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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87화 (87/314)

환관의 요리사 87화

수백 년의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예기가 죽지 않은, 차가운 도검을 넘어 도착한 비고의 심처는 두꺼운 철문에 가로막혀 있었다.

금이 자갈처럼 널려 있고 옥과 진주가 산처럼 쌓여 있었던 제일 비고 보다도, 절세의 보검과 시대를 풍미한 명필가들이 아꼈던 붓과 벼루들이 가득했던 제2 비고 보다도.

엄중하게 봉해져 있는 제3 비고의 앞에서 태감은 소년에게 겸손과 존경을 요구했다.

수천 년의 역사를 버텨온 제국의 모든 역사가 잠든 곳. 수없이 피 흘려온 제국이, 금룡 진가가 마지막까지 지켜낸 자존심이 그곳에 있다고.

“이곳에 잠든 것은 시간이요, 역사이며. 황실의 모든 것이다.”

비고의 어둠으로도 차마 숨길 수 없는 자부심과 그 속에 스며든 여리고 섬세한 슬픔을 소년은 보았다.

그 슬픔이 무엇인지, 그 뒤의 그림자를 소년은 알면서도 입 밖으로 낼수는 없었다.

그것은 태감이 언젠가 그의 입으로 털어놓아야 할 마지막 숙제이며, 청산해야 할 빛이었으니. 그로서는 그저 기다릴 뿐이었다.

시간이 흐르기를. 상처가 아물고 피딱지가 떨어지기를. 흉터가 남더라도 그 흉터를 보며 그 시절을 추억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아직 아물지 않은 자신의 상처도 함께 아물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다.

숨을 들이쉬고, 날숨에 처연한 분위기를 몰아내며 소년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건 그렇고 이 문은 어찌 여실 생각입니까? 저와 태감님 팔로는 열기 힘들 것 같은데.”

저야 나름 단련되어 있지만, 태감님의 근력은 영…….

소년은 붓보다 무거운 걸 든 적이 있을까 의심스러운 태감의 가늘고 고운 팔을 흘깃거리며 웃었다.

이 녀석, 감히 환관들에게 비밀리에 전수되는 십팔반살인기를 전수받은 나를 무시하다니. 전운을 감지한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이미 눈빛만으로 상대가 어떤 수를 쓸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부 꿰차고 있는 둘은 상상 속에서만 서로를 향해 치열하게 살수를 내질렀다.

한참 동안 서로를 쏘아보던 둘은 동시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십팔반살인기는 무슨. 상상 속에서나 절대고수지 현실은 젓가락보다 무거운걸 들 일 없는 샌님과 절름발이 꼬맹이였다.

한 명은 정치판을 주름잡는 동창의 제독이고 한 명은 반백이 넘은 노인인데도, 사내라는 인종은 여전히 어린아이였다.

여전히 쓸데없는 것에 열광하고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한다.

“훗, 오늘은 봐주겠다. 하지만 조심해라, 나의 오른손은 늘 피.에. 굶.주.려. 있으니.”

“얼굴 가죽 두꺼우신 걸 보니 정치인 맞으시는군요.”

소름 끼치는 말을 태연하게 내뱉는 태감을 보며 소년은 옷깃을 여몄다.

그런 말을 주워 담고도 낯빛 하나변하지 않는 것을 보면 새삼 정치인이라는 자들이 얼마나 대단한 이들인지 실감이 갔다.

소년은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이 문은 어떻게 열고 들어갑니까? 혹시 황족의 혈통임을 증명해야만 문이 열린다거나, 혹시 숨겨져 있던 거신상이 문을 열어주는 겁니까?”

“거 상상력 참…… 옆에 따로 문이있다.”

판타지함에 길들여져 이번엔 또 어떤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될지 기대하던 소년은 말할 수 없는 참담한 표정으로 철문의 옆을 보았다.

육중한 철문의 옆으로 사람 한 명이 드나들기에 적절한 나무문이 번듯하게 달려 있었다.

그 육중함에 가려져 빛이 바랬지만 그럴듯한 문이었다. 금룡 비고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문은 값비싼 자단목제였고 빈틈없이 조각되어 있어 우아했다. 바깥에서였다면 분명 감탄했으리라.

하지만 족히 십여 미터는 넘을 거대한 철문을 앞에 두고 그 옆의 개구멍으로 지나가는 것은 탐탁지 않은 일이었다.

소년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는 엄숙한 표정으로 태감에게 물었다.

“그럼 도대체 저 철문은 왜 달아두신 겁니까?”

쓰지 않을 물건을 굳이 달아두었단말인가? 무엇을 위해서 막대한 양의 철과 노동력을 소모했단 말인가. 소년의 질문에 태감은 답을 내놓았다.

“폼 나지 않느냐. 그래도 비고의 심처인데 이 정도 문을 달아놔야지.”

“허.”

빈틈없이 논리적인 답변이었다. 허탈한 한숨을 내쉬는 소년의 손목을 잡아끌고 태감이 마지막 비고의 문을 열었다.

약간 곰팡내 나는 텁텁한 공기. 수 백년간 열리지 않았던 비고의 문을 열었다는 가슴 저릿한 감동도 없이 태감과 소년은 성큼 비고 안으로 들어 섰다.

윤기가 흐르는 도자기와 세월을 이기지 못해 빛바랜 그림들. 퀴퀴한 골동품들이 모인 비고의 심처는 소년에게 실망감을 안겨줄 뿐이었다.

“너무 실망하지 말아라. 이런 잡동사니야 그저 구색을 갖추기 위해 가져다 둔 것뿐이니.”

비고의 끝자락에 도착할 때까지, 태감은 입을 열지 않았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마음을 가다듬듯이, 경배하듯이. 존귀한 존재를 배알할 준비를 하듯이.

그리고 끝자락에 도달했을 때. 소년은 태감이 말하지 않더라도 이 비고에 보관된 가장 중요한 보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제국의 역사이며, 황실의 자존심.

금룡 진가의 모든 것.

금룡기(金龍於).

친정(親征)의 상징. 제국 전쟁사를 모두 경험했다는 역사의 증거물은 언젠가 찾아올 전장의 바람을 기다리며 잠들어 있었다.

“기대한 것처럼…… 화려하지는 않군요.”

“군기이기도 하고, 오래된 물건이니 어쩔 수 없지.”

금룡기는 소년이 기대한 것처럼 화려하고 깨끗한 물건은 아니었다. 군데군데 구멍이 뚫리고 피와 먼지에 얼룩져 빛이 바래 언뜻 보면 초라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핏방울이 얼룩져 있고 그끝은 너덜거리는 금룡기의 모습은 창칼로 일어선 제국의 본모습이나 다름없었다.

차갑고 냉정한, 철혈의 증명.

그 앞에서 다른 제국인이었다면 무한한 자부심과 긍지를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소년은 깃발에 배어든 피냄새와 흉포한 역사의 흔적이 거북하게만 느껴졌다.

“멋지기는 합니다만, 가지고 나갈수는 없겠군요. 너무 크고…… 좀 냄새도 나는 것 같고.”

“허, 불경한 소리. 군에 몸담은 장수들의 평생 소원이 이 금룡기를 직접 보는 거라는 것을 알고 있느냐?”

“거 참 소박한 소원입니다. 그려.”

소년의 성의 없는 대답에 태감은 삐친 듯 고개를 팩 돌렸다. 거 참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소년은 태감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관심이 있는 척 질문을 던졌다.

“근데 저기 옆에 있는 건 뭡니까?”

소년이 가리킨 것은 금룡기의 옆에, 금룡기에 버금가는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벽걸이 융단이었다.

벽한 면을 가득 채울 만큼 긴 붉은 비단에는 사람의 이름 같은 것이 빽빽하게 쓰여 있었다.

“아, 저건 황실의 보첩(譜膜, 가계도)이구나. 초대 용린왕 때부터 내려온 것이지.”

“그런데, 묘호가 아닌 이름으로 적혀 있군요?”

소년은 특이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보통 황족의 사후에는 따로 시호를 붙이고 황제에게는 묘호를 붙이는것이 관례가 아닌가.

하지만 눈앞의 보첩에는 묘호 대신 진씨 성을 쓰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이것은 금룡 진가의 사적인 족보라 그렇다. 이곳에는 다른 곳에는 적을 수 없는, 역사에 남길 수 없는 황족의 이름까지 모조리 적혀 있지. 폐위된 황제, 지워야만 했던 황족들이 말이다.”

씁쓰름한 웃음을 지으며 한참을 말없이 보첩을 보던 태감은 손가락으로 이름 하나를 가리켰다.

“여기, 황제 폐하도 적혀 있구나.”

“어디…… 폐하의 성함이 진비운(秦榧雲) 이셨군요.”

“어떠냐, 황송하지?”

쉬이 들을 수 없는 폐하의 진명을 들었으니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니.

태감의 말에 소년은 참 별걸 가지고 다 유난을 떤다고 생각했다. 하여간 제정일치 사회는 이게 문제야.

지도자가 똥을 싸면 그 똥까지 신성화하려고 한다니까.

제정일치의 불합리성을 되새기며 현대사회의 사회제도를 찬미하던 소년은 황제의 옆으로 적힌 여인의 이름을 보았다.

누군가가 먹으로 지워 그 옆으로 새로 쓴 이름은 황제와 같은 항렬에 있었다.

진비령(秦榧玲).

소년은 가만히 태감을 돌아보았다.

소년의 표정에서 그 뜯을 알아첸 태감은 잠시 숨을 고르며 시간을 끌었다.

입에 담기도 거북하다는 듯이, 하지만 금룡비고라는 제국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장소가 그의 입을 가볍게 했다.

“네 예상대로, 진비령, 주화공주(朱花公主)는 폐하의 누이이며 계승권을 가진 황족이셨다.”

그 말에 배어 있는 비극의 향기는 느슨하게 풀어진 소년의 정신을 긴장시켰다.

지뢰를 밟았다는 짙은 후회와 태감에 대한 죄책감에 소년은 고개를 떨구었지만, 태감은 담담하게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목이 메는 기색도 없이 태감은 무미건조하기까지 한 어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잠깐 사이에 태감은 그의 속에서 비극의 역사에 고뇌하는 자신과 소년에게 역사의 일부를 설명하는 자신을 분리시킨 것이다.

“만인에게 사랑받을 사람이란 존재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겠지. 하지만 유일하게 가능했던 여인이 있었다. 축복 속에서 태어나신 분. 진가의 장녀. 주화공주만이 가능하신 일이었지.”

그가을는 것은 분명 역사에 적힌 이야기였다. 하지만 사심 없이 객관적인 이야기만을 전달하려 해도 그말투에, 정면에 고정한 시선에서는 사람이기 때문에 떨쳐낼 수 없는 애정이 묻어나왔다.

차가운 칼이 어린 속살을 헤집었다. 소년은 멈추라 말하고 싶었지만, 태감은 한번은 마무리 지었어야 할 일이라는 듯이 강건한 태도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가혹했던 내전, 선황께서 전장을 질타하시는 동안 백성들을 위로할 이가 필요했지. 폐하께선 어린 나이 심에도 직접 친위대를 이끌고 도적들을 퇴치하시어 백성들을 지키셨고 주화공주께선 굶주리고 피폐해진 백성들을 위로하셨다.”

시산혈해의 시대, 마지막 희망처럼 백성들에게 다가온 공주는 얼마나 아름답고 찬란했을까. 만백성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한들 누가 질투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토록 찬란한 사람이었기에 그 빈자리는 참혹할 만큼 뼈에 사무치는 것이었다.

태감은 허탈하다는 듯이 소년에게 물었다.

“믿을 수 있겠느냐? 나라의 희망이, 반란을 일으킨 일족의 적자와 사랑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그것은 마침내 내전을 종결한 제국에 새로운 파란을 일으켰지. 혹자는 그것이 잔치를 파탄 내는 많은 방법중 최악의 행위였다고 평할지도 모른다.”

만백성이 마치 어머니를 잃은 것처럼 울었다. 진노하신 선황께선 공주를 찾기 위해 천하를 뒤흔들었지.

내전을 종결시킨 선황 깨서도 끝내 공주를 찾지는 못했다.

“그래, 주화공주는 돌아오지 않으셨다. 백성이 슬픔에 잠기고 선황께선 분노하셨지만, 결국 돌아오지 않으셨지.”

태감은 흘러내린 먹자국을 쓰다듬으며 소년에게 말했다.

“결국 선황께선 주화공주의 흔적을 전부 지우려 하셨다. 가장 지독한 폭군의 이름도, 차마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암군의 이름도 적혀있는 이 보첩에서 말이다.”

그리고 황제께선, 즉위하신 첫날 보첩에 다시 그분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그것은 누이에 대한 연민이었을까, 아니면 나라와 자신을 버리고 떠난것에 대한 원망이었을까.

태감이 털어놓을 수 없는 감정을 곱씹는 동안 소년은 황제를 떠올리고 있었다.

정확히는, 황제와 다투었던 순간을, 그를 금룡비고에 오게 만들었던 사건을 기억했다.

어째서 그에게 싸움을 걸었을까.

다시 생각해 봐도 미친 짓이었다.

설령 도전장을 받았다 한들 작게는 자신의 상관이요 크게는 제국의 지배자인 황제를 그대로 들이받은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소년이 황제에게 승부수를 던진 이유는, 그를 도발하고 자신의 목을 내건 이유는.

점잖은 척, 온화한 척하는 황제의 눈 속에서 타오르는 굶주림을 보았기 때문이다.

가장 비천한 곳을 기던 후궁의 벌레가 제국의 지존에게 연민을 느낀것이다.

만백성의 아버지, 위대한 용의 혈통을 이은 적자. 모자랄 것 없고 부족할 것 없으며 세상에 상대할 적수가 없을 사내는.

황제는 어찌하여 그토록 적을 갈망하는가.

가장 비천한 신분인 자신에게까지 싸움을 걸어올 만큼 목말라 있던 황제의 민낯을 되새기며 소년은 천천히 공주의 이름을 더듬었다.

이미 마른 지 오래인 글씨에선 어쩐지 먹물이 묻어날 것만 같았다.

서로 물어뜯을 수 있는 적. 그러나 결코 추악한 악의와 질척한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순수한 승부를 겨룰 수 있는 적을 갈망하는 이유를, 소년은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소년의 표정에서 그 심중을 읽은 태감이 그에게 확신을 더 해주었다.

“최고의 맞수셨다더군. 설령 용께서 공주를 황제로 선택하신다면 사심 없이 축복할 수 있을 만큼.”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지요. 대 제국의 지배자가 어찌 가장 비천한 존재에게 도전하겠습니까.”

결핍에서 나온 맹목적인 욕구가 그를 절박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자신을 낮추고 패배를 갈망하게 될 만큼. 고독감이 그의 심장에 틀어박혔으리라.

누이의 실종 이후, 수년이 지나지워진 누이의 이름 앞에 섰을 황제는 어떤 심정으로 붓을 들었을까. 무엇을 느끼며 누이의 이름을 적었을까.

심처의 문을 나서며 소년은 괜히 얻은 것도 없이 감정 소모만 했다고 투덜거렸다.

“아니, 새어나간다면 대역죄로 다스릴 만한 황실의 비밀을 듣고도 만족할 수 없단 말이냐?”

“괜히 피곤하기만 하고 얻은 게 뭐가 있습니까? 아 맞다 뭐 하나 주워 나왔어야 했는데.”

“가는 길에 아무거나 하나 골라 가자꾸나. 그래, 저 비수 어떠냐?”

태감이 가리킨 것은 새카만 날을 가진 비수였다. 한 뼘쯤 되는 날에 거무튀튀하지만, 빛에 비춰 보면 각도에 따라 섬뜩한 붉은빛이 요사스럽게 번뜩였다.

“혈옥비수라는 물건이다. 무려 천년전 물건이지. 예리함으로는 천하에 으뜸이라는 신병이니라.”

“미친, 천 년 전이요? 골동품도 아니고 고물이네, 고물. 날은 돕니까?”

“무슨 소리를, 운철과 혈옥으로 신선이 벼려냈다 하는 상고시대의 신병을 몰라보는구나.”

아니, 그런 게 왜 이런 비고에 굴러다닙니까? 좀 더 엄중하게 보관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소년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태감이 비수를 집어들었다.

“보아라. 천 년의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날을 갈아본 적 없다는 전설이 사실인지 아닌지.”

태감은 허리 높이에서 비수를 떨어트렸다. 힘주어 던진 것도 아니었고 높이가 높았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허리춤에서 자유낙하 하여 중력에 의해 바닥으로 떨어진 비수는 소리 없이 대리석 바닥을 파고들었다.

소름 끼칠 만큼 고요했다. 소년은 천천히, 마치 바닥에서 돋아난 것만 같은 비수의 손잡이를 잡아 뽑았다.

조금의 저항감도 없이 뽑힌 비수는 대리석을 파고들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유려한 자태 그대로였다.

“……이런 미친…… 이런 게 왜 이런 구석에 있습니까?”

“구석이라니, 한 나라의 역사가 잠든 비고인데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냐?”

아무튼, 마음에 든 것 같아 다행이구나. 태감은 입을 다물지 못하는 소년에게 혈옥비수의 칼집을 던졌다. 기이한 붉은색이 도는 가죽 칼집은 요사스러운 칼날에 어울리게 신비롭고 영험해 보였다.

마치 칼날의 예기를 봉인하기 위한 것처럼. 모든 칼집의 존재 이유야 그것이겠지만 소년은 그 칼날의 예리함에서 특별한 불길함을 느꼈다.

하지만,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매력적인 칼날이었다. 목숨이 경각에 달했을 때 회심의 한수로서도 나무랄데 없고 칼날의 폭이 좁고 예리하기가 비할 데 없으니 발골 작업을 하기에 이보다 좋을 수가 없었다.

“마침 또 고기 좀 만질 일 있었는데 잘됐군요. 새김질용 칼 한 자루가 필요했는데.”

“조심해서 써라.”

섬껏한 칼날을 품에 안으며 소년은 다부지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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