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115화
다관 막심의 개점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곳은 다름 아닌 사대상단의 일원인 금화 상단이었다.
사대상단 중 식품을 주 거래품목으로하며 경사에 가장 많은 다관을 소유한 금화 상단의 피해는 막심한 것이었기에, 사람들은 금화 상단이 어떤 방법으로 반격에 나설지를 주목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사대상단을 표가 상단과 막심은 이겨낼 수 있을까? 표가 상단은 뿌리가 굵고 탄탄한 상단이었다.
하지만 돈이면 귀신도 부린다는 상계에서 그 뿌리는 노도와 같은 금화상단의 자금력에 뽑힐 거라는 것이 업계인들의 중론이었다.
하지만 다관 막심이 경사에 자리를 잡고 영향력을 확대할 때까지, 금화상단은 그 성장세를 관망할 뿐 이렇다 할 견제를 하지 않고 있었다.
“이미 상대가 대세를 탔다는 것이 확인되었는데 건드는 건 멍청한 짓이지.”
후궁의 옥린비이자 금화 상단의 다류 사업 총 책임자. 배진설의 판단은 정확했다. 가뜩이나 적이 많은 사대상단으로서는 당장의 수익보다는 장기적인 상단의 인상을 살리는것에 초점을 두어야 했다.
한순간이라도 삐끗하여 소비자에게 외면받는 순간, 지금까지는 아군인척 손잡고 있었던 사대상단의 날카로운 비수가 자신들을 갈가리 찢어버릴 테니까.
금화 상단의 주력 품목이 식료품이었기에 더욱더 그랬다. 식료품은 공급이 쉽고 판매할 대상이 넓지만, 그것은 장점인 동시에 단점이기도 했다.
공급이 쉽기에 자본만 있다면 누구나 뛰어들 수 있고, 판매할 대상인 일반 백성들은 군중심리에 너무나도 쉽게 휩쓸린다.
“그리고, 금화 상단의 물건을 불매하겠다는 말이 경사에 퍼지는 순간.”
“나머지 사대상단에선 기다렸다는 듯이 저희들의 유통망을 물어뜯겠지요. 저희가 다시는 재기할 수 없도록. 그리하면 지금까지는 식품업계를 독점해 왔던 금화 상단은 몰락하고, 나머지 세상단과 중소 상단의 사파전이 시작되겠군요. 제일 유력한 건 흑룡 상단일까요? 아니면…….”
옥린비는 시녀 봉렴의 말에 짜증스럽다는 듯이 식은 차를 들이켰다.
상상만 해도 불쾌한 가정이었지만 그녀의 말은 틀린 점이 없었다.
그리고 아무리 독살스러운 그녀라도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온 호위무사이자 측근 역할을 해온 그녀를 내칠 만큼 감정적이지는 않았다.
“가배라는 것을 처음으로 경사에 전파한 것이 다관 막심인 이상 적어도 오 년은 그 명성을 넘어설 수 없을 거야. 아마도.”
“뭐, 갑작스럽게 표가 상단의 상단주가 급사를 당한다면 또 모를 일이지요. 그 상단주, 독신이잖아요?”
의욕이 넘치는 젊은 상단주가 어느날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업계에서 흔한 일이었다.
젊은 혈기와 객기를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그 말에 옥린비는 코웃음 쳤다.
“그래. 평소였다면 분명 그랬겠지.”
충분히 성장할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린 다음에. 열매가 가장 탐스럽게 무르익었을 때 주인을 제거하고 그 과실을 대신 취하는 것.
누군가가 공들여 가꾼 과실을 취하는 것이 얼마나 손쉽고 달콤한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가배라는 새로운 차가 경사에 완전히 녹아들면. 그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한입에 삼키는것이 그녀의, 그리고 금화 상단의 목적이었다.
예상치 못한 하늘의 방해만 없었더라면 그들은 탐스러운 과실을 취해그 황금빛 속살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거기서 떨어지는 단물은 얼마나 달콤할까. 얼마나 향긋할까.
“설마, 그런 일이 터질 거라고 누가 예상했을까.”
운이 좋지 않았음을 말하는 옥린비의 표정은 소태를 씹은 것처럼 일그러졌다. 표자승이 운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그녀가 운이 나쁜 것인지를 가늠하여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들 필요는 없을 것이나, 그녀는 자꾸만 떠오르는 만약이라는 가정을 떨쳐내지 못했다.
그녀 앞에 높인 과실은 그만큼 막대한 수익을 안겨줄 만한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상심에 옆에서 목간을 꺼내들던 봉렴은 뜻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나 말이에요. 설마 비응단주 혁문수가 금마단주 악진평을 암살하려 할 줄이야. 아, 그러고 보니 최근에 그 일에 연루된 환관 한 명이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죠?”
“그래. 그 때문에 의뢰를 맡길 만한 믿음직한 단체는 모조리 수면 아래로 자취를 감췄고, 동창의 요원들이 제국 전체를 이 잡듯이 뒤지고 있고, 군부와 육부의 개혁이 일어나며 안양비 님의 파벌이 흔들리고 있지.”
젠장! X 같네, 진짜! 라는 상스러운 육두문자를 토해내지 않은 것은 품격을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덕분이었다. 그녀가 궁의 바깥에서 직접 상단의 일원으로 활동했던 시절이라면 대번에 욕설을 토해내며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으리라.
물론 봉렴은 주인의 추태를 비웃을 만큼 간이 큰 여인은 아니었다. 원하신다면 자리를 비켜드리겠다는 듯 이 그녀가 바닥을 가리키자 옥린비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차를 내올까요?”
“그래. 가배는 말고.”
“네, 서호에서 들여온 용정차를 내오지요.”
“단 것도 좀 가져다주렴. 머리를 썼더니 단것이 먹고 싶구나.”
옥린비는 단 것을 참으며 문득 지난날 난화비의 다과회에서 본 과자가 생각났다. 그 샛노란 소를 듬뿍 올린 그 과자는 과연 어떤 맛이었을까?
“흠, 하나쯤 먹어볼 걸 그랬어.”
과자와 함께 그녀는 아주 잠깐, 그날 죽여야 했던 자신의 시녀에 대한 기억 또한 함께 떠올렸다.
‘흠, 어쩌면 좀 더 쓸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괜히 죽였나?’
그녀가 기억하는 지난날에는 죄책감과 후회 따위의 감정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저 불필요한 소비였던 것은 아닌지에 대한 아주 조금의 반성. 그것이 떨어진 꽃에 대한 감상의 전부였다.
봉렴이 차와 다과를 내오고 한참 후에야 그녀는 과자로 손을 가져갔다. 단 것이 조금 들어가자 뇌에 신선한 활기가 공급된 것인지, 그도 아니면 부하의 의견도 수용할 관용적 태도가 배양된 것인지 옥린비가 봉렴에게 의견을 물어왔다.
“뭔가 좋은 의견 없니?”
“글쎄요…… 암살이 안 된다면… 진부하지만 미인계는 어떨까요?”
봉렴의 말에 안양비는 고운 턱 끝을 손에 얹고 시름에 잠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어려울 거야.”
“네? 어째서죠? 자고로 사내 치고 젓가락 들 힘만 있으면 누구나…….”
“생각해보렴. 돈 있고 힘 있는 남자가 아직까지 여자를 구하지 않은 이유가. 뭐가 있겠니?”
봉렴은 잠시 그 이유를 탐구할 시간을 가졌다. 제법 규모 있는 상단의 상단주이고, 그렇다고 신체적으로 딱히 불구이거나 한 것도 아니며, 서역으로 원정 상행을 나설 만큼 혈기왕성한 남자가 굳이 아내를 가지지 않는 이유는?”
“어머머, 설마?”
“그래. 그러니 미인계는 어렵겠지.”
“그럼 미남계를 써볼까요?”
“그러기엔 인재가 없구나.”
하지만, 미인계라는 전략은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옥린비의 말에 봉렴은 그 뜻을 알아차리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그걸 하시게요?”
“그것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구나. 이미 만들어진 시장을 통째로 뺏을 수 없으니, 갈라먹기라도 해야지.”
방금 전보다 조금 더 씁쓸해지고 차가워진 차를 마시며 옥린비는 청사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 * *
오랜만에 다시 만난 표자승은 조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곰 같은 체격은 조금 줄어들어 있었지만, 소년은 그것이 근육이 줄어든 것이 아닌 순수하게 지방을 태워 몸을 탄탄하게 조였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가죽 채찍처럼 잘 단련된 몸이군.”
“최근 쉬었던 운동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표자승은 수줍게 숨겨두었던 도끼를 꺼내 들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부리부리한 눈과 송곳니가 드러난 야성적인 얼굴은 틀림없이 사선을 넘나든 전사의 것이지능글능글한 상인의 것은 아니었다.
최근 다관을 드나드는 무관들과 어울리며 피가 끓은 것일까?
아니면.
“대비하고 있나?”
“대비해야지요. 표가 상단을 이을 사람이 아직 없으니 말입니다.”
결국, 최후의 순간이 다가왔을 때 믿을 수 있는 것은 단련된 두 팔뿐이라는 것을 표자승은 알고 있었다.
서역으로의 원정 상행에서 얼마나 많은 죽을 고비를 넘겨왔던가. 돈냄새를 맡는 것만큼이나 탁월한 죽음을 찾아내는 감각이 그에게 맹렬하게 경고하고 있었다.
그 감각이 그가 다시금 도낏자루를 쥐게 움직인 것이리라. 마치 인왕상같은 자태에 감탄한 소년은 그 섬세하게 갈라진 팔 근육을 만지며 찬사를 쏟아냈다.
“정말 맹렬하게 단련했군. 이 정도면 무과에 도전해 보는 건 어떤가?”
“으허허, 제가 십 년만 젊었어도 한번 도전해 보는 건데 말입니다!”
하지만 그의 본성은 상인이었고, 도낏자루를 쥔 이유도 호신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점잖게 도끼를 숨긴 표자승은 달콤한 과자와 뜨거운 가배를 내왔다.
“이번에 저희 주방 사람들이 자체적으로 개발한 새로운 사옹과 찬드라 왕국산 가배입니다.”
“흠…… 반죽이…… 자주색이군? 자색 고구마(紫薯)인가?”
맛이 강하지는 않았지만 고구마 향기가 은은하게 올라왔고 속을 갈라보면 연한 보라색인 것이 보기에도 좋았다.
고구마의 부드러움은 강렬한 설탕의 달콤함을 은근하게 둥글려 조화롭게 만들어 주었고 그 모난 점 없는 단맛은 설탕을 넣지 않은 쌉쌀하고 고소한 가배와 훌륭하게 어울렸다.
“찬드라 왕국의 가배는 쓴맛과 신맛이 적고 향이 진하군. 우유와 잘어울리는 가배다. 그리고, 이건 가을 한정 다기인가?”
“예, 지난 여름 한정 다기가 불티나게 팔려서, 이번엔 물량을 조금 추가할 생각인데…….”
“아니. 그래선 안 되지. 수량은 그대로 가도록 해. 그래야 물건에 값어치가 생긴다.”
본론으로 들어가기까지 그들은 한 참을 다른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이 무르익기만을 기다렸다.
중요한 일을 위해 길일을 잡듯이,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선 그에 어울릴 만한 분위기가 필요했다.
“찬드라 왕국은 어떻지?”
“이제 막 분점을 개점할 부지를 알아보는 중입니다. 아직 적극적으로 나설 단계는 아닌 것 같아…….”
“그래. 시간은 많으니 느긋하게 진행하도록 해. 반드시 기회는 온다.”
“금화 상단이, 바깥의 공세에서 흔들릴 거란 말씀입니까?”
그 옛날 사대상단이라는 이름의 통곡의 벽을 허물기 위해 표자승은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 했다.
많은 중소 상단을 연합하려 정면으로 그 아성에 도전하는 것. 그것은 끔찍하고 참담한 결과를 불러온 최악의 선택이었다.
돈 앞에 사람은 한없이 작고 나약한 존재였음을 확인한 시간. 몰락의 끝에서 간신히 목숨과 상단의 이름만을 지켜낸 남자는 그 날을 회상하여 끓어오르는 분기를 심장에 눌러담았다.
소년은 그에게 달콤한 복수를 속삭였다. 마치 악마가 인간에게 감미로운 사과를 권하듯이, 확신에 가득찬 목소리로 소년은 말했다.
“돈보다 강한 것은 무엇이냐.”
그 말에 표자승은 상인으로서 당연한 대답을 내놓았다.
“세상에 돈보다 강한 것은 없습니다.”
“틀렸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칼과 법.”
그 막연한 대답에 표자승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대꾸했다.
“그것들은 돈을 따라 움직이는 것들 아닙니까.”
“아니. 그 반대야. 칼과 법을 따라 돈이 움직이는 것이지.”
금화 상단이 가진 칼과 법은, 우리가 가진 칼과 법을 막을 수 있을 만큼 크고 강하더냐? 소년의 말에 표자승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번 개혁으로 사대상단이 뿌리 심어둔 세력이 크게 위축되며 덩달아 사대상단의 영향력 또한 감소하고 있었다.
아직은 그들이 뿌려둔 돈이 무거워 버티고 있으나 언젠가는 그 돈의 위용도 빛바랠 날이 올 터. 후궁 제일의 권력자인 사례 태감의 독니가 그들을 겨냥한 이상 그것은 이미 예정된 사실과 다를 바 없었다.
“사대상단의 재력 기반은 찬드라 왕국에 심어둔 그들의 영향력이다. 교역의 문턱에 주저앉아 세상의 돈을 갈퀴로 긁어드리니 그 위세가 수그러들지 않는 것이지. 하지만 우린 찬드라 왕국에 절대적인 우군을 얻었다.”
사막에서 가장 부유한 영지를 소유한 남자가 그들의 후원자였다. 거기에, 미력하나마 왕가의 지지 또한 함께 등에 업지 않았는가.
그 정도면 사대상단과도 한번 싸워볼 만한 지지기반이었다.
피가 끓어오르고 분위기가 고양되자 소년은 이쯤에서 본론을 꺼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를 향해 악의를 짜내기 좋을 때였다.
“금화 상단에서 새로운 다관을 열었다지.”
“상호는 상춘화(貫春花)라 하더군요. 가배를 주로 취급하는 다관입니다만…….”
“파는 건 가배만이 아닌 모양이지?”
파는 건 웃음인가. 아니면 몸인가?
소년의 직설적인 물음에 표자승은 쓴웃음을 베어 물며 답했다.
“차와 웃음을 대접하나, 귀하신 손님께는 특별한 접객이 있다고 하더군요.”
“도발적인 시도군. 우리 쪽 손님은 얼마나 빠졌지?”
“사업상담을 하는 손님분들은 제법 빠졌습니다. 술과 여자가 따르는 접대는 상계의 암묵적 전통 아니겠습니까. 유생 손님들이야 아직은 관망하시는 듯합니다만…….”
표자승의 말에 소년은 고민에 잠겼다. 둘 다 가질 수는 없는 법이다.
하나를 얻는다면 하나는 내주어야 하는 것이 세상의 규칙이었다.
“둘 다 가질 수 없다면, 어느 쪽을 지켜야 할까?”
“그야 유생 손님들이지요. 다관의 분위기에 일조하기도 하고, 입소문의 주 대상이 그쪽이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쪽을 지킬 수 있도록 전략을 짜야겠군.”
고고한 학 같은 유생 나으리들이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고고한 가면이 벗겨지는 것. 오물에 찌들어 자신들 만의 세계에서 낙오하는 것이야말로 그네들이 가장 두려워 하는 일이 아닌가. 계략을 떠을 린 소년의 눈동자에 스산한 각오가 배어들었다.
“소문을 퍼뜨려야겠군.”
“소문입니까?”
“그래. 무관과 무관 양쪽에서 말이야.”
소문이란 것은 물과도 같아,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지. 소문이 이밑까지 흠뻑 적시려면, 위에서부터 흘려야 하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