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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101화 (101/314)

환관의 요리사 101화

소년은 이삼에게 은밀한 지령을 내렸다. 로산의 방에 잠입하여 가문으로부터 받은 서신이 있는지를 파악하고 그 내용을 알아내는 것이 이삼의 임무였다.

그녀를 움직이는 것이 그녀 개인이 품은 마음인지, 아니면 뒤 배경이 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호오, 향신료가 그렇게 풍부하다니, 부러울 따름입니다.”

“찬드라 왕국은 향신료 말고도 향유도 유명하답니다. 아유르베다라고 하는 찬드라 왕국의 전통 의학은 이 향유를 이용하여 환자의 몸을 치유하지요. 박하기름은 체온을 내려주고 계피와 장뇌, 꿀은 근육의 통증을 줄여준답니다.”

먼 타지에 나온 사람에게 고향 이야기를 하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또있을까. 석고상 같았던 로산의 표정에도 조금씩 감정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강렬한 자부심과 숨길 수 없는 그리음. 소년은 교묘하게 화제를 로산의 고향으로 돌리며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로산 양의 고향은 어떤 곳인가요?”

“제 고향 말씀이십니까?”

상상만으로도 즐겁고, 잠시라도 마음을 팔면 눈물이 떨어질 만큼 애틋하리라. 로산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녀의 시선이 먼 곳으로 향했다.

“좋은 곳이지요. 사철 비가 많이 오고, 경사보다 훨씬 따뜻하답니다. 달콤하고 즙 많은 과일이 지천으로 널려있고, 계곡에는 민물새우에 가재, 작은 물고기들이 가득하지요. 고개를 들어도 하늘을 보기 힘들 만큼키 높은 나무들이 빽빽하고, 사람들은 여유가 있고…….”

그리고, 가족이 있는 곳.

그 순간 로산의 표정에는 숨길 수 없는 균열이 생겼다. 그 일그러짐은 틀림없이 제 나이에 어울리는 소녀의 것이었다.

한없이 단단해 보이기만 했던 그녀도 결국은 타향살이에 지친 소녀인지라, 한번 생긴 균열이 회복되는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분명 멋진 곳이겠지요.”

“예…….”

소년은 점잖게 말을 마무리하며 이삼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으레 하는 영양가 없는 이야기들이 지루하게 이어졌다.

“오, 이삼 군도 돌아왔으니 저희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라하비 님.”

“안녕히 가세여!”

소년은 라하비에게 깊게 고개를 숙이며 슬쩍 로산과 시선을 맞추었다.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에 매부리코 아래로 길게 찢어진 웃음을 심어준소년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월향궁을 빠져나가는 대문 앞. 소년은 이삼에게 물었다.

“뭐 건수가 있니?”

“별다른 서신은 발견하지 못했어요.”

“흔적은?”

“최선을 다해 지웠으니 걱정 마세요.”

소년은 이삼의 머리를 한차례 흩트려 주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늦은 오후, 태감의 저녁을 준비하기 위해 소년은 쉴 틈도 없이 바쁘게 발을 놀려야 했다.

손님이 떠나고 난 후, 라하비는 좀더 풀어진 자세로 의자 위에 늘어졌다.

“로산, 나 오늘 괜찮았어? 실수한 건 없지?”

“네, 발음만 조금 더 연습하시면 완벽하실 거에요.”

마치 고양이처럼 뒹굴거리며 허벅지 위로 머리를 들이미는 라하비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로산은 온화한 칭찬으로 그녀를 위로했다.

“히잉, 제국어는 너무 어려워.”

“라하비 님도 금방 익숙해지실 거에요.”

“둘이 있을 때는, 소나라고 부르기로 약속했잖아.”

“네, 그랬죠. 소나.”

로산은 라하비의 애칭을 부르며 그녀의 귀를 간지럽혔다. 까르르 웃으며 발버둥 치는 라하비에게 로산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에요.”

그것은 그녀 스스로에게 새겨넣는 말이기도 했다. 가늘게 떨리는 그녀의 손가락을 쥐며 라하비 역시 같은 말을 속삭였다.

“응, 다 좋아질 거야.”

한고비를 넘겼으니 잠깐은 행복한 꿈을 꾸어도 좋을 것이다. 로산은 과자를 집어 들어 반으로 갈랐다.

하나는 라하비의 입에, 하나는 자신의 입에. 꿈결처럼 풀려나오는 달콤함은 그녀의 불안감을 희석해 주었다.

“소나, 오상호 님은 어때 보이셨나요?”

“응? 아, 그 허리가 굽으신 분?”

“네.”

로산은 매부리코 소년의 온기 없는 눈동자를 떠올리며 라하비에게 물었다. 제국 금룡 진씨에게 비를 부르는 능력이 내려오고 청해국 이씨 왕가에는 동물과 소통할 수 있듯이 찬드라 왕가에도 비밀스러운 능력이 피를 타고 전해져 왔다.

라하비는 곤혹스럽다는 표정으로 미간에 손가락을 댄 체 무언가를 떠올리려 했지만 끝내 고개를 떨구었다.

“잘 모르겠어.”

“잘 모르겠다고요?”

“응, 애초에 난 능력을 그리 강하게 타고난 것도 아닌걸.”

찬드라 왕가의 혈통은 대대로 사람을 읽는 능력을 타고난다. 그것이 감춰둔 속내이던, 그 사람의 내력이던. 설령 본인조차 잊고 살았던 기억까지도. 그 무시무시한 능력은 찬드라 가문을 왕가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모든 가문의 두려움을 사 왕가의 힘을 잃게 된 원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어린데…… 분명 나이가 어릴수록 읽기 쉽다 하셨죠?”

하지만 왕가의 능력이라고 만능은 아니었다. 사람에 따라 능력의 차이가 있었으며 나이가 많은 사람, 인생에 굴곡이 많았던 사람일수록 읽어내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오늘 방문한 상호는 분명 라하비 보다도 어린 나이가 아닌가.

그 얼굴을 보면 믿기 어렵지만, 후궁의 상호 오운은 분명 어린아이였다.

“그건 그런데…… 오상호는 특이했어.”

“네? 어떤 점이 특이했죠?”

“마치 나이가 많은 노인처럼 분량이 방대하기도 하지만 뭐라고 해야 하나…… 자신이 전혀 모르는 언어로 된 책을 읽는 느낌?”

라하비의 모호한 말에 로산은 침음을 삼키며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복마전이라 불리는 후궁은 어린아이 하나 쉬운 사람이 없었다.

“무언가 특별한 훈련을 받은 걸까요?”

“이럴 줄 알았으면 옆에 있는 사람도 한번 읽어볼 걸 그랬나?”

“다음에 부탁드려요.”

라하비의 이마를 쓸어주던 로산은 잠시 양해를 구하고 자신의 방에서 휴식을 취했다.

침대와 탁자, 작은 옷장 하나.

고향 땅의 물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살풍경한 방은 그녀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듯했다. 그리움을 떨쳐내기 위해서. 물러서지 않기 위해서.

하지만 차마 버리지 못한 그리움의 한 조각을 버리지 못한 그셔는 때때로 그것을 꺼내보며 고통스러워했다.

이삼이 차마 뒤지지 못한 곳. 속옷을 수납하는 서랍의 바닥 안쪽에서 그녀는 빛바랜 편지를 꺼냈다.

군데군데 물방울에 번진 흔적이 남은, 다정한 통증을 가져다줄 그것을 꺼내든 그녀는 말없이 무릎 위에 편지지를 올려두고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언젠가는…….”

몇 방울, 편지지 위에 새로운 아픔의 흔적이 번졌다.

* * *

신뢰할 수는 없으나 서로 간의 이득에 의해 손을 잡는다. 이것은 배아픈 일이었다.

홍엽비의 점심을 차리고 부여비와 설전을 벌이며 태감의 저녁에도 신경 써야 한다는 다사다난하며 피로하기 그지없는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소년은 마침내 찬드라 왕국의 사절단이 경사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모시는 것은 외궁 입니까?”

“외궁의 경양각(景陽閣)이겠지. 외궁에서 손님을 모시는 건물 중에는 제일 등급이 높으니.”

달콤한 깨 단자를 씹으며 차를 홀짝거리는 태감의 말에 소년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 머리를 짚었다.

후궁에서라면 큰 제약 없이 돌아다닐 수 있었지만 외궁은 소년에게 낯선 무대였다.

“뭐, 걱정할 것 없다. 어차피 외궁의 사절단이 오면 라하비와 만나야 할 테니, 그때 시동인 척 묻어가거라.”

“귀찮겠군요.”

“원래 실무진은 귀찮은 법이지.”

깨단자는 씹을 때마다 속의 빈 공간에서 뜨거운 증기가 푸슛 튀어나왔다. 어린아이처럼 천진하게 그것을 즐기는 태감을 보며 소년은 무심코 태감의 뒤통수를 후려칠 방법을 고민해 보았다.

고민에 잠겨있는 소년에게 태감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가벼운 투로 물었다.

“그건 그렇고, 요즘 장소들과 말을 놓더구나?”

“측근들끼리 친해져서 마음이 불편하신가 봅니다?”

“하여간 비꼬는 건 천재적이라니까.”

한 차례, 신경전을 벌인 그들은 이내 피식 웃으며 속내를 털어놓았다.

“아직 밝히지는 않았는데, 자기들끼리 짐작하고는 말을 놓으라 하더군요.”

“그 아이들은 믿을 만해. 난 털어놓아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털어놓아야지요.”

언젠가는. 그 언제는 과연 올까.

씁쓰름한 차를 마시며 소년은 그날이 언제쯤 올지를 고민했다.

세월에 지친 소년의 모습에 태감은 무엇으로 그를 위로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무엇으로 위로할 수 있을까. 과연 무엇이 그의 위로가 될까. 태감은 문득 과연 자신이 준비한 물질적인 보상이 그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의 일은 고된 것이었다. 뜨거운불 앞에서 땀 흘리며 냄비를 휘둘러야 하고 자신의 딸뻘, 어쩌면 손녀뻘인 여자들에게 굽실거려야 했으며, 살얼음판을 걷은 것 같은 경계를 넘나들며 정보를 캐내야 했다.

그것은 비굴해져야 했고, 때론 원치 않게 남을 협박해야 했으며. 때론 목숨을 보장받을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에 대한 보상은 적절한가?

태감은 그에게 무수한 보상을 약속했다. 경사의 가장 노른자위 땅에 큰 장원을 지었고 크고 기름진 농토를 약속했다.

후궁의 비들에 견줄만한 아리따운부인들을 구해줄 것이고 그의 곳간과 창고는 바닥날 일이 없을 것이다.

이것은 적절한 보상인가?

소년은 과연 그가 준비한 물질적인 보상에 매력을 느낄까?

그의 영혼은 충족될 수 있을까?

만족할 수 있을까?

그는 노인이었다. 비록 소년의 몸을 입고 있으나 그의 영혼의 시간이 되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너는…….”

“일할 시간입니다.”

소년은 태감의 말을 막아서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태감은 그를 막아서고 진솔한 답을 듣고 싶어 했다.

그가 원하는 보상을 준비할 수 있도록. 하지만 소년은 완고했다.

“바쁘지 않습니까. 아마 저녁이면 사절단이 라하비 님과 접견할 텐데, 미리 말을 맞춰 둬야지요.”

“그래, 그렇지.”

태감은 끝내 소년은 잡지 못했다.

잠시 후 위정이 서류 꾸러미를 들고 오기 전까지, 태감은 소년이 떠난자리에서 해소할 수 없는 긴장과 초조함을 맛보아야 했다.

그에 비해 도망치듯 자리를 삐져나온 소년은 홀가분한 표정으로 월향궁을 향해 걸었다.

오늘의 호위는 장소. 장소는 사람눈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금세 담장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높은 곳을 좋아하니?”

“높은 곳을 좋아한다기보다는 이렇게 폭이 좁은 길을 좋아해요. 균형감각을 수련하는데 도움이 되거든요.”

“실생활에서 단련이라, 대단한데.”

솜씨 좋게 빙글 돌며 재주를 자랑하던 장소는 멀리서 사람이 보이자 폴짝 뛰어내렸다.

“그 시녀에요.”

“라하비 님의?”

“네.”

소년이 멈춰 서자 머지않아 시녀가 가까이 다가왔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이거 로산 양 아닙십니까. 마침 월향궁을 방문하러 가던 길인데, 잘되었군요.”

“예, 모시러 가던 참이었습니다. 방금 외궁에 찬드라 왕국의 사절단이 방문하여…….”

“지금쯤이면 황제 폐하를 배알하고 난 후겠군요.”

로산은 조금 다급한 듯 보였다. 소년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의 표정을 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무언가 숨기는 듯, 꿍꿍이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라하비 님을 뵙고 난 후에는, 책임자분과 앞으로의 사업을 논의해야겠지요?”

“예, 조속히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후후, 사절단의 책임자분을 만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떨리는군요.”

소년은 약속을 들먹이며 로산에게 다짐을 받았다. 사절단의 책임자. 로산은 분명히 이 사업은 찬드라 왕가에서 지원하는 사업이며 왕가의 지원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약속했다.

하지만 로산의 불안한 눈동자에서 소년은 찌르는 듯한 불길함을 맛보았다.

로산이 자리를 떠난 이후, 소년은 장소에게 책임자의 자세한 정보를 불러 달라 요청했다.

“네? 사절단 책임자분의 정보요?”

“가능한 한 자세하게.”

장소는 당황하면서도 품 안에서 미리 수집한 사절단의 정보가 적힌 두루마리를 꺼냈다.

“어디…… 이름은 라마잔 보랜 람로이 바유. 나이는 예순에 람로이 가문의 가주네요. 람로이 가문은 사막계 부족 중 가장 부유한 영토를 소유한 가문 중 한 곳인데…… 어…… 광산을 소유하고 있고 아주 큰 오아시스가 영토 내에 존재한다고…….”

“사막계 부족. 마흔의 남성. 이름은 라마잔 보랜 람로이 바유. 그래, 이 정도면 돼.”

이 정도면 인물을 특정할 만한 정보는 대충 다 외운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막 부족과 우림 부족은 복장부터가 크게 달랐고 특히 가주라면 가문의 문장이 박힌 물건을 눈에 잘 띄는 곳에 소유하고 있을 테니 대번에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럴 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소년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자신의 등허리를 기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태감과 예상했던 최악의 미래가 어째선지 가깝게 느껴졌다.

“……장소야, 지금 태감님께 정보를 전달할 수 있겠니?”

“지금 제가 가면 혹시 모를 위험에 대처할 수 없을 텐데요.”

“그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전달해야 할 정보야.”

기우일 거라고 치부하기에는 그 무표정하던 로산의 흔들리던 눈동자가 심상치 않았다. 그것 불안감에 찬 눈동자는 못된 장난을 들킨 어린아이와도 닮아 있었다. 감당할 수 없는 무언가를 저질러 버린 눈. 소년은 그것을 그냥 넘길 수 없었다.

만약 오판이었다면 다행인 일이다.

그렇다면 얼마든지 수정할 수 있으니까. 소년은 부디 자신이 멍청한 실수를 한 것이길 기도 했다.

“태감님께 전해. 차선책이 아닌 차악책을 준비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차악책……이요?”

“그래.”

장소를 떠나보낸 소년은 식은 땀이 흘러내리는 이마를 훔치며 표정을 다듬었다. 사업의 진퇴를 논하는 자리에서 이런 표정으로 자리에 앉을 수는 없었다.

흐르는 인공 수로의 물에 얼굴을 비춰보며 소년은 눈매를 누르고 입꼬리를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마침내 로산이 그에게 준비가 끝났다며 접객실로 모시겠다고 말할 때 소년은 완전히 사업가의 표정이 되어 있었다.

“잠시 후 오실 겁니다.”

“기대되는군요.”

“그럼 차를 내오겠습니다.”

로산이 자리를 비우고,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 똑, 똑.

정중한 세 번의 노크 소리.

소년이 들어오라고 허락하자 문을 열고 한 남성이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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