터져 나올지언정 그것만큼은 사양이었다.

소년의 비장한 표정에 쿡쿡 웃으며 태감은 소년에게 한 무더기의 편지를 가져다주었다.

“이건 또 뭡니까?”

최고급 비단 재질의 두루마리부터 절강성에서만 소량 생산되는 전서용 최고급 종이까지. 재질부터가 비범하기 그지없는 편지봉투에 소년이 질겁을 하자 태감이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에게 온 연서(懸書)란다.”

“드디어 나에게도 봄날이 온 것인가…… 길고도 길었다.”

무려 한 번 죽고 나서야 간신히 찾아온 봄날에 소년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아, 나에게도 드디어 이런 날이 오는구나! 얼굴 집안 보지 않고 성격만 맞으면 바로 날짜 잡아야지. 아이는 아들딸 안 가리고 딱 셋만 낳아서……는 개뿔.

“지랄 마시고, 뭡니까?”

“네 안부 편지다.”

태감은 편지를 하나하나 끌러주며 소년에게 설명해 주었다.

산딸나무 편지지에 부드러운 필체의 난화비.

가는 세필로 편지지 다섯 장 분량의 편지를 보내준 부여비.

눈물 자국이 묻어나는 홍엽비 등 친분이 있는 비들에게 온 것부터 굵고 힘 있는 필체로 써진 무장들에게 온 편지도 있었다.

“허 참. 살다 살다 비 분들에게 편지도 다 받아보는군요.”

“인맥이란 중요한 것이지. 상처가 좀 더 아물면 한 번쯤 돌아야 할거다.”

“어쩔 수 없지요. 인맥이란 꾸준히 만나고 관리해야 유지되는 것이니.”

태감이 남은 일을 처리하기 위해 자리를 비우자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장소와 이삼이 쪼르륵 방안으로 들어왔다.

소년은 손주들이 병문안을 온 암투병 중인 노인이 된 기분을 맛볼수 있었다.

“아이고, 어제부터 수련했다면서. 낮잠이나 좀 자지 어쩐 일이야.”

“에이, 저흰 오운님 옆에 있어야죠.”

“호위무사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익숙하게 방의 사각지대에 자리 잡는 아이들을 침대로 부르며 소년은 뽀송뽀송하게 씻은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동창 요원들이 지키고 있는 후궁에서 설마 누가 암살시도를 하겠어. 이럴 때라도 편히 쉬어야지.”

“그래도…….”

“어허. 어른이 쉬라고 하면 쉬는거야. 그래, 이번 기회에 쟁여둔 차나 좀 마셔보자꾸나. 장소야 거기 찬장 좀 열어보겠니? 밀화차(蜜花茶) 담가 둔 것이 좀 있을 테니.”

향 좋은 목련을 꿀에 재운 꽃차는 목련의 꽃 한 송이를 통째로 꿀에 재워 만든다. 마실 때도 꽃송이를 꺼내 그대로 잔에 담고 따뜻한 물을 부어 향이 충분히 우러날 때까지 기다리면 끝.

봄날에 날아든 나비처럼 코끝을 간질거리는 달콤한 향기에 아이들이 볼을 발그레하게 물들였다.

“아아, 그러고 보니 저번에 내 혈통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혹시 너희들도 뭔가 타고난 능력 같은 게있니?”

뭉근한 차 향기를 맡으며 잔을 입술로 가져가기 전 소년은 차를 마시며 이야기할 만한 소재를 골랐다.

이삼은 비록 지금은 멸족했지만, 한 때 서장에서 세를 크게 일군 금익족이라는 혈족의 마지막 후예이고 장소는 귀주에서 유명한 묘족의 후예가 아닌가.

소년의 말에 이삼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저흰 뭐 그렇게 대단한 건 없는데요. 애초에 저흰 노래나 하면서 사는 일족이라…… 아. 한 번 들은 노래는 절대 잊어버리지 않아요.”

“아 그랬지. 어쩐지 한번 불러만 줘도 잘 부르더라.”

“음…… 그리고…… 새랑 이야기할 수 있는 것 정도?”

“뭐?”

황당하다는 반응에 이삼이 창문을 열었다. 물씬 단풍 물든 정원에는 참새 몇 마리가 포르르 날아다녔다.

소년이 멍하니 참새를 보고 있으니 이삼이 입술을 동그랗게 말고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더니 진짜로 참새한 마리가 창틀에 날아와 앉는 것이 아닌가.

“새랑 말이 통한다고?”

진기 명기한 재주를 본다는 듯한 소년의 시선에 이삼이 뺨을 발그레하게 물들이며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는 아니고…… 그냥 새 울음소리를 들으면아, 얘가 뭐라고 하는구나. 하고 알아듣는 정도예요. 장소도 이 정도는 해요.”

소년이 고개를 팩 돌려 장소를 바라보자 장소는 꾸물거리며 시선을 돌렸다.

“부끄러운데…… 해요?”

“얼마나 부끄러운지 한번 보자꾸나.”

소년의 재촉에 장소는 마지못해 창가에 섰다. 그리고는 한참을 망설이더니 마지못해 작은 소리로 외쳤다.

“나양~!”

“…….”

“…….”

방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침묵에 짓눌린 장소의 어깨를 보는 소년의 눈동자에는 서글픈 시름이 깃들었다.

아아. 우리는 장소에게 너무나도 심한 짓을 했구나. 고개를 푹 숙인채 어깨를 떠는 장소를 위로해 줄말을 찾던 소년의 눈이 창틀로 향했다. 창틀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바둥거리며 넘어오려 하고 있었다.

“고양이.”

“네? 아네. 저흰 고양이랑 그…… 좀 통하는 편이라.”

등에 검은 줄무늬가 있는 회색 고양이었다. 팔자 좋은 귀여운 얼굴에 나른한 듯 하품을 하던 녀석은 장소가 팔을 벌리자 폴짝 뛰어올라 그 품에 안겼다.

“안아보실래요?”

장소가 조심스럽게 소년의 무릎에 고양이를 내려주자 고양이는 금세 소년의 무릎 위에서 둥글게 몸을 말고 누웠다.

“귀엽구만.”

왜 난 애완동물 한 마리를 기를 생각을 못했을까. 사람의 체온보다 조금 더 뜨거운 털 뭉치를 쓰다듬으며 소년은 홀린 듯 중얼거렸다.

손가락 사이를 파고드는 보드라운 털의 감촉과 손아귀를 가득 채우는 뜨거운 온기. 소년은 태어나 처음으로 고양이라는 생명체가 얼마나 귀여운지를 깨달았다.

“저…… 가끔 불러올까요?”

장소가 조심스럽게 묻자 멍하니 고양이를 쓰다듬던 소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주방에는 털이 날리니 안 되겠지만…….

“뭐. 가끔은 괜찮겠구나.”

이 살벌한 후궁에서, 가끔은 마음의 위안거리가 필요한 법이다.

* * *

상처는 빠른 속도로 아물었다. 흰죽이었던 식사에 점점 건더기가 추가되고. 마침내 의원에게서 고기를 먹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을 때쯤.

소년은 혼자 힘으로 침대 밖을 거닐수 있게 되었다.

“좀 쉬었더니 다리 근육이 빠져서 후들거리는군.”

사람의 몸이란 이렇게나 나약하고 불성실한 것이다. 하지만 단단한 대지를 밟으며 자신의 힘만으로 걷는 그 사소한 즐거움은 후들거리는 다리마저 사랑스럽게 느껴지게 했다.

후궁의 돌담길 아래에 작게 피어난 야생화에 눈을 돌리며 쉬어갈 때 소년은 드디어 병석과의 결별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여유를 즐길 수는 없었다. 오늘 만나기로 한 사람은 다름 아닌 난화비였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숨을 돌린 소년은 다시 다리를 절뚝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아담하게 꾸며진 화원 안쪽으로 걷다 보면 나오는 큰 느티나무 아래.

느티나무를 시계방향으로 돌면 보이는 숨겨진 듯한 정원의 문.

그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미 손님 맞을 준비를 끝낸 난화비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간 격조하였습니다.”

존귀한 신분의 여인을 만나기 위해선 최소 한두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난화비는 케케묵은 관례를 보다 소년의 건강을 먼저 걱정했다.

“큰일이 있었다 들었어요.”

“허허, 별일 아니었습니다. 후궁에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소년이 농담을 던지자 난화비는 생긋 웃음 지었다. 그것만으로도 단풍이 떨어진 자리에 새순이 돋는 듯했다. 하지만 한순간 찾아온 봄은 난화비가 표정을 굳히며 스러졌다.

“범인은, 알아냈나요?”

단조로운 문장 속에서 소년은 그 마디마디에 스며든 난화비의 각오를 읽을 수 있었다.

그녀는 일평생 무에 몸담은 몸. 폭력은 익숙한 것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선 적을 쳐야 한다는 각오 또한 되어있을 것이다. 냉엄한 강철의 법을 몸으로 배웠을 테니.

하지만 적을 암살한다는 것은 다른 종류의 각오가 필요했다.

악의를 받아내는 각오가 아니라, 악의를 품을 수 있는 각오. 소년이 판단하길 난화비는 남의 악의를 버티고 받아낼 수는 있어도 남에게 악의를 가질 수는 없는 인물이었다.

“허허, 여간 독한 자들이 아니라 아무런 진척이 없습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분노한 태감은 암살자들의 배를 갈라 위장의 내용물로 그 흔적을 찾으려 했지만, 배를 갈라도 나오는 것은 멀건 위액뿐이었다.

암살하기 직전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증거. 자신들의 존재를 특정할 수 있는 모든 흔적을 지우고 살행을 결심한 그 독심에 태감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소년의 얼굴은 뱃가죽이 갈라진 사람치고는 태연하다 못해 온화함마저 느껴졌다.

그 나이 때의 아이가 큰일을 당했을 때 보일 수 있는 반응은 보통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공포에 떨던가. 혹은 복수에 불타오르던가.

하지만 난화비의 눈에 비친 소년은 그 두 가지 모두 포함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일도 있을 수 있다며 흐지부지 흘려넘기려는 듯한 반응.

난화비는 입술을 깨물었다.

“심증은 있을 텐데요.”

“아시다시피 태감께선 적이 많으신 분이신지라…….”

소년의 태도는 정중했지만, 그 속에 내재된 뜻을 읽지 못할 난화비가 아니었다. 그 완강한 거부의 뜻은 난화비에게 후궁의 더러운 일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소년과 태감의 뜻이었다. 마치 온실 속 화초를 대하는 듯한 태도.

그 사실에 분기가 치밀었지만, 그것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그 뜻은 온전히 난화비 자신의 안위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걱정과 배려의 뜻에 치기 어린 반응을 할 만큼 그녀는 어리지 않았다.

그저.

“그렇군요…… 그렇다면…… 어쩔수 없지요.”

그저 분할 뿐이었다. 정치적 기반이 부실하여 자신의 아군을 보호하는 것조차 버거운 자신의 처지에.

후궁에 매여 움직일 수 없는 답답함에.

그리고. 순간 안도감을 느껴버린 자신의 나약함에 난화비는 분노를 느꼈다. 그 누구보다도 소년이 피습당한 사건에 걱정하고 안달한 주제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결의한 주제에.

정작 싸움에서 빠지게 되니 안도감을 느낀 것이다.

이 얼마나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인가.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고 입술을 깨무는 난화비를 보며 소년은 할 필요 없었던 말을 꺼냈다.

“단풍이 멋지게 물들었군요.”

“예? 아아. 그렇지요. 올해는 유난히 붉게 물든 것 같아요.”

울긋불긋 물든 서난궁의 정원은 빼어나게 아름다웠다. 짙푸른 여름의 흔적을 벗어던진 나무들은 한순간만 즐길 수 있는 계절의 아름다움으로 가장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맥락 없이 찾아든 소년의 말은 난화비의 가슴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 말은 가을의 정취를 즐기며 여유를 찾자는 취지에서 한 말은 아니었다.

“곧 겨울이 오겠지요.”

소년의 혀끝에서 아릿한 독기가 느껴졌다. 아름다운 생명력을 뽐내던 가지가 앙상하게 메마르고 그 위로 흰 눈이 덮일 시간을. 쌓인 눈이 세상의 소리를 잡아먹고 시야를 흐릴 침묵의 나날을 소년은 말하고 있었다.

겨울이 오기 전. 가을의 문턱을 넘어설 때.

“서방에서…… 교역단이 오지요.”

“거기엔 황제 폐하를 뵈러 온 서방의 사절단이 포함되어 있지요.”

사막의 교역료를 너머, 이미 서방의 원양 항해단이 긁어모은 진귀한 물산이 제국의 심장으로 온다.

그리고 그것을 취급하는 것은 대대로 사절단의 대접을 책임지던 식방각주 총괄 조리장의 가문.

“금화 상단.”

나지막하게 그 이름을 입에 담는 난화비의 볼을 따라 한줄기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그녀의 외가 역시 복건성에서 세를 크게 일군 무역 상단인 만큼 사대상단이 얼마나 두껍고 무시무시한 벽인지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소년과 태감이 꾸민 계략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 제국의 상계에 어떤 지각변동을 일으킬 것인지도. 그녀의 뇌리에는 소름 끼치는 청사진이 그려졌다.

그녀의 눈동자가 당황스럽게 구르자 소년은 빙그레 웃었다.

“물론. 서한은 전달하셔도 좋습니다. 아직 시간이 넉넉하니, 복건성까지 도착하기엔 충분하겠지요.”

“괜찮……겠나요?”

“난화비 님께 좋은 일은 저희에게도 좋은 일이지요.”

난화비 님.

소년은 말을 하기 전 메마른 입술을 축이기 위해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그 얇고 갈라진 입술에 난화비의 시선이 멈추자 소년은 일부러 천천히 시간을 들여 입술을 열었다.

“겨울을 대비하십시오.”

“사상자가 없을 수는…… 없겠지요.”

“피가 흐르지 않는 전쟁은 없지요. 그것이 아무리 후궁에서 벌어지는 꽃의 전쟁이라 할지라도. 하지만 피가 흐르는 것을 최소화할 수는 있을 겁니다.”

난화비 님이라면요.

소년은 그 말을 끝으로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에게 배웅 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난화비는 소년이 떠난 공간을 멍하니 응시했다.

겨울이 온다. 누군가는 오직 혼자 힘만으로 버티려 할 테고, 누군가는 손잡은 이들과 체온을 나누며 버텨야 할 겨울이.

멍하니 비어 있던 난화비의 눈동자에 서서히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너무 과하게 이야기해 준 건가? 아니야. 이 정도는 언질을 해 두어야지.”

소년은 아직 쓰라림이 느껴지는 가슴팍에 손을 얹으며 난화비의 표정을 떠올렸다.

그녀는 강인한 여인이니, 분명 자신의 식수들을 잘 챙길 것이다. 남에게 악의를 휘두르진 못해도 자신의 식구를 위해 받아칠 수는 있는것이 난화비였으니. 소년은 그녀의 굳은 심지를 믿었다.

이제 남은 것은.

“허허, 잘 지냈는가?”

소년의 상념을 찢고 얇고 경쾌한 노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익숙하고, 절대 듣고 싶지 않았던 목소리. 소년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이거. 장 태감님 아니십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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