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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94화 (94/314)

환관의 요리사 94화

사근사근하고 달콤한 칼날과 정중하고 우아한 방패. 명예와 자존심이 피와 주검을 대신하는 전장은 살점을 탐하는 창과 검이 날뛰는 전장만큼이나 치열하고 참혹했다.

“저…… 과자를 새로 구워서요…….”

어색한 미소를 띠고 과자를 가져온 장소 때문에 전쟁은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새끼고양이처럼 바들바들 떨며 볼에 홍조를 띄운 미소년은 진귀한 것이었다. 다른 비들이야 그가 누구의 종복인지를 알고 있으니 웃음으로 넘겼지만 옥린비는 노골적인 욕망을 표정으로 드러냈다.

그녀는 알고 있을까. 닭 모가지도 비틀지 못할 것 같은 가녀린 소년이 실은 장정 열 명을 단숨에 쓰러뜨릴수 있는 실력자라는 사실을.

‘거 취향 참.’

소년은 노골적으로 드러난 옥린비의 표정을 보며 조소를 흘렸다. 마치 품 안에 들어온 새끼 토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궁리하는 듯한 순진한 장난기와 너무 쉽게 망가질 장난감을 어찌 가지고 놀아야 할지 고민하는 천진함. 그리고 새하얀 백지에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어른의 색기.

그것들이 공존하는 농염함이 옥린비의 눈가에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수줍게 과자를 내려놓는 장소의 얼굴은 천천히 뜯어보며 나른한 숨을 흘리는 그녀에게선 위협에 대한 대비가 조금도 되어 있지 않았다.

그로서 소년은 장소와 이삼이 생각보다 후궁에 그리 널리 알려진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만약 그녀가 장소의 정체를 알고 있었더라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제국에서 가장 적이 많은 남자를 밀착 경호하는 호위무사라는 사실을 안다면, 숨 쉬는 것처럼 죽음을 행사할 수 있는 암살자라는 사실을 안다면 지금처럼 색욕을 담아 그를 보았을까?

소년의 시선은 분명한 불쾌함과 진득한 혐오에 절여져 있었다. 건전하고 마초적인 성향의 그로서는 자신의 직장 동료이며 보호해야 할 어린 아이인 장소에게 끈적한 시선을 보내는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만약 그의 손에 몽둥이가 들려 있었다면 단매에 때려죽이고 싶을 정도로.

장소와 이삼의 모습이 잘 보이는 위치에 숨어 소년은 조용히 이삼에게 지시를 내린 순간을 기다렸다.

따끈한 에그타르트가 탁자의 중앙에 놓이고, 주최자인 난화비가 다른 비들의 접시에 과자를 올리는 순간.

소년은 기미를 볼 시녀와 옥린비가 에그타르트를 먹는 순간이 기회일것이라 생각했다.

자신의 음식이 사람을 감탄시키지 못할 리가 없다는 오만한 자부심.

하지만 소년은 확고했다.

“어머!”

하지만 기회는 소년의 예상과는 다른 곳에서 터져 나왔다. 경쾌하고 쾌활한 경탄사, 듣는 사람의 기분을 들뜨게 만드는 풋풋한 미성.

부여비였다.

에그타르트를 베어 문 부여비는 그녀 주위의 모든 사람이 에그타르트에 시선이 쏠릴 만한 찬사를 읊었다.

“식은 에그타르트와 따뜻한 에그타르트는 완전히 다른 과자라고 해도 믿겠어요. 따뜻하고 뭉근하고. 달콤함은 절제되어 있지만, 그 느낌은 진하고 오래가는.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난화비는 한순간 당혹감을 표현했지만 이내 우아한 검은 눈썹을 부드럽게 휘게 하며 부여비에 못지 않은 미소를 그렸다.

“저명한 시인으로 이름 높으신 부여비 님께서 어떤 시를 선보여주실지 기대되는걸요?”

“휴우, 도저히 표현할 수가 없네요. 말 그대로, 시인을 한숨짓게 만드는 맛이에요.”

부여비의 본모습을 본 적 있는 소년조차 그녀를 다시 보게 될 만큼 쾌활하게 행동하는 부여비의 모습은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의구심에 소년이 굽은 등을 조금 펴고 얼굴을 들어 올렸을 때.

“달에 비유하는 것은 너무 촌스럽겠죠? 밝은 태양이라고 할까요? 하지만 태양 또한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때로는 속삭이듯이, 때로는 웅변을 하듯이 목소리에 강약을 주며 찬사를 연발하던 부여비의 시선이 소년과 마주쳤다.

그 순간. 그녀가 소년을 향해 배시시 미소지었을 때.

소년은 지체없이 이삼에게 지시를 내렸다.

“빚이 하나 또 늘어버렸군.”

도대체 그녀가 무엇을 근거 삼아 그들을 도왔는지, 무엇을 눈치챈 것인지 소년은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뱀새가 황새의 생각을 어찌 알겠는가. 그 대신 소년은 이삼의 유려한 솜씨에나 마음껏 감탄하기로 했다.

실행은 과감하게 거침없이, 이삼의 손이 갈고리처럼 움직이며 시녀의 허리춤을 스치자 잘 익은 과실이 무르익어 떨어지듯이 향낭이 그의 손에 떨어졌다.

“여기, 바로 검사해 볼게요.”

은밀하게 뒤로 물러선 장소가 품에서 옥룡침을 꺼내 들었다. 백독을 감별해낸다는 황실의 기물은 대번에 거무튀튀한 빛으로 물들었다.

“……상당한 극독…….”

“태감님께 가져다 드려야겠군요.”

소년은 항냥의 입구를 엄중하게 봉한 다음 이삼에게 건네고 자신은 다시 난화비들을 훔쳐볼 수 있도록 자세를 잡았다.

“어? 같이 안 가세요?”

“예? 저런 재밌는 구경거리를 두고 어딜 갑니까?”

옥린비가 당황하는 꼴이 얼마나 고소할지, 기대감에 부푼 소년의 얼굴에는 순박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 * *

“어머…… 부여비 님의 말씀을 들으니, 정말 기대가 되는걸요.”

옥린비는 갸름한 눈동자에 부여비의 과도한 칭찬에 대한 멸시와 조소가 담겼다.

노골적인 조롱을 의뭉스러운 웃음으로 넘기는 부여비를 흘겨오던 옥린비는 마침내 때가 되었다는 신호를 시녀에게 보냈다.

“애린아.”

“네…… 네…….”

마침내 다가온 죽음에 시녀는 창백한 얼굴로 천천히 도리질 쳤다. 제아무리 각오했다 한들, 들이밀어진 죽음에 순응하기에 그녀는 너무 젊고 꽃다운 나이였다.

폐부 깊숙한 곳에서 응어리진 공포는 목에서 메아리치며 입을 벌어지게 했다. 입속에서 튀어나오려 하는 한마디.

“저…… ㅁ…… 모…….”

못하겠어요. 제발, 살려주세요.

그 한마디. 눈물방울과 함께 맺힌 그 한마디가 떨어지기 전. 옥린비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시녀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애린이, 이제 머지않아 궁을 나가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답니다.”

천천히. 상냥하고 친애와 우정이 듬뿍 녹아든 그 말은 그 누구라도 속을 수밖에 없을 만큼 따스했다.

“정말 축하할 일이네요.”

“궁 생활이 고되었을 텐데, 가서는 좋은 일만 있기를 바라요.”

“그…… 축하해요…….”

눈물방울마저 말라버릴 만큼 참혹한 공포가 시녀의 척추를 파고들었다. 입술이 바싹 마른 채로 옥린비를 돌아보는 시녀를 향해 그녀는 사람이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의 자애를 담은 표정을 보여주었다.

“네가 가면 한동안 쓸쓸해지겠구나. 그래도 고향에 가면 사랑하는 가족들을 만날 테니 잡지는 않을게 부디 행복하렴.”

그녀의 말한 마디 한 마디가 시녀의 심장에 못을 박아넣었다. 함부로 뛰지 못하도록.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생존욕 마저 지게 만드는 그 말.

그 한마디에 시녀는. 애린이라는 이름의 시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이라는 그 한마디의 무게. 그무게에 떨어진 꽃이 이 후궁에는 얼마나 많을까. 썩어 문드러진 꽃의 무덤에 오늘도 꽃 한 송이가 떨어지려 하고 있었다.

“…….어…… 어?”

그러나 현실은 늘 불행을 직선적으로 던져주지 않는다. 불확실한 운명의 장난은 늘 불행을 비틀어 변질시켜 버리곤 했다. 지금처럼.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휑한 허리춤은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온 죽음과는 다른 형태의 공포를 선물했다.

참담한 색채로 물든 애린의 얼굴에 옥린비는 그녀의 허리춤을 보았다.

“……애린아, 어서 먹어보렴. 맛있어 보이는데 식으면 아깝잖니.”

딱 봐도 날카로운 것에 끊어진 듯 대롱거리는 줄만이 매달린 허리에서 시선을 펜 옥린비는 마치 차가운 피가 흐르는 동물과 같은 눈으로 나지막하게 애린을 재촉했다.

“네…… 네……!”

아직 따스한 온기가 남아 있는데도 애린은 자신이 쥔 과자가 얼음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잇몸이 얼어버릴 것 같은 냉기를 느끼며 간신히 과자를 씹어 삼킨 애린을 나른한 눈으로 보던 옥린비는 갑작스럽게 일어서며 비들에게 인사를 올렸다.

“어머, 벌써 가시게요? 과자도 하나 드셔보시지…….”

“죄송합니다. 갑자기 속이 좀 안 좋네요.”

“저런…….”

냉막한 대꾸로 난화비의 권유를 끊으며 옥린비는 더 이상의 용무는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이상 무례를 숨기지도 않는 그녀에게 부여비는 친근한 미소로 다시 한 번 과자를 권했다.

“정말 맛있는 과자인데…… 아쉽네요.”

명백한 승자의 얼굴을 한 부여비에게 옥린비는 짤막하게 대꾸했다. 더이상의 대화가 무가치하다는 듯이, 간신히 웃어른에게 보일 수 있는 무례의 아슬아슬한 지점을 건드리는 어투였다.

“예, 근데 속이 안 좋네요.”

“그럼 조심히 가세요. 가다가 탈이라도 나실지 모르니.”

“……예, 조심해야죠. 다음부터는.”

“그럼 부디 별 탈 없으시길 바라요. 가시는 길도 평안하시길.”

둘의 사이에서 난화비는 해맑은 웃음으로 옥린비를 배웅했다. 대답도 없이 자리를 피하는 옥린비의 등을 바라보며 난화비는 이제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음을 실감했다.

그녀들이 하고있는 것은 정치였다.

죽을 수도 있고, 때로는 죽여야만 하는 것. 난화비는 그것을 뼈에 사무치도록 느꼈다.

분명 자신이 모르는 정치적 암투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부여비와 양태감님의 사람들이 사전에 막아준 것이겠지.

자신의 둔감함을 자책하기 전에 난화비는 우선 부여비에게 깊이 고개숙여 감사와 사죄를 전했다.

“제 미욱한 대처로 심려를 끼쳐드려…….”

“그러실 필요 없어요. 일단은 저희, 동맹이잖아요?”

옥린비를 대할 때의 적의와 조롱으로 가득 차 있었던 미소가 아닌, 마치 동년배를 대하는 것처럼 순박하고 평범한 그녀의 미소는 사람의 맥을 풀리게 했다.

난화비의 손을 잡으며 마치 수년간 알고 지낸 지기처럼 친근하게 구는 그녀의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정치란 이토록 두려운 것이란 것을. 난화비 만큼이나 부여비도 사무치도록 실감했다.

글과 먹물로는 알 수 없었던 세계.

한때는 동경했고 한때는 비웃었던 세계에 발을 올렸음을 부여비는 이자리의 누구보다도 강렬하게 느끼고 있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전율과 불안으로 떨리는 부여비의 손을, 그 온기를 마주 잡으며 난화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치적 동맹이며, 서로가 목숨을 공유하게 된 사이. 남자들처럼 거나하게 술잔을 치켜들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은 떨리는 손으로 온기가 남은 찻잔을 들어가볍게 부딪혔다.

세 잔이 허공에서 잘그락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저도…… 잘 부탁드려요.”

홍엽비의 수줍은 한마디는 폭발적인 웃음과 짓궂은 농담으로 변했다.

긴장은 사르르 녹아내렸고 비슷한 연배의 세 비들에게는 오직 같은 남편을 둔 여인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친밀감이 생겼다.

그저 명목상의 동맹이 아닌, 함께 웃고, 함께 슬퍼할 수 있는. 비밀을 공유할 수 있고 함께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존재. 친구.

안양비로서는 결코 바라지 않았던 결과였을 것이다. 그리고 실수에는 반드시 책임질 사람이 필요했다.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옥린비를 짜증스럽게했다.

“옥린비…… 님?”

그런 옥린비를 그녀의 시녀가 불러세웠다. 조금 늦게 고개를 든 그녀는 그늘에 숨은 채 낮도깨비같은 불길함으로서 있는 존재를 발견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 괴이한 존재가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다과회는 만족스러우셨습니까?”

담벼락의 어둠에 숨은 존재는 허리가 굽은 추레한 소년이었다. 날카롭게 찢어진 눈에 매부리코, 입술은 지나치게 얇아 그의 웃음을 음산하게 했다.

“당신은…….”

장소의 정체는 알아차리지 못한 옥린비였지만 소년의 추레한 모습은 너무나 유명한 것이었기에 옥린비는 그가 누구인지, 그를 보낸 것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오운.

사례태감 양단의 수하. 갑작스럽게 수면 위로 떠올라 사례태감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다는, 후궁의 무시못 할 존재로 떠오른 그는 안양비 파벌에서도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존재였다.

“어쩐 일이죠?”

단장이라도 자신을 불러세운 무례를 엄히 다스리겠다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옥린비가 대꾸하자 소년은 입꼬리를 귀밑까지 길게 찢으며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든 험악한 미소를 그렸다.

“태감께서 전하라 하신 물건이 있어, 이리 무례를 범했나이다.”

은쟁반에 정중하게 받쳐을린 그것은 자주색 비단 재질의 향낭이었다.

한때는 시녀의 허리춤에 매달려 주인을 구렁텅이로 밀어 넣던 물건이 돌아오자 옥린비의 안색에 분노의 기색이 떠올랐다.

명백한 조롱의 의도. 하지만 말을 꺼낸 것은 소년이 먼저였다.

나지막하게 깔린 한마디, 한마디는 그녀의 심장에 낙인을 찍을 것처럼 무겁고 조용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내용물이 몹시 위험한 것이었기에, 내용물은 비우고 대신 사향과 향나무로 채워두었습니다. 본디 후궁에 들어 올 수도 없는 물건이고 들어 와서도 안 될 물건이나.”

네가 어떻게 이 물건을 구했는지 알고 있다. 혀끝에 그 뜯을 담지는 않았으나 지옥 유부의 끓어오르는 저주를 담은 소년의 눈동자는 분명히 그 사실을 담고 있었다.

가족을 협박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옥린비뿐만이 아니었다.

하얗게 달아오른 쇳덩이 같은 소년의 눈이 감겼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으니, 오늘 전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경고일 뿐이었다.

“분명 무언가, 착오가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지요?”

경멸이 묻어나는 소년의 말에 옥린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었다.

비록 어금니가 바스러지더라도, 혈압이 올라 핏줄이 서더라도. 입꼬리는 끝내 미소를 지었다.

“네, 분명 무언가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네요.”

“그랬겠지요. 허허…… 그럼 이 천것은 이만 가겠나이다. 날이 점점 차가워지니 부디…… 보중하시옵소서.”

그 순간 소년의 눈동자에 떠오른 명백한 살의에 옥린비는 반걸음 뒤로 물러섰다.

본능에 호소할 만큼 농밀한 살의, 시체가 뒷목을 가볍게 쓰다듬는 듯 한, 눈 점막에 들러붙는 듯한 숨김없는 광기.

수백 마디의 폭언보다도 눈앞에 들이댄 칼보다도 확실한 형태의 협박이었다. 숨 쉬는 것마저 잊은 채 옥린비는 그 자리에서서 소년이 담벼락 그림자를 따라 사라지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하…… 하하…… 하아……”

횡경막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고 심장에 뭉친 피가 온몸 말단부까지 일제히 빠져나가는 듯한 탈력감을 느끼며 옥린비는 간신히 숨을 몰아쉬었다.

떨리는 손을 그러쥐며 옥린비는 조용히 자신의 시녀. 오늘 죽었어야만 하는 시녀를 돌아보았다.

서서히 하늘의 끝자락을 물들이는 노을 아래. 그녀의 눈동자에도 천천히 살의가 깃들었다.

“너도 알고 있겠지.”

“옥린비 님…….”

“너도 후궁 생활을 오래 했으니…… 후궁이란 곳은 늘, 잘못에 책임을 질 사람이 필요하단다. 그것이 불가피한 경우일지라도.”

굳이 지금 말할 필요는 없있겠지만, 옥린비는 굳이 소년이 떠난 직후 애린에게 그 말을 꺼냈다.

자신의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애린을 보며 그녀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는 공포에 떠는 사람이 아니라 공포에 질리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협박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협박하는 사람이었다.

마치 공포에 저항하기 위한 방어기 제인 것처럼 그녀는 애린에게 달콤한 죽음을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렴. 네 가족들은 모두 풍족하게 살 수 있게 해줄 테니.”

“아…… 제발…… 제발요…….”

“네 어미가 병들었다지?”

옥린비는 그녀가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며 겁에 질린 그녀의 표정을 즐겼다.

눈물샘마저 얼어붙어 버린 절망감, 의지할 사람도 애원할 사람도 없는 비참한 존재. 그것을 자신이 마음대로 희롱하고 짓밟는 쾌감은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를 각인시켰다.

천천히 소년이 심은 공포를 지우며 그녀는 뱀처럼 애린을 감싸 안았다.

“네 가족은 분명, 행복할 거야.”

그러니 부디, 좋은 곳으로 가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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