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91화
정숙함이 최고의 덕목으로 칭송받는 시대, 황후 후보자씩이나 되는 이가 무기를 들고 땀 흘리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은 그녀 나름의 신뢰의 표시일 것이다.
극을 어깨에 걸친 채 호방하게 웃는 난화비의 얼굴에는 그늘이 없었다.
땀에 젖은 옷을 갈아입으러 잠시 자리를 피했던 난화비가 돌아왔을 때 그녀는 여전히 짧고 간편한 무복차림이었다.
자신의 치부를 내보임으로써 난화비는 자신의 신뢰를 증명했다. 그인신장악술이 더할 나위 없이 소년의 심장을 사로잡았음은 증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신뢰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먼저라는 사실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검은 머리는 거추장스럽지 않게 한 줄기로 닿아 뒤로 넘기고 흔한 연지 하나 바르지 않은 민얼굴의 그녀는 한여름의 가장 뜨겁고 왕성한 생명력으로 가득 찬 태양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그녀가 좋아하는 여름의 야생화를 닮았다. 안온한 보살핌 속에서 화사함과 풍성함을 간직한 채 피어난 꽃들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강한 생동감.
그것은 숨 막힐 정도로 경직되어 있는 이 후궁에선 느낄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이 소년은 안타깝게 했다. 노쇠한 노인이 느낄 수 있는 최대한의 슬픔.
그중 하나는 자신의 잠재력, 자신의 재능을 뽐내지 못하고 현실의 굴레에 시들어가는 젊은이들을 보았을 때였다.
더 행복할 수 있었던 이들. 그 가치를 올바른 일에 쓸 수 있었다면 세상을 바꿀 만한 재주를 선보였을 이들이 시대의 무게에 눌려 신음하며 갇혀있다는 사실은 소년에게 끔찍한 수렁에 잠긴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했다.
홍엽비도 그러했다. 이 후궁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더 행복했을 것이다.
부여비도 그러했다. 이런 시대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역사에 남을 만한 역량을 뽐냈을 것이다.
황제는 어떠할까. 이 후궁은 과연 그 주인을 행복하게 만드는가?
아마 황제 자신도 대답하지 못할 의문을 떠올리고, 그것을 다시 심중에 가라앉히며 소년은 멋진 무술을 보여준 것에 대한 심심한 감사 인사와 함께 오늘 서난궁을 방문한 이유를 꺼내 들었다.
과자였다.
송하회에 낼 과자가 어떤지 평가를 받고 그녀의 요구사항을 듣는 것이 소년이 그녀를 방문한 목적이었다.
송하회. 지나간 여름을 추억한다는 명목의 풍류 있는 다과회의 명목상 주최자가 바로 난화비였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 목적은 안양비와 대립할 파벌을 만드는 정치적 목적에 의한 것이고, 명단을 짜고 자금을 댄 것은 태감이니 실질적 주최자는 태감이었지만 소년은 명목상 주최자인 난화비의 체면도 살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정확히는 모처럼 공들여 새로 만든 과자를 얼굴만 반지르르한 사내놈에게 선보이고 싶지 않았다는 개인적인 욕망에 의한 것이었다.
악착같이 과자를 빼앗으려는 태감과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서난궁에 도달할 수 있었던 소년은 모진 추억을 과거의 모래 속에 파묻으며 준비해온 과자를 상에 올렸다.
“어머, 이건 뭐죠?”
그중 난화비의 시선을 가장 먼저잡아끈 것은 투명하고 말캉한 젤리였다. 마침내 추출하는데 성공한 젤라틴과 늦여름에 딴 포도와 자두, 새콤한 여름밀감으로 만든 젤리는 낯선 모양새였지만 시선을 뗄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양갱이나 효육과 유사한 서방의 과자, 젤리라고 합니다.”
“효육이라…… 짭짤해 보이지는 않는데, 과자이니 달콤하겠죠?”
마치 처음 불을 발견한 원시인처럼 미지에 대한 불안과 호기심, 기대감이 느껴지는 표정으로 난화비는 천천히 사기 숟가락을 들어 올렸다.
백윤을 닦달하여 만든 아름다운 틀에 굳힌 젤리는 세공된 보석처럼 아름다웠다. 깊이 있는 보라색, 우아한 자태. 그것을 망가뜨리는 것이다.
아름다운 것을 망가뜨리는 것은 어찌 이리도 배덕적이고 달콤한 걸까.
사기 숟가락에 푸들푸들 떨리던 젤리는 가해지는 압력에 쉽게 갈라졌다. 손끝에 달라붙는 짜릿한 촉감, 흙장난하던 어린 시절의 무구한 욕망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커흠…… 난화비 님?”
“……어머! 저도 모르게 그만…….”
“이해합니다. 촉감이 재미있죠, 젤리.”
무아지경으로 말캉말캉한 젤리를 뭉그러트리던 난화비는 뺨을 발갛게 물들이고는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처음 선택은 포도.
난화비가 숟가락을 입에 문 순간, 말캉한 포도젤리가 혀 위로 미끄러진 순간 소년은 난화비의 떨리는 동공에서 그녀가 멈춰선 이유를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탕수육의 소스만큼이나 치열한 이념대립의 한가지였다. 젤리는, 씹어 먹는가? 녹여 먹는가.
서늘한 젤리가 혀끝으로 미끄러진 순간 난화비는 느꼈을 것이다. 그 묵직한 무게감을, 혀의 온기만으로도 그 형체를 잃은 채 녹아내리는 섬세함을.
그녀는 천천히 혀를 이용해 입천장에 젤리를 대고 으깨며 그 감촉을 즐겼다. 도대체 어떤 촉감이 젤리의 촉감과 비견될 수 있을까.
어떤 단어를 이용해야 설명할 수 있을까.
열기 속에서 젤리는 흐늘흐늘 녹아내리며 혀끝을 적시는 단물이 되었다. 메마른 혀끝에 찾아든 단비처럼 달콤하고 삿된 욕망을 삭히는 감로수만큼이나 서늘하며 풋풋한 소년소녀의 첫사랑처럼 새큼한.
너무 빨리지나 가버린 여름의 잔향은 젤리를 삼키고 난 후에도 코끝을 간질거리는 듯했다.
“그저 명목상의 송하회(送夏會)가 되지는 않겠네요.”
“늦여름의 햇볕을 받은 과일만을 사용해서 그런지, 달고 향기가 좋지요?”
말에 담긴 가시에 소년은 헛기침하며 말을 돌렸다. 시일이 촉박해 난화비의 이름을 빌린 다과회인데도 그녀가 개입할 여지를 주지 않았으니 이는 앞으로 그녀와 정치적 동맹관계를 유지한다면 묵과해서는 안될 무례였다.
소년은 변명 대신 고개를 숙이며 조건 없는 수용의 태도를 보였다.
그가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성의를 다하겠다는 소년의 자세에 난화비는 턱을 괸 자세로 생각에 빠졌다.
정치적 동맹. 그 말이 품은 의미가 정말 순순한 의미에서의 동맹일 것이라고 믿을 만큼 순수한 이는 이자리에 없었다. 정치적이라는 단어는 어떤 단어에 연결시켜도 그 단어가 가지고 있던 선의와 순수함을 망가트렸다.
비록 지금은 동맹이나 그 안에서도 위치가 갈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 발자국 물러서면 두 발자국 물러서게 되고 두 발자국 물러서게 되면 이미 상대의 종이 되는 것이 정치적동맹. 정치적 아군이라는 관계였다.
부림받는 종이 될 것인가. 부리는 주인이 될 것인가. 난화비의 눈동자에 스산한 손익의 저울이 떠올랐다.
하지만.
하지만 그렇게 매정하게 저울주를 옮기기에는.
“……자두도 맛있네요…….”
“개인적으로 가장 추천하는 것은 여름밀감 맛입니다.”
젤리가 너무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렸다. 발간 홍조를 띄운 채 지나가 버린 여름을 탐닉하던 난화비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요구 조건을 말했다.
“이 젤리라는 과자를, 가능한 한 많이 준비해 주세요.”
그 순간 수십 년간 그녀에게 봉사해온 노복처럼 온화한 표정을 지은 소년은 너무 눈앞의 것에만 집중하는 어린 아가씨를 위해 점잖은 충고를 전했다.
“우선은, 두 번째 과자도 한번 맛보시지요.”
첫 번째 과자가 호기심을 유발하기 위해서였다면, 두 번째 과자는 혀를 사로잡기 위해 그가 야심 차게 준비한 것이었다.
충직한 노복의 눈동자에 음산한 기운이 감돌자 난화비는 심장 언저리를 간지럽게 하는 긴장감을 느꼈다.
“후후, 그러네요. 과연 어떤 과자일까…….”
긴장감에 입꼬리가 떨리는 것을 숨기며 난화비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차가운 가면 안에 감춰진 광기의 표정, 세상에 불화와 전쟁, 그리고 비만을 풀어놓은 날 소년이 지었던 광기의 표정이 또 다시 스며 나오고 있었다.
그 소름 끼치는 광기를 마주한 난화비가 느낀 것은 두려움, 공포 따위가 아니었다. 후궁에 들어와 황제의 여인이 되고 나서도 창과 활을 놓지 않았던 그녀의 투쟁 욕구, 승부욕이 소년의 위험에 맞물려 맥동하기 시작했다.
“좋은 표정이네요. 어린 시절 상단을 따라나섰다 늑대의 습격을 받았을 때가 생각나는걸요?”
“걱정 놓으시지요. 어디까지나 합법적이고 안전한 과자니까요.”
* * *
마침내 그 날이 왔을 때, 뜬눈으로 가슴을 졸이던 화비와 봉비들은 간소하게 기미를 볼 시녀 한 명만을 대동한 채 송하회의 회장을 찾았다.
누군가를 올라갈 기회를 찾아서, 누군가는 황후 후보자의 초청장을 거절할 엄두를 내지 못해 억지로, 각자의 사정을 품에 안은 비들의 얼굴에는 다과회를 즐긴다는 기색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모여든 사람들의 얼굴엔 하나같이 그늘이져 있으니 모처럼 꾸민 야외 다과회장의 화사함도 빛을 잃는 듯했다.
모처럼 남반구에서 천금을 들여 공수해 온 여름꽃들로 장식된 회장에 감탄하는 이들도 없어 내로라하는 미인들이 모인 장소임에도 어쩐지 쓸쓸한 적막감이 감돌았다.
하지만 적막은 잠시였다. 다과회의 주최자인 난화비와 함께 회장의 양끝에서 동각국의 부여비, 남양궁의 홍엽비가 등장하자 비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몰렸다.
혈관에는 같은 붉은 피가 흐르고, 같은 살과 뼈로 이루어져 있다는 보편타당한 주장을 신뢰할 수 없게 만드는 미의 화신들이 걸어오는 장면에 그 자리에 모인 ‘보통 사람’ 들은 숨 쉬는 것조차 잊고 그 광경을 영접했다.
난화비, 홍엽비, 부여비. 그야말로 사는 세계가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는 그들의 모습은 질투마저 부질없는 것으로 변모시켰다.
“역시…… 오상비 님들쯤 되니까 뭐라고 해야 하나…… 느낌부터가 다르네요!”
“애화야, 조금만 조용히 하자.”
“흑흑, 아씨도 가슴이 조금만 더있었으면…….”
“……돌아가면 보자…….”
길화인. 강소성 출신의 화비 예송비는 오상비의 기품이 감탄하며 주인의 가슴에 한탄하는 그녀의 오랜친구이자 젖먹이 자매로 자란 시녀 애화에게 살의를 품었다.
강소성의 그럭저럭 규모가 있는 상단의 딸로 태어나 어정쩡하게 아름다운 얼굴로 후궁에 들어온 그녀는 후궁을 겉도는 화비 중 한 명이었고 그 신세를 벗어날 생각도 없었다.
강소성에서는 힘 좀 쓴다는 상단의 딸이지만 그것뿐인 배경에 얼굴이 천의무봉인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귀중히 여길 줄 아는 여인이었다.
유일한 소망이라면 그냥저냥 후궁생활을 영위하다가 고향 땅으로 돌아가 별 탈 없이 생을 마감하는 것정도일까.
집에 돈이 궁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권력에 눈을 돌릴 만큼 배짱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큰 욕심 부리지 않고 자신을 따라온 애화와 수다나 떨다 보면 이룰 수 있는 꿈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권력의 그림자도 밟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살아온 그녀에게 오늘 초청장은 부담스럽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상가의 딸로 태어났기에 그녀는 남들보다 판단이 빠른 편이었고 소문을 듣는 귀도 있었다.
오늘의 다과회가 어떤 의미인지 모를 만큼 아둔한 여인은 아니었다.
“차라리 무식한 만큼 배짱이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아씨, 저기 좀 보세요. 신기한 과자가 있어요!”
“그래그래, 기미 좀 봐주렴. 너무 게걸스럽게 먹지는 말고.”
현실로 시선을 돌린 그녀는 방금전부터 그녀의 호기심을 자극하던 보석 같은 과자로 시선을 돌렸다.
군침 삼키는 소리가 옆에 선 그녀에게 들릴 정도인 시녀 애화에게 기미를 부탁하며 예송비는 근심을 털어 냈다.
보잘것없는 화비인 자신에게 정치적 가치가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위험천만한 기미역으로 친구같은 시녀인 애화를 둔 것이 아닌가.
기미를 맡긴 것은 단순히 맛있는것을 좋아하는 애화에게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한 그녀의 배려였다.
보석 같은 과자를 입에 삼킨 애화는 호들갑을 떨며 예송비에게 과자를 권했다.
“아씨, 이것 좀 드셔보셔요!”
“그래, 척 봐도 맛있어 보이는구나. 조금만 조용히 하자?”
위를 보지 않고 현재에 만족할 줄 안다면 사소한 행복은 의외로 가까이에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자신의 시녀와 소란스럽게 과자의 맛에 대해 감상을 늘어놓을 수 있는것도 그런 행복의 일부분이리라.
이것저것 맛을 보며 예송비에게 감상을 들려주던 애화의 입이 일순간 멈추었다. 마치 입안에 달콤한 꿀을 한가득 머금은 것처럼, 입을 열면 그 꿀이 떨어질까 입술을 떼지 못하는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그것을 삼킨 애화는 진지한 표정으로 예송비에게 그 과자를 권했다. 거의 강요에 가까운 강권이었다.
“아씨, 이걸 드셔보여요. 어서!”
“왜 그러니? 맛있어 보이는 과자기는 하다만…….”
“어서요! 다른 경쟁자가 생기기 전에!”
후궁의 가장 밑바닥인 화비라 해도 비는 비일 텐데, 천박하게 과자를 더 많이 먹으려고 애를 써야 한다니? 예송비는 분노와 난처함보다도 호기심을 먼저 느꼈다.
구운 과자인 듯 겹겹이 층을 가진 피는 먹음직스러운 갈색이었고 그 안에는 화사한 노란색 소가 들어 있었다. 낯설지만 대단히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과자.
소년의 성명절기.
에그타르트(蛋塔)였다.
여인의 입으로 그 과자가 들어가는 순간. 회장을 지켜보는 높은 전각의 창문을 통해 한 남자는 증오를 토해내고 있었다.
“증오스럽구나, 저들을 전부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어.”
“태감님.”
“저들이 먹는 과자가, 내 거였어야 해!”
창틀이 으스러지도록 부여잡은 채 한 손으로는 큼지막한 에그타르트를 쥔 남자.
양 태감이었다.
이 행사를 위해 많은 자본을 투자하고 밤을 새워 가며 명단을 작성한 그는 소년이 다과회에 내겠다며 만들어온 에그타르트를 손에 쥔 순간 그 모든 일정을 들러 엎겠다 할 만큼 에그타르트에 미쳐버렸다.
그것은 중독이었으며 열광이었고, 한 치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의 광기였다.
돼지기름을 넣어 반죽한 솜털처럼 가볍고 첫눈보다도 아삭아삭한 피와 녹아내린 황금처럼 묵직하고 매끄러운 커스터드의 감촉.
신선한 바닐라의 향긋함과 캐러멜화된 설탕의 구수함, 졸아든 벌꿀의 코점막을 녹여 버릴 만한 달콤한 향기와 그런데도 절제되어 있어 혀를 지치게 하지 않는, 하지만 모자람없는 단맛.
이 시대의 모든 과자 전문 요리사들의 악몽이 그 자리에 있었다. 소년의 그 표정. 세상을 불태울 광인의 표정을 마주한 태감은 어떤 심정으로 에그타르트를 받아들었는가.
미래를 예감한 예언자의 담담함이었을까. 아니면 모든 죄를 자신이 이고 가겠다는 구도자의 희생정신이 가미된 거룩함이었을까.
틀림없이, 한순간의 쾌락에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우자(愚者)의 말로일 것이다.
“태감님, 대의를 그르치시면 아니되옵니다!”
“무엇이 대의란 말이냐! 난 오늘을 위해 살겠다!”
“제기랄, 이삼! 어서 과자를 더 가져오라고 전해!”
“으악! 이미 다과회장에서도 주문이 포화상태라는데요?!”
안양비에게 반격의 깃발을 빼든 그날. 여름을 전송하는 풍류 깊은 다과회장에서.
안과 밖으로 불화의 씨앗이 태동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