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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86화 (86/314)

환관의 요리사 86화

연좌궁의 집무실로 들어선 소년은 의자에 앉아 한숨 돌릴 필요성을 느꼈다. 소년이 고른 것은 결이 고운 오동나무 의자였다.

인체공학적인 설계로 만들어져 허리를 부드럽게 받쳐주고 팔걸이의 높이도 소년에게 딱 적절했다.

무엇보다 의자 전체에 음각된 장인의 고집이 엿보이는 조각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품격이 높아졌음을 믿어 의심치 않게 했다.

소년의 위로 어슴푸레하게 드리는 달빛은 소년의 얼굴에 음산한 그림자를 지게 했다.

“……좀 밝은데로 나와 앉으면 안되겠나?”

“그 정돕니까?”

“내가 저잣거리 무협지 주인공이었다면 당장 칼을 빼들있겠지. 아군이라 다행이구나.”

“거 참 다행이군요.”

심드렁한 소년의 태도에 태감은 피식 웃고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부여비에 관한 문제였다.

소년은 떨리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싸 쥐고는 숨을 토해냈다.

“부여비 님이, 야욕이 없으신 분이라 다행입니다. 정말로, 예. 사실 그것도 사실인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요.”

자신은 믿더라도, 태감은 믿어서는 안 된다. 그녀에 대한 인간적 호감이 소년의 심중에 자리를 잡은데도 소년은 날카롭게 호의를 째고 그 안에서 객관적인 정보만을 추려냈다.

부여비 님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마십시오. 소년의 말 속에는 위험한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었다.

정치적 동반자 관계가 되었기 때문에, 그렇기에 더욱더 끝없이 서로를 의심하고 감시하는 것이 정치인의 숙명이었다.

차가운 배덕.

오랜 시간 마음에 굳은살이 박인 태감도 때때로 그것을 느끼고는 했다.

정치인이란 상종 못 할 놈들이라는 것을. 언제 길거리에서 벼락을 맞아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천하의 잡놈들이라는 것을.

끝없이 의심에 의심을 거듭해야 하는 직업은 사람의 마음을 갉아먹는다. 가장 친했던 아군도, 가족마저도 언젠가는 의심 섞인 눈으로 보게 될 날이 오겠지.

개를 늑대로 착각하게 되기 전에 그만둬야 하겠지만 그의 자리는 누군가에게 물려주고 마음 편히 은퇴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앞으로는 더욱더 바빠질 것이다.

이제 부여비의 허락을 얻었으니 본격적으로 난화비가 세력을 넓힐 준비를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우선 흠이 없는 비들을 선출해야 하니 동창 제독으로서 부담감이 막중했다.

태감은 그런 잡무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밀린 일을 처리하기로 했다.

“아, 그러고 보니 너에게 전해줄것이 있었지.”

“예? 저한테요.”

“그래…… 어디……”

태감은 생각이 안 난다는 듯이 한참 동안 서랍안을 뒤지더니 수줍게 옥새가 찍힌 문서를 꺼내 들었다.

“후궁의 상호. 문화보존문예기술인 오운은 어명을 받들라!”

“후궁의 상호. 문화보존문예기술인 오운이 황제 폐하의 어명을 받드옵니다!”

그 순간 소년은 납작 엎드렸다. 이게 무슨 장난인가 싶었지만, 황제의 옥새가 찍힌 칙서를 든 태감은 지극히 진지한 어조로 칙서를 읽어내려갔다.

“그리하여 오운의 솜씨에 짐이 감탄한 바. 후궁의 상호. 문화보존문예기술인 오운에게 금룡비고에 출입할것을 허(許)한다.”

소년은 한참이 지난 후에야 칠성제에서 황제를 엿 먹였던 일이 떠올랐다. 지금 생각하면 그거 진짜 미친짓이었구나. 무슨 깡으로 그런 미친짓을 했지?

배짱 두둑한 전생에서도 중국 국가 주석에게 깝죽거려본 적은 없는데, 도대체 뭘 믿고 그때의 난 황제 앞에서 그 지랄을 한 걸까?

소년은 곰곰이 그때 당시 자신이 만취 상태가 아니었는지 의심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맨정신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

“그건 그렇고 금룡비고라니, 폐하께서도 통이 크시군요.”

금룡비고라면 곧 황궁비고를 말하는 말이 아닌가. 소년은 어린 시절 읽었던 무협지의 낭만이 다시금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규화보전.

아수라파황공.

설마 했던 죄를 지은 전대고수가 유폐되어 있으면 어떻게 하지?

나이를 먹어도 로망은 사그라지지 않는다. 남자는 영원히 어린아이인것이다.

“뭐, 비고라고 해봤자 오래된 잡동사니가 쌓인 창고일 뿐이다. 네가 기대하는 뭐 신선의 비술이라든가, 봉인된 요괴. 그런 건 없어. 케케묵은 갑옷이나 전쟁터에서 공을 쌓은 장수의 칼 같은 역사적인 물건이라면 있다만.”

한마디로 별로 주고 싶은 건 없고 생색은 내고 싶을 때 주는 선물이라는 소리였다. 심드렁한 태감의 표정에서 소년은 그 의미를 알아챘다.

“뭐, 가본다는 점에 의미를 둬야겠군요.”

“그렇지. 그래도 나름 한 나라의 역사가 기록된 곳이니 역사학자라면 부러워할게다.”

“그럼 귀찮은데, 가고 싶다는 양반한테 양보할 수는 없습니까?”

“내일 낮쯤이면 그 친구와 네 모가지가 나란히 장터에 걸리겠구나.”

목 언저리에서 손가락을 흔드는 태감의 모습에 소년이 웃었다. 소년도 이제는 이런 농담을 그저 웃어넘길수 있게 되었다.

사람은 적응하는 동물이었다. 십년간 노예로 살며 노예근성이 찌들었던 것처럼. 소년은 어느새 후궁의 사람처럼 생각하는 법을 배웠다.

“그럼 비고에서 뭐가지고 나올 수도 있습니까?”

“있지. 딱 한 개만. 근데 가지고 나와도 처치 곤란일걸?”

“그냥 적당한 거 하나 가지고 와야겠군요.”

대충 병이나 하나 가져다 꽃이나 꽂아둬야겠다고 소년이 말하자 태감은 쓰게 웃으며 소년의 소박한 생각을 만류했다.

“비록 반출되었다 한들 비고의 물건이다. 깨뜨리면…… 알지?”

“튼튼한 물건을 골라야겠군요.”

하여간 이놈의 후궁은 뭐 하나 마음 편한 구석이 없어. 투덜대며 자리를 뜨는 소년을 보며 태감은 위정에게 곁눈질했다.

“저 친구도 이제 배짱이 많이 늘었어. 그렇지?”

“익숙해진 거겠지요. 일도 많았고, 탈도 많았지 않습니까.”

일도 많았고, 탈도 많았다. 그 말을 내뱉은 위정의 눈동자에는 마치 자신의 젊은 시절을 투영한 듯한 그리움과 회한이 쌓여 있었다.

“그래, 많은 일이 있었지.”

탕수육을 나눠 먹은 그 날, 태감은 소년이 그날 한 고백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가 평생 지켜야 할 비밀, 설령 그의 주군이라 할지라도 털어놓을 수 없을 고민을 되새기며 태감은 심중에 틀어박힌 아릿한 통증을 느꼈다.

언젠가, 모든 일이 끝나면. 웃는 얼굴로 너를 떠나보내는 그 날. 술잔을 기울이며 나의 비밀을 고백할 날이 오겠지. 그날이 오기 전까지 우리의 불공평한 관계는 해소되지 않겠구나.

하늘에 뜬 달을 올려다보며 함께 웃을 수 있기를, 마음의 짐을 훌훌 털어낼 그 날이 오기를 기다리며 태감은 현실로 눈을 돌렸다.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목간한 무더기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 *

금룡비고에 가기에 앞서. 오랜만에 풀을 빳빳하게 먹인 환관복을 입은 소년은 맨 처음 태감을 만난 그 날의 당혹감을 다시 맛보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원리로 얼굴에 붙어있는지 모를 흑단 가면이야 이제 익숙해졌지만, 태감은 오늘 처음 보는 기이한 용가면을 쓰고 있었다.

“용권차면(龍權徣面)이라 한다. 용의 권세를 빌린 가면이란 소리지.”

“어…… 위엄 있어 뵈긴 합니다만.”

떨떠름한 소년의 목소리에 태감이 양손을 허리에 대며 엄포를 놓았다.

“이 가면은 용의 아들의 권세를 빌렸다는 뜻이니 곳 폐하의 대리인이란 소리다.”

“아, 그러시군요. 무릎이라도 꿇을까요?”

“허, 됐다. 시간 아깝게.”

바깥에는 평소 타고 다니지 않는 가마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그 가마를 드는 것은 잘 단련된 체구에 흰천을 얼굴에 둘러 얼굴이 드러나지 않게 한 장사들.

말을 하지 않도록 입에 흰 종이를 문 그들은 모두 허리춤에 거대한 칼을 차고 있었다.

소년은 첫눈에 그들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었다. 황제의 친위대이며 황족이 아니면서도 유일하게 후궁에 출입할 수 있는 거세하지 않은 남자.

황제로부터 죄를 사할 권한을 위임받은 참수도의 주인들.

참주.

“말하지 않았느냐. 폐하의 대리인이라고.”

극도의 공경을 받으며 가마에 오른태감이 손짓하자 소년은 쭈뻣거리며 따라 올랐다.

소년이 오르자 가마의 문이 굳게 걸어 닫히고 참주들이 가마를 들었다.

사람이 드는 건데도 기이할 만큼 진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만큼 완벽하게 호흡을 맞췄다는 증거였다.

밀폐된 가마 안에서도 태감은 가면을 벗지 않았다. 그 미묘한 분위기 와 차가운 숨결이 자신이 알던 태감이 아닌 것 같아 소년은 고개를 돌려 문틈 사이로 비치는 풍경을 내다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환관들, 나인들.

화려한 행색의 비와 그녀를 모시는 시녀들. 변치 않을 것 같았던 후궁의 여름도 가고 어느새 가을이 성큼다가와 있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겨울이 오겠지.

소년에게 겨울은 춥고 힘든 계절이었다. 껴입을 솜옷 하나 없이 살 때는 겨울이 그렇게 두려울 수가 없었다. 앓아누워도 찾아올 사람 하나없는 그 공포는 경험한 사람이 아니면 모를 것이다.

그래도 이제는 아프다고 하면 병문안을 사람 한 둘은 생겼구나. 소년은 가면을 쓴 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태감을 힐끗 돌아보며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앓아누우면 저 양반도 야단이겠군. 밥할 사람이 없으니.

반룡궁의 내원에 가마가 내리자 참주들은 깊이 고개를 숙여 읍한 다음 소리 없이 자리를 떴다. 자갈이 깔린 정원에는 드문드문 오동나무가 심겨져 있었다.

“오동나무?”

“실용적인 나무지. 가구를 만들 때도 좋고.”

“관상용으로는 어떨지 모르겠군요.”

“뭐, 나름대로 의미가 있어 심어둔거다.”

태감은 품에서 기이한 열쇠를 꺼내 내원의 담장을 더듬었다. 그 재질을 알 수 없는 새카만 열쇠는 마치 재를 먹인 듯 거무튀튀하고 광택이 없었다.

“비록 금룡비고 내부는 별 볼 일없을지라도, 그 입구만큼은 신비하고 경이롭지. 보라, 이것이 바로 숨겨진 비고의 문이니.”

담장의 중간에 작은 흠집처럼 있던 열쇠 구멍에 열쇠를 끼우고 태감은 소년에게 엿 시대의 전설을 전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담장 아래로 땅이 내려앉고 사람한 명이 충분히 드나들 수 있을 만한 크기의 입구가 열리자 소년은 그 안을 들여다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무뿌리가 얽혀 만들어진 계단, 가지와 잎이 뒤엉킨 벽에는 은방울꽃 같은 꽃들이 은은하게 빛나며 통로를 밝히고 있었다.

또 다시 갑작스럽게 다가온 판타지 함에 소년이 넋을 놓고 있자 태감은 빨리 안오면 두고 간다고 소리치며 그를 재촉했다.

“허, 이건 도대체 무슨…….”

“듣기로는 이 황궁이 처음 건설되었을 때, 노공(老公)께서 후궁의 비밀스러운 통로를 만드셨다고 하더군. 아마 이 비고 또한 그분의 작품이겠지.”

“노공이라면…… 그분?”

“그래. 그분 말이다.”

소년의 뇌리에 그날 본 거대한 뱀의 위용이 떠올랐다. 수천 개의 태양과도 같았던 눈과 폭포수 같았던 흰 수염.

감히 인간의 측량 단위로 절 수 없을 것만 같은 동체. 그 신화시대의 존재라면 이 요정의 샘으로 이어질 것만 같은 길도 이해가 되었다.

길은 한참을 이어졌다. 울퉁불퉁한 나무뿌리가 밟기에 썩 편하지는 않았기에 걸을 때 남들보다 배는 더 체력소모가 심한 소년은 몇 번이나 쉬어가야 했다.

“여긴 뭐 그런 건 없습니까? 발판이 자동으로 움직여서 가만히 서 있기만 하면 된다던가.”

“오, 그러면 편하겠는걸.”

아직 다 내려가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올라갈 것을 생각하니 숨이 턱턱 막혔다.

굵은 나뭇가지에 그대 숨을 고르던 소년이 기이한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분명히 폭포 소리였다.

“이제 슬슬 다 온 모양이구나. 가자.”

한걸음 걸어 내려갈수록 차갑고 습한 공기가 훅 치고 들어왔다. 점점커지는 폭포 소리, 발밑으로 전해져오는 진동은 소년의 기대감을 고양시켰다.

한걸음, 두 걸음, 물기가 어린 뿌리를 밟고 한 걸음씩 내려갈수록 크게 들리는 폭포 소리가 소년의 발걸음을 잡아끌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은은했던 꽃의 불빛이 강해졌고 습기는 피부에 달라붙어 이슬이 맺힐 정도였다.

마침내 비고에 당도하였을 때, 소년은 그 광경에 압도되어 넋을 잃었다.

“비고로 두기에는 아깝군요.”

“좋지 않으냐? 이 흔치 않은 풍경을 독점할 수 있는 소수의 선택받은 인간이 되었다는게.”

천장에서 끝없이 흘러내리는 장쾌한 폭포와 그 아래로 고인 거대한호수. 수면에는 흰 포말이 넘실거렸다. 천장에 박힌 야명주가 흩뿌려져있었고 아래로는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을 내는 꽃들의 깔려 있었다. 하늘과 땅에 내려앉은 별의 융단.

그 광경은 소년의 한순간을 사로잡았다.

마치 세상의 중심에서서 별의 파도를 온몸으로 맞이하는 듯한, 그장엄한 아름다움 속에서 소년은 이한순간 속에서 존재하고픈 욕망이 싹틈을 느꼈다.

이 한순간. 이 광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의 고난은 보상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열이 없는 차가운 냉광(冷光)이었지만 소년은 그 속에서 지상에서는 맛볼 수 없는 아늑함을 맛보았다.

“시간만 괜찮다면 한숨 자고 가고 싶군요.”

“후후, 아무리 그래도 황실의 성지에서 오수를 즐길 수는 없지.”

빛나는 꽃을 지르밟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발을 떼며 소년은 비고의 첫번째 문에 당도 했다. 제 일문은 값비싼 보석과 사치품이 장식되어 있었다.

엄지손톱만 한 굵은 진주를 꿰어만든 목걸이, 홍옥으로 만든 반지에 신비로운 문양이 음각된 옥가락지, 금강석을 아낌없이 박아넣은 요대 등등에 황금으로 만들어진 단도 등등. 귀중한 보물들이 널려 있었지만 태감은 소년에게 눈길을 주지 말라말했다.

“비고는 깊어질수록 진귀한 보물들이 숨어 있지. 진정한 보물이란 그속에 스며든 내력을 살펴봐야 진가를 알 수 있는 법이다.”

더 안쪽으로 깊숙하게 들어갈수록 대단한 보물들이 널려 있었다. 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잠든 거대한 옥두꺼비, 비단 주머니를 가득 채운 흑진주에 가공하지 않고 채취한 그대로 보존된 자수정 등등.

사치의 향연을 밟고 넘어가며 소년은 자신의 금전감각이 마비되는 것을 느꼈다.

“저 진주 한 알만 있으면 일 년은 풍족하게 살겠군요.”

“이 진주 말이냐? 저 진주 말이냐? 진주가 너무 많아서 어떤 진주를 말하는 건지 모르겠구나.”

“흐미…….”

산더미 같은 금은보화를 헤치고 나아가면 이제는 역사 깊은 문인들, 공을 세운 장수들이 생전에 사용했던 검이나 필기구 따위가 그 내력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마치 쓰레기처럼 먼지를 뒤집어쓴 보화들과는 달리 그것들은 제대로 관리가 되는 듯 말끔한 모습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태감은 그것 중 유난히 눈에 띄었던 검 한 자루를 집어 들었다. 칼집에는 옥을 붙이고 자루에도 옥을 조각한 장식이 붙어 있는 검은 고풍스러운 만큼 칼날의 예기 또한 대단했다.

“삼백 년 전 천하제일명장 귀문철이 벼렸다는 옥룡검이다. 날카롭기로는 백장의 겹친 소가죽을 단번에 자르고 단단하기로는 차돌을 갈라도 예기가 죽지 않는다고 하지.”

검을 내려놓은 태감은 이번엔 새카만 궁을 집어 들었다,

“이건 그 유명한 호교궁(虎嚙弓)이다. 호랑이의 심줄을 꼬아 활줄을 만들었다고 하더군.”

태감은 으스대며 활줄을 걸려 했지만 호랑이의 심줄을 꼬아 만들었다는 명성답게 호교궁은 책상에 앉아 붓이나 놀리는 환관 나부랭이가 어찌할 만큼 만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한참을 씨름한 끝에 궁을 내던진 태감은 숨을 고르며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이 다음에 있을 비고가 바로 황실에서 가장 중요한 보물을 보관하는 장소이니, 경건한 마음으로 임할 수 있도록.”

그를 떨떠름한 표정으로 보던 소년은 내팽개쳐진 호교궁을 가리켰다.

“일단, 물건에 화풀이하는 건 그만 둡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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