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의 요리사-103화 (103/314)

환관의 요리사 103화

인생에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이 있고 한철 힘든 날 있으면 좋은 날 있듯이. 소년에게도 평화와 안정의 시간이 찾아왔다.

인간 만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가슴 졸이고 날 세우며 살던 날이 지나니 느긋하고 여유롭게, 심지어 취미생활마저 즐길 수 있는 나날이을줄이야.

느지막하게 태감의 아침을 챙겨주고 나면 소년은 시간이 너무 남아 연좌궁의 정자 아래에서 연못의 잉어들에게 먹이를 주거나, 심지어는 오수를 즐기며 한가로이 시간을 보냈다.

자연스레 소년의 호위 역으로 굳어진 장소와 이삼도 봄날의 고양이처럼 나른한 시간을 함께 보냈다.

“저기를 좀 보거라. 태감님께서 바삐 뛰어다니시는구나.”

“저런, 정말 바쁘신가 봐요.”

“우리처럼 몸 쓰는 사람들의 좋은 점이 뭔지 아니?”

“뭔데요?”

소년은 정자의 난간에 걸터앉아 발끝으로 수면 위로 입을 내미는 잉어들을 건드려 보는 장소에게 블루 칼라의 좋은 점을 설명했다.

“머리 좋은 놈들이 고생할 때 우린 쉴 수 있다는 점이란다.”

“근데 머리 좋은 사람들 고생이 끝나면 이제 저희가 고생할 차례잖아요?”

“허허 우리 장소 벌써 세상의 이치를 깨우쳤구나.”

상으로 오늘 점심은 장소가 좋아하는 매운 음식으로 해주마.

정말요?

까르륵 아이 좋아라.

장소와 소년이 재밌게 놀고 있자니 옆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이삼이 슬그미니 소년에게 물었다.

“저…… 도와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허허 우리 삼이는 참 눈치가 없구나. 자고로 우리 같은 아랫사람은 시키는 일만 하면 되는 거란다. 괜히 나서서 일 벌이면 주위 사람이 피곤해져요. 알겠지?”

사회생활 반백 년의 그야말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이었다. 아직때 묻지 않은 순수한 이삼에게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고민하던 소년에게 헬쑥한 태감이 다가왔다.

“가면은 얻다 두고 민얼굴로 다니십니까?”

“갑갑해서 못 써먹겠다. 그보다, 상관은 노는데 참 즐거워 보이는구나?”

“즐겁다마다요.”

유들유들한 소년의 얼굴에 맥이 풀렸는지 태감도 정자의 그늘로 들어왔다. 높은 하늘에 조각구름 몇 개떠 있고 시원한 바람은 절로 졸음을 불러왔다.

흑단처럼 검고 윤기 있는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태감의 목덜미 위로 드리우고 어쩔 수 없는 본능에 눈꺼풀이 이끌릴 때.

어디선가 피어오른 사과나무 타는 연기에 실린 고기 냄새는 태감의 가라앉은 이성을 각성시켰다.

“이 향기는?”

“시간이 남아서, 마침 새로 얻은 새김칼 성능도 시험 좀 할 겸 베이컨 좀 만들어 봤습니다.”

소년의 손에 들린 상고시대의 비보 혈옥비수는 사람을 도축할 때뿐만 아니라 발골용으로도 훌륭했다.

그 성능이 지나칠 정도라 다루는 내내 긴장해야 하지만 그걸 감수하더라도 이만큼 좋은 칼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소년은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혈옥비수의 날을 꺼내 태양 빛에 비추어보았다.

마치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새카맣게 보이지만 각도에 따라 요사스러운 붉은 빛이 번뜩이는 요물.

오철칼을 포함하여 좋다는 칼은 대부분 만져본 소년도 이만한 물건은 처음이었다.

“살점을 헤집는데 손에 느낌이 없더군요. 마치 허공에 대고 칼질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뼈나 힘줄은 잡는데도 저항감이 조금도 없는 것이…….”

“좋은 물건이지?”

“신선이 벼렸다는 말이, 조금은 믿겨지더군요.”

소년은 품속을 더듬어 숨겨둔 비수의 존재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유성락. 위정에게 배운 일격 필살의 비도술. 만약 이 혈옥비수를 던진다면 어떨까.

섬쩟한 예감에 소년은 등허리를에는 한기를 느끼며 품 안으로 혈옥비수를 갈무리했다.

아무리 흉흉한 후궁이라지만 소년은 아직 자신의 손으로 피를 볼 각오는 되어있지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는…….’

하지만 언젠가 피를 봐야 할 날이 온다면, 주저하지 않을 수 있을까.

무엇을 위해서 다시 근육을 단련하기 시작했나. 무엇을 위해서 비도술을 단련한 걸까. 결국, 마음에 칼을 세우지 못한다면 무용지물일 뿐이었다.

소년의 어두침침한 얼굴을 보던 태감은 소년의 어깨를 톡톡 치고는 장소와 이삼을 가리켰다.

“예, 그렇지요.”

“그러니까 그런 생각 하지 마라.”

한순간 믿음직스러웠던 태감은 다시금 나른한 표정으로 변해 배부른 고양이처럼 늘어졌다.

분명 돌아가면 서류의 탑과 잔소리의 폭풍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도, 인간이란 이토록 한 치 앞을 보지 않으려 하는 동물이었다.

태감의 현실도피를 보다 못한 소년은 넌지시 물었다.

“거- 바쁘신 모양입니다.”

“바쁘지, 난화비 파벌 관리도 해야하고, 안양비 파벌과 소소한 분쟁이 생겨서 그 문제도 해결해야 하고. 이제 표가 상단의 사람들이 찬드라 왕국으로 떠났으니 본격적으로 금화상단의 입지를 줄일 준비도 해야 하니 바쁠 수밖에. 그뿐만 아니라 이번엔 큰 행사가 있어 골치 아프다.”

큰 행사. 소년은 그 말에 꼬리뼈끝을 간질거리는 불길함을 맛보았다. 황실에서 주관하는 행사가 있을 때면 소년에게는 늘 큰일이 닥치고는 했다.

불길함이 스며든 소년의 얼굴에 헛웃음을 터뜨리며 태감은 손을 내저었다.

“걱정할 필요 없다. 이번엔 외궁의 일이니.”

“그럼 저흰 나설 일이 없겠군요. 어떤 일입니까?”

강 건너 불구경하는 듯한 소년의 말에 태감은 작게 미소 지었다.

“사실 완전 연이 없는 일은 아니지. 이번에 금군 무장들의 승진을 건 무술대회가 열린다.”

“이 동네는 승진도 쌈박질해서 올라갑니까?”

“무관인데 당연한 것 아니냐?”

뭐지? 무관이면 그, 병법이나 전술, 이런 거로 평가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소년은 아직 전쟁터에서 단기필마(單驗四馬) 뛰쳐나가 적군을 와해시키는 인간병기들의 무용을 보지 못했기에 자연스레 장군이란 몸보다 머리가 뛰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관이면 당연히 병법으로 평가받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무관까지 올라갔으면 병법은 당연히 되는 거 아니겠냐. 무관 등용문이 얼마나 어려운데.”

“예? 그럼 제국의 무장들은 다 일기당천(一騎当千)지략까지 뛰어난 용장들이란 말씀입니까?”

“일기당천까지는 모르겠다만, 제국금군의 무관이라면 능히 일당백은 되어야지.”

태감의 태연자약한 말에 소년은 이게 농담으로 하는 말인지, 아니면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궁금해졌다.

“아무튼, 이번 승진심사에서 제일 주목해야 할 것은 정사품 비룡대주 자리가 걸린 정오품 대전이다.”

“그분도 나오시겠군요?”

소년은 그의 기억 속에서 기골 장대한 장부를 떠올렸다. 같은 남자가 봐도 감탄이 나올 만큼 멋진 진짜남자. 금마단주. 그가 정오품이었다.

“비룡대는 황제 폐하의 직속 호위대중 가장 실적을 쌓기에 좋은 곳이다. 그런 만큼 역대 금군의 별장중 대부분이 비통대출신이지.”

그 말은 곧 차세대 금군 별장을 노리는 이들의 숨 막히는 혈투가 벌어질 거라는 소리였다.

소년의 시선이 저 멀리, 외궁의 연무장이 있는 방향을 향했다.

“입신양명(立身揚名)에 눈 돌아간 이들이 피를 튀는 혈투를 벌이겠군요.”

금군 별장이 어떤 자리인가. 좌 별장과 우 별장의 위, 황제 폐하 아래금군의 최고 우두머리이며 지방 팔군의 도독 당량 대장군과 같은 위치에 있는 관직이 아닌가.

그 이름에 배어든 짙은 권력의 향기에 소년은 혀를 내둘렀다.

“대단하겠군요, 금군의 대장군이라니.”

“대단하지. 한 나라의 최강자. 제국에서 가장 강한 사나이를 뜻하는 말이 아니냐.”

“예?”

아니, 설마? 소년의 시선에 태감은 헛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지방군이야 규모가 원체 크다 보니 무력보다는 병법과 지휘력이 더 중요하지만, 금군은 규모가 작은 소수정예다. 개인의 무력이 전술보다더 빛을 보는 자리지. 그러니 그런 금군의 우두머리는 당연히 금군 최강의 사나이가 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냐.”

소년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이곳이 이세계라는 사실을 강하게 느꼈다.

시대를 넘어서는 공통적인 상식마저 송두리째 날아가 버린 그 순간, 소년은 어물쩍 화제를 돌렸다.

“그…… 아무튼, 이왕 하는 거 금마단주님이 이기셨으면 좋겠군요.”

“글쎄다……. 이번 경쟁상대가 원체 쟁쟁한 이들이라 잘 모르겠구나. 금마단주 역시 대단한 친구지만…….”

태감이 꺼내는 이름은 하나같이 기세는 범과 같고 날래기는 하늘을 나는 매 같다는 명성 자자한 이들이었다. 화검단주 승화명. 용비단주 패웅. 그리고.

“비응단주 혁문수. 이 친구가 아주 물건이지.”

그 이름부터가 범상치 않아 소년은 태감에게 그가 어떤 인물인지 물었다.

“금군 좌별장 혁문기의 아들이니 배경부터가 범상치 않은 인물이지. 거기에 비음단은 산적이나 민란 등을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무력부대야. 그런 만큼 단원 하나하나가 범처럼 사납기로 이름 높다. 그런 이들을 관리하는 자가 호락호락한 자 일리는 없지.”

태감은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소년은 태감의 반응에서 그가 점치는 승률은 반반 정도일 것으로 판단했다.

아니, 그것은 아마 태감이 아닌 위정의 평가일 것이다. 몇 번 손을 섞어 본 사이로써, 소년은 그의 안목을 믿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까. 요리사인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지난번 자라탕을 기억하십니까?”

“자라탕? 기억하다마다. 맛이 좋았지. 마침 자라탕이 끌리는데 오늘 저녁은-”

입맛을 다시는 태감의 말을 끊고 소년은 말을 이었다.

“전 그날 한가지 탕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래, 기억나는구나.”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 큰일을 앞둔 장사에게 반드시 승리를 약속할 수 있는 약탕은 소년이 반백 년을 갈아온 필살기 중의 필살기였다.

대선을 앞둔 정치인, 큰 대회를 앞둔 스포츠 선수 등등. 수없이 많은 이들이 소년에게 탕을 청해 큰 효험을 보았다.

소년의 자신감에 태감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글쎄다, 네 요리는 인정하는 바이다만……. 일단 연통은 넣어두마.”

태감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년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 불편하고 갑갑한 몸으로 태어나 자신의 감각은 전생을 아득히 넘어선 곳에 도달했다.

과연 이 손으로 끓여낸 탕은, 어떤 효능을 보여줄 것인가.

* * *

금마단주와의 만남은 소년의 예상보다 빨리 이루어졌다. 금마단주 쪽에서 먼저 소년에게 연락을 넣은 것이다.

“허허, 오상호 덕분에 이런 곳에도 와보는구려.”

“여기 상단주와 조금 안면이 있는 사이라…….”

이제는 제집처럼 익숙한 다관 막심의 특실. 돈으로도, 명예로도 쉬이 발 들이지 못한다는 특실에 발을 들인 금마단주는 황송하다는 듯이 두리번거렸다.

따스한 가배와 달콤한 도넛이 차려지고 점원이 공손한 인사와 함께 특실을 나서자 금마단주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우선은, 바쁘실 텐데도 이리 나와 주신 것에 감사 인사를 하고 싶소.”

“단주께서 부르셨는데 당연히 나와 야지요.”

“상호께서 이 못난 놈의 얼굴에 금칠을 해주시는군.”

잔에 설탕을 조금 타며 단주는 잠시 말을 끌었다. 청하기 어려운 부탁을 하려는 것일까?

소년이 귀를 기울여 그의 말을 기다리는 동안 단주는 천천히 심호흡한 후 말을 시작했다.

“실은 이번에…… 아들이 태어났소.”

“득남하셨군요. 이거 축하드립니다. 제가 소문이 어두워 찾아뵙지도 못했군요. 뭔가 선물이라도 보내야 했는데…….”

“아니, 아니오. 그런 게 아니라…… 커흠.”

소년이 탁자에 이마가 닿을 정도로 고개를 깊게 숙이자 단주는 얼굴이 벌게져 손을 내저었다.

연신 헛기침을 하며 소년이 머리를 들 때까지 기다린 단주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실은, 우리 부부는 다년간 아이가 없었소. 아내는 늘 자신의 탓이라고 자책하고 살았지. 그런데 마침내 아이가 생겼소, 기쁘고…… 정말 고마워서. 아내에게 무언가 선물을 해주고 싶었소.”

“허…….”

그것은 소년이 모르는 이야기였다.

평생 독신으로 살아온 소년에게 가정의 행복이란 머나먼 세계의 이야기였다.

평생 그것을 불편하다 생각한 적없고 부럽다 생각한 적도 없었지만, 금마단주의 눈은 참으로 빛나고 있었기에 소년은 무심코 자신이 결혼했으면 어땠을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말인데…… 저번에 내주었던 산딸기술 말이오.”

“예? 아…… 아아 그 칠성제에서?”

“크흠, 그 술을 한 병 얻을 수 있겠소? 아내가 그 술을 참 맛있게 마셔서 어떻게 해서든 한 번 더 마시게 해주고 싶소만…….”

갸륵한 단주의 말에 소년은 침음을 흘리며 고개를 떨구었다. 넉넉하게 여섯 단지나 담가 두었던 그 산딸기술은 태감이 저녁 반주로 홀짝홀짝 마셔버려 동이 난 지 오래였다. 소년의 사정에 단주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구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너무 마음 쓰지 마시오. 운이 따르지 않았을 뿐이니.”

이 시대에 출산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특히 임산부의 나이가 많다면 더더욱. 그 같은 고생 끝에 아이를 품에 안겨준 사랑스러운 아내에게 술 한 병 구해주지 못한 남편은 얼마나 가슴이 쓰릴까. 섭섭함은 없다는 듯 단주는 밝게 웃었지만, 소년은 단주의 가슴속에 멍울진 한을 볼 수 있었다.

어찌 두고 볼 수 있을까. 소년의 눈동자 속에선 서서히 불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부인께선 벌써 술을 드셔도 괜찮으신가요?”

“음? 아아 괜찮소. 원래 저녁 반주를 즐기기도 했고, 의원도 한잔 정도는 괜찮다고 하더군. 수유기 이기는 하지만 유모가 있으니 걱정 없지.”

물론 안 먹는 게 제일 좋다는 건 알고 있지만, 하도 그 달콤한 한잔이 생각난다고 해서 어쩔 수가 없었소.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단주의 손을 소년이 마주 잡았다. 섬뜩한 그 안광에 단주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빼려 했다.

“그렇다면 제가 도움이 되어드릴수 있을 것 같군요.”

부인께 최고의 저녁을 선물해드리고 싶습니다.

그 한마디. 소년의 자부심과 경력이 모조리 실린 그 무거운 한마디에 금마단주는 잊고 살았던 기대감이라는 것이 다시금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