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의 요리사-121화 (121/314)

환관의 요리사 121화

활화산이 분화하는 것과도 같은 장렬한 포효에 위정과 태감이 구르듯이 방안으로 달려들었다. 그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는 틀림없이 소년의 것이었다.

모든 가능성이 가라앉은 절망의 바닷속에서 떠오르는 한순간의 행운을 찾아낸 것과 같은 얼굴로 방에 들어선 이들은 소년을 보고 얼어붙었다.

그것은 모든 희망을 빼앗긴 인간의 얼굴이었다. 쫓기고 도망치며 간신히 다다른 낙원의 땅에서 추방당한 사람의, 갈데없는 분노가 썩어 문드러진 얼굴.

소년은 수라도 야차도 아니었다.

지옥 밑바닥에 가라앉은 망자였다.

폐부를 찢는 것과도 같은 신음성을 흘리며 허덕이던 소년의 눈동자가 옆을 향해 돌았다, 유리알처럼 희번덕거리는 눈동자 안에 태감이 담기자 소년의 입에서 절망의 한숨이 멈추었다.

창백한 입술이 열리는 것을 기다리며, 동시에 그것이 열리지 않기를 기원하며 태감은 눈을 감았다. 저입에서 어떤 말이 튀어나올지, 자신을 책망하는 말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태감의 가슴을 시리게 했다.

소년은 말없이 붕대가 감긴 가슴팍으로 손을 가져갔다. 상처를 봉합한 가슴팍은 소름 끼치는 푸른색 대신 본래의 혈색을 되찾았다. 붕대에 젖어있는 피를 매만지며 소년은 몸을 일으켰다.

“하루쯤 지난 모양이군요.”

“그래.”

“식사는 하셨습니까?”

“아직이다.”

그렇습니까? 무난한 대답을 말하며 소년은 입을 쩍 벌려 하품했다. 게으른 소처럼 나른한 모습은 방금 전까지 독과의 사투를 벌인 환자라기 보다는 늦잠을 자고 일어난 노인에 가까웠다.

어떻게 독을 이겨낸 것일까. 그 누구보다도 기적을 바랐으나 막상 기적이 일어나자 태감은 그 사실에 대한 감사보다는 어째서 기적이 일어났는지를 생각했다.

“몸은 괜찮으냐?”

“찌뿌드드하고 쑤시는군요. 가슴이.”

“독에 당해서 그럴 거다.”

“아, 그렇습니까?”

기적은 일어날 수 없기에 기적인 것이다. 소년의 안색에선 점점 혈기가 돌아오기 시작했고 죽음의 그림자는 그에게서 멀어졌다.

그 사실에 놀라움을 느끼면서도 태감의 머리는 기쁨보다는 이유를 추적하는 쪽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오랜 정치 생활로 다져진 본능이었다.

해약이 없다고 알려진 맹독이다.

그뿐만 아니라 배에 칼침을 맞았으며 몸 또한 비루한 어린아이의 몸이었다.

세상 어느 누가 저 상태에서, 죽음의 끝자락에서 돌아올 수 있을까.

일족 모두가 전사였던 초원의 주인. 늑대의 자손들이라 할지라도 불가능할 것이다.

열흘을 굶고 열흘을 자지 않아도 지치질 않는다던 투쟁의 화신들이라 할지라도 몸의 체온을 빼앗아 심장을 멈추게 만드는 청각사의 독을 이겨내지는 못할 것이다.

독이라면 천하제일이라는 뱀의 자손이라면 어떨까. 그들이라면 청각사의 독도 버텨낼 수 있겠지. 하지만 선천적으로 독을 타고나며 병약하게 태어난 그들은 상처를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다.

심장을 파고드는 맹독을 이겨내고 배를 꿰뚫린 상처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생명력. 제국에서 단 하나의 핏줄만이 그런 강인함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 혈통은-

“왜 그러십니까?”

“…….”

태감은 자신의 간사함에 실망했다.

기적이 일어나기를 원치 않았는가.

만약 그렇게 된다면. 소년이 다시 일어나 주기만 한다면 그 어떠한 대가라도 지불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는가.

그런 주제에 막상 소년이 살아나니 그는 기쁨과 환희 대신 차가운 것만을 생각하며 소년의 생환을 축하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에게 좀 더 관심을 가지지 못한것을 자책한 주제에. 그 때문에 이런 참담함을 맛본 주제에. 자신은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이성이 아니었다.

태감은 말없이 소년에게 달려들었다. 그 왜소한 어깨에 팔을 두르고 차갑게 굳은 목에 얼굴을 파묻었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이것이었다. 미래와 타산을 따지지 않은 현재의 뜨거운 축하와 감사.

그것만이 지금 순간 소년에게 보내야 할 모든 것이었다. 소년을 끌어안은 채 태감은 그의 심장 고동을 들었다.

작고 느리지만. 심장은 확실하게 뛰고 있었다.

“고맙다. 죽지 않아 줘서.”

날 떠나지 않아 줘서.

흔들리는 온기와 함께 속삭이듯 스며든 태감의 말은 소년의 발목에 미련이라는 사슬을 채웠다. 눈앞에서 아른거리던 자유의 땅에 대한 미련을 잠시 접고, 소년은 태감의 등을 가만히 두드려 주었다.

“밥이나 먹읍시다.”

그 일상적인 한마디에 태감이 펄쩍 뛰어올랐다.

“미쳤구나. 배에 칼을 맞은 것을 잊었느냐?”

“살다 보면 칼침도 좀 맞고 그러는 거지, 별걸 가지고 호들갑을.”

“어허, 봉합이 되기는 했다만 잘못하면 복압 때문에 상처가 터져서 내장이 빠져나올 수도 있어. 상처가 아물기 전까지는 무리하면 안 된다.”

“의원 말 다 들으면서 살 수 있습니까? 다 융통성 있게 사는 거지.”

껄껄 웃으며 침대 밖으로 다리를 내미는 소년을 잡아 누르며 태감은 드물게 엄한 태도를 보였다.

“칼을 맞은 주제에 융통성을 찾느냐. 안된다면 안된다. 최소한 한 달은 누워있어야지.”

“참 내, 그러다 상처는 커녕 좀이 쑤셔서 죽겠습니다.”

“그러면 양지 바른 곳에 묻어주마.”

하는 수 없이 이불을 끌어올린 소년은 마침 생각났다는 듯이 태감에게 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 삼이랑 장소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 참. 네가 깨어난 걸 알려줘야지. 위정.”

위정이 잠시 자리를 비운 동안 태감은 침대 위에 걸터앉아 그간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흠, 뭐 암살자를 보낸 건 뻔하지요.”

“속단할 수는 없는 문제다. 나는 적이 많고, 넌 너무 노출되었어.”

그래서 가능한 너를 그저 만담꾼으로서 두고 싶었지만…… 태감의 말에 소년은 난처한 듯 웃었다.

“어쩔 수 없었지 않습니까.”

“그래. 어쩔 수 없었지. 하지만.”

“나도 살았고, 홍엽비님도 살았지요. 그거면 된 것 아닙니까.”

많은 일이 있었구나. 소년은 어째서 태감과 이리도 빨리 가까워진 것인지, 어째서 이토록 그와 감정을 나누었는지를 어렴풋이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사귄 시간은 짧지만 그를 위하여 일하고, 그와 함께 정치의 사선을 넘으며 동질감이라는 것이, 정이라는 것이 싹터 버린 것이다.

정말로 많은 일이 있었구나. 못다 이룬 것이 많았지만 이미 이룬 것도 충분히 많았다. 홍엽비뢰 심병을 치유하고, 난화비의 파벌을 만드는데 일조하였으며 표자승과 함께 경사에 새로운 차 문화를 유행시켰다.

금군의 우수한 무장과 연결고리를 만들었고 황제 폐하의 상을 차려보기까지 했으니.

그러니 후련하게 떨어진 거군. 아득했던 광경은 눈에서 지우며 소년은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이렇게 병석에 누워 창밖을 보니 꼭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소녀가 된 기분이군.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웃음 지은 소년은 창밖에서 기이한 것을 발견했다. 마지막 잎새는 아니었지만, 마치 먹잇감을 찾아 날아드는 매처럼 장소와 이삼이 창문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태감!”

소년보다 조금 늦게 그들을 발견한 태감이 황급히 창문을 열었다. 급강하 한 매처럼 창문을 통해 날아든 둘은 완벽한 자세로 낙법을 취했다.

“애들아. 다음번엔 급해도 문을 이용하자꾸나.”

“괜찮으세요?!”

“어허허, 어른 말은 귓등으로도 안듣는 걸 보니 청춘이로구나.”

땀에 흠뻑 젖은 채로 달라붙어 오는 둘을 밀어내며 소년은 그들의 고된 훈련의 흔적을 보았다.

자기 학대에 가까운 수련을 반복하며 꾀죄죄하고 더러워진 아이들의 손은 물집이 터져 피가 묻어 있었다.

“가서 씻고 이만 자라.”

“그래도 호위는…….”

“호위는 무슨. 살다 보면 칼빵도 맞을 수 있지.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 호들갑 떨지 마!”

소년이 윽박지르자 아이들은 금세 까르르 웃었다. 어서 씻으러 가라며 재촉하는 소년에게서 도망치기 전, 아이들은 소년에게 다가와 거칠고 투박한 손을 쥐었다.

“다음번엔 반드시.”

“지켜드릴게요.”

아이들이 잰걸음으로 방을 빠져나갈 때까지, 소년은 멍하니 그 뒷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아이란 이렇게 모르는 사이에 불쑥 커버린단 말이지.”

“애도 없는 양반이…….”

“넌 있었느냐?”

“할 말이 없군요.”

그 말을 끝으로 소년은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피곤했으리라. 독을 이겨내고, 상처도 아직 아물지 않은 몸이니. 그의 목까지 이불을 끌어올려주며 태감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다행이구나.”

살아남아서. 정말로-

“다행이지요.”

이죽거리는 장 태감의 얼굴을 보며 안양비는 오랜만에 맨주먹으로 사람을 때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일부러 쓰디쓴 차를 준비했지만 장태감은 느물거리는 미소로 승리의 잔을 달게 들이켰다.

그 모습에 안양비는 부루퉁하게 물었다.

“어째서 그리도 확신하는 건지 모르겠구려.”

그자가 중독된 독이 무엇인지, 자네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안양비의 말에 장 태감이 입꼬리를 길게 찢었다. 그 웃음은 창밖의 달빛이 드리운 그늘 속에서 한없이 길게 늘어졌다.

“청각사의 독이라. 확실히 좋은 독을 구하셨습니다.”

“이런 일에 돈을 아끼는 성격은 아니라.”

“헛돈을 쓰셨으니 속이 아프시겠습니다.”

장 태감의 조롱에 안양비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먹잇감을 응시하는 범과도 같은 기세에 장 태감은 뒷덜미가 서늘하다는 듯이 손을 가져가 뒷목을 쓸어내렸다.

“해약이 없다는 독이요. 제아무리 태의를 불러다 다그쳐도 용빼는 재주가 있을 리 있나. 거기에 복부에는 칼까지 맞지 않았소. 설령 독을 쓰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중상이요. 사경을 헤멜 만한.”

그런데 어찌 그리 생존을 확신하는거요.

안양비는 손에 한껏 힘을 그러쥔 채 물었다.

자신을 보며 아직 어리다는 듯이 보는 장 태감에게 수틀리면 주먹을 날릴 준비를 하고서. 그 살벌한 기세에 솜털이 곤두서는 것을 즐기며 장 태감은 확신의 이유를 들려주었다.

“목이 잘리지 않고, 심장이 꿰뚫리지 않았다면. 그 친구는 반드시 살아날 겁니다. 장담하지요.”

“이유가 빠져있군.”

“그럴 친구니까요.”

안양비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확신이었다. 건장한 장사라도 칼을 맞으면 사경을 헤매고 재수 없는 건 죽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거기에 해약 없는 맹독까지 더했는데도, 그는 어찌 그리 흔들림 없이 살아 있을 것을 믿는 것일까.

“이해할 수 없는 일이오. 내가 아는 사람 중 자네는 가장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었소. 그런데 지금은 지나칠 정도로 미신적이군.”

내가 알던 사람이 맞는가? 안양비의 힐난에 장 태감은 음흉한 미소로 그녀를 도발했다.

“믿음은 안양비 님의 자유지요. 뭐, 정 그러시면 내기를 하지요.”

“내기라. 그러고 보니 저번에 그런 이야기를 했었지.”

탐탁지 않다는 듯 뒷말을 흐리는 안양비를 보며 장 태감은 시선을 먼곳으로 던졌다. 마치 조금도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이 가볍게, 그야말로 그림과도 같은 도발이었다.

“뭐, 영 그러시면 그냥 무르시지요. 없었던 일로 하시고…….”

육중한 충격이 탁자 위를 덮쳤다.

전율의 일격을 내려친 안양비에게선 폐부 안쪽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의 신음이 들렸다. 과연 참을 수 있을 것인가? 상대는 이미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의 노인이었다!

“아주…… 재미있는 말을 하는군……!”

안양비의 이성은 간신히 살육의 충동을 억눌렀다. 제아무리 안양비라도 관을 눈앞에 두고 있을 나이의 노인에게 주먹을 날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본능을 억누르는데 모든 힘을 소모한 이성은 장 태감의 이성을 거절해야 한다는 생각을 더 이상 떠올리지 못했다.

평소였다면 그의 제안이 단순한 허세인지, 그도 아니면 다른 수가 있는지를 생각하고 검토했을 것이다.

교활하기로는 천 년 묵은 뱀보다도 교활하고 음흉하기로는 꼬리 아홉개 달린 여우보다도 음흉한 장 태감의 내기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얼마나 미친 짓인지,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평소의 안양비라면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래 내기…… 내기 조오읗지……아주 조오오오오오옺고말고. ”

“허허……. 힘이 좀 과다하게 들어가신 것 같습니다?”

“글쎄. 잘못 들은 것 아니겠소. 나이를 먹은 게지. 이참에 재능있는 젊은 친구들에게 자리를 물려주는것도 생각해 보시구려.”

“허허허, 아주 약이 바짝 오르셨군요. 이 노인네의 건강도 염려해 주시고. 뭐, 다시 말씀드리지만 꼭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쾨드득. 섬뜩한 소리와 함께 단단하기로는 도끼가 이가 나간다는 흑단나무 재질의 탁자 귀퉁이가 안양비의 손에서 쥐어 짜였다.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를 하듯이 안양비의 신경을 건드리던 장 태감은 자신이 위험한 장난에 너무 심취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헛소리는 작작하고…… 내기의 주제나 한번 말해보시오.”

“뭐, 처음과 같습니다. 소년이 독을 이기지 못하고 죽으면 안양비 님의 승리. 소년이 독을 이겨낸다면 저의 승리인 것이지요.”

“내기라면 당연히 걸린 상이 있어야 하지 않겠소.”

내기라면 응당 따라야 할 보상의 문제에 들어서자 장 태감은 거북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오랜만에 안양비의 꼬투리를 잡고 놀린 것이 즐거워서 일을 벌인 것 뿐이기에, 막상 보상을 걸자 하니 곤란해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모시는 상관에게 금품 따위를 요구할 수는 없지 않은가? 장 태감은 어른스러운 미소를 띠며 고개를 저었다.

“그저 지루함을 피하기 위한 잠깐의 여흥일 뿐인데, 꼭 그럴 필요까지야…….”

빠드드드득!

이번엔 안양비의 입속에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치 사냥감의 뼈를 씹는 범과 같은 모습에 장 태감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무슨 소리요…… 자고로 내기라 하면 걸린 상품이 있어야 서로 의욕이 나지 않겠소. 사양 말고 원하는것이 있으면 말해보시구려.”

그러지 않는다면 죽이겠다.

라는 노골적인 협박의 눈빛에 장 태감이 떠듬거리며 대답했다.

“어…… 그…… 그럼…… 아. 저번에 선물 받으신 귀한 차가 있으셨지요? 봉례옥침(鳳酸玉針). 그걸 받도록 하지요.”

“그래…… 옥린비가 선물한 차로군…… 그럼 난 태감의 목을 받도록할까…….”

“안양비 님?”

“내기, 무르기 없기요.”

그 순간 장 태감은 태어난 이래 가장 간절하게 하늘에 계신 용에게 소원을 빌었다. 부디 소년이 완쾌되기를. 부디 건강을 되찾기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