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117화
명문가 의자제는 남들보다 늦게 일어나는 법이다. 대대로 진사를 배줄한 것으로 유명한 명문 정가의 독자. 정 판사의 기상은 늘 이미 해가 중천에 뜬 이후의 일이었다.
세상이 어지럽고 혼란하니 명가의 자제이자 장차 용림원(龍林院)의 대학사가 될 그로서 어찌 단잠에 들수 있겠는가.
술 한잔에 달을 안주 삼으며 세상시름을 잊은 탓에 아침부터 까끌거리는 목을 부여잡고 일어난 정 판사는 마른기침을 하며 하인을 불렀다.
“게 아무도 없느냐?”
“도련님. 기침하셨습니까? 조반을 차려올릴까요?”
때는 이미 점심이 지난 시간이었지만 정 판사의 개 쪽 같은 성격을 익히 하는 하인은 그의 성미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조반이라 말했다.
“아니다. 내 목이 칼칼하니 밥은 되었고, 꿀물이나 한잔 진하게 타오거라.”
“예이~”
천한 것들이야 해장을 위해 아침부터 걸쭉한 국물을 찾는다지만 어찌반가 의자제가 품위 없이 아침부터 얼큰한 국물을 찾겠는가.
깔끔하고 진한 꿀물을 들이켜 기운을 회복한 정 판사는 기분 좋게 옷을 내오라 큰소리를 쳤다.
“제일 좋은 옷을 내오거라!”
“예이, 그럼 저번에 안휘성에서 들여온 비단으로 새로 지은 옷을 가져올깝쇼?”
“그래. 신은 수사슴 가죽신을 가져오고 가락지는 내 평소 끼는 옥가락지와 은가락지를 가져오거라. 그리고 요대는 대모갑을 댄 것을 가져오도록.”
자고로 유생이라면 그 품격에 어울리는 옷을 입어야 하는 법. 값비싼 비단옷을 차려입은 정 판사는 마지막으로 손때묻은 책을 옆구리에 끼어나갈 채비를 했다. 물론, 그 손때는 책의 겉장에만 묻은 것이었다.
“내 친구들과 나라의 중요한 앞날에 대하여 긴히 할 말이 있으니 아버님께 가서 전냥을 좀 채워달라고 네가 부탁 좀 드리거라.”
정 판사가 자신의 텅 빈 비단 전냥을 내밀자 하인은 사색이 되어 고개를 저었다.
“아이고 도련님, 저번에 정 진사 어르신이 한 번만 더 돈을 탕진하고 오시면 아주 매를 단단히 드시겠다 하셨습니다요!”
“이놈이! 장부가 나서려면 주머니가 두둑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느냐?! 나라의 앞날이 바람 앞의 등불과 같거늘! 군자라면 당연히 우애깊은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대비를 해야 할지언데! 주머니가 비어나서지 못한다면 뭇 사람들이 이 정판사를 우습게 볼 것이 아니냐! 네 단매에 네놈을 때려죽이기 전에 퍼뜩 달려가지 못할까!”
장부는 자고로 전냥이 두둑해야 하는 법. 두둑한 전낭 때문에 흘러내리는 요대를 부여잡으며 정 판사는 장원을 나섰다.
자, 자고로 군자라면 고즈넉한 곳에서 차와 함께해 공부하는 법 아니겠는가. 그리고 요즘 경사에서 가장 인기 있는 다관이라면 역시 품격과 유행을 모두 잡은 막심이겠지.
“그러고 보니 이번에 새로운 다관이 개업했다고 들은 것 같은데…….상춘화였나?”
듣기로는 거친 세상에 상처 입은 남성들을 따스한 가배와 함께 위로 해주는 가게라고 하던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요즘 나라의 장래에 대한 걱정과 밤을 지새우며 공부에 몰두한 탓에 심심이 몹시 지친 것 같기도 하다.
“흠흠, 아무리 굳센 장부라도 때론 보드라운 여인의 손에 위로받고 싶은 법. 이를 어찌 흉이라 할 수 있겠는가.”
물론 정 판사는 섭섭하게 혼자서만 좋은 것을 누리는 소인배는 아니었다. 좋은 것은 함께 누려야 더 가치있는 것 아니겠는가.
기분 좋게 다관에 들어선 정 판사는 늘 자신들만을 위해 예약이 되어 있는 다관 막심의 난 실로 들어갔다.
“오오, 정 형 왔소?”
“오늘은 좀 늦으셨구려.”
“하하, 보름달을 벗 삼아 책에 몰두하다 보니…….”
“역시 미래의 용림원 대학사다우시오.”
손이 곱고 얼굴 멀끔한 유생들이 비단옷을 펄럭거리며 그를 위해 자리를 마련하자 정 판사는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자리에 앉았다.
옆구리에 끼고 온 책은 이미 바닥 한구석에 밀어 넣은 후였다.
“정 형이 오실 줄 알고 미리 주문해놨지. 설탕은 몇 개나 넣으시겠소?”
바삭바삭하고 결이 살아있는 페이스트리인 소피(酥皮)와 우유를 듬뿍넣은 진한 가배 한 잔.
군자의 시름을 잊게 하는 향긋함에 정 판사의 입가가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소피는 특히 정 판사가 좋아하는 설탕을 듬뿍 뿌리고 팥소를 채워 넣은 것이었다.
“크흠, 설탕은 그……세 개 정도면 적당할 것 같소.”
뜨거운 갈색 거품 위로 풍당풍당 설탕 조각이 떨어지고 잠시 후 쌉싸름한 향기가 부드럽고 풍성한 달콤함에 누그러지자 정 판사는 우아하게 찻잔을 들어 올렸다.
윽, 조금 쓰군. 정 판사가 남모르게 설탕 단지를 집어 드는 동안 모여앉은 유생들은 각자 주문한 가배를 마시고 달콤한 과자를 집어 먹으며 나라의 장래에 관한 토론을 시작했다.
“큰일이 아닐 수 없소. 무관에게서 시작된 불꽃이 문관에게까지 옮겨붙다니…….”
“황제 폐하께서도 너무하신 것 아니오? 그간의 공은 무시하시고 허물만을 그리 잡으려 하시다니! 그간 우리 학자들이 나라에 바친 충성을 생각해주시지 않으시고!”
“우리도 미래의 관리로서 가만있을 수 없소. 이럴 때야말로 반가의 자제들인 우리 유생들이 힘을 모아야 할 때가 아니겠소?”
열변을 토하는 친구들을 보며 정판사는 마음에 뿌듯함이 차오르는것을 느꼈다.
젊은이들이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며 몸을 불사르니 분명 제국의 앞날은 밝을 것이 틀림없다!
이 무리에 껴있다는 사실에 무한한 자부심을 느끼며 정 판사도 한마디 내뱉었다.
“이럴 게 아니라 우리 유생들의 의견을 대표하여 황제 폐하께 상소문을 올려야 하지 않겠소?”
위대하신 용의 아들께서도 우리 젊은 유생들의 하나 된 의견을 무시하지는 못하실 거요! 정 판사의 급진적인 의견에 주변 유생들이 난색을 표했다.
“커 흠…… 상소문은 좀…….”
“뭐 그렇게까지 할 것 있을까 싶기도 하고…….”
“아무리 그래도 나라의 주인이신 폐하께 그런 불충을…… 어흠…….”
한순간에 분위기가 냉각되자 정 판사는 어쩔 줄을 모르며 헛기침을 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이 바로 권유할 때가 아닐까?
마침 전낭도 두둑 하니, 장부로서 배포를 보일 때가 바로 지금이로다!
정 판사가 호기롭게 일어서자 유생들의 시선이 그에게 몰렸다. 그 뜨거운 시선을 즐기며 정 판사가 담대한 제안을 꺼냈다.
“나라의 장래에 대한 걱정이 무거우니 다들 가슴에 시름이 쌓이신 것같소. 이 정 판사가 한 턱 낼 테니 오늘 좋은 곳에서 함께 시름을 풀어보는 건 어떻소?”
“좋은 곳이라 하면?”
“이번에 새로 개업한 다관 중 상춘화라는 곳이 그리 좋다는데……. 커흠!”
잠시 후 쏟아질 열렬한 환호성과 찬사를 기대하며 정 판사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자, 친애하는 동무들, 오늘은 이정 판사와 함께 뜨겁게 밤을 불태워봅시다! 하지만 기다렸던 환호성이 들리지 않자 정 판사는 눈을 떠 주변을 살펴야 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며 우애를 나눴던 이들이 그를 백안시하고 있었다.
숨길 수 없는 경멸의 눈동자가 그를 향하자 정 판사는 상황이 자신의 기대를 벗어났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정 형, 아니, 정 판사 자네……그런 곳에 드나드나?”
“실망스럽군. 그런 천박하고 추잡한 곳에 드나드는 이가 우리 모임에 껴있었을 줄이야.”
“에이, 어서 밖으로 나가세. 더러운 말을 들었으니 어서 귀를 씻어야겠네.”
그들은 마치 손바닥 뒤집듯이 정판사와의 관계를 재정립했다. 장차제국의 관리가 될 그들이 어찌 수치를 모르는 이와 엮일 수 있을까.
미꾸라지 한 마리가 맑은 물을 흘리고 검은 먹을 가까이하면 자신도 검어지는 법이었다.
“이…… 이 보게들! 도대체 갑자기 왜 이러는가!”
“듣고 싶지 않네! 어서들 가세나! 함께 있다가 안 좋은 소문이라도 퍼질지 모르니.”
하지만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것을. 그들의 웃고 떠든 다관 막심이 실은 동창 요원들이 정보를 수집하기 위한 장소로 이용된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들의 이름이 이미 동창 요원들이 적은 명부에 올라 태감의 손에 넘어갔다는 사실을.
벼슬길이 막힌 것은 자신들도 정판사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그들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 * *
다관 막심의 최상층. 아직 누구에게도 공개된 적 없는 특실에서 소년과 표자승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치 음모를 꾸미듯이 둘의 표정은 음산하고 사악했다.
“효과가 좋아.”
“확실히, 일부의 유출은 피할 수 없었지만 주고객인 유생 손님의 이탈은 피할 수 있었습니다.”
“어차피 시장을 전부 독점할 수는 없다. 주고객층을 유지할 수 있으면 만족할 만한 성과지.”
다관 막심은 주고객을 유생으로 정한 덕분에 많은 이득을 보았다.
고상한 유생들이 모이니 자연스레 다관의 분위기 또한 고급스러워졌고 그런 유생 나으리들이 모이는 다관이라는 이름값에 그들을 구경하려는 손님이 또 모였다.
비록 손님의 일부를 빼앗겼다고는 하지만 가장 중요한 손님을 지켰다면 웃어넘길 수 있는, 대수롭지 않은 피해였다.
“성과는 그뿐만이 아닙니다.”
표자승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 악동 같은 미소는 적이 골탕먹었다는 사실을 즐거워 하는 미소였다.
“소문이 아주 지독하게 퍼졌더군요. 처음엔 손님을 조금 끄는 듯하더니, 요새는 파리만 날리고 있는 모양입니다.”
방금도 사람을 보내 확인해 보았더니, 다관 앞에 먼지만 날려 하인들이 먼지를 쓸고 있다 합니다! 표자 승의 말에 소년이 코웃음 쳤다.
“그럼 기루가 낮에 파리가 날려야 정상이지. 물장사는 밤이 절정 아니냐.”
“크하하! 그렇지요! 기루는 밤에 잘 돼야 정상이지요!”
애초에 기루를 낮부터 열려 했으니 일이 이 사달이 난 것 아니냐. 욕심 사납게 행동해서 천벌을 받은거지.
두 사람은 죽이 잘 맞는 친구였다.
천박한 조롱이 한가지 풀어질 때마다 그에 따른 폭발적인 긍정과 야유가 피어났다.
농담을 나누며 웃고 떠든 둘은 한 껏 풀어진 분위기 속에서 잔을 나누었다.
이런 자리이니 술을 나누어도 좋으련만, 둘은 고집스럽게 가배를 고집했다.
따스한 열기 속에서 향이 뭉근하게 피어오르자 표자승이 우유를 데웠다. 설탕은 넣지 않고. 진하게 우려낸 가배를 각자의 잔에 담기자 소년이 우유를 잔에 따랐다.
달콤하게 뭉그러지는 향기 앞에 세월의 날카로움이 누그러졌다. 하지만 그 따스한 온기를 즐기는 사람들의 눈동자는 차갑고 독기에 차 있었다.
“여기서 끝낼 수는 없다. 우리도 반격이 있어야지.”
“아직 준비된 것이 없습니다. 새로운 과자는 아직 연구 중이고, 새로운 원두는 선별작업이 끝나지 않아서…….”
“내가 준비해 온 것이 있다.”
“새로운…… 과자입니까?”
표자승은 막연한 불안감을 느꼈다.
그 전날, 과자를 선보이며 세상을 불태우리라 맹세했던 소년의 수라와 같은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자신은 죄를 범하는 줄을 알면서도 소년의 손을 잡았다. 상인이라는 인종은 결코 좋은 죽음을 맞이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그 말로는 비참하리라 생각하면서도 표자승은 소년의 손을 잡았다.
그 때의 소년은 정말로 수라였다.
수라였고, 야차였으며, 지옥 밑바닥의 나찰이었다.
그 어떤 사악하고 강대한 귀신의 이름을 들어도 그날의 소년과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표자승은 그것이 어딘가 비틀린 인간의 광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의 소년은 평범했다.
표정은 평온했고 혀는 독기가 빠져있었다. 그렇다면 믿어도 좋으리라.
표자승은 거침없이 소년이 내민 쟁반의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기이한 과자가 담겨있었다.
“신기한 과자군요.”
어른 손바닥만 한 동그란 고리는 멋진 황금색을 띠고 있었다. 그 위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유백색의 끈적하고 불투명한 즙 같은 것이 덮여있었는데 맡아보면 아주 단내가 진동했다.
“아주 재밌는 과자군요. 이름은?”
“도넛이라고 한다.”
“도넛. 서방의 과자인가요? 호오…… 그렇다면 제국어로 번역하면……”
“도넛이다. 이름을 바꾸지 마.”
스승님?
표자승은 기묘한 위화감을 맛보았다. 결정적인 실수를 했을 때, 돌이 킬 수 없는 결정을 했을 때의 목덜미를 짜르르 울리는 섬쩟함이 그의 뇌척수를 파고들었다.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가고, 동공이 불안하게 흔들릴 때 소년의 목소리에서 낮고 무거운 명령이 떨어졌다.
“가배를 새로 타와라. 우유를 넣지말고.”
“스승님?”
“어서.”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표자승은 원치 않았지만, 그의 손발은 주인의 명령을 배반한 채 정성을 들여 가배를 우려내 탁자로 가져왔다.
텅 빈 것 같은 소년의 눈동자가 다시금 그에게 명령했다.
먹어.
손가락 두 번째 마디까지 털이 승숭 난 투박한 손이 도넛을 집어 들었다. 겉면은 끈적했기에 표자승은 속으로 손을 씻을 물을 가져와야 했다며 자책했다.
바삭.
처음 입 안을 강타한 것은 강렬한 달콤함이었다. 그 어떠한 가공도 거치지 않은 원색적인 단맛이 표자승의 혀위로 쏟아졌다.
어린아이라면 모를까, 다 큰 어른이라면 절로 눈살을 찌푸릴 만한 단맛. 씹으면 이빨이 쑥 들어가는 푹신한 빵의 식감은 확실히 훌륭했으나 그 무절제한 단맛은 많은 이들의 공감은 사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표자승은 가배를 들이켰다.
따뜻한 가배가 목구멍 너머로 넘어가며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세상을 불태울 것이라 했던 소년의 말이 너무나 강렬하여, 이번에도 지레 겁을 먹은 것이다.
긴장감과 함께 따스하고 쌉싸름한 가배가 혀끝에서 단맛을 훔쳐내었고.
이내 단맛이 사라진 혀는 맹렬하게 도넛을 탐하기 시작했다. 마치 사막에서 쓰러진 나그네의 입술에 한 방물 물기를 적신 것처럼. 멸망을 눈앞에 둔 세상의 마지막 사람처럼 간절한 눈동자로 자신의 어린 스승을 보았다.
유리알 같은 눈동자에는 겁에 질린 자신의 얼굴이 떠올라 있었다.
“……스승님. 설마.”
“먹어라. 표자승.”
표자승은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오판을 한 것인지를 실감했다.
세상은 이미 불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