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97화
요 몇 주간은 그야말로 혁명이란 이름이 어울리는 시간이었다. 모든 유행의 시작점이자 제국의 심장인 경사에서부터 시작된 열기는 온 제국을 뜨겁게 달구었다.
각지의 이름난 명사들이 돈을 싸들고 달려와 다관 막심을 찾았고 한정판 다기를 웃돈을 줘 가며 수집해갔다.
돈 자랑하기 좋아하는 유생들은 다관 막심의 3층 내실을 빌려 친구들에게 한턱내는 것을 최고의 자랑거리로 삼았고 일반 서민들도 부담 없는 가격에 즐길 수 있는 가배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제도에서는 이제 멋을 아는 자라면 누구나 진한 가배 한 잔을 즐길 줄알아야 한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질 때쯤. 바깥처럼 소란스럽지는 않지만 황궁에서도 가배의 영향력은 은밀하게 세를 불려나가고 있었다.
문사들은 차 대신 잘 우려낸 가배 한잔을 마시며 회의를 진행했고 무장들도 땀 흘린 후에 차 대신 설탕을 듬뿍 넣은 달콤한 가배를 찾았다.
후궁 시녀들의 수다거리에도 가배에 관한 이야기는 빠지지 않았고 비들의 다과회에도 향기 좋은 가배와 막심의 다기가 없다면 촌스럽다는 평을 면치 못했다.
그러니 태감으로서는 만족스러울수밖에. 근래 웃음이 떠나질 않는 태감의 표정이 아니꼽다는 듯이 소년은 툴툴거리며 말했다.
“기분 좋으신가 봅니다.”
“좋다마다.”
불충하기 그지없는 소년의 눈빛에도 태감은 싱글벙글 웃을 뿐이었다.
태감은 원한다면 기꺼이 뽀뽀를 해주겠다는 듯이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소년을 보았다.
“현 경사 최고의 관심거리이자 유행의 중심인 다관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데 어찌 즐겁지 않겠느냐. 덕분에 이번에 큰 이득을 보았다.”
하루 열 봉지 한정으로만 파는 최고급 원두에 원 시세의 이십 배까지 가치가 부풀려진 한정판다기.
그것들을 그 어떤 선물보다도 값비싼 정치적 무기가 되어주었다. 분명 다관을 마련하기 위해 지불 해야 했던 손실을 모조리 메꾸고도 남았으리라.
“그냥 지분도 아니지. 다관의 소유주인 표자승의 스승님이 내 옆에 있는데.”
단순한 지분을 넘어서, 표자승의 마음을 사버린 소년의 가치는 필설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태감의 아낌없는 칭찬에도 소년은 피로와 귀찮음에 찌든 한숨을 몰아쉴 뿐이었다.
“덕분에 이번에 뺑뺑이 좀 돌았지요.”
태감이 한정판 다기와 원두로 정치판을 주름잡는 동안 소년은 후궁의 세 비와 폐하의 앞에서 재롱을 떨어야 했다. 아침에는 난화비 님께 가배를 올리고 점심에는 홍엽비 님께 매운 음식과 후식으로 가배를 올리고 저녁에는 부여비 님께 가배를 올리며 학술회를 열어야 했다.
“아니, 이렇게 바쁜데 최소한 황제폐하는 좀 막아주셨어야죠?”
“보통 황제 폐하를 가장 우선시해야 하는 거 아니냐?”
“바쁜데 제가 황제 폐하까지 챙겨야겠습니까? 예?”
소년의 말에 태감은 뭐라 반박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이내 포기했다. 눈밑에 짙은 그늘이 깔린 소년에겐 어떤 말로 반박을 해도 대답 대신 칼이 먼저 날아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소년에게 태감은 엄숙하고 진중한 태도로 말했다.
“그런데 짜잔~ 새로운 일이 들어왔단다.”
“시발 계급장 떼고 한판 합시다. 아님 사표 쓸 테니까 수리해 주던가.”
“진정해 진정. 이번엔 정치와는 관련 없는 이야기다. 편할 거야.”
이젠 태감의 말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기가 어려워진 소년은 불신의 눈초리로 태감을 노려보았다. 차가운 종의 시선에 태감은 눈을 돌리며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게 말이다. 라하비의 문제다.”
“라하비? 그분께서 어쩌신 일로?”
태감의 말에 소년은 인상을 찌푸렸다.
라하비.
아마 후궁에 살며 절대 대면할 일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이름이 들려오자 소년의 본능이 경종을 울려댔다.
라하비. 그녀가 어떤 여인인가. 찬드라 왕국에서 볼모라는 명분으로 시집온 공주가 아닌가. 권력을 쥐여줄 수도, 그렇다고 손을 댈 수도 없는 위치의 그녀는 황후로 올라갈 수 없기에 유일하게 안양비가 적대하지 않은 오상비(五祥妃)였다.
“동맹국의 공주이시니 대접하지 않을 수 없으나, 외인의 신분이니 나라의 국모자리를 내줄 수도 없어 그저 품고만 계신 분이 라하비 아닙니까. 계획에 라하비 님의 이름은 없었을 텐데요?”
후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 신분의 특수성 때문에 라하비는 황후가 될 수 없는 존재였다. 황후가 될 수 없다면 권력을 쥘 수도, 쥘 필요도 없다.
그렇기에 안양비도 그 서슬 퍼런 칼날을 들이대지 않았고 태감 또한 파벌을 만들 때 그녀를 고려하지 않았다.
굳이 그녀를 포섭하여 얼마 되지 않은 얻은 이득보다 실이 더 클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포섭한다면 그 이득은 기껏해야 난화비에 대한 지지표명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까지 포섭하게 되면 오상비 넷이 한 파벌로 묶이게 된다.
안양비에게 이보다 더 거슬리는 일이 또 있을까? 풀숲의 뱀이 무섭다면 풀숲을 건들이 말아야 하는 법이다.
소년의 눈빛에 태감은 한숨을 토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명령을 받으면 따라야 하는 하급자의 서러움이 짙게 깔려 있었다.
“가배 탓이다.”
“예?”
“가배, 서역의 말로는 커피라 한다지. 그 커피는 사실 찬드라 왕국에서 대중적인 음료였다는군.”
태감의 말에 배어든 검푸른 불길함이 소년의 옷섶에 젖어 들었다. 소년은 팔다리에 추를 매단 채 바다에 빠진 것처럼 허망한 절망감에 물든 표정으로 의자에 걸터앉았다. 방만한 자세였으나 이 자리에 그를 나무랄 사람은 없었다.
“향수병?”
“아마도. 물론 확실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럴 가능성도 있다는 뜻이지.”
“허…… 허허…… 허허허허.”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그렇다면 당연히 심리상담은 상담가에게. 그런데 향수병이라는 병이 상담으로 치료가 되는 병이던가? 향수병의 약은 귀향이 아닌가.
“그럴 수도 없는 입장이다. 명색이 동맹국의 공주야. 그런 귀하신 몸이 향수병 때문에 고국으로 귀향한다면 세인들은 혹시 제국의 대접이 미흡했던 것은 아닐까 의심하겠지? 그럼 제국의 체면이 어찌 되겠느냐.”
“염병할 일이군요.”
“늘 그랬지.”
흐리멍텅한 눈으로 짧은 욕지거리를 입에 담던 소년은 이내 비스듬하게 턱을 괴고는 태감에게 해야 할 일을 물었다.
이미 사건이 벌어진 이상 빼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결심이 선 소년의 표정에 태감의 얼굴에도 모략가의 웃음이 걸렸다.
“늘 하던 일을 하면 된다.”
“제가 여자 꼬시는데 선수기는 하지요. 근데 이번 분은 꼬시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라하비는 포섭할 필요가 없는 비였다. 하지만 태감은 음흉한 속내를 혀끝에 담으며 소년의 근시안적인 시야를 비웃었다.
“왜 안 되느냐?”
“그야, 네 비가 모인다면 안양비 파벌에서 견제가…….”
“포섭했다 하여 굳이 곧바로 지지를 할 필요는 없지.”
“……아하, 쐐기로 쓰시겠다?”
소년은 그제야 태감이 그리는 미래가 이해가 되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태감의 그림 대로라면 라하비가 난화비를 지지하는 것은 안양비의 세가 축소되고 난화비의 파벌이 득세하기 시작한 그 직후일 것이다.
“하아…… 어쩔 수 없군요. 한번해 보지요.”
이거, 커리라도 다시 연습해야 하나?
중화 요리사인 소년에게 커리는 그리 익숙한 요리가 아니었다. 그나마 유명한 빈달루 커리나 치킨 마크니 커리 정도야 알고 있었지만, 인도만 해도 지방마다 커리가 다른데 아예 다른 세계는 어떻겠는가?
애초에 찬드라 왕국이 커리를 주식으로 하고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제국이 고대중국과 비슷하다고 다른 나라도 그러란 법은 없지.”
판단할 만한 그건가 되는 정보가 없으니 소년이라 한들 이렇다 할 방법이 없었다.
일단은 부딪혀 보는 수밖에. 소년의 말에 태감은 그럴 줄 알았다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내 미리 연통을 넣어두었으니 지금 출발하면 늦지 않을 거다. 장소를 붙여줄 테니 현장에선 장소를 보내 자문을 구하도록.”
다른 세 비를 만날 때와는 달리 태감은 책상에서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후궁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을 만나러 가는 것인데 사례태감인 태감이 직접 나서야 하지 않을까?
“나도 가고야 싶다만, 밀린 일이 너무 많아서 말이지. 그리고 라하비는 그런 격식을 따지시는 분이 아니시니 걱정할 것 없다.”
“그럼 다행이겠습니다만…… 저녁은 적당히 챙겨 드셔야겠군요.”
“……하아…… 노력해 보마.”
시름에 잠긴 태감을 뒤로한 채 소년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한고 비를 넘어서니 새로운 고비가 나오고 이제 좀 쉬려 하니 그새 또 골치 아픈 일이 발목을 잡으니, 과연 언제쯤 되어야 무위도식하며 살 수 있을까.
소년의 초라한 등 뒤로 장소가 종종걸음으로 그를 쫓았다.
* * *
월향궁(月向宮)본디 새로 오상비가 된 라하비를 위해 궁을 새로 세우기 전 가볍게 머물 거처로 선정된 곳이었으나 라하비가 궁이 마음에 든다 하여 그래도 오상비의 궁으로 남는 영광을 누리게 된 그곳은 후궁의 외곽에 마련되어 있었다.
작고 아늑하게 꾸며진 궁은 후궁의 정점에 어울리는 위엄과 화려함은 없었지만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매력이 있었다.
월향궁은 기이한 곳이었다.
“제국의 문화와 찬드라 왕국의 문화가 화합을 이룬 장소라는 표현이 적절하겠죠?”
“이 융단이 무척 흥미롭네요. 양모로 짠 것 같은데…….”
곳곳에 이국적인 정취가 남아 있는 월향궁은 여태껏 경험한 사상궁과는 다른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마치 이국의 비밀스러운 신전을 방문한 것만 같은 경건함을 느끼게 해소년을 긴장하게 했다.
소년과 장소가 가까이 오자 미리대기하고 있던 시녀가 그들을 마중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라하비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 바로 말입니까?”
보통 지체 높으신 여성을 만나기 위해선 최소한 시간 이상을 기다리는 것이 제국의 관례였다.
하지만 라하비와 동향 사람인 듯한 가무잡잡한 갈색 피부의 시녀는 라하비께선 그런 불필요한 관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곧바로 문을 열었다.
“아뇽 하세요? 라하에여!”
“안녕하십니까. 손님 여러분. 찬드라 왕국의 제 1왕녀 소나크시 소남카람찬드 찬드라 라하입니다. 라하비께서는 아직 제국어가 익숙하시지 않아 통역인 제가 대신 인사드리는 점,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별다른 장신구 없이 연한 색 비단옷에 흰 꽃 한 송이를 꽃은 발랄한 소녀의 인사는 어눌했지만, 그 어색함을 잊어버릴 만큼 활기가 가득했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이국의 언어로 노력하는 라하비의 열정은 소년의 노쇠한 심장에도 스며들 정도였다.
라하비가 권위적인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피부로 느낀 소년은 내친 김에 궁금했던 것을 질문했다.
“한가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시지요.”
“다른 비 분들께서는 각자 존호(尊號)를 받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라하비께서는…….”
시녀는 잠시 라하비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이고는 그녀의 허락을 받고 다시 입을 열었다.
“라하비 님의 본명인 라하는 찬드라 왕가의 직통에게만 허락받는 왕명입니다. 나라에서 가장 존귀한 이름이지요. 그래서 용의 아들께서도 따로 존호를 쓰는 대신 왕명으로 대신하는 것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시녀가 말을 끝내자 옆에서 가만히 말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라하비가 까르르 웃으며 시녀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라하비의 말을 들은 시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증이 풀리셨다면, 이제 용건을 말씀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예? 예. 말씀하시지요.”
소년의 허락에 시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무언가를 가져왔다. 황동으로 만든 좁고 긴 주전자. 소년은 대번에 그것이 커피를 달이기 위한 주전자임을 눈치챘다.
“가배군요?”
“예, 찬드라 왕국식으로 우려낸 가배입니다. 한번 드셔보시지요.”
진하게 우려진 커피는 전형적인 달임 커피였다. 약간 점도가 느껴지는 묵직한 커피는 향이 진하고 씁쓰름했다.
평소 커피에 설탕을 거의 넣지 않는 소년도 달임 커피 앞에서는 설탕을 아끼지 않았다.
“훌륭한 가배입니다. 이것은 다관 막심에서 제공되는 원두가 아니군요?”
소년의 말에 군인처럼 강직한 무표정을 유지하던 시녀의 표정에 희미한 금이 갔다.
소년의 예사롭지 않은 미각에 감탄한 것인지 시녀의 말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대단한 미각이시군요. 예, 이 원두는 찬드라 왕국의 사절단에게 받은 원두입니다. 바로 알아맞히시는군요?”
“본업이 요리사다 보니…… 그러고 보니 가배를 달일 때 향신료나 개암나무 열매를 넣어 달이는 경우도 있다 들었습니다. 혹시 폐가 되지 않는다면 한잔 청할 수 있을까요?”
“왕국에선 축제가 있을 때 견과류와 계피를 넣어 진한 가배를 끓이지요. 그것을 아시는 분께 내드리지 않을 수 없지요.”
시녀는 금세 새로운 주전자에 커피를 끓여왔다. 구수한 커피 향기 사이로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달콤한 계피 향기.
소년이 터키를 여행하며 얻어 마셨던 잔칫날의 커피 맛이었다. 옛 추억에 입맛을 다시며 잠깐의 여운을 즐긴 소년은 잔을 내려놓으며 추억을 털어냈다.
이런 뜨뜻미지근한 감정은 외로움을 달래줄 수는 있어도 정치와 협상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아직 라하비의 요구가 무엇인지, 그 진의를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추억에 젖어 있을 수는 없었다.
“훌륭한 가배입니다만, 굳이 이 한 잔을 맛보여 주시기 위해 절 부르신 것은 아니시겠지요?”
“예, 실은 상호께서 가배에 정통하시다는 말을 듣고 이렇게 요청을 드렸습니다.”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습니다만,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말씀하십시오.”
호의적인 소년의 태도에 결심을 굳힌 듯 라하비는 다시 떠듬떠듬 말문을 열었다.
“오 상호……께. 부타기 이습니다!”
“예? 예, 말씀하시지요.”
“가배를 배우고 싶습니다!”
“예?”
“죄송합니다. 지금부터는 제가 대신 설명 드리겠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발음으로 애를 쓰는 라하비를 대신해 난처한 기색의 시녀가 대신 말문을 열었다.
“실은 이번 찬드라 왕국에서 사절단이 올 때, 이 제국식 가배를 선보이고 가능하다면 그 제조법을 전수해 주시길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애석하게도, 그 부탁은 도저히 소년이 혼자 결정할 수 없는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