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92화
한편에서는 세상 모든 증오와 원망, 질투가 응어리져 열매를 맺고 있을 무렵. 주방에서는 더운 열기를 마시며 소년이 구슬땀을 흘리고 있을 무렵.
속세의 모든 번잡한 것들과는 연이 없는 것처럼, 그들만이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것처럼 세 여인은 뭇 비들의 선망과 질투 어린 시선을 받으며 둥근 탁자에 둘러앉았다.
가장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명목상 다과회의 주최자인 난회비였다.
“오늘 다과회에 참석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모자라지도, 과하지도 않을 만큼 고개를 숙이고 천박하지도 무뚝뚝하지도 않게 단아한 미소를 입에 띄운 그녀는 친히 다관을 쥐고 차를 권했다.
“후후, 난화비 님이 우려주시는 차는 처음 마셔보는걸요?”
“솜씨가 변변치 않아서 입을 만족시켜 드릴 수 있을지 걱정스럽지만…….”
“어머나,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답니다. 차라면 식은 차던, 뜨거운 차던, 쓴 차던 모두 좋아하는걸요.”
늘 나른하고 사무적인 태도였던 그모습이 맞는지, 부여비는 난화비가 부담스럽다고 생각할 만큼 살가운 태도였다.
받은 만큼 줘야 하는 법. 부여비는 소년에게 받은 만큼 확실하게 난화비와의 친분을 대외적으로 보여줄 생각이었다.
“참 재미있는 우연이에요.”
“네?”
“저희가 모인 이유가, 후궁의 한 상호 때문이라니.”
난화비 님은 어떤 일이 있으셨나요? 어떤 요리를 드셨나요?
친밀함을 쌓아 올리는 기본은 서로 공통된 주제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부여비는 생글생글 웃으며 난화비에게 지난 이야기를 물어보았다.
“그러네요…… 전…… 크레이프라고 하는 서방의 과자였어요. 그리고 파운드 케이크랑…….”
“파운! 드 케이…… 크는…… 저도…….”
아는 주제가 나오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치켜든 홍엽비는 그녀에게 쏠린 두 시선에 볼을 발갛게 물들이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것이 필요 이상으로 어른스러워진 탓에 제 나이다운 풋풋함을 잃어버린 둘에게는 신선하고 귀엽게 다가왔다.
“전 아주 신기한 차를 대접 받았답니다. 가배라고 하는 서방의 차였는데…….”
“어머, 서방의?”
“네, 듣기로는 콩을 볶아 바싹 건조한 것을 다시 우려낸 차인데 원두상대로는 보존 기간이 길고 마시면 잠이 오지 않는 신비한 차로 서방에서는 의약품으로도 사용된다 하더군요.”
“그런 상품이라면 저희 집안에서도 어떻게든 취급하고 싶네요. 혹시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부여비는 난화비와의 대화에서 의외의 재미를 발견했다. 복건성 최대규모를 자랑하는 무역 상단을 외가로 둔 난화비는 어린 시절부터 배를 타고 상단을 따라 여행을 다니며 식견을 넓힌 덕분에 쏟아낼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끝도 없이 많았던 것이다.
배를 타고 원양항해를 나선 이야기, 끝없이 펼쳐진 사막과 직접 무기를 들고 늑대무리에 맞서 상단의 짐을 지킨 이야기. 그 유쾌한 모험담은 부여비가 원해온 모든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들은 또 다시 의외의 재능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홍엽비의 군사에 관련된 식견이었다.
마침내 대화의 주제가 반가의 여식이라면 입에 담기 꺼려 할 전쟁과 군사로 넘어갔을 때, 지금까지 쭈뻣대던 것은 다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홍엽비가 그야말로 살아 숨 쉬는 군대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한 것이다.
“제국의 주 전략은 대포 등의 화약병기를 이용한 화력전과 기마술에 능한 기마병들을 이용한 야전이 주인데, 과거에는 뛰어난 무장들을 앞세운 돌격 전술로 상대의 예봉을 꺾고 후방의 궁사 부대가 발이 묶인 적군에 화력을 투사하는 형태였다면 현대에는 접근전보다는 소형화된 연노나 단궁을 이용해 적의 병력을 지속적으로 갉아먹는 경기병의 육성에 중점을 두는 것이…….”
그녀는 과연 대장군의 여식이었다.
만약 그 자리에 동석한 것이 현직무관이었다면 그녀의 뛰어난 군사적 식견과 그녀의 말에 스며든 해묵은 군대의 향기, 일명 ‘쌈내’라고 부르는 냄새가 깊게 스며들어 있음에 놀랄 것이다.
누가 알았겠는가. 그저 규중의 처녀인 줄 알았던 그녀가 사실은 당량대장군과 모의전을 겨룰 수 있을 만한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는 것을.
오직 아버지와의 놀이로만 가진 재능을 뽐낼 수 있었던 서러움을.
“그래서 향후 제국 병기창의 제일과제는 화약 병기의 간소화, 경량화라고 생…… 각…… 합니다……”
한참을 열변을 토해내던 홍엽비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두 비의 시선에 빠르게 현실을 자각했다.
귀까지 빨갛게 물들인 그녀의 모습은 애달플 만큼 안쓰러웠다. 물론, 그녀의 성격을 놀림감으로 삼을 만큼 유치한 어른은 이 자리에 없었다.
“정말 훌륭한 이야기였어요. 저도 개인의 호신에는 조금 자신이 있었지만, 전략과 전술엔 무지한 편이었는데 덕분에 개안할 수 있었어요.”
“아…… 아뇨…… 별것 아닌 이야기로 귀를 더럽힌 것은 아닌지…….”
쭈뻣거리며 애원하듯이 속삭이는 홍엽비에게 난화비는 표현할 수 없는 보호 욕구를 느꼈다.
그녀의 작은 체구와 소심한 성정, 바들바들 떨리는 가는 속눈썹은 나이 차이 많은 여동생을 연상시키게했다.
그렇기에 그 순간 그녀의 입에 따뜻한 위로와 감사를 담게 한 것은 이해타산을 따지지 않는 순수한 선의였다.
하지만 난화비의 따스한 한마디보다 욕망에 몸 바친 부여비의 질문이 먼저 튀어나갔다.
“홍엽비 님, 궁금한 점이 있는데 여쭈어도 괜찮을까요?”
“네? 네…… 말씀하세요…….”
“제가 알기로는 변경을 수비하는 지방 팔군이 마지막으로 전군을 동원했던 일이 약 700년 전 서방법국의 침략전이었다고 알고 있는데, 당시 화약 병기가 개발되지 않은 시대에 어떤 형태로 수성전에 대비하였는지…….”
어느새 동각궁의 황후 후보자에서 안휘성 제일의 재녀 예가인으로 돌아온 부여비는 수많은 학자의 밑천을 털어버렸던 학생의 자세로 홍엽비에게 질문을 던졌다.
소년의 노쇠한 심장조차 흐물흐물하게 녹여버렸던 그녀의 친화력은 홍엽비의 쪼그라든 심장마저 온기로 녹여 버렸다.
“그거라면 제가 대답해드릴 수 있는 문제네요. 근대에 화약 병기가 개발되기 전까지 제국군의 주력 수 성전략은 연노[連弩]를 이용한 적병력의 집중포화로 대표되는데 이는 ”
군사 전문가와 역사 전문가는 떼어놓을 수 없는 단짝이었으며 탐욕스럽게 지식을 원하는 부여비와 속마음을 털어놓을 사람이 없어 억눌려 살아왔던 홍엽비의 만남은 환상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그렇다면 제국의 군사력은……!”
“화약 병기의 개발은 앞으로……!”
“어머나…….”
두 사람의 소름 끼치는 토론을 들으며 난화비는 남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맑고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한 하늘 아래에, 달콤한 과자와 향긋한 차에 둘러싸인 소녀들의 다과 회에서 화약 냄새와 피비린내가 느껴지는 것은 어째서일까?
* * *
누군가가 행복함을 느끼고 있다면, 반드시 그 주위에는 그 행복을 떠받치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는 이들이있다.
송하회의 회장에선 비들이 천상의 달콤함에 취해 있는 동안 회장에서 떨어진 전각의 주방에서는 소년이 초열지옥을 경험하고 있었다.
이제 막 여름의 열기가 가시기 시작한 초가을의 열기를 돌화덕이 가열차게 끓어오르게 하고 있었다.
더위를 식히기 위해 찬물을 머리에 끼얹어도 잠깐 한눈을 팔면 물기가 증발해 옷이 버석거릴 지경이었다,
“신기한 게, 아까부터 물을 아무리 마셔도 오줌이 나오지 않네요…….”
일일 주방보조를 담당하게 된 이삼은 물동이에서 목을 축일 물을 뜨며 중얼거렸다. 등에는 허연 소금이 말라붙어 있었고 입술은 메말라 있어 초췌하기 그지없었다.
“좀 쉬고 있어요. 이제 슬슬 시마이…… 아니, 마무리할 거니까.”
소년은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축늘어지는 이삼에게 소금을 탄 미지근한 물을 내주며 화덕에서 마지막 에그타르트를 꺼냈다.
그윽한 황금빛 커스터드의 달콤함도 수백 판을 연속으로 봤더니 징그러울 뿐이었다.
소년은 철망 위로 올라간 채 식기를 기다리는 에그타르트를 바라보며 허탈한 한숨을 쉬었다.
“아마, 구운 거, 절반 정도는 태감님이 드셨겠죠?”
소년의 질문에 이삼을 멀건 눈으로 산더미 같은 에그타르트 무더기를 흘겨보았다.
그야말로 뼈를 갈아 넣는 노력으로 쌓아 올린 에그타르트 무더기는 그들에게 인골탑이나 다름없었다.
“반 넘을 것 같은데요?”
“허이고…… 그 양반 그러다가 제명에 못 살지. 아직 젊어서 당뇨 무서운 줄을 몰라.”
소년은 툴툴대며 아직 따뜻한 에그타르트 하나를 꺼내 이삼에게 건넸다.
마치 가을날 가장 잘 익은 사과를 손주에게 주는 과수원 할아버지 같은 푸근한 표정에 이삼은 바로 전에까지 끔찍한 노동의 상징이었던 에그타르트를 받아들었다.
바삭바삭한 첫입, 그다음 달콤하고 사르르 넘어가는 커스터드의 부드러운 감촉.
절로 한숨짓게 만드는 마성의 맛이 피로에 지친 몸에 스며들었다. 뻣속까지 차오르는 달콤함에 이삼은 울상을 지었다.
“불공평해요, 만들 때는 그렇게 고생했는데…… 먹을 때는 고작 세입이면 끝이라니.”
“원래 요리란 게 그래요. 만들 때는 죽도록 고생하고, 정작 먹을 때는 후루룩 먹어버리고.”
젊은 시절에는 그런 일로 고민한 적도 있었다. 육수를 뽑는데 삼일, 소스를 뽑는데 반나절, 재료 손질에 하루.
그런 노동집약적인 요리를 고작 십분 만에 먹어치워 버린다는 손님의 매정함에 남모르게 울분을 터뜨린 적도 있었다.
“요리사가 아무리 노력해도, 손님께 전할 수 있는 행복은 기껏해야 십여 분, 식사 전체를 통틀어도 한 두 시간 정도.”
하지만, 그거면 된 거야. 요리사로서,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은 주제넘은 일이다.
노년의 요리사가 아직 풋풋한 젊은 요리사에게 전하고 싶은 한마디를 혀 밑에 숨기며 소년은 씁쓰름한 미소로 추억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그들에겐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일단은 씻고, 옷 갈아입고 회장에서 봅시다.”
찬물로 몸의 소금기를 털어내고 머리를 비벼 대충 넘긴 소년은 익숙하게 환관복을 차려입었다.
한때는 제 구멍에 팔을 끼우지도 못해 낑낑댔던 옷도 이제는 몸에 착 달라붙게 되었다.
그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이 살벌한 후궁에 물들었음을 한탄해야 할지 고민한 시간도 없이 소년은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던 이삼과 함께 송하회의 회장으로 향했다.
회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답의 삼 층, 태감이 있을 곳으로.
설마, 지금쯤이면 만족했겠지? 전답의 계단을 오르는 동안 소년의 심중에 틀어박힌 불안은 점점 커졌다.
오늘 구워낸 에그타르트는 거의 일천 개에 가까운 개수였다. 보통 생각하는 조그만 에그타르트가 아니라 손바닥만 한 큼직한 사이즈의. 태감은 그 절반을 먹어치운 것이다.
사람의 위장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오늘, 태감의 폭식은 분명히 한계를 넘어섰다.
걱정과 불안에 서둘러 달려 올라간 소년은 태감은 나른한 표정으로 맞이했다.
“왔느냐?”
“괜찮으십니까?”
“내가 괜찮지 않을 게 뭐가 있겠느냐. 잘 먹었다.”
“거 참…… 앞으로는 적당히 드셔야 합니다.”
태감은 입가가 흘러내릴 것 같은 농염한 미소로 소년의 잔소리에 응답했다. 천국에 가장 가까운 행복감을 선사하는 만복감.
천상의 신선처럼 허허롭고 지옥의 나찰처럼 퇴폐적인 모습으로 상위를 뒹구는 칠칠치 못한 모습에 소년은 한숨을 쉬었다.
“얼굴값 좀 하고 삽시다, 제발…….”
미인은 뭘 해도 미인이라지만, 책상 위에 널브러진 모습마저도 한 폭의 미인도 같아 뭇 사람들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겠지만, 그를 바라보는 소년의 시선은 고상한 미의 화신에 탄복한 이라기보다는 휴일에 나다니지도 않고 집에서 잠만 자는 아들내미를 보는 어머니의 시선이었다.
“흥, 얼굴이 좋으면 뭐하냐. 밖에서는 가면을 쓰고 다녀야 하니 제값을 못 받는 처진데.”
“그럼 까고 다니시던가요.”
“어허, 그러면 뭇 소녀들이 내 잘난 얼굴에 밤새 잠 못 이루지 않겠느냐. 지나치게 잘생긴 얼굴은 죄가 되는구나.”
“……그 얼굴을 봐서 지랄 염병이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소년은 씹어 뱉듯이 말하고는 창밖의 회장을 굽어보았다. 몇 날 밤을 지새우며 준비한 화원에서 천상의 선녀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으니 이 얼마나 뿌듯한가.
작은 장식 하나, 장식된 꽃병 하나하나 그의 손길을 타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하지만 개인적인 만족감과 일의 성과는 다른 일이니, 소년은 그 점을 물었다.
“괜찮습니까?”
수없이 많은 의미를 함유한 그 한마디. 태감은 그 의미 속에서 소년이 가장 궁금해할 답을 전해주었다.
“네가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구나. 예상보다 난화비의 포섭력이 좋고, 부여비도 협조적으로 나오는 편이야. 애초에 이 자리에 모인 비들 대부분이 안양비의 파벌에 들어가지 못한, 혹은 들어갈 수 없는 이유를 가진 이들이니 그들도 협조적인 편이고.”
보호가 필요한 이들, 개개인은 별볼 일 없지만 그런 이들도 뭉치고 도당을 짜면 그것은 곳 ‘힘’이 된다.
그런 그녀들에게 태감은 번듯한 구심점을 보여주었다.
난화비.
성품이 다정하기로 유명한 그녀의 간판을 태감은 아낌없이 이용할 생각이었다.
“비호를 받았다면 받은 만큼 일을 해야지.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대부분 훗날의 대가 보다도 당장의 비호가 급한 이들이다. 기댈 구석이 없고 비빌 언덕이 없으니 살얼음판같은 후궁에서 하루하루가 불안할 수밖에 없어. 미끼를 보여줬으면 물수밖에 없는 입장들이지.”
“파벌이란 쌍무적 계약관계로군요.”
“대가 없는 호의는 궁 밖에서도 없는 일이다.”
냉혈한 태감의 말에 옷깃을 여미면서도 소년은 창밖을 내다보며 혹시나 문제가 생긴 점은 없는지를 살폈다.
늘 그렇듯 사람 일이란 것이 순탄하게 풀리지만은 않는 법이다. 하지만 소년이 기대했던 문제와는 다른 문제가 그들을 찾아왔다.
가장 먼저 그것을 발견한 것은 눈이 좋은 장소였다. 다과회의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무렵, 이미 초청받은 모든 손님이 자리에 앉고 찻잔이 몇순배 돌았을 시간에 찾아온 불청객.
그녀는 키는 작았으나 자세는 곧고 단정했다. 검은 머리카락을 틀어 올리고 옥비녀를 꽂아 장식했으며 연한 녹색의 궁장으로 치장한 이.
눈매는 처졌으나 그것이 유순함이나 온화함 따위보다는 어딘가 음흉하고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 독특한 분위기를 가진 여인.
옥린비(獄麟妃).
안양비 파벌의 중추적인 인물이자 외궁 식방각 총괄조리장을 외척으로 둔 여인이 초청장도 없이 회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