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110화
무의 나라. 제국. 아이들이 글자를 떼기 전에 검 쥐는 법을 먼저 배우는 땅. 무를 추종하는 이들은 누구하나 할 것 없이 황궁에서 열리는 승급 대전에 환호하고 열광했다.
누가 황궁 최강의 무인인가. 누가 이 제국에서 가장 강한 남자인가.
제국 최강.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심장에 불을 지르는 그 한마디에 제국의 심장, 경사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 열기가 치밀어 오르는것은 황궁의 담벼락 밖의 이야기였다. 담벼락 안쪽, 전투를 앞에 둔무장들의 분위기는 차분하고 엄숙했다.
승급전은 결코 수많은 관중 사이에서 무예를 선보이는 광대 노릇이 아니었다.
창과 검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싸우는 투쟁이었으며 삶과 죽음은 오롯이 자신의 손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두려움에 젖어 있는 이는 없었다.
“약자는 죽고, 강자라면 살아남는다. 살아남았기에 강한 것이고, 강했기에 살아남는다. 제국의 무장이라면 가장 먼저 심장에 새기는 경구라오.”
팔과 손목에 붕대를 감으며 악진평은 소년에게 제국이 설립되기 이전부터 내려온 오랜 옛말을 들려주었다. 그것은 동시에 다짐이었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 살아남고자 한다면, 이겨라.
제국의 무예에 상대에 대한 경의와 예우, 명예와 존중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이겨라. 그리하여 살아남으라. 제국의 무예는 오직 하나의 대명제 위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야만적이군요.”
나라의 군인이라면 뭐 충성심이라던가, 정의 따위를 강조해야 하는것 아닌가. 소년의 떨떠름한 말에 악진평은 빙그레 웃었다.
“야만적이지. 전투란 그런 것이오. 피와 죽음이 흐르기 시작하면 논리와 명분은 설 자리를 잃지.”
치졸하고, 야만적이고, 비겁하더라도 이겼다면 그것이 강자의 증명이다. 그것이 설령 암살이더라도. 악진평의 말에 소년은 새삼스럽다는 듯 되물었다.
“암살을 경험하신 본인께서 하시니 무게가 다르군요.”
“후후, 물론 원망하고 증오하오. 당장 눈앞에 있다면 찢어 죽이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그것을 비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소.”
싸움이란 그런 것이다. 정면에서 이길 수 없다면 암수를 쓰는 것. 그리하여 이기는 것. 이겼다면 그것은 추잡한 일이 아니었다. 지략을 쓴것이다. 그것이 제국의 무인이었다.
담담하게 내뱉는 악진평의 얼굴은 온화함 마저 엿보여 소년은 소름이 돋았다.
좋은 사람인 것을 알고, 호감을 느끼고 있지만, 그와 자신이 본질적으로 다른 동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소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즐거우십니까?”
“……즐겁냐 물었소?”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자신을 암살하려 한 옛 친구와 목숨을 건 혈투를 벌이러 가는 이에게 즐거워 보인다는 말은 썩 무례하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소년의 눈동자 속에서 자신의 얼굴을 본 악진평은 그만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인생의 가장 중요하고 긴장되는 순간, 한때는 친구였으며 경쟁자였던 적을 죽이러 가는 순간에.
그의 입꼬리는 그의 본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군. 그런 거야.
“역시, 나도 제국의 무관인 모양이요.”
목숨을 건 전투가 눈앞에 있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구려. 핏물을 삼킨 것 같은 미소는 소년의 흉금에 전율과 흥분을 심었다.
만약 그와 동시에 태어날 수 있었다면, 멀쩡한 몸으로 태어나 그의 옆에서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와 같은 위치에서 지평선을 바라볼 수 있다면, 남자로서 그보다 더 가슴 뛰는 일이 있을까.
“슬슬 식사하셔야겠군요. 싸울 사람이 배가 비어서야 안 되지요.”
잠깐의 선망은 소년의 기분을 상당히 가볍게 해 주었다. 꿈, 오늘은 소년의 꿈을 이루는 날이 아니었던가. 이번엔 소년이 악진평에게 광기를 보여줄 차례였다.
“상호께서 일주일 밤을 새우며 달이신…….”
“효과는 보증하지요……. 조금 ‘셀’ 수도 있습니다만…….”
실제로 일주일 밤을 새우며 소년은 거의 한계에 달해 있었다. 눈가의 짙은 그림자는 뺨까지 내려와 있었고 충혈된 눈은 초점이 흐릿했다.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은 소년을 붙들어 매어놓은 것은 꿈을 향한 열망이었다.
오늘 그의 꿈이, 그의 요리사로서의 증명이 이루어진다. 중화 요리사 김승조의 한평생을 우려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이 만든 탕을 마시고, 싸워 이긴다면.
그것은 자신의 탕이 이긴 것이다.
그런데 어찌 잠이을까. 설령 이 자리에서 선 채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소년은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어차피 죽으면 실컷 잘 테니.
젖은 종이로 틈새를 매운 탕관은 그 크기부터가 웅장했다.
잡티 하나 없는 하얀 백자에 붉은 색으로 그려 넣은 것은 거북과 날개달린 호랑이. 모두 무관들의 승전을 비는 물건에 들어가는 신수들이었다.
“태감께서 보내신 탕관입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역사가 깊은 물건인 모양입니다.”
소년은 별것 아니라는 듯이 너스레를 떨었지만, 탕관을 찬찬히 살펴보던 악진평은 이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금구비호승무탕관(金龜飛虎勝武湯罐)이 아니요. 역사가 깊은 물건인데…….”
“뭐, 내용물이 중요하지 그릇이 뭐 중요하겠습니까.”
“그건 그렇소만…… 허허.”
소년이 단도를 꺼내 탕관의 이음매를 붙인 종이를 가르고 뚜껑을 비틀어 열자 뭉근한 향기가 물씬 피어올랐다. 가장 처음 느껴지는 겉은 그윽한 약 향. 약 향기라고는 하지만 약재와 버섯 향 섞여 있어 거북하거나 하지는 않고 구수하여 식욕을 돋우는 향기였다.
소년은 천천히 은 국자로 국물을 휘저었다. 따스한 김이 솟아오르고 국물 안쪽에 녹아들어 있던 진하디진한 육수의 향기.
오리와 기러기, 그리고 온갖 건해산물과 사슴의 힘줄에서 녹아 나온 아교질의 끈적하고 농밀한 향기는 악진평의 코끝에 녹아들어 정신을 혼미하게 했다.
“어서…… 어서 주시오!”
식욕은 인간의 품격을 찍어누르고 본연의 욕망을 드러나게 했다. 굶주린 짐승처럼 핏발선 눈으로 국자를 노려보던 악진평의 앞에 작은 밥공기만 한 그릇이 놓이자 그는 참지 못했다.
곱게 차려진 숟가락조차 들지 않고 그릇을 입으로 쑤셔 넣으려 하는 그모습은 탕을 달이는데 심혈을 기울인 소년에 대한 예우와 공경이 조금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것으로 좋았다. 소년이 그에게 요구하는 것은 존경과 감사가 아니었으니까.
따스한 액체는 그릇 바닥의 문양이 비쳐 보일 만큼 맑고 용암처럼 밀도가 높았다.
아교질 성분이 높은 식재료를 풀끓여낸 국물이 으레 그렇듯이 국물은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쩍 달라붙을 만큼 진하고 혀가 녹아내릴 만큼 진했다.
혀 위에서는 온갖 육 고기와 건해산물의 극한까지 우러나온 감칠맛이 혀를 아리게 만들고 입에 머금고 우물거리면 그윽한 버섯 향기가 비강 가장 안쪽 깊은 곳에 스며든다.
영원과도 같은 찰나. 목구멍으로 넘어가 버리면 다시는 만날 수 없을 천국을 영원히 입안에 가둬두고만 싶었다.
하지만 야속한 목울대가 움찔거리는 순간 황금의 액체는 위장으로 미끄러져 내려갔고 그에겐 참담한 공허감만이 남았다.
“어리숙한 무인의 머리로는 이 탕에 어울릴 만한 미사여구를 짜낼 수 없겠지. 본인의 아둔함에 한숨만이 나오는구려.”
잘 움직이지 않는 혀를 억지로 굴려 투박한 칭찬을 늘어놓은 악진평을 보며 소년은 조용히 초를 세었다. 그 기묘한 행동에 악진평이 의문을 가지기도 전에.
“큽……?!”
그가 가슴을 부여잡았다. 목구멍 안쪽으로 이글거리는 태양이 솟구쳐 올라오는 듯한 열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위장을 뜨겁게 달군 열기는 핏줄로 퍼지며 진액을 끓어오르게 했다.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은 마치 거대한 전고(戰鼓) 소리와 같았다. 그 옛날 용의 피를 받아 마시고 만 명의 적군을 단기필마로 물리쳤다면 용장척운이 이러했을까. 검 한 자루로 폭포를 갈랐다는 검왕 양수반이 이러 했을까.
온몸에서 힘이 넘쳐 흘러 당장에라도 이 힘을 어디론가 분출하지 못하면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최고로 고양된 악진평을 보며 소년은 속삭이듯이 말했다.
“이제 가서, 마음껏 날뛰십시오.”
* * *
경합이 치러지는 장소는 황궁의 수련장에서도 가장 안쪽에 존재했다.
지금껏 수없이 많은 장수의 피를 마셨을 모래는 오늘로 새로이 흩뿌려질 젊은 피를 기대했다.
바람마저 내려앉아 숨을 멈출 것 같은 고요. 소리 없는 절규와 원한이 배어든 자리에 두 자루 검을 허리에 찬 무사가 들어섰다. 한 자루는 길고, 한 자루는 짧았다.
몸에 찬 갑옷은 화려하진 않지만 길이 잘 든 물건이었다. 몸의 급소만을 보호해 주는 가벼운 경장에 투구마저 쓰지 않은 사내는 죽음의 전당 앞에서기에는 너무나도 위태로워 보였다.
하지만 그의 앞에선 누구도 그런 말을 꺼낼 수 없을 것이다. 비응단주 혁문수. 사람을 잡아먹는 야차검의 명성 앞에 누가 그가 준비가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늦었군.”
서늘한 눈으로 연무장을 훑어보던 혁문수의 동공이 한곳을 향했다. 그와는 달리 중장갑으로 무장하고 거대한 철창을 든 사나이.
수라창 악진평이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참관하는 자도, 승패를 정해줄 심판도 없었다. 이 자리에서 살아서 연무장을 나선 자가 곧 승자이며, 패자는 이 모래땅 아래에 묻힌다.
차가운 철의 규칙.
이제까지 와서 무슨 말이 필요할까. 혁문수가 검을 뽑았고, 악진평이 창을 겨누었다. 그리고.
조금의 견제도 없이, 두 사람은 강철의 폭풍이 되어 달려들었다. 교차된 두 자루 검과 창의 자루가 비명을 지르며 허공에서 부딪혔다. 힘은 악진평이 위였다.
“크합!”
거인과 같은 힘으로 창 자루를 내리꽂아 버린 악진평의 일격에 가벼운 경장의 장점을 실린 빠른 회피로 혁문수가 뒤로 물러선다.
모래 먼지가 폭발하듯이 튀어 오르고 그 사이로 혁문수가 비도를 던진다.
챙!
왼팔의 완갑으로 급소를 가리며 모래의 장막을 뚫고 악진평이 돌진, 한쪽 팔만으로도 강철의 거창은 벼락처럼 빠르게 휘둘러졌다. 제비가 땅을 스치듯 날 듯이 혁문수가 그틈새를 파고든다.
두꺼운 중갑옷을 정면에서 뚫기엔 힘을 집중할 시간이 필요했다. 혁문수는 그 대신 상대적으로 취약한 관절 부분에 검을 쑤셔 박기로 했다.
마치 뱀이 나무를 타고 기어오르듯이 완갑을 스치고 올라간 두 자루검이 겨드랑이 쪽을 파고들며 독니를 들어낸다.
그 순간, 악진평의 광배근과 승모근이 부풀어 오르고 검날에 끼인 팔이 오히려 혁문수의 멱살을 잡았다.
검과 갑옷의 무게까지 150근(90kg)에 육박하는 혁문수의 몸이 종잇장처럼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혁문수의 대응 또한 노련한 것이었다. 자세를 고집하며 힘겨루기를 하는 대신 짧은 검을 놓고 손을 빼며 자세를 잡은 혁문수는 고양이처럼 가볍게 바닥에 착지했다.
“옛날과는 많이 달라졌군. 예전에 이렇게 노리면 어쩔 줄을 모르고 허둥댔는데.”
“많이 단련했지. 실전에서였다면 막기 힘들었을 테니까.”
그런데…… 자네는 별로 변한 게 없는 것 같군. 악진평의 말에 혁문수는 코웃음 쳤다.
“확실히 변하긴 변했어. 도발도 할 줄 알게 되고.”
“세상살이가 팍팍해서 말이지. 언제까지 샌님으로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뭐 좋은 거라도 먹었나?”
“먹었지. 자네 덕분에.”
그래서, 나도 뭔가 보답을 좀 해야겠어. 악진평의 보답은 뜨거운 것이었다.
창의 물미가 바닥을 긁으며 다시 한번 모래의 폭풍을 일으켰다. 상대의 시야를 가리는 치졸한 일격, 하지만 그 속에서 번뜩이는 창날은 벼락처럼 섬뜩하게 찔러 들어왔다.
“이젠 제법 비겁한 암수를 쓸 줄알게 되었구나, 악진평!”
“자네에게 배운 것들이라네.”
검을 휘두르며 함께 비수를 뿌리고, 상대의 사각을 찌르는 공격은 혁문수가 즐겨 쓰던 방식이었다.
젊은 날엔 그 기상천외한 공격에 당황하여 허점을 들어낸 적도 많았다. 그리고 그 전수자답게 혁문수는 악진평의 기습적인 일격에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물러서며 떨어트린 소검을 회수했다.
강철의 송곳니가 번뜩이는 모래의 장벽을 향해 달려든다는 것은 비상식적인 행위였다.
무시무시한 담력과 매와 같은 눈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으리라. 창을 겨눈 악진평은 잠시 손을 내리고 그에게 물었다.
“자네가 나를 이긴다고 해서, 이번 일은 덮어지지 않을 걸세.”
“호오, 이제는 말로 정신공격까지 하는군. 제법이야.”
“사실을 말하는 걸세. 자네의 가문에까지 수색이 들어갈 텐데. 그걸 어찌 덮으려는 건가.”
지극히 원론적이고 고루한 이야기는 따분하고 지루했다. 서리처럼 굳어진 혁문수의 얼굴에 상대에 대한 실망감이 떠올랐다.
“너저분한 말이다. 그런 지저분한 말은 투쟁의 흥분을 흐리지. 뒷 일이 어쩌고 명분이 저쩌고, 지금 칼을 들고 마주한 우리에게 집중할 수는 없나?”
“그걸로 족하나?”
“널 벨 수 있는 것으로 족하다.”
혁문수는 더이상 말이 필요 없다는 태도였다. 검을 쥔 자는 검으로 말하고, 창을 쥔 자는 창으로 말하면 되는 법.
그것이 제국의 무인 아니었던가.
하지만 악진평은, 그에게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물어야 할 것이 남아있었다.
“암살자를 보낸 그 날, 목표는 나 하나였나?”
다른 것은 묻지 않겠네. 이거 하나만 대답해주게. 악진평의 눈을 마주하며 혁문수는 검을 든 손을 내렸다. 잠시 후, 그에게 걸린 것은 조롱의 미소였다.
“자네도 알겠지만, 난 후환을 남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지.”
굳이 관용을 베풀 이유는 없지 않은가. 혁문수의 비아냥에 악진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와는 돌이 킬 수 없는 관계였다.
“그래. 자네는 그랬지.”
그럼, 이제 싸울 준비는 되있겠지?
검을 치켜세운 혁문수는 기묘한 소음을 포착했다. 마치 나무에서 못을 억지로 잡아 뽑는 듯한, 금속을 꺾는 듯한 삐걱거림.
그것은 융기한 악진평의 근육이 단단하게 조인 갑옷을 밀어 올리는 소리였다. 핑! 소리를 내며 완갑을 조여 맨 가죽끈 일부가 터져 나왔다.
“이젠 거리낌 없이 자네를 쳐 죽일수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