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의 요리사-85화 (85/314)

환관의 요리사 85화

“아, 후식은 없나요?”

다시 이야기를 나누던 서재로 돌아온 부여비는 마치 배부른 고양이처럼 나른한 표정으로 의자 위에 늘어졌다. 시중을 들 시녀들을 모두 물린 채로.

소년에게는 더는 체면을 차려 연기 한 부여비의 모습이 아닌 깨끗한 민낯을 보여주겠다는 듯이 그녀는 한 껏 풀어진 표정이었다.

이것마저 예측한 걸까?

소년은 식은 땀을 흘리며 그녀의 의도를 예측해보려 했다. 자신의 목적마저 알아차리고 만 것인지, 아니면 그와 신뢰 관계가 쌓여 스스럼없이 민낯을 보여준 것인지. 쉽게 단언할 수 없는 이야기였기에 소년은 잠자코 그녀의 말에 따랐다.

“물론 준비되어 있지요. 녹차와 말린 무화과로 만든 양갱을 준비했습니다.”

쌉싸름한 양갱에 달콤하고 아작아작 씹히는 무화과의 조화는 맛이 가법고 향기로운 녹차와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일부러 단맛을 최대한 억제한 양갱에 소년은 마지막으로 향기로운 꿀을 더했다.

“이 꿀은 오직 귤꽃에서만 모은 것이라 향이 무척 좋습니다.”

“어머나, 정말로 꿀에서 살짝 감귤향기가 나네요?”

녹차와 감귤의 향긋함을 즐기며 부여비는 아예 접시를 들고 긴 의자 위에 누워버렸다.

팔걸이에 상반신을 기댄 체 다리를 쭉 뻗은(이 시대 기준으로는) 남사스러운 모습에 소년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혹시나 이것을 빌미로 훗날 목이 잘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소년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것을 재밌다는 듯이 보던 부여비는 이내 다 먹은 양갱 그릇을 상에 내려놓았다.

“정말 훌륭한 요리였어요. 이렇게 음식에 열광해 본 것이 얼마 만인지…….”

“마음에 드셨다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고개 숙이는 소년을 가만히 보며 부여비는 양갱을 떠먹던 얇은 은수저를 손가락으로 돌렸다.

도저히 품위 있는 행동은 아니었지만, 그 솜씨가 보통 현란한 것이 나이었기에 소년은 잠깐 그녀의 묘기를 관람했다.

그것은 부여비가 무언가를 고민할때 무의식적으로 하는 동작이었다.

고민과 갈등 끝에 부여비는 만복감에 늘어지는 몸을 일으켜 세워 소년과 정면으로 마주했다.

아직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멀거니 서 있는 소년에게 부여비는 자신의 흉금을 터놓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유를 모르겠어요.”

“예?”

“오늘 저녁을 차린 이유 말이에요.”

“그거야 부여비 님께 식사를 대접하고 싶은 이놈의 작은 소망이…….”

“그런 거 말고요.”

부여비는 말투마저 변했다. 마치 여염집 소녀처럼 가벼워진 말투로 부여비는 새처럼 조잘거렸다.

모든 가식과 황궁 예절을 벗어 던지고, 부여비는 소년에게 예가인으로서 씩 웃어주었다.

후궁의 가장 밑바닥을 기었던 음습한 벌레로서는 버틸 수 없는 태양처럼 티끌 하나 없이 밝은 미소였다.

모략을 꾸미고 음흉한 속내를 삼킨 상대를 바보로 만드는 웃음이었다.

그녀의 웃음으로 소년이 필사적으로 궁리해 온 암투와 정치적 파장이 모조리 유치하고 어리숙한 것으로 변했다.

홍엽비에게서도 느꼈던 것을 소년은 부여비에게서 느꼈다. 사람을 끄는 힘, 외모와는 상관없이 사람을 끄는 매력.

이것이 바로 황후 후보자의 자격이라는 걸까? 소년은 새삼 홍엽비를 돌아보며 부여비와 비교해 보았다.

그 순진무구함과 한없이 지켜주고만 싶은 연약한 모습, 하지만 그 내면에 있는 곧은 심지는 그녀가 마냥 연약하기만 한 이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 부여비는 어떨까.

눈앞에서 천진하게 웃고 있는 그녀는 실로 신비로운 여인이었다. 소년은 기이하게도 그녀가 오랜 친구처럼 느껴졌다.

가벼운 사담, 무가치한 농담을 나누며 의미 없이 함께 웃을 수 있을 것만 같은 분위기.

그렇기에 그녀가 어려울 때라면 한 없이 발 벗고 나서 도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느새 옹졸한 그의 마음에 그녀가 지분을 차지하고 들어앉은 것이다.

소년은 그것이 우습다고 생각했다.

“모르겠군요.”

“무엇을요?”

“부여비 님을 말입니다.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질문이 돌아오지 않았는데도 그녀는 말없이 소년의 말에 응해주었다.

“제 무엇이요?”

“맨 처음 첫인상과도, 그 후에 만나 뵌 모습과도, 지금의 부여비 님의 모습이 달라 혼란스럽습니다.”

부여비는 아무 말 없이 소년의 탁한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어린 소년의 눈동자는 오랜 시간 세월에 닮고 닳아 긁히고 깨지며 마모되어 혼탁해진 유리구슬을 닮아 있었다.

아이의 눈에 어울리지 않는 짙은 피로감을 보며 부여비는 소년의 질문에 답해주었다.

“누구나 필요에 의해 연기를 하며 살지요. 맨 처음의 평범한 비로서의 모습도, 그 후의 책과 지식에 열광하는 모습도, 계산적인 황후 후보자로서의 모습도 모두 제 모습이에요. 하지만 상호께서는 제 일부분만을 보는 걸 원치 않으섰겠죠?”

“그래서, 보여주신 겁니까?”

부여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으로 대신했다.

결국, 그녀는 사람을 사귈 때 유의 해야 할 해묵은 고언을 직접 실천한 것이었다.

진심에는 진심으로, 사람을 사귐에 있어 거짓 없이 행동하라.

더는 무슨 말이 필요할까. 더는 그 어떤 연기가 그녀를 속일 수 있을까. 소년은 기만을 관두었다.

소년은 부여비의 허락도 없이 의자를 빼와 그녀 앞에 두고 걸터앉았다. 부여비는 그 모습을 보며 부드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간신히, 신뢰를 살 수 있었네요.”

“원래대로 라면 제가 영업을 하러온 건데, 어째 반대로 영업 당한 기분이네요.”

“어느 쪽이든 계약이 성사되면 좋은 것 아닐까요?”

“글쎄요. 제가 실권자가 아니라 계약 성사 여부는 답변해 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소년은 부여비와 짓궂은 농담을 나누었다. 그녀는 편한 사람이었다. 이야기를 나누기도, 그저 함께 있기에도.

“이상한 일이군요.”

“이상하다고요?”

“신기할 정도로 부여비 님이 친숙하게 느껴져서 말입니다.”

불경스러운 말이었다. 환관이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부여비는 까르르 웃으며 소년의 말을 이어받았다.

“저희가 서로 비슷한 면이 있나 보네요. 사실 저도 오상호가 참 친숙하게 느껴졌거든요.”

“이런, 용의 아들께서 들으실까 무섭습니다.”

“어머? 먼저 이야기하시고 그러실거예요?”

다른 이들이 보았다면 지탄받아 마땅할 만큼 입을 크게 벌리며 웃는 부여비를 보며 소년은 그녀에 대한 마지막 경계심을 풀어냈다.

자신이 얼마나 날을 세우던, 결국 그녀에게 무장해제 당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정말로 그녀와는 뭔가 통하는 부분이 있었던 걸까? 그 기이한 친화력앞에서 소년은 도저히 엄격한 잣대를 들이댈 수 없었다.

남은 것은 믿음뿐이다.

“더는 이것저것 재는 것도 의미 없을 테니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습니다. 함께하시겠습니까?”

“네. 좋아요.”

맥이 풀릴 만큼 경쾌한 대답이었다. 소년은 혹시나 싶어두 번 물어보는 일 없이 그 자리에서 일을 마무리 지었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지극히 사적인 시간이었다.

부여비는 다시금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빛내며 열의에 가득 찬 학생의자세로 돌아왔다. 소년은 조심하지 않으면 가진 밑천이 전부 털릴 수도 있겠다는 압박감을 받았다.

“일도 끝났으니, 사적인 대화를 나눠 볼까요?”

“주제는 뭐든지 좋습니다. 부여비님께서 골라주시지요.”

“흐음, 그럼 서방의 식문화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요?”

“마침 제 전문 분야군요.”

시간은 아직 넉넉하게 남아 있었고 부여비의 학구열에는 끝이 없었다.

소년으로서는 간신히 자신의 밑천이 털리는 것을 막기 위한 숨 막히는 토론의 장이었다.

* * *

이기고 돌아가는 것인지, 패배하고 도망치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는 밤이었다. 소년은 기력이 빠져 후들거리는 다리를 채찍질하며 간신히 연좌궁의 문턱에 도달했다.

겸양을 벗어던진 부여비는 탐욕스럽게 지식을 탐하는 맹수였다. 자칫 잘못하면 그녀에게 현대의 지식을 무절제하게 풀어버릴 것만 같아 소년은 가슴을 졸여야 했다.

하지만 일을 마치고 돌아갈 때, 올려다보는 밤하늘은 아름다웠다.

새카만 융단위로 흩뿌려진 빛나는 모래알갱이들을 올려다보며 소년은 오랜만에 충만한 노동의 만족감이 뼈 안쪽에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젊은 시절 땀을 뻘뻘 흘리며 늦은 밤까지 주방에서 일하며 느꼈던 것과 비슷했다.

확실히, 젊은 몸은 젊은 몸이구나.

새삼스럽게 그것을 느끼게 된다.

때때로 소년은 자신이 노년을 바라보는 나이의 요리사인지, 이제 막코밑에 수염이 날 나이의 소년인지 구분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그 두 가지 정체성은 늘 소년을 혼란스럽게 했다.

하지만 동시에, 스스로가 그런 풋풋한 고민으로 밤을 지새우기엔 정신적으로 너무 늙었다는 사실을 소년은 알고 있었다.

정체성 고민, 자아실현 같은 건 대부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일하다 보면 잊고 살게 마련이다. 소년을 마중 나온 장소가 돌담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소년 못지않게 피곤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 까탈스러운 양반을 수행하고 있으니 피곤한 것도 이해가 갔다.

하여간, 아동착취라니까.

“괜찮아요? 눈 밑이 헬쑥한데?”

“헤헤 전 괜찮아요. 오운 님은요?”

“저야 뭐 별일 없었죠. 혹시 배고파요?”

“네. 엄~~청요.”

장소는 걸터앉은 그대로 스르륵 미끄러져 내려왔다. 평소였다면 가볍게 폴짝 뛰어내렸을 텐데, 피곤이 겹겹이 쌓인 얼굴에선 숨길 수 없는 나른한 수면욕이 엿보였다. 오늘 야식은 뭔가 소화가 잘되고 후루룩 먹기 좋은 것을 골라야겠다고 생각하며 소년은 장소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물었다. 장소는 두서없이 이야기를 꺼냈다.

“저녁을 대홍각(大弘閣)이라는 가게에서 먹었는데요…… 거기 주방장과 태감님이 시비가 붙어서…….”

“하여간 그 양반성격 하고는…….”

음식 관련해선 타협이 없는 태감의 대쪽같은 혀가 틀림없이 불을 뿜었을 것이다. 그 성격에 또 얼마나 독살스럽게 말을 했을지 생각하니 소년은 현기증이 돌았다. 경사에 또 새로운 무용담이 돌겠구나.

“저녁은 가볍게 혼돈자(馄饨子) 어때요? 속 부대끼지 않게.”

혼돈자의 가장 큰 미덕은 바로 피로할 때 먹어도 술술 넘어간다는 점이었다.

얇은 만두피에 소가 찔끔 들어간 엄지손가락만 한 만두를 국물에 띄웠으니 부들부들한 피와 뜨끈한 국물을 함께 후루룩 들이켜면 자기도 모르게 한 그릇 뚝딱 넘어가곤 한다.

전에 한 번 만든 이래로 태감이 가장 사랑하는 야식이 된 혼돈자는 항상 반죽과 소가 준비되어 있었다.

매운 걸 좋아하는 장소는 육수에 고추기름을 듬뿍 치는 걸 좋아했다.

“고추기름 넉넉하게 얹고, 육수는 담백한 사골육수로 해서 후루룩 마시면 크으……!”

소년이 혀를 요망하게 놀리기 시작하자 장소의 뺨에 발그레한 혈색이 돌고 메마른 입에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소년은 요리를 만드는 것만큼말도 잘했다.

“고명은 사실 많이 올릴 필요가 없지요. 원래 혼돈자는 최소 오색 고명을 올려줘야 한다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 전 고명이 많으면 오히려 국물맛을 해친다고 생각합니다. 제일 좋은 것은 파를 조금 올리는 것이 좋고 정 아쉽다면 김 가루 조금. 이 정도가 타협안이죠.”

“전 김 가루 많이 올린 게 좋아요…….”

장소는 벌써 그릇을 받아든 것처럼 침을 삼켰다. 눈앞에 만두가 아른거려 못 참겠다는 듯이 발걸음을 재촉하는 걸 보며 소년 역시 지친몸을 끌고 주방으로 향했다.

메말라 비틀어진 그의 몸이 오랜만에 제멋대로 음식을 원하고 있었다.

항상 몸을 유지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식사했던 소년에겐 즐거운 신호였다.

그에게도 늘 배고팠던 시절이 있었다. 밥을 세 공기씩 먹고도 한참 일하고 나면 위장이 아플 정도로 배가 고프던 시절.

지금보다 더 크고 우람한 팔뚝에 근육이 꿈틀거렸던 시절.

오랜만에 그 시절이 돌아온 것 같았다.

그때도 이렇게 친구와 나란히 숙소로 돌아가며 뭘 먹을지 고민하곤 했는데.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은 친구의 얼굴이 장소의 고양이를 닮은 얼굴위로 겹쳐져 보였다. 유난히 콜라를 좋아하는 녀석이었는데, 이름이 기억이 안 나네.

소년은 밤하늘을 도화지 삼아 그친구의 얼굴을 그려보았다. 살짝 가무잡잡한 피부에 눈은 조금 작고, 입이 큰 편이었지.

코는 참 오뚝했어. 콜라를 좋아해서 늘 주방 냉장고 구석에 콜라를 넣어 놨었지. 가끔 그걸 훔쳐 마신적도 있었지. 성격은 참 좋았는데.

소년은 그 친구의 얼굴, 그 친구의 고향. 성격, 많은 것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유독 그 이름이, 이름 석 자가 떠오르지 않았다.

소년이 멈춰 섰다. 벌써 앞서간 장소가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는 시선을 밤하늘에 고정한 채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사실 떠오르지 않는 것은 친구의 이름뿐만이 아니었다. 더 소중한 기억들, 잊고 싶지 않은 기억들.

그것들은 이렇게 아무런 맥락도 없이 갑작스럽게 흙발로 들어와 소년의 가슴을 진탕 시켰다. 그것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익숙해지지 않은 고통이었다.

스승님, 맨 처음 칼을 쥐는 법을 알려주신 그분은 참 인자한 분이셨지.

군대에서 사귀게 된 친구. 그 녀석과는 참 아웅다웅하면서도 참 오래 사귀었구나.

이제는 시큼털털할 만큼 발효된 늙은이의 낯부끄러운 첫사랑 따위가 차례대로 떠올라 소년의 심장을 옥죄었다.

그럼에도 아직 가장 가슴 아픈 하나는 심장에 틀어박힌 채 쉽사리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그것만큼은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떠올린다면 틀림없이 무너질 것을 소년은 알고 있었다.

아무리 나이를 먹더라도, 아무리닮고 닮았더라도.

사람을 한순간에 어린아이로 만들어 버리는 그 한마디.

어머니, 아버지.

그 순간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굳은살 박인 손안에서 희미한 온기가 그의 차가운 얼굴을 감쌌다.

심장이 느리게 뛰는 것만 같이, 주변 풍경이 녹아내리고 공허감 속에선 피로와 슬픔이 그를 향해 손짓했다.

소년은 발목에 족쇄를 찬 것처럼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했다. 이미낡고 깨지고 마모되면서 굴러왔던 그를 구성하던 부품이 한 걸음을 떼면 모조리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여태껏 이 악물고 버텨온 모든 것을 허사로 돌려 버릴 만한 피로감이 정수리 끝을 적시고 흘러들어 몸 안에 채워졌다.

온갖 회한이 폐부를 긁으며 입으로 토해졌다. 몸 안이 텅 빈 것처럼 소년은 주저앉았다. 꼭 포대 자루가 쓰러지는 것 같은 가벼운 소리가 났다.

“오운…… 님?”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장소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말 한마디를 건네지 못하고 소년은 옛 기억 속으로 수몰되었다. 부끄럽고 달콤한, 애틋하고 즐거웠던, 짜증나고 지긋지긋했던. 일들. 추억들.

생각.

“야밤에 뭘 하고 있어?”

옷 더러워지겠다.

어느새 그를 마중 나온 태감의 말에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환한 달빛 아래에서 태감은 세상 모든 고민과 사사로운 걱정을 초월한 것만 같은 자태로 서 있었다.

꽉 잠긴 것 같았던 목이 트였다.

소년은 태어나 처음 목소리를 내는 것처럼 뜨문뜨문 말문을 열었다.

“아, 왠지…… 현기증이 나서요.”

“아아…… 가끔 그럴 때 있지. 혹시 빈혈은 아니겠지?”

“흠, 확실히 요즘 밥을 대충 챙겨먹긴 했는데…….”

“그럼 안 되지. 후궁처럼 팍팍한 곳에선 밥이라도 잘 먹어야 버티지 않겠느냐.”

소년은 주변의 여인들에게는 절대로 보여주지 않을 다정한 얼굴로 소년을 걱정했다. 자신의 사람에게만 보여주는 얼굴. 소년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렇지요. 다음부턴 태감님 밥은 몰라도 제 밥은 잘 챙겨 먹겠습니다.”

“그럼 곤란한데.”

태감은 피식 웃으며 돌담에 기대어앉았다. 값비싼 비단이 더러워지는것도 개의치 않고 소년과 함께 같은 자리에서 같은 달을 올려다보았다.

어슴푸레하게 달무리가 지는 하늘.

태감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힘드냐?”

허세 없이 살 수 있는 남자는 없는 법이다. 아무리 늙었더라도. 설령 서지 않는 나이라고 하더라도 남자는 영원히 허세를 부린다. 소년은 씩 웃으며 받아쳤다.

“힘드니까 월급 좀 올려 주십쇼.”

“오냐. 얼마나 더 얹어줄까? 경사에 고래 등 같은 장원, 만석꾼 부럽지 않을 농지와 소작인들, 네가 은퇴하면 끼워줄 용의 아들께서도 부러워할 만한 미녀. 여기에 뭘 더 얹어주랴?”

“더 얹어달라고 하면 제가 도둑놈이겠군요.”

그 순간의 분위기를 타고 소년은 자신의 내면에 담긴 문제들을 차곡차곡 밀어 넣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먼지를 툭툭 터는 그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후궁의 상호였으며.

태감의 요리사였다.

“부여비는 어땠느냐?”

“말도 마십쇼. 정치 감각이 떨어지기는 무슨, 복장 뒤집히는 줄 알았구먼.”

“그 정도로? 하하, 내 눈도 다 죽은 모양이군.”

“부여비 님이 적이었으면 전 포기 했을 겁니다.”

여전히 불안하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밤이었다. 하지만 이런 밤을 숱하게 보내온 소년은 답을 알고 있었다.

결국, 약은 시간뿐이라는 것을. 이 또한 지나가리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