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의 요리사-120화 (120/314)

환관의 요리사 120화

제국의 주인이며 만백성의 아버지.

위대하신 용의 자손이신 황제 폐하의 용체에 유일하게 손을 올릴 수 있도록 허락받은 남자.

태의전의 전주이며 황실의 주치의인 태의(太醫) 황정승은 평소 자존심이 강한 남자였다.

어느 누가 존귀하신 용의 혈통을 이어받으신 황제 폐하의 용체를 진찰할 수 있겠는가. 전 제국에서 오직 자신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그의 자존심은 오만이 아닌 자부심이라 불러야 마땅한 것이었다.

그러니 평소였다면, 사례 태감 본인도 아니고 여물지도 않은 후궁의 상호 따위를 진찰해 달라는 무례한 부탁 따윈 대번에 내쳤을 것이다.

제아무리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사례 태감이라 할지라도 이런 청은 받아들일 수 없다.

정식으로 요청서를 보낸 것도 아니고, 그 환자가 지체 높은 고관도 아니며. 이렇게 늦은 밤에 기별도 없이 찾아와 다짜고짜 사람을 고치라니! 이것이 존귀한 태의를 대접하는 태도인가?!

어찌 사례 태감씩이나 되는 자가 이리 예의와 법도를 무시하고 방자하게 행동한단 말인가!

폐부에서 끓어오르는 통렬한 한마디는 끝내 입 밖으로 내뱉어지지 못했다. 자신의 반의반도 살지 못했을 청년의 서늘한 눈동자는 닮고 닮은 노인의 무뎌진 심장을 공포에 떨게했다.

“어떻습니까.”

“이…… 일단 내부의 피와 고름은 전부 닦아냈습니다. 다행히 칼이 내장을 피하여 장이 다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가면 안쪽에서 번뜩이는 눈의 움직임에 황정승은 움츠러들었다. 사례태감의 눈에는 상처를 입은 부하를 위한 애도의 감정이 조금도 담겨 있지 않았다.

사람을 가치와 이익으로만 나누는 비인간적인 괴물. 그런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후궁 권력의 정점을 찍은 남자의 독기는 늙은 의원이 버틸만한 것이 아니었다.

“칼날에 발라져 있던 독이 문제입니다.”

그 순간 황정승은 눈앞의 사람 같지 않은 환관이 자신의 멱살을 틀어쥐리라 생각했다. 그러고는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고쳐내라고 고함을 지르겠지. 만약 못한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그 자리에서 칼을 뽑아 들지도 모른다. 태의라는 간판 따윈 이자에게 아무런 장애물도 되지 않을 거야.

“무슨 독이지요?”

“운남의 금지로 유명한 독곡(毒谷).그 독곡에서만 산다는 청각사(靑角蛇)의 독입니다.”

청각사. 운남의 절지에서만 사는 푸른 뿔이 난 뱀의 전설은 이 머나먼 경사까지도 퍼져 있었다. 굵기는 새끼손톱만 하고 길이는 두 뼘도 채 안 되는 것이 독기로는 일절이요 해독이 어렵기로는 천하제일이라.

전설상의 화타나 편작이 오지 않고 서야 해독할 수 없을 독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황정승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미 손주를 볼 나이에 초라하고 부끄러운 태도였으나 죽음 앞에선 모두가 평등한 인간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생각한 욕설과 비난은 들려오지 않았고, 그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렇군요. 청각사라. 독을 중화할 수는 없습니까?”

“몸의 양기를 보하는 약을 만들 수는 있습니다만, 가뜩이나 강한 독기에 찌든 환자의 몸에 강한 약이 들어가면 오히려 간장을 망가뜨릴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저 자연적인 치유력에 맞길 수밖에 없겠군요.”

“예……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사실상 사망 선고에 가까운 말이었다. 주워 담을 수 없는 선언을 말하며 황정승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미동도 없는 사례 태감의 눈동자에서 마지막 온기마저 빠져나갔다. 그런가 하고 중얼거리는 사례 태감에게선 일말의 희망도, 하다못해 우수한 부하의 죽음으로 인하여 생기는 손실을 아쉬워 하는 기색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어째서 그렇게 보는 것이오. 당신의 부하가 아니오. 그 올바른 말을 토해내지 않기 위해 황정승은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깨물었다.

저 비늘 없는 뱀과도 같은 자를 보고만 있으면 자꾸 자신의 스러진 양심이란 것이 고개를 쳐들고 날될것만 같았다.

말한다면 자신의 목도 온전하지는 않겠지만, 황정승은 태감에게 묻고 싶었다.

당신의 명령을 수행하고, 충성을 다한 부하가 아니냐. 당신을 위해살고, 당신을 위해 죽은 사람을, 여물지도 않은 어린 소년의 목숨을 받아간 주제에 어째서 그리도 차갑고 무정하게 서 있는 거냐.

기르는 개가 죽어도 그것보다는 슬퍼하는 것이 사람일진대. 네놈은 사람도 아니란 말이냐.

“수고하셨습니다.”

그저 태의의 말을 이해했다는 듯 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인 태감은 황정승의 수고에 감사를 표했다.

그 의례적인 한마디에 황정승은 척추를 타고 소름이 기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자신과 같은 하늘 아래에 이런 자가 있다는 사실을, 그가 자신과 같은 붉은 피가 흐르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도망치듯 자리를 피하고 잠시후.

“이제 괜찮습니다.”

그림자처럼 태감의 뒤에서 있던 위정이 황정승이 떠난 것을 확인하고 태감에게 말했다.

“그래, 그는 갔는가.”

태감은 천천히 가면으로 손을 가져갔다. 흑단으로 만들어진 광택이 흐르는 가면. 그의 반평생을 써온 가면을 벗기 전까지는 그는 화낼 수 없었다.

가면은 동창의 제독이자 사례감의 태감임을 증명하는 것이었으니까.

그 자리 위에선 결코 동요할 수 없었기에, 태감은 가면을 벗기까지 결코 화를 내지 않았다.

천천히, 가면을 쥔 태감의 손에선 가는 핏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전날소년이 흘렸던 것과 같은 붉은 핏방울. 핏방울이 새카만 가면을 적셨다.

“무관심했구나.”

희미하게 흔들리는 목소리는 물기에 젖어 있었다. 황제를 위해 사는 자가. 많은 사람의 목숨을 책임지는 자로서 결단코 보일 수 없는 약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위정은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동창의 제독. 사례감의 태감도 결국은 사람인 것이다. 붉은 피가 흐르는. 어깨를 떨며, 흐느낌에 가까워진 감정을 추스르며 애쓰며 태감은 창백하게 질린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감아둔 붕대 아래의 환부는 기이한 푸른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좀 더 마음을 썼어야 했다. 좀 더 그에게 신경 쓰지 못한, 그를 배려하지 못한 나의 잘못이다. 내가 그에게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베풀어 주었는데, 그가 나에게 내어준 것의 백분의 일 만큼도 나는 그에게 보답하지 못했다. 그가 위험한 길을 걸어갈 때, 나는 낙관 속에 그를 버려두었다.”

그 때문에 그는 이렇게 침상에 누워 있구나.

태감의 목소리 속에선 점점 물기가 말라 들었다. 가슴 시린 자책과 살점을 파먹는 자기혐오를 토해내는 태감 앞에서 위정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흔한 위로의 한마디조차.

그도 태감께서 자책하시길 원치 않을 것이다. 그라면 분명 금방 털고 일어날 것이다.

따위의 값싼 위로의 말들.

그런 말들은 얼마나 무성의하고, 무책임한가. 배려라는 탈을 쓰고 흙발로 들어와 남의 심장을 짓밟아 버리지 않는가. 그렇기에 위정은 침묵했다.

태감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점점 싸늘하게 식어가는 소년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정치가란 자신을 위해 눈물을 흘려도 무방한 자리가 아니었다.

정치가의 눈물은, 오롯이 선동과 기만을 위해서만 흘려져야 한다.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눈물을 흘릴 수는 없었다.

“업무가 바쁘다는, 비는 손이 없다는 것을 핑계 삼아 나는 그에게 차디찬 것만을 쥐여주고야 말았구나.”

태감은 소년의 얼굴을 향해 손을 가져갔다. 좁은 이마. 찌그러진 듯한 귀. 가느다란 눈썹 아래로 날카롭게 찢어진 눈이 있고. 그 아래로 자리잡은 것은 옹졸한 매부리코와 얇은 입술의 큰 입.

그 큰 입을 쩍 벌리고 껄껄 웃으며 주방에서 있는 소년은 불꽃을 끌어안고 칼을 수족처럼 놀리던 그 모습은 아름다웠다.

태감은 그 순간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뜨겁게 맥동하는 그 모습은 꼬리를 길게 늘어뜨린 별똥별처럼 찬란했고 끓어오르는 쇳물처럼 강렬했다.

그런 그가 자신만을 위하여 요리를 만들어주었다. 불편한 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나만을 위해서 요리해 주었다. 나만을 위해서 일해주었다. 핏물을 삼키고 칼날 위를 걷는 후궁의 정치판을 오직 나만을 위해서 뛰어주었다.

지쳤을 텐데도. 지난 생의 기억에 찌들었을 텐데도. 그는 나를 위해서 뜨겁게 타올라 주었다. 그토록 뜨겁고, 그토록 아름다웠던 사람이.

이렇게나 차갑게 식어버렸다는 사실은 태감의 모든 눈물을 빼앗았다.

소년에서 손을 땐 태감은 건조한 목소리로 위정에게 명령했다.

“배후는 찾았나.”

“암살자들에게선 특징을 잡을 수 없더군요.”

무기는 이미 폐업한 지 오래된 철방의 물건이었고 의복 또한 마찬가지였다. 신체에는 암살자들이 자신들의 신분을 증명하기 위해 흔히 새기는 흉터나 문신 또한 없었다.

마치 단 한 번의 일을 위해 길러진 것처럼.

소모품과도 같이 만들어진 암살자들을 이야기하며 위정은 그 과묵한 표정을 잠시 일그러뜨렸다.

“일단은 동창의 요원들을 동원해 수배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배를 갈라라.”

“예?”

“배를 갈라서 그 내용물을 확인해. 살행을 나가기 전 자살을 결의했다면 분명 최후의 만찬을 즐겼겠지. 아직 소화되지 않은 내용물을 찾아봐.”

위정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태감은 잠시 소년의 가슴 기복을 지켜 보며 고개를 돌리지 않고 물었다.

“장소와 이삼은.”

“……수련 중입니다. 계속.”

소년이 경사 외곽에 마련된 동창의 안전가옥으로 실려온 이래 장소와 이삼은 계속 훈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잠도 자지 않고. 식사도 하지 않으며. 그 자기 파괴적인 훈련은 틀림없이 죄책감에 대한 도피이리라. 태감은 고개를 저었다.

“이만 쉬라고 전해줘. 명령이란 말도 더해서.”

“알겠습니다.”

태감의 용무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하지만 위정의 용무는 끝이 아니었다. 바위처럼 문을 가로막은 채. 태감은 본능적으로 그가 결단을 요구하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녀석은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위정.”

“이겨내지 못할 겁니다. 애초에 성한 몸도 아니었던 녀석입니다. 계속 고통받게 둘 수는 없습니다.”

이대로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는 꼴을 두고 보실 생각입니까. 소년에게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존엄을 요구하는 위정의 말에 태감은 입술을 깨물었다.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지 않으냐.”

“예. 있지요. 하늘로 승천하신 금룡께서 다시 내려오신다면 가능할 수도 있지요.”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소년이 지금까지 버틴 것도 특별한 혈통을 타고났기 때문이란 것을 위정은 알고 있었다.

만약 평범한 어린아이였다면 고통받을 일도 없었을 것을. 칼을 맞는 순간 그대로 절명하여 고통 없이 떠나갔을 것을. 질기디질긴 피는 그에게 고통의 순간을 끝없이 연장하고 있었다.

그러니 자비롭게 보내주는 것이 옳다. 태감은 그 보편타당한 말을 거부했다.

“안다. 네가 옳다는 것은 알아. 내가 그에게 보여줄 수 있는 마지막 자비가 고통스럽지 않게 보내주는 것뿐이라는 사실도, 안다.”

하지만 그래도 믿고 싶구나.

열리지 않을 입술에서 나오지 않을 말을 기대하며, 태감은 소년의 옆에 주저앉았다.

* * *

물속에 가라앉은 것만 같은. 색과 소리가 사라진 세계에서 소년은 자신의 기억을 회상했다. 가장 즐거웠던 기억과 가장 슬프고 힘들었던 기억은 늘 함께 떠올랐으며 소년이 열광하고 슬퍼하고 흐느낄 때마다 소년의 몸은 더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

가장 젊고 활기찬 시절의 자신이 보였다. 처음으로 누군가를 사랑했고, 그 여운이 가슴에 새겨지기도 전에 사랑을 떠나보낸 젊음이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사회적으로 가장 인정받았던 시절의 자신이 보였다. 큰 대회에 나가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고, 가장 친하다고 생각했던 동료와 의견 다툼을 하던 도중 갈라서 버렸다.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한 동료의 얼굴이 그에게서 멀어졌다.

검은 머리가 반백이 되어가고, 거의 회색에 가까워진 시절의 자신이 보였다.

전 세계를 떠돌아다니며 돈을 벌고 명성을 높인 끝에 자신만의 가게를 세우게 된 자신이. 모든 것을 이뤘다고 생각한 그 날의 죽음이. 자신의 꿈이었으며 인생의 마지막 도전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그의 품을 빠져나갔다.

달콤하고 향긋한 기억들은 휘발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아프고 잊고 싶은 것들은 그를 빠져나가며 흉터를 남겼다.

그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며 소년은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은 소년의 입안에서 응어리져 흘러내렸다.

후회와 원망 속에서 몸부림치며 한 없는 추락감을 느끼던 소년은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기억들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그렇구나. 저게 주마등이라는 거로군. 죽는 것은 두 번이지만 보는 것은 처음인걸.

그리고 소년은 자연스레 자신이 두번째 죽음 앞에 당도 했다는 사실 또한 깨달을 수 있었다.

기억은 점점 최근의 것들로 변해갔다. 후궁의 이름 없는 노비에서 태감의 수하가 되고. 이름을 받고. 그에게 요리를 해주었던 기억들.

힘들고 두려웠지만, 결코 전생의 것보다 못하지 않았던 두 번째 인생의 기억들. 남겨두고 온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과 자신을 죽인 적에 대한 증오 또한 추락감 속에서 점점 날아가 버렸다.

후련함. 가슴을 비워나가며 소년. 김승조의 가슴 속엔 시원한 바람이 스며들었다.

모든 것이 완벽할 수는 없지. 이만하면 제법 이룰 것도 이루고, 즐거웠다고 생각하자.

다음 생에 대한 두려움도, 못다 이룬 것에 대한 미련도. 하나둘 그의 몸에서 빠져나가며 김승조는 점점 더 빠르게 떨어졌다.

색도 없고 소리도 없는 세계에 점차 빛이 깃들고, 남겨둔 이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기 직전. 김승조의 눈에 무채색의 세계를 파고드는 강렬한 섬광이 보였다. 자신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떨어지는 수없이 많은 색의 집합체.

그것은 김승조를 휘감고 그를 다시 후회와 미련의 세계로 끌어 올렸다.

아직 이루지 못한 것이 남아서일까.

피지 못한 꽃이 아쉬워서일까.

오욕과 번민이 끊긴 자유의 세계를 눈앞에서 빼앗긴 순간. 김승조에게.

소년에게 남은 것은 제 죽음조차 제뜻대로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끝없는 분노였다.

이-

“개자식아!!!”

소년이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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