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의 요리사-116화 (116/314)

환관의 요리사 116화

“오랜만이네요.”

“그간 격조했습니다. 부여비 님.”

나른한 햇살을 받으며 책을 끌어안은 부여비는 뜻을 알 수 없는 오묘한 미소를 지으며 소년에게 자리를 권했다.

마치 어떤 선물을 준비한 것인지 알고 있다는, 잔망스러운 어린아이 같은 웃음에 소년은 소태를 문 것처럼 쓰디쓴 웃음으로 응수했다.

별 관심은 없었지만, 소년은 대화시간을 늘리기 위해 부여비가 내려놓은 책에 호들갑스럽게 반응했다.

“병법 총론이라. 재미있는 책을 보고 계셨군요.”

“좋은 친구를 사귀었더니, 다양한 것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의외의 취미를 가지고 계셨지요.”

설마 그 홍엽비가. 바람만 불어도 풀썩 쓰러질 것만 같은 가날픈 그녀가 땀내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군사와 병법에 심취해 있을 줄을 누가 알았겠나.

지금까지는 혼자서 삭이듯 즐겨왔을 그녀의 작은 취미는 부여비와 난화비를 만나 만개했다.

‘부여비 님이야 새로운 지식이라면 가리질 않으시고…… 난화비 님은…….’

당장에라도 창 한 자루만 들려주면 날뛸 준비가 되어 있는 난화비는 글로만 전쟁을 배운 그녀들에게 최고의 조언자였을 것이다. 물론 셋이 긴밀하게 뭉치는 것은 소년에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러니 이제 밑천 다 털린 전 놔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소년의 눈인사에 부여비는 화사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어머, 아직 숨겨두신 게 많으시면서. 소년은 마치 뱀 앞의 쥐처럼 움츠러들며 항복을 선언했다.

“……오늘은 어떤 이야기가 듣고 싶으십니까?”

“글쎄요. 상호께선 어떤 이야기를 준비해 주셨을까나?”

사근사근하게 파고드는 부여 비 의말에 소년은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아, 나는 왜 교양을 개판으로 들었을까.

그때 조금만 더 관심을 가졌더라면! 전공만을 중시하며 진정 마음의 수양을 쌓는 교양 수업에는 무관심했던 지난날을 반성하며 소년은 필사적으로 삐거덕거리는 뇌를 회전시켰다.

소년은 수십 년 전의 기억을 되살린 끝에 간신히 부여비가 흥미를 느낄 만한 대화 주제를 찾아낼 수 있었다.

“오늘은 서방의 고대 철학사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군요.”

“고대 철학사!”

학자에게 이보다 군침 당기는 것이 또 어디 있으랴!

어느새 샛별이 빛나는 눈동자 속에 탐구욕을 가득 품은 부여비에게 소년은 점잖게 말했다.

“물론 배움이 짧은 제가 깊고 넓은 철학 전부를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요. 제가 이번에 소개하고 싶은 학파는 쾌락주의를 내세운 에피쿠로스학파입니다.”

“쾌락주의? 물질적으로 풍요롭거나 신체적 쾌락을 강조하는 학파인가요?”

“쾌락이라는 말뜻의 부정적인 느낌때문에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다고 이해합니다. 하지만 에피쿠로스학파는 오히려-”

그녀는 좋은 학생이었고, 훌륭한 청자였으며, 즐거운 이야기 상대였다. 이대로 몇 시간이라도, 며칠이라도 함께 떠들고 웃기만 해도 지루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또 다시 끝없는 대화의 미궁에 빠질 뻔했음을 깨달은 소년은 혀끝을 지그시 깨물어 정신을 환기시키고 엄숙한 표정으로 분위기를 가다듬었다.

“즐거운 이야기는, 우선 재미없는 이야기를 끝마친 다음에 홀가분하게 즐기시는 것이 어떠신지요.”

소년의 진지함에 입술을 비죽 내밀며 딴청을 피우던 부여비는 이내 어리광을 포기하고 바른 자세로 앉았다. 그 단아하면서도 다부진 태도에 소년은 이미 자신의 속내가 모조리 들켰음을 실감했다.

“어떻게 소문을 퍼뜨려드릴까요?”

“혹시 육신통(大神通)이라도 터득하신 겁니까?”

소년의 짓궂은 농담에 부여비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설마요! 그저 남보다 조금 더 소문에 관심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 뿐이랍니다.”

“육신통이란 본디 구도자가 수련하며 깨달음을 얻는 과정에서 감각이 극도로 날카로워져 생기는 부산물이라고들 하지요. 감각이 날카로워졌기에 보다 잘 보고, 잘 듣고. 그리고 잘 느끼게 되는 것. 그런 의미에서 부여비 님의 능력은 충분히 육신통이라 불러도 좋을 듯합니다.”

소문이라는 모래에서 금싸라기를 걸러내는 그녀의 능력은 충분히 신통력이라 부르기에 충분했다.

마치 먼저 보고 온 듯한 그녀의 말과 행동에 놀란 것이 몇 번이었나. 그것은 단련이나 노력의 여하로 어찌할 수 없는 재능의 영역이었다.

빛나는 천재에게 보내는 동경의 시선을 눈치랜 부여비는 어색하게 웃으며 눈을 돌렸다.

그녀의 일평생 수백 번도 더 보아온 동경의 눈빛은 그녀를 옥죄고 부담스럽게 만들었으며 끝내 그녀의 인간관계를 파탄 내버렸다.

순수한 동경의 시선이 머지않아 질시의 시선이 되고 끝내 나약한 스스로의 한계에 대한 절망과 증오, 그리고 비정상적인 우월함에 대한 경멸로 바뀌는 것을 지켜보며 상처 입은 그녀는 그 시선에서 통증을 느꼈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을 눈치첸 소년은 겸연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전 태생이 우둔하여 그런지 전부터 공부 잘하는 사람들이 참 부러웠습니다.”

“네? 상호께서요? 그럴 리가…….”

“하하. 정말입니다. 전부터 몸으로 부딪혀서 해결하는 일은 잘해도 글줄을 읽는 일은 도통 신통치가 않았지요. 부끄럽지만 글도 남들보다 늦게 뗀 편입니다.”

부끄러운 치부를 담담히 말하며 소년은 부여비를 안심시켰다. 그 시선에서 전해져오는 순수한 호의와 부드러운 배려에 부여비는 숨을 고르고 작게 고개를 숙였다.

어리디어린 소년의 얼굴에 스며든 세월의 먼지와 달라붙은 피로는 그녀가 있는 곳이 어딘지를 상기시켰다. 가장 발랄하고 행복할 나이의 아이조차 닮고 닮은 노인으로 만드는 곳.

그녀가 살았던 외롭지만 행복했던 서원이 아닌, 사람이 사람의 목숨을 사고파는 후궁이라는 공간임을 확인한 그녀는 양손을 가만히 모으고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의 대상은. 금화 상단이 새로 개업한 다관. 상춘화겠지요?”

“그렇습니다. 겉으로는 가배를 파는 다관입니다만…….”

부여비의 표정에 대번에 경멸의 감정이 드러났다.

“사실은, 다관인 척 위장한 기루에 가깝다지요.”

“말씀대로입니다. 듣기로는…… 커흠. 어디까지나 소문입니다만, 순진한 유생분들을 끌어모으려고 갖은 수를 다 쓴다는 모양입니다.”

소년이 적당히 순화한 예시를 풀어놓자 부여비는 대번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학문을 닦는 자. 재물을 멀리해야 하고, 육욕을 멀리해야하며, 식탐을 자제해야 하고 태만을 경계해야 한다. 학자의 딸로 태어나 서원에서 때 묻지 않고 살아온 그녀에겐 불결하게만 느껴지는 이야기일 것이다.

하물며, 그 주 대상이 비록 성별은 다르나 함께 수학했던 동료 유생들이라니!

분기에 찬 그녀는 어휘력을 발휘해 교양인들의 자리에서 점잖은 주의를 받을 만한 언동을 쏟아내었다.

“파렴치하고 불결하기 그지없군요. 나라의 기둥이 되어야 할 이들이 여인의 치마폭에 쌓여 공부를 팽개치다니!”

“아직 순진하신 분들이니…….”

“학문을 배운 자라면 당연히 그 배움에 어울리는 정신수양이 되어 있어야 하는 법!”

열변을 토하는 그녀에게 맞장구를 치며 소년은 교활한 미소를 숨겼다.

첫 번째 단추가 잘 끼워졌으니 이제 두 번째 단추를 준비할 차례였다.

* * *

부여비와의 회담 이후 궁으로 복귀한 소년은 오랜만에 난감하다는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절망감이나 이해력의 한계를 넘어선 난제를 눈앞에 두었을 때 느낄 불가해함을 말하는것은 아니었다.

일을 마치고 다음 일을 하려 바삐 준비하려 할 때 상관이 자신에게 투정한다는 이 상황.

그야말로 난감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백자 같은 하얀 볼을 부풀린 채, 마치 삐졌다는 듯이 고개를 팩 돌리고 자신의 앞을 막아선 태감을 보며 소년은 우선은 뭐라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일단 점잖게 욕을 해볼까?

아냐, 그래도 상관인데.

“아까부터 왜 지랄…… 아니, 지랄은 아니지. 왜 그러십니까?”

“우리 사이에 이만큼이나 허물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말이니 기쁘게 받아들이마. 그리고 그만큼 가까워진 사이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요즘 나한테 너무 무관심한것 아니냐?”

소년은 자신이 살아생전에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생각했다.

마치 일이 바쁜 남자에게 투정하는 여자친구 같은 말이 아닌가. 평생독신으로 살아온 자신이 이런 말을 듣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그것도 남자에게!

학의 날개처럼 우아한 눈썹 아래로 새초롬한 눈동자에 스며든 짙은 서운함의 감정은 당장에라도 눈물로 녹아내려 하얀 볼 위로 흘러내릴 것 같았다.

앵두를 베어 문 것처럼 빨간 입술이 뾰로통하게 섭섭함을 조르자 소년은 그만 내면에서 흘러넘친 감정을 참지 못했다.

“한 번만 더 그딴 표정 지으면 진짜 뒤집니다.”

“알았다 알았어. 진정해.”

“아무튼, 무슨 일로 지랄이십니까.”

“커흠. 요즘 네요리를 먹은 게 무척 오래전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그래도 명색의 전속 요리사가 나보다 남의 식탁들 자주 차리니 섭섭하구나.”

누가 차리기 싫어서 안 차린답니까? 바빠서 지랄 아뇨. 들이받아 버릴까 보다. 소년은 모난 말이 튀어나오려 하는 것을 폐부에 눌러 담으며 한숨을 몰아쉬었다.

확실히, 자신은 태감의 요리사였다.

“오랜만에 태감님의 상을 차려보지요.”

기대감에 들뜬 태감에게 성대한 저녁을 약속하며 소년은 자신이 오랜만에 연좌궁의 주방에 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곳.

익숙한 주방에 들어서자 소년의 몸에서 불필요한 긴장감 따위가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기분 좋은 탈력감, 눈을 감고도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있을 만큼 익숙한 공간. 손을 뻗으면 원하는 도구가 손에 착잡히는, 어느새 연좌궁의 주방은 소년에게 신체의 일부분처럼 느껴지는 공간이 되었다.

“날이 슬슬 서늘해지는군.”

춥고 건조한 공기. 달콤하고 기름진 음식을 먹기에 좋은 날이었다.

울상을 짓는 태감의 얼굴을 떠올린 소년은 그간의 서운함을 만회할 만한 회심의 요리를 준비하기로 했다.

밀즙화방(蜜汁火方).

절강성의 요리인 밀즙화방은 소금에 절인 햄을 통째로 꿀에 쪄 먹는 호쾌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음식이었다.

사용하는 햄은 물론 절강성의 명물이자 중국 최고의 돼지로 유명한 절강 금화 돼지로 만든 금화퇴(金華腦)였다.

그 뒷다리 햄을 통째로 가져온 소년은 칼집을 깊게 넣어 뼈를 발라낸 다음 물에 담가 소금기를 빼냈다.

소금기가 빠지는 동안 하얀 연밥과 꿀에 절인 청매(靑梅)와 설탕에 절인 앵두를 준비하고, 꿀과 술을 섞은 물을 햄이 잠길 정도로 부은 다음 시루에 올려 쪄낸다.

그 달콤 짭짤한 향기가 주방을 넘어 넘실거리자 냄새를 맡고 찾아온 장소와 이삼이 기대에 찬 얼굴로 소년을 올려다보았다.

“그래, 많이 만들었으니까 너희도 맛 좀 보렴.”

햄이 80%쯤 익으면 소금기가 강하게 우러난 첫 번째 국물은 따라버리고 연밥과 꿀을 넣어 다시 한번 쪄내고, 다 쪄진 햄은 납작하게 썰어 청매와 앵두, 연밥으로 장식에 그릇에 담는다.

남은 국물은 거품을 걷어가며 졸여 햄 위에 뿌려내고 금목서 꽃으로 장식 한다.

사용한 접시 역시 훌륭한 물건. 상의 정중앙에 올리자 그 육중한 무게감에 정성껏 차려낸 찜이며 튀김 따위가 빛이 바랠 지경이었다.

“단맛이 진한 요리인 만큼 밥보다는 이 지마소병(芝麻燒餠)에 싸서 드셔 보시죠.”

“소병이라…….”

화덕에서 막 구워낸 따끈따끈한 깨빵을 반으로 갈라 거기에 햄 두 점을 끼워 넣은 태감은 망설임 없이 입으로 가져갔다.

바삭! 소리와 함께 지마소병이 씹히고 그 안쪽으로 달콤함이 넘쳐 흘렸다. 졸아든 꿀의 농밀한 향기는 퇴폐적이기까지 했다.

씹을수록 입안을 적시는 타락의 단물이 혀끝을 적실 때마다 태감인 자신의 안에 남아 있었던 죄악감이라는 것이 휘발되어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악마가 인간을 타락시키기 위해 만든 것일까. 한 입 먹은 순간 태감은 자신이 완전히 악마의 노예가 되었음을 느꼈다.

그것은 달콤한 퇴락이었다. 인간의 자유 의지를 뭉그러트리고 안온한 현실에 메이게 만드는, 안주와 태만의 맛.

한참을 말없이 달콤함을 탐닉하던 태감은 이내 가쁨 숨을 토해내며 의자 등받이게 몸을 기대었다.

“오랜만이구나. 이렇게 요리에 감동하는 건.”

권태로운 표정으로 숨을 내쉬던 태감의 눈동자가 점점 미래라는 이름의 희망을 엿보기 시작했다. 두렵고 무시무시한 현실이라는 괴물에게 눈을 돌려, 극광의 빛으로 물든 찬란한 달콤함을 엿본 순간 태감은 자신의 내면에 깃들어 있던 냉혹함이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언젠가.”

언젠가. 모든 일이 마무리 지어지면. 행복할 수 있을까. 무엇을 먹을지, 뭘하며 놀지 같은 나른한 고민만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낼 날이 올까. 그런 날이 올 때까지, 넌 내 옆에 남을 수 있겠느냐?

태감은 입을 다물었다. 그 나약함을 입에 담는 순간 더 이상 후궁의 사례 태감으로서, 동창의 제독으로서 자리를 지킬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태감님.”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밥이나 좀다오.”

그는 거대한 정보단체를 이끄는 수장이었고 황제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약함은 곧 제국의 나약함이며 그의 슬픔은 곧 국력의 손실을 불러왔다.

그 누구보다도 강하고 오만해야만 견딜 수 있는 철혈의 자리.

하지만 그의 혈관에 흐르는 것은 쇳물이 아니었다. 뜨겁고 붉은 피였다. 소년은 담담히 말을 꺼냈다.

“날이 좋군요.”

“그래, 가을이 다가왔구나.”

“산에는 단풍이 물들고, 농부들은 추수를 준비하겠지요.”

“후후, 우리와는 연이 없는 이야기구나.”

후궁의 심처는 가을의 풍류마저 비켜 가는 곳이었다. 황금빛 들판도, 한해의 수확을 기뻐하는 농부들의 목소리도 이곳에서는 볼 수 없었다.

그렇기에 하루 정도는. 일이 끝난하루 정도는 놀아도 좋지 않을까.

“지금 하는 일이 얼추 정리되면. 하루 정도는 놀러 갈까요.”

저번 금마단주를 모신 동창의 안가가 제법 경치가 좋더군요. 마침 생각났다는 듯이 흘리듯 말하는 소년의 말에 태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좋겠다는 듯이.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는 듯이.

“그래. 그것도 좋겠지.”

가을이 지나가는 밤. 가망 없는 약속을 나누며 주종은 서글픈 미소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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