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107화
경사 인근의 이름 없는 야산에 마련된 동창의 안전가옥. 마차를 타고 한 시간 정도를 달린 끝에 소년은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옆으론 시원한 계곡이 흐르고 작지만 잘 가꿔진 마당에 소박한 가정집이 세워져 있었다.
담장이 높은 편이기는 하지만 멋진 경관과 꾸밈없는 온화한 분위기는 안가라기보단 차라리 별장이라는 명칭이 어울렸다.
여름 피서를 오면 더할 나위 없으리라.
금마단주는 정원에 의자를 내놓고 앉아 있었다. 불편한 다리로 산을 오르느라 숨이 턱까지 차오른 소년을 반갑게 맞이한 그는 수척해져 있었지만 죽음의 그늘은 비껴간 듯했다.
“좋아 보이십니다.”
“아주 좋소.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니 세상 좋구려.”
“여유란 중요한 것이지요.”
“가족과 함께라면 더욱 그렇지.”
소년은 짐꾼들에게 가져온 짐을 창고에 보관해달라 말하고 미리 피신해 있던 양화와 인사를 나눈 후 마당 뒤쪽 개울가로 나왔다.
개울가에는 금마단주가 미리 의자를 가지고 나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병문안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오오, 병을 보아하니 술인 것 같소?”
“설마요, 꿀과 과실청을 물에 탄겁니다. 지금 단주님께 가장 필요한 것이지요.”
독을 이겨내며 축난 그의 몸에 가장 필요한 것. 바로 소화흡수가 빠른 당분이었다. 소년이 호리병을 내밀자 재밌다는 듯이 향기를 맡던 금마단주는 단숨에 그것을 들이켰다.
“크으, 달콤하군.”
“약이라 생각하고 드십시오.”
“허허, 달콤한 약이라니. 어릴 때였으면 분명 기뻐했을 거요.”
병을 모두 비운 단주는 말을 꺼내기가 어려운지 잠시 머뭇거리며 시선을 돌렸다.
소년은 그의 입이 열리기를 끈질기게 기다렸다. 잠시 후, 단주는 고개를 숙였다.
“또 다시 감사 인사를 해야겠소. 너무 자주 남발하여 그 의미가 퇴색하지 않았기를 바라오.”
“그러실 것 없습니다. 제 목숨을 구해주셨으니 당연히 해야 할 도리였지요.”
“그렇다면 사죄까지 더 해야겠소. 그들은 틀림없이 나를 찾아온 이들이니.”
암살자. 지난밤의 강렬한 기억은 도저히 추억으로 남길 수 없는 것이었다. 둘의 사이에 묵직한 긴장감이 깔렸다. 본론을 꺼내기에 좋은 분위기다.
“암살자라, 혹시 짐작가는 이는 있으십니까?”
“허허……. 도무지 짐작가는 이가 없구려.”
걔 단주는 난처한 기색으로 관자놀이에 손을 가져갔다.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 묘하게 어색한 동작. 소년은 그가 이미 마음속으로 누군가를 지목했을 거라는 확신을 가졌다. 의자를 조금 그에게 가깝게 끌어당기고, 소년이 물었다.
“대회가 가까워졌군요.”
“애석한 일이지. 몸 상태가 이래서야…….”
입안 쓴 듯 마른 침을 삼키는 금마단주의 눈동자 속에선 아직 사그라지지 않은 투쟁욕이 조용히 타오르고 있었다.
아쉬울 테지. 어찌 아쉽지 않을까.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가 저물었거늘, 평생을 단련해을 성과를 시험해볼 기회가 날아갔거늘어찌 속에서 불이 끓어오르지 않을까. 소년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의 심중을 떠보았다.
“첫 대전상대는 어떤 분입니까?”
“음? 아아. 비응단주 혁문수라는 친구요. 검 실력이 대단한 사람이지.”
나와는 오래 겨루어온 사이인데, 아쉬워하겠군. 단주는 사람 좋은 얼굴로 포장했지만, 그 목소리에는 은은한 울화가 깃들어 있었다.
긴 세월 동안 이어진 반목의 역사에 자연스럽게 쌓인 분노. 소년은 그의 말에서 범인에 대한 심증을 얻었다.
비응단주. 비응단주라.
소년은 우스갯소리인 것처럼 물었다.
“혁문수라는 사람이 보낸 걸 수도 있겠군요. 암살자.”
“글쎄……. 아마 아닐 거요. 그 친구는 날 죽이고 싶다면 직접 죽이러오지, 이런 수를 쓸 친구는……. 아닐 거요.”
금마단주는 자신이 말하면서도 자신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과연 그럴까. 자신의 심장에 묻는 질문은 공허한 회한이 되어 그의 발끝으로 흘러내렸다.
한때는 친구였고, 늘 경쟁하는 사이가 되었으며, 끝내는 서로를 원수처럼 보게 된 사이.
더는 갈등의 골을 메울 수도, 그럴 생각도 하지 않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나.
그리고 마침내, 여기까지 온 것인가.
혁문수는 그를 증오했다. 오래전, 아직 미성숙하고 철없는 무관이었던 시절. 우연히 불이 붙었던 대련에서 혁문수를 꺾은 그 날부터 그의 증오는 시작되었다.
그 사사로운 일로 둘의 사이는 점점 멀어졌고, 마침내 이렇게 되었다.
금마단주. 악진평 역시 이제는 혁문수를 증오했다. 마침내 증오로서 완성되어 버렸다. 결국, 칼로 사는 이들의 관계는 이런 형태로 완성되는가. 악진평은 눈을 감았다.
“아닐 거라고, 믿고 싶으십니까.”
소년의 말은 지독하고 날카로웠다.
흐르는 개울물을 내려다보는 소년의 옆모습을 보며 악진평은 웅얼거리듯이 답했다.
“믿고 싶소. 아직.”
그는 내 친구였소. 비록 틀어져 버렸지만, 아직 개선될 여지가 남아있다고 믿고 싶었소. 하지만.
“이젠 그럴 수 없겠구려.”
말라죽은 추억을 장작 삼아 그의 심장에도 새카만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무인의 투쟁심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고 증오와 원망의 복수심이라 불러도 될 것이다. 결국, 결과는 같다.
불구대천(不俱戴天).
이제는,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다.
소년이 악진평의 손을 잡았다. 평생을 수련해 온 무인의 손은 두꺼운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메말랐지만 강인한 힘이 느껴지는 손을 힘주어 잡으며 소년이 그의 심중을 물었다.
“싸우고 싶으십니까.”
그 한마디는 뜨겁고 도발적이었다.
네가 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 소년의 시선에 악진평은 소년의 손을 으스러지도록 잡으며 그에게 전사의 얼굴을 보여주었다.
“도와주시오. 싸울 수 있도록.”
내가 그 개자식의 목을 벨 수 있도록.
남자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말이었다. 그와 함께라면 기꺼이 지옥에 뛰어들 수 있으리라. 소년은 전사의 기백에 밀리지 않는 수라의 얼굴로 답했다.
“그렇다면, 도와드리지요.”
개자식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수 있도록.
* * *
다시 말하지만, 소년은 요리사였다.
사천 년 역사의 신비로운 의술이나 전설로 내려오는 신선의 약수 따위는 알지 못했다.
그러니 소년이 할 일도 요리였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치료군. 단언컨대 나처럼 즐거운 환자도 세상없을 거요.”
“강한 약은 강한 독과 같은 말입니다. 독을 해독하시느라 간에 무리가 가셨을 단주님께 약을 쓸 수는 없지요.”
“그래서 이렇게 부드러운 식단이군?”
심심하고 담백한 식단은 확실히 몸에 무리가 가지 않을 것 같았다. 후루룩 죽을 넘기고 보들보들한 농어찜을 살뜰하게 발라먹은 악진평은 식후 입가심으로 달콤한 차를 마시며 중얼거렸다.
“이것을 일일 오식 합니다.”
“다섯 번이나?”
“몸이 축나셨을 테니까요. 지금 당장은 줄어든 근육에 저장된 글리코겐, 그러니까 근육 내 당원(戇原) 보충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고개만 돌려도 바로 배가 고프실 테니까요. 소년은 멍한 표정의 악진평에게 향후 계획을 설명했다.
“우선은 잘 드시기만 하면 됩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단주 깨서는 독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근육 내 당원이 상당량 빠지셨을 겁니다. 체중이 꽤 주셨죠? 우선은 이걸 채워넣는 것이 목표입니다. 이를 서양에서는 리바운딩이라고 하는데, 보통 고탄수화물 음료를 사용하지만, 저희는 어쩔 수 없이 식사로 채워야 해서 아마 몸에 지방이 조금 끼실겁니다. 이건 차후 저희 쪽 사람들과 훈련을 하시는 거로…… 단주님?”
“아? 아…… 그…… 상호께선 참 지혜로우시구려.”
뭐, 어차피 이해하실 거라곤 생각 안 했습니다. 피식 웃은 소년이 간식거리로 한천으로 만든 달콤한 과일 젤리를 가져오자 악진평은 멋쩍은 얼굴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처음엔 조금 낯설었던 달콤한 음식도 이젠 제법 입에 맞게 되었다.
그렇게 한동안 먹고 자는 생활을 하며 악진평의 몸은 포동포동하게 살이 올랐다. 처음엔 날렵하게 근육이 잡혀 있었던 그의 몸에 살이 조금 오르자 꼭 겨울잠을 자려 하는 육중한 곰 같은 모습이 되었다.
“부끄러운 꼴을 보였소, 상호.”
“부인께선 좋아하시는 것 같더군요.”
“커흠, 크흠…….!”
최근 그가 귀여워졌다고 말하고 다니는 양화의 말을 들은 소년은 한동안 그의 귀여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했다. 귀여움이라. 아무리 보아도 명동이나 종로의 뒷골목에서 형님 소리를 들으셔야 할 것 같다만…… 소년의 말에 악진평은 헛기침을 하며 주먹을 쥐고 팔근육에 힘을 줘 보았다.
응장한 산악처럼 융기하는 근육은 과연명불허전이었다. 그저 그 위로 지방층이 덥혀 둥그스름해 보였을뿐. 하지만 악진평은 부끄럽다는 듯이 고개를 떨구었다.
“몸이 둔해진 것이 확실히 느껴지오. 감도 조금 떨어진 것 같고.”
복수하겠다 칼을 간 것이 얼마 되지 않았거늘, 벌써 평화로움에 안주해버린 것일까.
인간은 나약한 존재였다, 안락한 현실에 눈을 돌려 버리면 고통스러운 미래를 볼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소년은 그의 몸 상태가 마음에 드는지 빙그레 웃었다.
“몸은 거의 회복되신 것 같군요.”
“확실히, 상호 덕분이요. 이토록 기력이 충만한 적은 없었던 것 같소.”
잘 먹고 잘 쉬며 몸을 불렸으니, 이젠 몸을 움직일 차례였다. 그의 눈이 서서히 미래를 향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소년의 미소에 흉악한 살심이 드러났다. 앞으로 지옥도를 목격하게 될 악진평을 위한 작은 연민이 깃든 그것은 미소에 한없이 가까웠으나, 결코 미소는 아닌 무언가였다.
그 순간 악진편의 감각은 무수히 많은 인간의 존재감을 인지했다.
“상호…… 이것은?”
“사례 태감께서 보내신 선물입니다.”
각자가 잘 단련된 체구에 흉흉한 살기가 흐르는 병장기를 꼬나쥔 이들, 동창의 직속 무력부대였다.
그 선두에는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장소와 이삼도 있었다. 창검과 방패로 무장하고 대오를 짠 그들의 흉포한 기세는 틀림없이 전장의 것이었다. 그를 위해, 단 한 사람을 위해 그들은 전장을 끌고 왔다.
한 자루 창이 날아와 소년과 악진평의 사이에 꽂혔다. 창대까지 철로 만든 철창은 날 길이만 해도 세 뼘이 넘었다.
그 육중하기 그지없는 창을 가볍게 뽑아든 악진평의 얼굴에는 피에 굶주린 짐승처럼 사나운 미소가 걸려있었다.
철과 철을 비틀어 찢는 듯 날카로운 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진다. 양떼를 헤집는 야수처럼 난폭하게 날뛰는 악진평과 그를 둘러싼 채 집요하게 포위망을 구성하는 동창 요원들, 이제는 전사들의 시간이었다.
요리사는 요리사의 일을 해야지.
소년이 안가의 주방으로 들어서자 멀리서 남편이 싸우는 모습을 보던 양화가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오셨어요?”
“예, 싸우고 나시면 배가 고프실테니 미리 식사 준비를 하려 합니다. 저 친구들 몫까지요.”
“어머, 도와드릴까요?”
“허허 괜찮습니다. 별로 많지도 않은데요.”
동창 요원들과 단주까지 총 스물한명. 싸우고 나면 좀 더 먹을 테니한 사십 인분 정도. 평생을 주방에서 살아온 소년이었기에 가능한 말이었다. 익숙하게 재료를 준비하고 도마에 늘어놓는 소년은 감탄스럽다는 눈으로 보던 양화는 도끼잡이의 배에 권타를 찔러 넣는 남편의 모습을 보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렇게 열심히 움직이면 금세 살이 빠지겠어요.”
“예? 예 그렇지요. 금세 전처럼 날렵한 몸으로 돌아오실 겁니다.”
소년이 덕담처럼 건넨 말에 양화는 하늘이 무너지라 숨을 토해냈다.
“귀여웠는데…….”
“허허…….”
사랑의 힘인가. 아니면 특이 취향인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여자들은 원래 근육 돼지를 좋아하는 것인가.
고민 끝에 소년은 당장 해야 할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커다란 들통에 거의 백 개에 달하는 계란을 가져다 놓고 정신없이 깨기 시작하다 심심했는지 양화가 와 거들겠다고 했다.
“어머, 어떤 요리를 하시려고 이렇게 계란을 많이 쓰세요?”
“아아, 하남의 명물 요리인 철과단(鐵鍋蛋)을 만들려고 합니다. 드셔보신 적 있으신지요?”
“아뇨, 이름을 듣는 것도 처음이에요.”
소년은 내친김에 이야기 보따리를 조금 풀어놓기로 했다.
“커흠, 그러니까 아주 먼 옛날에, 하남에 계란 요리를 주장기로 삼은 요리사가 있었다 합니다. 만드는 요리마다 손님들의 호평 일색이었다지요. 그렇게 계속 특별한 계란 요리를 궁리하던 요리사가 어느 날 계란물에 짭짤한 향장(香肠)과 버섯, 마른 새우와 육수를 섞어 특별한 계란찜을 만들었다 합니다. 그 맛이 실로 일품이어서 그 가게는 크게 번창했다고 하는군요.”
그런데 그 계란찜을 만든 쇠 냄비가 모양이 독특하여 사람들이 특이한 철과로 만들었다 해 철과단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입니다.
소년은 이야기를 풀어놓으면서도 능숙하게 재료를 손질하고 계란물을 풀었다. 다진 향장과 버섯, 파와 마른 새우가 계란물 속에 풍당풍당 빠지면 진한 닭 육수로 농도를 조절해준다.
바깥에서 한껏 땀 흘리고 난 후의 식사일 테니 소금간은 넉넉하게. 소년은 끊임없이 손을 움직이면서도 심심해할 양화를 위해 계속 말을 붙였다.
“이제까지 단주님의 식단은 대부분 담백하고 부드러운 식사 위주였지요? 이젠 고기 위주로 넘어갈 생각입니다.”
“호호, 역시 무인들은 고기지요. 남편도 중요한 시합이 있거나 한 날에는 늘 고기를 배불리 먹곤 했어요.”
“양질의 고기는 피와 살이 돼지요.”
전날까지의 식사가 소화가 잘되는 탄수화물 위주의 식사였다면 이제부터는 고단백 저지방 저탄수화물 위주의 식사로 식단을 변경할 때였다.
지방을 태우고 근육의 밀도를 높일 시간.
대회 날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태감님은 잘 계실질 모르겠군요. 제가 한 밥이 아니면 잘 안 드시는 분인데…….”
“어머, 그런데도 저희 남편을 위해…….”
소년은 양화의 말에 겸양을 표하며 고개를 돌려 황궁이 있을 방향을 보았다. 후궁의 심처에서 태감은 지금 올가미를 짜고 있으리라. 적의 목을 낚아채 뿌리 뽑을 수 있는 올가미를.
‘전 제 위치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부디, 그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돌아가면 거나하게 상을 차려드릴터이니.
밥투정 심한 주인을 떠올리며 소년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