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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111화 (111/314)

환관의 요리사 111화

피와 죽음, 강철의 충돌과는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소년은 악진평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녀가 내온 뜨거운 차에 직접 만든 다과. 그리고 안절부절못하는 장소. 시간을 보내기에 좋은 조건이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고 산들바람은 기분 좋을 정도였다. 오늘 떨어질 목과 피를 생각하면 하늘 또한 눈물을 흘려야 하겠건만, 유사이래 사람의 죽음에 하늘이 슬퍼한 적은 없었다.

평소였다면 그 무정함과 야속함에 아침부터 술을 푸며 욕을 했겠지만, 오늘 그는 온화함마저 엿보이는 자세로 나른함을 즐겼다.

“저…… 걱정 안 되세요?”

보다 못한 장소가 소년에게 물었지만 께느른한 표정으로 장소를 보던 소년은 덥수룩한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인생의 조언을 늘어놓았다.

“뭘 걱정하겠느냐. 어차피 내 할 일은 다 했거늘, 사람이 할 일이 끝났으면 남은 것은 하늘이 할 일이지. 안달한다고 되는 일 없다.”

“그래도…….”

“허허, 괜찮대도.”

소년의 허허로움에 잠시 혼자서 꿍얼거리던 장소는 이내 악진평이 마신 탕에 관해 물어봤다.

“저도 한번 마셔보고 싶어요.”

“나중에 어른이 되면 한 번 만들어주마.”

“지금도 괜찮을 것 같은데…….”

“애한테는 너무 이르지.”

“히잉, 애 아닌데.”

애가 아니라고 하는 동안은 영원히 어린애란다. 소년은 장소의 투정을 들으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비가 내리지도 않고 별이 떨어지지도 않으며 사람의 죽음을 슬퍼할 만한 상징적인 광경은 조금도 일어나지 않는 하늘을. 소년은 유쾌할 뿐이었다.

금마단주는 반드시 이긴다. 바닥에 떨어지는 것은 씹어 죽여도 시원치않을 원수의 것이다. 유쾌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그 맹목적인 신뢰에 근거는 단 한 가지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불태우며 뽑아낸 탕을 믿었다.

그 탕을 마셨다면 상대가 누구라도 금마단주는, 악진평은 지지 않을 것이다. 그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것. 그것이 바로 소년의 자존심이었다.

그 순간, 새들이 홰를 치며 일제히 날아올랐다.

“끝났군.”

“예?”

단정적으로 말한 소년은 허리춤에 술 한 병을 들고는 악진평을 맞이하기 위해 일어섰다.

아직도 믿음을 가지지 못하는 장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기다리는 소년에게 한 명의 무관이 다가왔다.

곰처럼 덩치가 크고 턱수염이 부숭부숭한 무관은 소도 단번에 때려잡을 법한 거대한 철퇴를 손에 쥐고 있었다. 철퇴는 피에 젖어 있었다.

“진평 그 친구에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오상호 시죠? 철기단의 단주 배금성입니다.”

“어이쿠, 배단주시군요. 보아하니……. 축하드립니다.”

“으하하! 간신히 이겼습니다!”

악귀나찰 같은 얼굴로 껄껄 웃으며 배금성은 피비린내 나는 철퇴를 뒤로 숨겼다. 무장답지 않은 배려심과 존중의 자세에 소년은 살가운 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이기셨다면 이번에 승진하시겠군요? 축하드립니다.”

“어떻게 운 좋게 그렇게 됐습니다!”

몸집만큼이나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호탕하게 웃은 배금성을 보는 소년의 눈이 가늘어졌다.

악진평의 친구라면 적어도 같은 계급인 정오품의 무관이라는 것이고 이번에 승진한다면 정사품이라는 뜻이니…….

‘기름칠 좀 해둬야겠군.’

물들기 싫어도 자연스럽게 물들어버린, 어쩔 수 없는 자신의 옹졸함에 염증을 느끼면서도 소년의 입가엔 가식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거나한 뒤풀이가 있어야겠군요.”

“크흠… 술을 아주 잘 담그신다고 들었습니다.”

“가을이군요. 여름에 묵힌 복숭아주와 여지주가 맛이 제대로 들었을 겁니다.”

“말만 들어도 황홀하군요. 혹시 제자리도 있습니까?”

“물론이지요.”

사과에 절인 꿀처럼 달콤하고 감미로운 소년의 말에 배금성은 군침을 삼켰다. 바삭바삭한 새끼돼지 구이에 거위 튀김, 생선찜에 푹 물러지게 조린 족발.

그리고 마셔도 마셔도 줄지 않을 달콤하고 향긋한 술. 소년의 말이 쌓일수록 배금성은 심장이 녹아내릴것 같다는 듯이 달콤한 숨을 흘렸다.

마치 감미로운 낙원을 상상하는 것처럼 물렁물렁하게 변한 그의 표정에 일순간 긴장감이 떠올랐다.

분노와 경계속에는 당장에라도 달려들어 적의 머리통을 박살 내고 싶다는 욕망이 담겨 있었다.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사근사근하게 굴어도, 결국 무관이란 놈들은 맹수와 같은 이들이었다. 소년은 그사실을 알 수 있었다.

물기에 젖은 듯한 둔탁한 발소리.

배금성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뒤로 감춰두었던 철퇴를 들어 자세를 취했다.

“제 뒤로 물러서십시오. 상호. 나온것이 진평 그 친구가 아니라면…….”

상호께서 위험하실 수도 있습니다.

미래의 즐거움에 취해 현재의 위험성을 방관하는 우를 범해버린 배금성은 진작 소년에게 경계하지 못한 자신의 우둔함을 탓했다.

혁문수. 만약 그가 나온다면, 막을 수 있을까.

혁문수가 나오자마자 피를 탐해 날될 거라는 그의 상상은 망상일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그는 객관적인 논리 보다 자신의 주관적인 감각을 믿었다.

그놈은 반드시 칼을 뽑는다. 평생의 숙적을 죽이고 난 후라면 더더욱.

막을 수 있을까. 방패를 가지고 올 것을.

불행하게도 그의 방패는 바로 전싸움에서 반파되었다. 그에게 남은것은 튼튼하고 큰 몸둥아리와 해진 갑옷뿐이었다.

그렇다면 단번에 쳐죽인다. 모든 긴장이 풀리고 승리의 만족감만이 남아있을 때, 막 입구를 빠져나오며 눈 부신 햇살에 순간 시야가 가려질 때를 노린다.

감추어둔 송곳니가 번뜩이고 정신이 고양되어 투쟁심을 제외한 다른 감정이 희석될 때. 소년이 근육이 꿈틀거리는 그의 팔을 잡았다.

“관두십시오. 단주님의 머리를 깨실 생각입니까?”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한 소년의 질책에 배금성은 그만 철퇴를 내리고 말았다.

“어찌 그리도……. 확신하십니까? 그 친구가 나올 거라고.”

“단주님께서 지실 리가 없으니까요.”

소년의 단조로운 말에 배금성은 그만 그에게 반박할 논리를 잃어버렸다. 수없이 많은 사실을 들이대본다 한들 소년에겐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믿음의 차이였다. 자신은 악진평이라는 남자를 믿지 못했다.

“그 말이 옳습니다. 제가 부끄러운 짓을 했군요.”

부끄러움에 뺨을 벌겋게 물들인 배진평은 더는 의심하지 않겠다는 듯 이 자신의 철퇴를 벽한구석에 세워두고 악진평의 귀환을 기다렸다.

그리고, 악진평이라는 사나이는 결코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 * *

무인들에게 승리란 단순한 것이다.

싸워서 이기고, 살아남았다면 술을 진탕 마시고 잔다. 그걸로 족하고, 더 바랄 것도 없다.

그 후의 일은 이제 정치가들의 일이었다.

악진평에게 상처가 나으면 으리으리한 연회 상을 차려주기로 약속한 후, 소년은 오랜만에 자신의 방 침대에 누워볼 수 있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하게 자신을 받쳐 주는 침대의 감촉과 편안한 베개의 높이. 자신의 방이 가져다주는 안락한 평화에 소년은 금세 잠이 들 뻔했다.

배가 고프다며 자신의 방에 쳐들어와 멋대로 침대에 걸터앉는 무뢰한만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무뢰한에게 정중하게 퇴거를 요청할지, 아니면 자신의 두 주먹으로 그 의사를 관철할지 고민하던 소년은 이내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둘 다 매력적인 제안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무뢰한은 자신의 상사였다. 소년이 일어서자 태감은 일의 성과를 물었다.

“금마단주가 이겼더구나.”

“예, 그리고 배금성이라는 자와 친분을 만들어두었습니다.”

“철기단주? 그거 좋은 성과군.”

“태감님은 어떠십니까?”

태감은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능청스러운 그 태도에 소년은 침대의 끄트머리를 잡고 일어서 태감을 마주 보았다. 태감은 소년의 시선을 피했다.

“그 친구가 입이 무거운 모양입니다.”

“무겁기는 무겁더군.”

“한번 보고 싶군요.”

“별로, 보기 좋은 꼴은 아니다.”

기껏해야 고깃덩어리겠지요. 매일보는 거 아닙니까. 소년의 호언장담에 태감은 마지못해 그를 연좌궁의 지하로 안내했다.

“여기서 보낸 나날이 꽤 되었는데 이런 곳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군요.”

“동창의 지하본부가 그렇게 쉽게 발견될 리가 있겠느냐.”

지하 암반을 파 내려간 지하통로는 습습했고 벽에서 물방울이 묻어났다. 벽을 밝히는 촛불 하나 없이, 희미한 호롱불에 의지해 계단을 밟아 내려가다 보면 어느 순간 넓은 공동이 나왔다.

빛이 부족해서인지 공동은 대부분이 짙은 어둠 속에 가려져 있었고 희미하게 피비린내가 났다.

공포영화에 등장하는 폐쇄병동이 떠오르는 광경이었다.

“이런 곳에서 오래 근무하면 돌아버리겠군요.”

“걱정하지 마라. 순환근무제니까.”

이런 시대에도 최소한의 인권과 직원복지는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 서 있는 공간도 충분히 음침했지만 태감은 그를 더욱더 음침하고 소름 끼치는 공간으로 안내했다.

틀림없이, 고문실이었다. 고통에 찬신음과 귀를 찢는 비명이 없어도 소년은 자연스레 그 공간이 무엇을 위해 만들어졌는지를 알아차렸다.

두꺼운 철문과 창살에 차마 세척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말라붙은 핏자국은 자기주장이 너무나도 강했다.

그리고 태감이 문을 열었을 때, 소년은 바깥에서의 모습은 그 속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스스로에게 실토했다.

“……고깃덩어리군요.”

“정확한 비유다.”

커다란 석제 탁자에 올려져 있는 ‘그것’을 아직 사람이라고 불러도 좋을지, 소년은 한참을 고민했다. 그것은 분명 사람이었을 테지만, 지금의 모습은 사람이라고 부르기에는 지나치게 난잡했다.

글을 쓰기 위해 남겨둔 오른팔을 제외한 다른 부분은 모조리 ‘깎여’나가 있는 그것은, 그런데도 숨을 쉬고 있는지 가슴의 기복이 눈에 띄었다.

“작업한 사람의 솜씨가 대단한 모양입니다.”

“경험이 많은 친구지.”

“그런데도 정보를 불지 않았다니, 이 친구도 대단하군요.”

고개를 저으며 간신히 헛구역질을 참는 소년에게 태감은 물었다. 굳이 보지 않아도 될 꼴을, 어째서 보러온 거지? 태감의 말에 소년은 씁쓰름한 기억을 베어 물며 대답했다.

“그냥, 봐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찌 되었건 이자가 잡혀 온 원인에는 제 지분도 포함되어 있을 테니까요.”

소년은 고깃덩어리가 된 암살자를 보며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다른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라는 변명으로 처음으로 사람에게 비수를 던진 날.

처음으로 사람을 죽인 날을.

반백을 넘긴 노인에게도 살인이란 힘겹고 버거운 기억이었다. 떨쳐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밤이면 밤마다 식은 땀으로 이불을 적시고 헛구역질을 할 만큼.

아무리 나이를 먹고 심장이 달아빠지더라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소년은 자신에 대한 혐오감과 자기 방어본능이 충돌하는 것에 어지럼증을 느꼈다.

점점 창백해지는 소년의 얼굴에 태감이 결단을 내렸다.

“나가자.”

고깃덩어리를 내려다보는 소년을, 태감은 그의 손목을 잡고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드물게 보인 상관의 남자다운 태도에 소년이 사뭇 놀랐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이 양반 또 왜 이래?”

태감의 눈은 오래전, 소소를 떠나보낸 그 날의 것과 같은 것이었다.

죄책감과 분노에 시달리는 눈.

정보조직의 총수인 주제에 주변 사람에게는 한없이 무른 남자. 분기가 차오른 태감의 표정은 분노한 미의 여신처럼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그나이 때 청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지었을 평범한 것이었다.

타개할 수 없는 현실에 분노를 느끼지만 어찌할 수 없어는. 그 상황에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는 억울함일 것이다.

‘나도 어릴 때는 저랬지.’

이제는 거의 떠올리지 않게 된 옛추억을 떠올리며, 소년은 잠깐이었지만 고통스러운 현재를 잊을 수 있었다.

“네가 느끼는-”

“모든 죄책감은 자기 탓이다, 뭐 대충 그런 말을 하시려는 건 알겠습니다.”

“……그래.”

한껏 분기한 태감은 찬물을 끼얹는 소년의 한마디에 조용해졌다.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이미 차분하게 가라앉는 노인의 시선이 너무나 따가웠다.

잠시 후, 그들은 한층 가라앉는 분위기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사무적인 이야기를 나누기에 좋은 분위기였다.

“앞으로 어쩔 생각입니까. 실증이 없으니.”

“늘 그렇듯이, 실증이란 만들면 만들어지는 거란다.”

“편리하군요.”

“편리하지, 그러니 황제 폐하의 비수 아니겠느냐.”

유일무이한 권력기관이며 정보기관인 동창의 강점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엮을 대상은.

“장 태감님이 아니실 확률도 있겠지요.”

“확신할 수는 없지. 혁문수, 그자가 살아있었다면 도움이 되있겠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다. 지금쯤 기쁜 해후를 하고 있을 악진평을 떠올리며 소년은 미심쩍은 부분을 집었다.

“그리고 만약 저희가 장 태감님을 친다면, 그것을 노리고 있던 제삼자에게 뒤를 내주게 되겠지요.”

“늘 경우의 수를 생각해두어야지. 하지만, 그렇다고 날려버리기에는 아까운 기회다. 봉은 같은 자리에 두 번 앉지 않는 법.”

장 태감뿐만 아니라 암살자를 고용한 혁문수의 집안 역시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이 기회에 황제 폐하께서는 금군의 인물 중 상당수를 정리하고 자신의 인사로 그 빈자리를 메우시겠지. 외궁의 물갈이는 폐하께서. 그리고 후궁의 물갈이는 동창의 일이었다.

“군부 출신 봉비 분들이 꽤 계시겠군요?”

“숫자가 적지 않은 편이지. 그리고 대부분.”

“안양비 파벌이시고요.”

한번 칼을 들었다면 고름을 짜는데 망설이지 않아야 한다. 그들이 하는 일은 결코 모두가 행복한 이상적인 미래를 만드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대화를 마치고, 위로 올라가려는 태감을 앞서 나사며 소년은 흘리듯말했다.

“내 죄책감은 내겁니다. 이 나이 먹고 이제 와 남에게 찡찡거릴 일없으니, 오지랖은 관두십시오.”

“……그래.”

어울리지 않는 말을 했다고 투덜거리며 소년은 계단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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