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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102화 (102/314)

환관의 요리사 102화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젊은 남성이었다. 키는 작았으나 자세가 곧았고 우림 지역 부족 특유의 간편하면서도 품이 넉넉한 옷을 입고 있었다.

얼굴은 세월의 풍파를 적게 탄 듯 선량해 보였고 머리는 짧았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찬드라 왕국의 라베라 로소 파르마 베딤입니다.”

“……반갑습니다. 후궁의 상호, 오운입니다.”

소년은 정중하게 인사했지만, 그의 시선은 라베라의 어깨너머 창백한 얼굴의 로산을 향하고 있었다.

한없이 냉혹해질 수 있는 살의가 소년의 빗장뼈 안쪽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소년이 부디 아니기를, 최악만은 아니기를 기도 했던 그 최악의 상황이었다.

소년의 눈동자는 물기 없는 유리알처럼 구르며 눈앞의 때 묻지 않은 미소를 짓는 청년을 가늠했다.

순박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는 청년에게선 악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흥분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어깨를 들썩거리며 입꼬리를 씰룩거리는 청년에게서 시선을 펜 소년은 가만히 로산을 들여다보았다.

“저 그러면…….”

“죄송합니다. 라베라 님. 결례인 줄은 알지만 잠시 자리를 비워도 괜찮을까요? 급한 볼일이 생겨서…….”

“예? 아…… 그러시죠.”

소년은 이제 막 사회에 나온 초년생에게는 과분할 만큼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로산을 지나치며 밖으로 나섰다.

그의 뒤를 로산은 조용히 뒤따랐다. 인적이 드문 장소까지 둘은 조용히 걸었다. 심장을 옥죄는 긴장감 속에서 로산은 소년이 뒤돌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소년이 뒤를 돌았을 때, 로산은 방금 전 판단을 저주했다. 뒤를 돈 소년의 표정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살점을 씹은 지옥의 마귀, 불을 토하는 야차. 소년의 입에선 짙은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았다.

“우리, 해야 할 이야기가 있을 것 같군요.”

소년의 말투는 단조로웠고 낮았다.

하지만 그 한 마디 한 마디는 로산의 심장부를 도려내는 것처럼 살의에 가득 차 있었다.

로산 하나만을 향한 살의가 아니었다. 수틀리면 연관된 모든 이을 물어뜯을 지독한 광기였다.

“분명, 왕가의 도움을 약조했지요. 사절단 단장, 책임자와의 대화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닌 것 같군요.”

터무니없는 무례. 소년은 과연 로산이라는 여자가 그런 실수를 저지를 만한 사람인지를 생각했다.

“계약은 파르마 가문과 단독적인 것입니까?”

“그…… 그렇습니다.”

로산을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그녀의 머리가 낮아질수록 소년의 시선은 무저갱으로 떨어졌다. 굳이 고루한 표현으로 소년의 복심을 표현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소년은, 열 받아 있었다.

“이미 준비가 끝나버렸지요. 이미 표가 상단에서는 찬드라 왕국으로 갈 인원을 편성해 두었고 저희 쪽에서도 그에 맞는 예산을 편성해 두었습니다. 하지만, 일이 이 정도까지 진척이 되면 뒤집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겁니까?”

사회에선 때론 속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울며 겨자 먹기로 해야만 하는 상황이 있다.

억울하고 분하지만 일을 그만두면 손해가 너무 막심하여,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상황. 하지만, 정치란 그럴 수 없는 것이었다.

한 발자국 물러서면 두 발자국을 내줘야 하고, 두 발자국 물러서면 상대에게 목줄을 내주게 된다. 죽더라도 상대의 목덜미를 물어뜯어야 하는 곳이 이 후궁이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할 말이 없다?”

“예, 모두 아둔한 저의 실책입니다.”

“후궁 경험이 그리길지는 않군요.”

“예?”

할 말이 없다. 모두 나의 책임이다. 그 말은 곧 자신의 뒤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뜻이었다.

소년은 그녀가 얼마나 어린지, 냉정하고 강인해 보였으나 경험이 그리 깊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런 실수를 할까.

“당신이 이런 멍청한 짓을 저지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군요. 누군가가 당신에게 바람을 불어넣은 사람이 있겠지요. 판단력을 흐리고, 달콤한 말을 한 사람은.”

“아닙니다, 오상호 님, 이것은 모두 제가…….”

“라하비 님?”

그녀는 어렸다.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사랑받으며 자랐을 것이다. 가문을 위해 발 벗고 나설 만큼 좋은 사람이며, 스스로를 강인하게 벼리기 위해 표정을 지우고 차갑게 행동하더라도 그녀의 본성은 여렸다.

그러니 가장 중요한 순간에 표정을 드러내지.

소년은 의문이 풀렸음을 깨달았다.

라하비가 그녀를 충동질한 것이다.

분명 가문이 어려운 상황에 처한 그녀를 위해 고민하고 또 고민한 끝에 순수한 선의로 그렇게 말할 거겠지.

왕가의 이름으로 하면 가뜩이나 수세에 몰린 파르마 가문이 이리저리 물어뜯길 테니 고육책을 낸 것이리라.

그것은 최악의 수였다.

“이 일을 추진하신 것이 누구신지 아십니까?”

“사…… 사례태감께서…….”

“그렇지요. 그럼 사례태감의 위에는 어떤 분이 계십니까?”

로산의 얼굴에서 핏기가 모조리 빠져나갔다. 그녀는 차라리 졸도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년은 여전히 고저 없는 목소리로 그녀의 심장에 세심하게 선별한 단검을 박아넣었다.

“용의 아들께서 계시지요.”

그것은 조금 과장된 표현이었다.

그러나 거짓말쟁이의 심장을 쑤시기에는 더없이 적절한 단어였다.

사형선고를 내리는 판관처럼 소년은 엄숙한 말투로 선언했다.

“물론 라하비 님께 죄를 물을 리는 없죠. 그렇지요?”

“그렇죠…… 네…… 그럼…….”

“후궁이란 곳은 늘, 그렇지 않습니까.”

후궁은 늘 희생양을 부른다. 로산에게는 자신의 잘못을 책임져줄 사람이 없었다.

라하비에게 애걸복걸해볼까? 그녀가 로산을 버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강제적으로 버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녀의 가문과 함께, 다가올 암담한 미래를 준비할 만큼 그녀는 강인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러할 것이다.

“차라리…… 사실대로 말했다면 나았을까요?”

“……굳이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들 필요는 없을 텐데요.”

“그래도 알려주세요. 최소한 지금보다는 나았을까요?”

“장담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고개를 떨군 로산은 조금씩, 아주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보고 있기 힘든 처연한 미소였다.

“최소한 …… 배운 것은 있네요. 한 순간의 고양감에 일을 추진하면 안된다는 것. 그리고 안될 것을 알면서도 기대감에 멈추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부디 유념하시길 법니다. 소년은 입천장까지 그 말이 튀어나왔으나 굳이 그것을 입에 담아 그녀를 조롱하지는 않았다.

소년 역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섣부르게 표자승의 가슴에 불을 질러버렸으니 이 일을 어찌해야 할까.

그 순간 소년의 시야가 닿지 않았던 기둥의 뒤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머리에 흰 꽃으로 장식한 이국적인 소녀. 눈물방울을 그렁그렁매단 라하비였다.

“라하비 님?”

“재성해여!”

구르듯이 뛰쳐나온 그녀는 무릎 꿇은 로산을 끌어안고 소년에게 함께 고개를 숙였다.

존귀한 오상비를 어찌 내려다보겠는가. 소년은 급히 자세를 낮주고 라하비에게 절을 올렸다.

“존귀하신 분이시여, 어찌 머리를 숙이시나이까.”

“제가 할 수 있어여!”

“예?”

눈물을 펑펑 쏟아내며 알아들을 수 없는 발음으로 라하비는 소년에게 매달렸다. 자신이 할 수 있다니,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 * *

인생엔 늘 예기치 않은 변수가 존재한다. 대부분은 좋은 쪽보다는 나쁜 쪽으로 작용하지만 때때로, 믿을 수 없는 행운이라는 것은 존재했다.

나락 가장 밑바닥까지 떨어진 누군가의 인생을 구제해줄 정도로.

사절단의 책임자, 라마잔 보랜 람로이 바유가 들어왔을 때 로산은 거의 혼이 빠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사막에서 가장 부유한 영지를 가진 남자는 믿을 수 없게도 커피 산업과 유통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물론, 생산지인 파르마 가문에 대한 넉넉한 보상까지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일이 너무 잘 풀려 거짓말처럼 느껴질 만큼.

그것은 로산 만큼이나 소년에게서 황당한 일이었다.

콧수염 풍성한 라마잔과 악수를 하고 뒤이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얼이 빠져있는 라베라 와도 이야기를 나눈 후. 소년과 로산은 어두운 표정으로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말문을 연 것은 로산이었다.

“우선은, 지난 실례에 대해 다시금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일이 잘 풀렸고, 지난 일이니 괜찮습니다.”

로산을 거듭 고개를 숙이며 사죄의 말을 입에 담았다.

소년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짙은 한숨과 함께 이유를 물어야 했다. 일이 잘 풀렸다하여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라하비 님께서는 라마잔 님과 처음부터 알고 지내신 사이였습니까?”

“예…….”

“그렇다면, 어째서 처음부터 라마잔 님과 다리를 놓는 방향으로 일을 진행하지 않으신 거죠?”

라마잔 보랜 람로이 바유. 사절단의 대표로 뽑힐 만큼 그 이름은 무거운 것이었다.

사막에서 가장 부유한 영지를 가지고 있는 그는 철광산과 암염광산을 가지고 있었으며 중요한 수원지를 몇 곳이나 소유하고 있었다. 그의 영지는 서방 교역의 중심지로 그의 이름은 교역상들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런 인물을 알고 있었다면, 어째서 처음부터 도움을 빌리지 않은 것일까. 람로이 가문은 동창에서도 정보를 수집할 만큼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가문이다. 소년의 질문에 로산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라마잔 님께서는…… 공주님…… 아니, 라하비 님의 외조부 되시는 분이십니다.”

로산의 말은 동창이 수집한 정보에서도 없는 부분이었다. 찬드라 왕국에서 첫손에 꼽는 가문에 왕가의 외척이기까지 하다면 정보가 없을 리가 없다.

그렇다는 것은 분명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다는 뜻이리라. 소년은 표정을 가다듬으며 그녀의 말에 집중했다.

“그렇다면 더욱더 손을 빌리기 편한 것 아닙니까? 라마잔 님께선 후덕한 분으로 보였습니다만.”

“예, 인자한 분이시지요. 하지만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찬드라 왕가의 법은 출가하여 왕실의 일원이 된 경우 가문과의 연을 완전히 끊어야 하므로…… 사적인 관계를 빌미로 쉬이 만날 수도, 청탁할 수도 없는 관계입니다.”

찬드라 왕가는 대대로 힘이 약한 편이라고 들었다. 그런 법이 있는것은 외척이 왕실이라는 명분을 휘두르는 것을 막기 위해서일까?

“그것은 외척의 전횡을 막기 위해서입니까? 확실히 그런 거라면 이해가 가는군요.”

“그런 것도 있지만…… 왕가에 전해지는…… 합.”

그것은 명백한 말실수였다. 방금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창백해진 로산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갑작스러운 행운에 정신이 느슨해진 탓일까, 차마 담아서는 안 될 말을 입에 담아버린 그녀를 소년은 따가운 침묵으로 응시했다.

무언가가 있구나. 틀림없이.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술을 굳게 닫은 로산에게 말했다.

“지금 그 말은, 못들은 걸로 하지요.”

“예……. 부탁드립니다.”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지만 잘 해결되었으니,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참으로 가증스러운 말이었으나 로산은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얼떨떨한 얼굴로 소년의 인사를 받았다.

결국, 모두가 승자의 탈을 썼으나 진심으로 이겼다고 말할 수 없는 날이었다.

소년의 보고를 받으며 태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의문을 제기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지나치게 운이 좋았구나.”

“이상할 정도였지요.”

“아무튼, 준비한 예산과 사람을 허투루 날려버리지 않게 되어 다행이다. 솔직히 꽤 배 아플 뻔했어.”

태감의 말은 부드러웠지만, 그의 눈에선 서릿발 같은 예기가 담겨 있었다.

분명 일이 잘못된 방향으로 수틀렸을 경우 소년으로서는 상상도 못 할 보복이 있었으리라. 소년은 다시금 태감이 어떤 사람인지를 되새길 수 있었다.

생각을 정리한 태감은 이번엔 표정을 바꿨다. 입술에는 달콤한 꿀을 듬뿍 바르고 눈빛에는 사랑과 경애의 감정을 담았다.

품 안에 들어온 새끼고양이처럼 사랑스럽고 먹으로 친 난처럼 고상했으나 소년은 징그럽다는 듯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이 큰일을 잘 넘겨 주었으니 이런 충신이 또 어디 있을까. 마음 같아서는 뽀뽀라도 해주고 싶구나.”

“제 혈옥비수가 피를 탐하고 있다는 사실을 늘 생각해 주시길 바랍니다.”

“뭐, 그건 제쳐 두고. 뭔가 포상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태감은 품 안에서 주머니를 꺼내 짤랑거리며 묘한 손짓을 해 보였다.

“슬슬 사람이 고플 때가 아니냐. 내 좋은 기루를 소개시켜 주-”

“그것보다 좀 급한 이야기를 합시다.”

“이보다 급한 이야기가 있느냐?”

남자에게 아랫도리 사정만큼 급한 이야기가 또 어디 있다고. 태감의 능글맞은 표정에 소년은 얼굴에 힘을 주며 눈을 부라렸다.

삽시간에 방안의 공기는 살벌해졌고 그들의 대화는 무겁고 냉정해졌다.

“찬드라 왕가에도 왕가의 혈통에 따른 능력이 있겠지요.”

“찬드라 왕가의 적통은 대대로 달의 여신에게 계시를 받을 수 있다고하지. 사람이 잊어버린 기억을 되찾고 마음의 어둠을 물리쳐 준다고 하더구나. 이것이 그들을 신권의 중심에서게 만든 이유겠지.”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요?”

결코, 형용할 수 없고.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도 없지만, 소년은 로산의 말문이 막혔을 때 강렬한 불안감과 초조함을 느꼈다.

뒷덜미를 죽죽하게 젖게 만드는, 눈을 뗄 수 없는, 추상적인 감각.

소년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 불안감은 라하비를 만난 그 날 소년의 심중에 심어진 것이었다.

태감은 어느새 소년의 이마에서 주르륵 흘러내리는 식은 땀을 보며 그에게 고개를 가까이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 감입니다.”

“감, 감이라.”

때론 백 개의 증거보다도 더 날카롭고 정확한 것이 사람의 감이었다.

태감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 어차피 감시를 위해 밀정을 파견해야 했느니 인원을 조금 늘려야겠구나.”

“기우였으면 좋겠습니다.”

“늘, 기우는 기우일 뿐이지.”

털어놓아야 할 것을 모조리 쏟아낸소년은 등받이에 몸을 깊게 파묻고 기나긴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는 조금 익숙해졌나 싶었지만, 후궁이라는 공간은 여전히 그에게 버거운 곳이었다.

나이가 들면 새로운 것에 적응하기 힘들어지는 법이다. 그가 서야 할 곳은 주방이었다.

태감은 작은 목소리로 소년의 귀에 속삭였다.

“정말 고생 많았다. 이젠 내가 일할 차례이니, 넌 쉬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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