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108화
세상에 필연이란 것이 어디 있단말인가. 만약 실패했다면 그것은 신의 뜻이 아닌 네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평생 그 말을 입에 담고 살았건만.
비음단주. 혁문수는 암살이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왠지 그럴 것 같았다는 생각을 했다. 우스운 일이다.
인연이란 것인가.
“질기구나. 악진평.”
결자해지(結者解之)라.
네가 살아남은 것이 필연적인 것이라면, 결국 너와의 매듭을 끊는 것은 내가 돼야 한다는 말이군.
찻잔을 쥔 채 생각에 잠긴 혁문수를 보며 암살자는 종이와 함께 두툼한 주머니를 상위에 올렸다.
[실패하였으니, 돌려드리겠습니다.]
암살자는 혀가 없었다.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설령 잡혀 고문당하더라도 정보를 토설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햇수로는 벌써 이십 년도 더 전의 일이니 이제 와 그 사실에 대해 유감을 표할 이유도 없었다. 암살자는 오히려 눈앞의 사내에게 구차한 변명을 하지 못할 이유가 되었음에 감사했다.
물끄러미 자신이 암살자에게 건네 었던 주머니를 보던 혁문수는 암살자에게 물었다.
“다시 시도할 생각은 없는가?”
성공한다면 처음 액수의 두 배를 더 얹어 주지. 이미 경사에 작은 장원을 마련할 만한 금액이었는데도 혁문수는 거기에 두 배를 더 올리기로 했다.
성인군자라 할지라도 솔깃하지 않을 수 없는 금액. 하지만 암살자는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합니다.]
“싫다는 건가? 할 수 없다는 건가?”
[없다는 겁니다.]
아무리 돈이 좋아도, 목숨보다 귀하지는 않다. 암살을 결행한 그 날공들여 키운 정예 암살자 아홉 명이 모조리 죽어나갔다.
그중에는 조직의 미래를 맡길 만한 인재도, 자신과 비슷한 직급의 간부급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모두를 한 번에 잃었으니 그 손실은 설령 의뢰금을 받는다 하더라도 매울 수 없는 것이었다. 자칫하면 지금까지 쌓아온 음지의 명성과 자리마저 빼앗길 수 있는, 그야말로 존폐의 기로인 셈이다.
그뿐만이라면, 했을 것이다. 조직의 명운을 걸로 건곤일척의 승부수를 던져봤을 테지. 조직을 재건하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자금이었다.
분명 부나방처럼 달려들었으리라.
하지만, 그것은 가망이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절대로 언급돼서는 안 되는 자들의 이야기가 업계에 떠돌고 있다.’
동창. 황제의 직속 정보조직이며 제국 최고의 정보조직. 그 말 뜻은 곳 동창이야말로 제국 최고의 암살단체라는 소리였다. 암살자를 잡아먹는 암살자가 독니를 들어내고 어둠 속을 배회하고 있는데, 그것도 그 목표가 자신들일 확률이 높은데 어찌 살행에 나서겠는가.
어둠 속에 웅크리고, 숨죽이고. 아예 조직을 해체하고 제 갈 길 떠나새 인생을 시작하는 것만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길이였다. 그러니 오늘 혁문수를 만나 돈을 돌려주는것이 암살자의 마지막 일이었다.
왜 두령께서는 돈을 돌려주라 하신걸까. 암살자에게 법도가 어디 있고 자존심이 어디 있단 말인가. 차라리이 돈을 들고 도망칠 것을. 그럴 배짱도 없는 주제에 마음속으로 한탄하던 암살자는 혁문수의 시선에서 온기가 빠져나가자 황급히 묵례를 올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 일만 끝나면, 저 멀리, 경사 아래로 떠나자. 혀는 없지만 모아둔 돈도 있고 사지도 멀쩡하니 뭐든 해서 먹고 살 수 있겠지.’
암살자답지 않은 낙관적인 생각이었다. 피를 피로 씻어야 하는 살업의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는 사실에 마음이 느슨해진 것일까.
평생 동경해 왔던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사실에 들뜬 것일까.
혁문수는 가만히 떠나는 암살자의 등을 보고만 있었다.
철컥.
검이 검집에서 빠져나오는 묵직한 금속음. 암살자가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벼락처럼 검이 뽑혀 나왔다.
수직으로 칠 것을 결의한 내려 베기의 자세. 암살자의 뇌가 아직 위험을 완전히 인식하지 못한 순간.
그 찰나를 베어가르며 검이 내려꽂혔다.
사람의 얼굴이 수직으로 갈라졌다.
정수리에서 사타구니까지 예리한 붉은 실선이 생기고 점차 핏방울이 스며 나오며 반쪽이 미끄러졌다.
철퍼덕거리며 미끄러진 두 조각의 시체. 내장의 비릿하고 역겨운 냄새가 나는 그것을 혁문수는 칼끝으로 헤집었다.
“역시, 혀가 없군.”
혁문수는 예리하게 단면을 훑어보았다. 베어낸 단면의 척추와 내장부분, 매끈하게 갈라진 겉면 부분과는 달리 안쪽은 뭉개진 흔적이 보였다. 검로가 흐트러졌다는 정거이고, 곧 마음이 흐트러졌다는 증거였다.
“추로(麤鹵)!”
“뭐요? 죽였수?”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비응단의 부단장 추로였다. 긴 투쟁의 시간을 걸어오며 수없이 많은 흉터가 얼굴에 새겨져 있었고 왼쪽 소매는 헐렁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혁문수에게 시건방진 태도를 묵인받을 수 있을 만한 강자였다.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피 웅덩이를 밟고 들어온 그는 발끝으로 시체를 밀어 단면을 위로 드러나게 했다.
갈라진 내장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농밀하게 피어오르는 죽음의 악취를 즐기듯 코를 킁킁거리던 추로는 얼굴을 단면에 가깝게 들이댔다.
“흐흐흐, 칼이 무뎌졌구만. 흐트러졌어. 응? 마음이 흔들진 거지. 어쩐 일이우?”
“알 것 없다.”
“킬킬 별일이야 별일. 야차 같았던 단장 나리도 이런 날이 오는구만. 죽을 때가 되었지. 응.”
검객의 검이 무뎌졌다면 곧 죽을 때가 가까워졌다는 증거. 수없이 많은 사선을 넘은 그들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상관의 죽음이 기껍다는 듯이 낄낄거리는 추로에게 눈길도 주지 않으며 검날의 피를 닦아낸 혁문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검이 무뎌졌다면, 검을 갈아야지.”
“검객의 검은 피로 갈아야 예리함이 살아나지. 이번엔 몇 명이나 준비할깝쇼?”
추로는 익숙한 듯이 빈정거리며 물었다. 그 역시 칼 밥을 먹고 사선을 밟으며 사는 사람인 만큼 수없이 많은 이들을 베어오며 무뎌졌다 자부했다.
그 어떠한 죄도 없는 무고한자, 노인, 여인, 어린아이까지. 지옥 밑바닥을 기게 될 수라의 길을 걸어온 그도 눈앞의 멀끔한 차림의 단장을 보면 한기를 느꼈다.
아무리 무도한 자신이라도, 고작 칼을 갈기 위해 사람을 베지는 않는다.
사람을 벤다면 그것이 돈이 되었건, 여자가 되었건, 반드시 그에 걸 맞은 이유가 있어야 한다.
“스무 명 정도.”
그 피비린내 나는 대답에 추로는 고개를 내저었다. 저자는 사람의 탈을 쓴 마귀였다.
그렇기에 사람이라면 할 엄두를 내지 못할 참혹하고 잔인무도한 일을 저리 태연하게 주문하지. 그렇다면 그 일을 거드는 자신은 무엇인가.
마귀의 앞잡이인가.
“스무 명은 무리요. 요즘은 사형수도 많이 없고…… 감옥 지기에게 퍼줄 만큼 예산도…….”
“굳이 사형수가 아니어도 된다.”
그리고 마침, 돈은 여기 있군.
돈주머니를 받아들며 추로는 어설픈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자신은 틀림없이 지옥의 밑바닥에 떨어질 것이다. 그럼 저 마귀 같은 단장이 가게 될 곳은 어디일까.
‘부디 그 밑바닥에서만큼은 얼굴보지 맙시다.’
* * *
불꽃이 튄다. 강철과 강철의 합주에서 빚어진 찰나의 번뜩임은 밤의 어둠 속에서 빚어졌다. 짐승과 같은 창이 날될 때마다 방패의 벽을 긁어내렸고 그 속에 숨은 검과 도끼의 송곳니는 야수의 빈틈을 노리고 휘둘러졌다.
“밥들 먹고 합시다~!”
서로의 간극을 파고드는 무정한 강철의 사이로 거친 소년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목숨을 탐했던 창과 검이 멈추고 전사들은 배고픈 소년이 되어 주방을 찾아왔다.
“휴, 맛있는 냄새가 진동을 하는군.”
“홍소육(紅燒肉)에 농어찜, 소고기 구이랑 탕도 한가지 준비했습니다.”
“그거 군침이 당기는구려.”
요 며칠 사이 악진평의 변화는 극적인 것이었다. 불순물 많은 철을 녹여 순수한 철만을 뽑아내듯 뜨거운 투쟁으로 지방을 태운 그의 몸은 신화시대의 전사와 같았다.
가죽 채찍처럼 조여진 복근과 산처럼 융기한 승모근, 짐승과 같은 대퇴근에 쇠를 깎아 만든 것 같은 전완근.
전생에 대단하다는 보디빌더들, 현대기술의 총애 받아 약물의 힘을 빌려 완성된 신과도 같은 육체를 보아온 소년조차 그 앞에선 혀를 내둘렀다.
완벽하게 단련된 전사의 육체는 응장하며 아름다웠다.
미켈란젤로가 심혈을 기울여 깎아낸 조각상이 이에 비할까. 그 완벽한 전사는 의자도 없이 맨바닥에 앉아 함께 수련한 전우들과 식사를 했다.
상이 좁아 상에는 반찬만을 올리고 밥공기는 손으로 들어야 했는데도 누구하나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다.
“자, 어서들 듭시다. 배가 요동을 치는군.”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아, 거기 젓가락좀 줘.”
각자가 젓가락을 분배하고 일사불란하게 흰 쌀밥을 입으로 가져갔다.
지친 몸에 쌀밥의 달콤함이 스며들었다. 씹으면 씹을수록 배어나오는 단맛에 하루의 피로가 녹아내리는 듯했다.
분명, 배가 부르면 기분 좋게 잠들수 있으리라.
악진평은 가장 먼저 소고기 구이를 집어 들었다. 그저질 좋고 기름기 적은 소고기를 납작하게 썰어 소금과 후추로 간 해 숯불에 구워낸 요리는 전사에게 어울리는 음식이었다.
숯불에 익혀 겉은 바삭하고 진한 불 향기가 입혀져 있었으며 속은 촉촉하고 뜨거운 육즙이 흘러나왔다.
“경사에서 살 때는 소고기가 이리 맛있는 줄 몰랐네.”
“보통 농사를 짓다가 늙어 죽은 소만 유통이 돼서 그렇습니다. 돼지처럼 잘 먹이고 잘 기르면 기름은 달고 고기는 부드럽지요.”
“정말 그렇소.”
넓적한 소고기를 밥에 올려 젓가락으로 양 끝을 누른다. 소고기로 밥을 말아 한입. 그 뜨거운 기름이 목구멍으로 흘러내리기도 전에 악진평의 젓가락은 잘 조려진 홍소육으로 향했다.
“호오, 이 홍소육은 뱃살이 아니군?”
“보통 홍소육은 껍질이 붙은 삼겹살로 만들지요. 하지만 오늘은 기름기가 적은 목살을 이용했습니다. 대신 푹 졸였지요.”
“야들야들하기가 말할 수 없을 정도군.”
기름기는 덜했지만, 장시간 졸여낸 목살 홍소육은 부드럽고 딱 좋게 짭조름했다.
이 또한 밥을 사정없이 먹게 만드는 음식이다. 촉촉하고 담백한 농어찜으로 잠시 혀를 쉬게 한 다음 뜨거운 닭고기 탕을 들이킨 악진평은 더욱 전투적으로 젓가락을 놀렸다.
이미 둘러앉은 전우들은 한 공기를 금세 비우고 두 번째 밥을 요청하고 있었다.
“많이들 드십시오. 밥은 아직 많이 있습니다.”
큰 가마솥에 세 솥을 했는데도 먹성 좋은 이들 덕분에 솥은 거의 바닥을 들어내고 있었다.
소년은 급하게 네 번째 솥을 불에 앉히며 이것이 잘 먹는 아이들을 둔 어머니의 행복인지, 아니면 단체급식 영양사의 행복인지, 그것도 아니면 잘 먹는 전우들을 둔 취사병의 행복인지를 고민했다.
분명 취사병의 행복은 아닐 것이다.
식사가 끝난 후, 그제야 몸에 물을 끼얹어 땀을 씻어낸 악진평은 소년이 내민 뜨끈한 차를 받아들었다.
중천에 떠오른 달을 보며 마시기에 좋은 차였다.
“대회가 가까워졌습니다. 단주.”
“경사로 돌아갈 날이 머지않았구려.”
기나긴 악연의 종지부를 찍을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소년은 창날을 갈기 위해 숫돌을 집어 드는 악진평에게 물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소년의 물음에 악진평은 걱정할 것없다는 듯 가슴에 손을 얹었다. 강렬하게 맥동하고 있는 심장에서 피가 뿜어질 때마다 손끝이 저릿할 만큼 강렬한 힘이 느껴졌다. 인생에 가장 충만한 시기, 육체의 최전성기 임을 자신했다.
“장담하지. 지금의 난 이곳에 오기 전의 나를 세 수 안에 고꾸라트릴 수 있소.”
관직에 앉게 되고 창을 잡는 시간만큼 붓을 잡는 시간이 중요해지며 그는 감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동료들과 대련을 하고 자기 수련을 한다 해도 결국 감각이란 피를 흘리고 사선을 넘어야만 길러지는 것이었다.
태감이 빌려준 사람들은 그에게 그 감각을 돌려주었다. 아니, 분명 지금의 감각은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날카로웠던 시절의 자신을 넘어섰다.
그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악진평은 창을 쥐고 아름드리나무 아래에 섰다.
“단주님?”
“보고 계시오.”
악진평이 힘있게 나무를 걷어차자 우수수 나뭇잎이 떨어져 내렸다. 그순간, 그의 창이 요동쳤다.
달빛이 그의 창을 비추었기에 소년은 아주 조금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창날은 소름 끼칠 만큼 빠르고 정확하게 나뭇잎을 꿰었다. 나뭇잎이 바닥에 다 떨어지기까지, 창날에 꿰인 나뭇잎은 총 열다섯 장이었다.
“맙소사, 검도 아니고 무거운 창으로?!”
“그 전이였다면 기껏해야 여덟 장, 많아야 열 장 정도였을 거요.”
악진평은 창을 늘어뜨리고 가볍게 위로 휘둘렀다. 날에 꿰인 나뭇잎이 뭉텅이로 날에서 뽑혀 허공에 떠오른 순간, 그의 창이 솟구쳐 올랐다.
만월을 그리는 우아한 창날의 궤적속에서 소년은 솜털이 오소소 솟아오르는 충격을 맛보았다.
사람의 살점을 헤집는, 오직 파괴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어찌 저리아름답게 움직인단 말인가. 어찌 저리 우아할 수 있을까.
소년의 입꼬리가 기묘한 웃음을 그렸다. 만족스러움과 기대감에 가득찬 소년은 열망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기꺼이, 당신을 위해 탕을 끓일 수 있을 것 같군요.”
“탕?”
“예, 아주 맛 좋은 약탕입니다.”
“상호께서 끓이시는 거라면 맛이야 틀림없겠지.”
“맛뿐만 아니라 몸에도 좋습니다.”
소년의 표정이 너무나 징그립고 무시무시해 악진평은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사마외도의 음험한 방법은 아니오? 물론 상호를 믿지만…….”
“하하!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질 좋은 야생 기러기와 자라, 그리고 동충하초와 버섯 같은 자연의 약재만을 이용한 탕입니다. 자양강장에 좋지요.”
“내 괜한 걱정을 했구려. 상호께서 내게 몹쓸 짓을 하실 분이 아닌데.”
소년은 빙그레 웃으며 그림자 아래로 물러섰다. 지금의 웃음을 들키면 분명 오해를 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소년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떨까, 탕을 마시고 나면. 저 무인은 과연 어디까지 날아오를 것인가.
목구멍에서 새어나오는 웃음소리를 참으며 소년은 주방으로 향했다.
탕의 밑 준비를 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