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99화
표자승. 역사와 정통을 자랑하는 표가 상단의 상단주. 장년의 나이였지만 여전히 미혼. 상단주임에도 여전히 직접 서역과 왕래를 할 정도로 정력적으로 상단을 운영하는 것으로 유명한 그는 일생에 가장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말로는 죽겠다 죽겠다 하지만, 인생에 다시없을 황금기임을 알기에 표자승의 입에선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자신 보고 무모한 고집을 부린다며 비웃던 이들이 하루아침에 고개를 조아리게 되었고 평소엔 쳐보지도 못했던 대상단의 행수들과 인맥을 쌓게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기쁨이 넘쳐 과욕을 부리게 될 때면 표자승은 언제나 자신의 어린 스승의 말을 되새김질했다.
자신의 위치는 자신이 혼자 힘으로 올라온 것이 아니며 사실은 모래 위에 지어진 성과 같다는 사실을. 늘 조심하고 주의해야만 자리를 지킬수 있음을.
그의 지위는 한 단계 올라갔으나 그의 세계는 조금 더 삭막해지고 차가워졌다. 그 사실에 씁쓸함을 느낄새도 없이 그의 바쁜 하루는 시작되었다.
“상아, 오늘 아침은 뭐니?”
“어…… 죽이랑…… 두부구이라고 하시던데요?”
아끼는 시동 상아의 말에 표자승을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찬장을 열어 엄선한 원두를 꺼냈다.
경사에 으리으리한 장원이 그의 소유였지만 그의 방은 그리 크지도 않고 가구도 소박한 것을 뿐이었다.
“오늘은…… 비두라 산으로 할까.”
아침은 대충 때우더라도 아침 가배만큼은 신중하게. 공들여 콩을 고르고 난 후에는 아침을 먹는다.
아무리 가배가 좋더라도 빈속에 먹으면 속이 쓰리니 어쩔 수 없다. 아침을 먹고 난 후에는 정성을 들여 콩을 갈고, 직접 가배를 내린다.
직원들의 솜씨도 많이 좋아졌지만 여전히 그의 성에 찰 만큼 재주 있는 직원은 없었다.
“그럼 이번 상행은 옥 행수가 담당하는 것으로 하고, 주 품목는 전과 같이. 그리고 여윳돈을 줄 테니 흥미로운 상품이 있다면 매입해오도록. 이상.”
아침식사 후에는 상단의 간부들과 회의 겸 업무시간을 갖는다. 다관이 크게 번창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표가의 가업은 상단이었고 그의 본질은 상인이었다.
그렇기에 표자승이 다관에 얼굴을 비치는 것은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늦은 오후부터였다.
“오늘 옷은 어떤 것으로 하시겠어요? 마침 남방에서 좋은 비단이 들어왔는데 이참에 비단옷을 한 벌…….”
“아니, 늘 입던 것으로.”
시녀가 중요한 사람을 만날 때 입은 비단옷 몇 벌을 꺼내왔지만 표자 승은 늘 입던 검소한 감색 옷을 찾았다. 짙은 감색에 잘 다려진 옷은 소박하지만 깔끔하고 무난했다.
“어찜 이리 검소하신지…….”
표자승의 무덤덤한 태도에 시녀는 한숨을 내쉬었지만 표자승은 코웃음을 칠 뿐 반박하지 않았다.
실은 이 또한 그의 어린 스승님이 전수한 상술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보통의 상인이라면 당연히 자신의 격을 높이기 위해 품격있는 좋은 옷, 좋은 장신구를 마련하려 할 것이다.
영업을 해야 할 때는 당연히 그도 질 좋은 비단옷과 장신구를 걸쳤다.
‘하지만 지금 내가 모셔야 하는 손님들은 상인이 아닌 격조를 따시는 고리타분한 유생들이지.’
상인이라면 상대의 옷차림으로 격을 잰다. 비단옷, 금붙이는 상인에게 갑옷이며 무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가 상대해야 하는 이들은 고리타분한 군자의 덕을 찾는 학자들. 누구보다 돈을 좋아하는 주제에 상업을 천하게 여기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이들에게 돈을 쥐어짜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물욕에 초탈한 척할 수 있을 정도로.
“표단주 오셨는가?”
“아이고 어르신 여긴 또 어쩌신 일로.”
“어허허 그야 자네 얼굴 한번 보러왔지. 요즘 경사에서 제일 잘 나가는 표단주한테 미리 도장좀 찍어놔야 하지 않겠어?”
징그러운 웃음과 은밀한 청탁들, 그것들중에서 자신에게 이득이 될만한 것들을 걸러내는 것은 피로한 일이었다.
혐오스러운 무리에 둘러싸인 표자승에게 다관의 점원이 작은 쪽지를 건네었다.
“그래서 말인데 표단주, 이번에 내가 모시는 분께서 자네의…….”
“아…… 죄송합니다. 급히 올라가 봐야 할 일이 있어서…….”
“어? 자…… 자네…….”
“정말 죄송합니다 어르신. 다음에 다시 찾아주시면 벌충하겠습니다.”
옷깃을 잡으려 하는 천박한 노인네들을 떨어트린 채 표자승은 다관의 제일 윗층으로 향했다.
삼 증을 넘어, 아직 누구에게도 공개된 적 없는 비밀스러운 사 층. 특실. 그곳에 그의 어린 스승이 기다리고 있었다.
“스승님!”
“어, 바쁜데 불러서 미안하다.”
“아닙니다 스승님. 스승님께서 부르신다면 이 표자승, 그 어떠한 시련이라도-”
“그래 그래. 일단 않아서 이야기하자.”
그의 어린 스승. 오운. 자신의 아들뻘임에도 이미 후궁에서 상호라는 정 오품의 관직에 올라있는 그는 늘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피곤함과 세월에 찌들어 있는 얼굴이었다.
나름대로 상계에서 닮아 빠진 그도 상상하지 못할 삼엄한 세계에서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장사가 잘되는군. 귀찮은 일도 많겠어.”
“감수해야 할 일이지요. 얻은 것도 많습니다.”
“상단의 일은 어떤가?”
“잘 굴러가고 있습니다. 예전처럼 일선에서 뛰지는 못하지만, 믿음직한 친구들이 있으니까요.”
나른한 듯 느긋하게 이어지는 이야기를 나누며 표자승은 점점 심장을 죄어오는 긴장감을 느꼈다.
스승의 께느른한 표정에서 그는 터무니없는, 그리고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 올거라는 사실을 느꼈다.
“찬드라 왕국에 가본 적 있나?”
“서방과 교역을 하는 상인치고, 그곳에 들리지 않는 이는 없겠지요.”
“그곳에서 장사해 본 적은?”
“그것은…….”
문턱이 닮도록 드나들었던 찬드라 왕국이지만 늘 거쳐 가야 할 중간지 점이었을 뿐, 그곳에서 장사해본 적은 없었다.
“찬드라 왕국은 이미 사대상단의 영향력이 물 샐 틈 없이 깔려 있지요. 저희 같은 중소 상단은…….”
“자리가 없다?”
“예. 찬드라 왕국에서의 교역. 꿈같은 이야기지요.”
조금 더 젊은 시절의 그도 그런 꿈을 꾼 적이 있었다. 굳이 목숨을 걸고 원정을 갈 필요 없이 서방과 제국의 모든 물산이 모인다는 찬드라 왕국에 지점을 낼 수 있다면 갈퀴로 돈을 긁어모으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다.
“하지만 도저히 비비고 들어갈 틈이 없더군요. 사대상단의 이름값은 도저히 넘을 수 없는 통곡의 벽이었습니다. 한번 깨지고 나면, 다시 도전할 의욕조차 잃어버릴 만큼 말이죠.”
타협과 좌절이 그의 말에 녹아 나왔다. 문득 한숨을 쉬던 그는 스승에게 푸념을 했다는 사실에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이거 죄송합니다. 이미 충분히 가진 주제에 더 바라면 욕심이겠지요.”
“표자승.”
“예?”
“나랑 일 하나 같이할 생각 있나?”
소년의 차가운 제안에 표자승은 그때의 전율이 다시 찾아온 것을 느꼈다.
* * *
평생을 치열하게 상계에서 살아온 그에게도 어느 순간 안정이라는 것은 찾아왔다.
그가 손대지 않아도 그의 상단이 막힘없이 굴러가고, 큰 욕심 부리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변함없는 인생을 보낼 수 있을 만큼의 부를 쌓게 된것이다.
서른 초반. 상계에서 누구나 인정할 만한 업적을 쌓아 올린 표자승은 자신이 정체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퇴보도, 나아갈 수도 없는 위치.
그는 자신이 쌓아 올린 모든 것을 걸고 위를 노릴 수 있을 만큼 담대한 이는 아니었다.
몇 번이나 목숨을 건 원정 교역을 성공시킨 그도 자신의 모든 기반을 송두리째 걸 용기는 없었다.
사대상단. 모든 중소 상단의 경의와 저주를 받는 통곡의 벽 앞에선 패기 넘치던 젊은이조차 현실을 볼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에게 소년이 찾아왔다. 표자승은 그것을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생각했다.
“제가 처음 스승님을 만나고, 가배를 배운 날. 스승님께서 제게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너 나랑 일 하나 같이하자.
표자승은 아직도 그날의 흥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순간부터 소년은 그의 스승이었으며 정신적지주가 되었다.
나이와 신분을 떠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흥분을 느낀 이상 그의 등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소년을 만나 그의 숨 막히던 정체감이 사라졌다. 그의 세계는 맥동하기 시작했고 다시금 뜨거운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사나이에게, 꿈을 잃은 이에게 다시 꿈을 꾸게 해준 것이다.
핏줄이 선 표자승의 눈을 노려보며 소년은 조용히 그에게 미래를 보여주었다.
“분점을 낼 생각 있나?”
“분점입니까?”
그것은 표자승 역시 고민하고 있던 사안이었다. 과포화되어 막심의 가배를 즐기지 못한 손님들의 열화와 같은 요구는 상인이라면 모른 척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표자승은 소년이 그런 단순한 제안을 하러 이곳까지 오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늘 자신을 놀라게 해준 소년이라면 이번에도 자신의 심장을 요동치게 해줄 거라고, 그의 제안을 듣기 위해 표자승은 고개를 숙였다.
“이 어리석은 놈에게 답을 주십시오. 스승님. 단순히 분점을 내자는 말씀은 아닌 것을 알고 있습니다.”
표자승은 그의 제안을 듣기도 전에 이미 조건 없는 수용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만약 목을 달라 한다면 목이라도 내놓겠다는 듯이, 소년은 그것을 원치 않았다.
그는 조금 더 고민해야 했다. 더 고민하고, 갈등하고. 검토한 후에,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 결정하기를 원했다.
이번에는 돌이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표자승이라는 남자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수도 있다.
“분점을 열 곳은, 찬드라 왕국이다.”
“……스승님, 설마.”
“현 경사에서 가장 많은 다관을 소유한 상단은 어디지?”
“금화 상단 이지요.”
“너희 상단과 취급하는 품목이 가장 겹치는 곳은?”
“……금화 상단입니다.”
표자승은 그제야 자신이 모르는 뒷사정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거대한 규모로 그려진 청사진의 일부분인지, 그 톱니바퀴가 되는 것을 감당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도.
당장에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 않기 위해 자신의 허벅지를 손으로 누르는 표자승을 보며 소년은 쐐기를 쑤셨다.
“그리고, 금화 상단과 연줄이 있는 비는 누구인지, 알고 있겠지.”
“……금화 상단 출신의 비가 한 명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당시 금화상단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해 상계에 말이 많았지요.”
“옥린비. 태감님과 정적 관계인 안양비 파벌의 핵심 인물이지.”
표자승은 어금니가 바스러지도록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두근거리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두려움과 흥분, 광기 어린 전율이 그의 핏줄을 달리고 있었다.
“무슨 의미인지 알겠나?”
“금화 상단을, 치신다는 말씀이시군요. 태감께서, 사례감의 태감께서.”
“아니. 태감께서 공식적인 자리에서 손을 쓰실 수는 없다. 치는 것은 어디까지나.”
너지. 네가 금화 상단을 치는 거다.
소년의 말에 표자승은 허탈한 표정으로 의자에 걸터앉았다. 소년의 말한 마디 한 마디에 실린 무게감이 그의 영혼을 내리눌렀다.
난 이렇게나 긴장에 약한 인간이었던가? 탈력감과 무력감 속에서 표자승은 심장에 싹튼 초라한 불꽃을 보았다.
한때는 그 무엇보다도 크고 환하게 타올랐던 젊은 날의 불꽃은 어느새 사그라들어 있었다.
세월이라는 연마석에 마모된 자신은 어느새 이토록 초라한 사람이 되었던가.
“난 그리 교활한 인물이 되지 못한다. 내가 조금 더 교활한 이였다면 너에게 재물과 보상이 가득한 미래를 약속했겠지. 하지만 그러기엔 난 너무 우둔한 사람이야. 내가 너에게 약속할 수 있는 것은 불확실한 미래뿐이다. 표자승. 나의 주인은 비정해야만 하는 사람이니까.”
실패한다면, 그리고 손익 득실의 저울에서 네 가치가 더 가볍다면 우린 널 버릴 것이다.
소년의 말은 비정했으나 꾸밈없이 솔직했다. 그렇기에 소년은 내심, 그가 이 제안을 거절하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시간을 주마.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다시 생각해 봐라. 네가 제안을 거절한다고 해서 불이익이 될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표자승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소년을 보고 있었다. 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은 것은 아니다.
그저 소년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그 날카로운 눈매와 젖살 없는 메마른 볼. 매부리코 아래로 입술이 얇고 길게 찢어진 입.
어린아이다움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지치고 노쇠한 얼굴. 그 기이함 속에서 표자승은 젊은 날의 자신을 찾았다. 가슴 속에 집채만 한 뜨거운 불꽃을 품고 있던 그 날의.
“오래전에 멍청한 놈이 있었습니다.”
소년은 그의 말을 들었다.
“어떤 멍청한 짓을 했지?”
“젊은 날에 크게 성공을 한 놈이었지요. 몇 번이나 사막과 제국을 오가며, 큰 돈을 벌었습니다. 패기가 있었고, 운도 따라줬지요. 주제에 어울리지 않는 객기를 부릴 만큼.”
그렇기에 분수에 어울리지 않는 영광을 탐내었다. 어쩌면 그것이 올바른 행위였기에 어리숙한 공명심과 정의감에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 멍청한 놈은 사대상단의 독과 점체제를 타파하고 싶어 했다.
“멍청한 짓이었지요. 그 얼간이는 세상의 비웃음을 받으며 간신히 목숨을 건졌습니다. 어쩌면 사대상단을 일부러 그 목숨만은 붙여둔 걸지도 모릅니다. 자신들에게 도전하는 자가 어찌 되는지, 어떤 꼴이 되는지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어린 날의 꿈은 저물었다.
현실은 차갑지만, 합리적이었고 안락했다.
큰 과욕을 부리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나쁘지 않은 인생을 살 수 있었다. 좋은 옷, 좋은 술, 좋은 음식을 먹으며. 안주할 수 있었다.
소년은 어른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표자승이라는 남자는.
여전히 어린아이로 남고 싶었다.
여전히 꿈을 꾸고 싶었다.
“다시…… 도전하고 싶습니다.”
“표자승.”
소년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표자승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어느새 타오르기 시작한 불꽃은 성큼 자라나 그의 가슴을 달구고 있었다.
시간의 모래 속에 파묻어두었던 낡은 꿈이 돌아왔고 늘어진 눈꺼풀 안쪽 탁한 눈동자에선 다시 극광의 빛이 떠올랐다.
“도와주십시오.”
털북숭이 거한이 소년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 풋풋한 열정에서 소년은 자신이 너무 오래전에 잃어버린 것을 보았다.
“이 못난 놈이 다시 한번 꿈을 꿀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이놈에게 아직 기회가 있음을 믿게 해주십시오. 이 우둔한 놈에게, 포기하지 말라고 말해주십시오.”
표자승은 확신했다. 자신이 이 나이까지 장가를 가지 않은 이유는 바로 지금을 위해서라고.
혈혈 단신의 맨손 빈 몸으로 다시 한번, 날아오를 이 날을 기다렸던 것이라고.
표자승을 굽어보며 소년은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그 뜻은 명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