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76화
늦은 밤 연좌궁의 주방에선 소년이 한창 철과를 휘두르고 있었다. 홍엽비의 저녁을 차리고 돌아와 한숨 쉬려 하는데 밥이 맛이 없었다며 찡찡대는 태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시 주방에서야 했다.
소년이 요리하는 모습을 보며 태감은 우유가 들어간 가배를 홀짝거렸다.
마시면 마실수록 향이 오묘하고 입안에 그윽한 쌉싸름함이 감도니 차와는 또 다른 맛이 있었다.
“허어, 마시면 마실수록 매력적이구나.”
“많이 마시면 잠이 오지 않니 적당히 마시고 내려 놓으십쇼.”
“허어, 잠이 안 온다고? 격무에 시달리는 문관들에게 지급해야겠군.”
태감은 우스갯소리로 한 말인듯했지만 소년은 후궁의 담 너머에서 문관들의 소리 없는 비명을 들린듯해 섬뜩한 기분에 옷깃을 여몄다. 몹쓸 짓을 한 것 아닐까.
커피 맛은 마음에 든 듯했지만, 태감은 신중론을 거두지 않았다.
“표자승, 그리고 표가 상단은 큰상단이다. 자금력도 있고. 상단주가 조금 괴짜라는 풍문이 있지만, 사업의 흥망하나로 흔들릴 만큼 녹록한 상단은 아니지.”
“그럼 밀어줘도 좋지 않습니까.”
“글쎄. 가배란 것이 그렇게까지 가치가 있을까? 제국은 차의 나라다. 우린 수천 년간 차 문화를 향유해왔지. 좋은 차, 좋은 다기를 뇌물로 사용하는 것만 봐도 차에 대한 집착을 알 수 있다. 네가 그 판도를 바꿀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느냐?”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그 가치는 어마어마한 것이다. 동창제독이며 사례감의 태감인 양단은 수없이 많은 상대에게 정치적 거래로, 또는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값비싼차와 다기를 즐겨 사용했다.
좋은 차는 같은 무게의 금과 같은 가치가 있고 명인의 다기는 입지 조건 좋은 장원 한 채와 같은 가치를 가진다. 그런 차 문화에 새로운 유행을 이끌어낼 수만 있다면?
유행을 스스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제국 문화의 심장과도 같은 경사에서 어떠한 이득을 끌어낼 수 있을까.
태감은 그 가치를 감히 환산할 수 조차 없어 눈앞이 아득해지는 듯했다.
할 수 있단 말이냐? 네가?
소년은 철과를 돌리는 것을 잠시 멈추고 태감을 뒤돌아보았다. 매부리코 아래로 찌그러진 미소를 짓던 입이 움직였다.
“가배란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저도 모르지요.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런데 어찌 그리 경망스럽게 투자를 말하느냐.”
“전 가배를 믿지 않습니다. 절 믿지요.”
“허어?”
태감은 당돌하다고 말하려 하다 그의 나이가 자신의 아버지뻘이라는 것을 상기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상대는 거의 삼십여년을 요식업계에 종사한 전문가 중의 전문가가 아닌가.
물론 소년이 종사한 업계와 도전하는 업계가 다르기는 하지만 소년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제가 지금까지 실패한 적 있습니까?”
그 패기에 태감은 말을 잃었다. 그어떤 미사여구와 호화찬란한 다짐보다도 짧고 굵고 파격적인 소년의 말은 그의 격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의 실력이라면, 그의 위치라면 그 말은 오만이 아닌 자신감이라는것을. 차갑고 강렬하게 불타오르는 소년의 눈동자에는 실패라는 단어는 없었다.
말없이 잔을 쥔 채고심하는 태감을 보며 소년은 표자승과 계획한 사업의 미래를 떠올렸다.
잘만 된다면 큰돈이 될 것이다. 아니, 이 똑똑한 남자라면 나 같은 무지렁뱅이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생각했지 못했던 이득을 끌어낼 것이다. 소년은 그리 믿고 있었다.
소년은 얼이 빠진 채 그의 말을 경청했던 표자승을 떠올리고 작게 웃었다.
“우선 이것이 가배와 함께 주력으로 팔 사옹(沙湯)이다.”
표자승의 앞에는 한때 태감을 매료시켰던 홍콩식 도넛 사옹이 은쟁반에 굴러다녔다.
아이 주먹만 한 것이 흰 설탕 옷을 빼입은 모습은 보기만 해도 한입에 삼키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허어, 유작회(油炸檜)와 비슷하군요?”
“뭐. 그것도 이거랑 비슷한 종류라고 할 수 있지.”
중국인들의 아침에 죽과 함께 자주오르는 길쭉한 튀김 빵 유타오도 일종의 도넛이라고 하면 도넛이라고 할 수 있을까?
소년은 뜨거운 밀크커피 한잔을 따라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으론 사옹을 집어 들었다.
“보라. 선계가 눈앞에 있으니.”
기름지고 달콤한 사옹을 베어 물면 사옹의 틈새로 뜨거운 김이 빠져나온다.
쫄깃한 반죽은 고소하고 위에 뿌린 설탕 알갱이들은 혀 위를 구르며 말할 수 없는 쾌감을 선사한다.
그리고. 그 위로.
뜨겁고 진한 밀크커피 한 잔이 사옹의 잔재를 쓸고 내려갈 때, 세상모든 근심과 유리되어 선계로 등선할 것만 같은 해방감마저 느껴진다.
그 순간 자신의 모든 자제력이 고갈되는 것을 느낀 표자승이 벌집을 노리는 곰처럼 달려들어 사옹을 집어삼켰다.
주먹만 한 사옹은 겉은 얇고 바삭바삭하며 씹으면 보드랍게 꺼진다.
달달한 설탕 옷이 사려 깊게 스며들고 가볍고 활기찬 기름의 고소한 맛은 입안에 작은 천국으로서 찾아왔다.
그 순간.
옛 현인의 안배와 같은 밀크커피의 따스한 온기와 풍부한 향기가 입안에 도래했을 때 그는 미욱한 자신에게도 열반할 수 있음을 알려주는 듯했다.
뜨거운 눈물로 수염을 적시며 표자승은 고개를 숙였다.
“절로 신앙심이 생기는 맛입니다.”
“후후, 그 맛이 고객들을 휘어잡아 그들의 지갑을 착취할 것이다.”
소년은 그것뿐만 아니라 광동식 찹쌀 반죽에 설탕 시럽을 묻힌 것이나 반죽에 흑설탕을 넣은 것 등 다양한 바리에이션을 선보였다.
무엇 하나 어울리지 않는 것 없었고 표자승의 영혼에 작은 구원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 없었다.
“흠, 이 맛이 진한 흑설탕 맛은 우유보다는 두유로 내린 가배와 더 잘어울리는 듯하군요.”
“제법 맛을 조합할 줄 아는군. 그럼 이제 다음 과제인가.”
“예,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찻잔, 다기다.”
“예? 그야 물론 좋은 다관에 좋은 다기는 필수지요. 값비싼다기는 그 다관의 품격을 결정하는 것이니까요. 물론 최고급으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런 게 아니야. 우리는 다관의 상호를 박은 다기를 직접 만든다.”
소년이 떠올린 것은 전생의 스X벅스 같은 프랜차이즈였다. 그때는 왜 예쁘지도 않은 로고가 박힌 컵을 이따위로 비싸게 팔아먹느냐고 욕을 했지만, 막상 팔아먹는 위치가 되니 이렇게 좋은 상품이 또 없었다.
“예? 상호를요? 어…… 좀 촌스럽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촌스럽지 않게 멋지게 해야지. 장사 한두 번 하냐??”
“그래도…….”
“그뿐만 아니라 다기를 고급화 전략으로 판매까지 한다!”
판매하는 다기에는 하나하나 정품인증서를 첨부하여 쉽게 위조하지 못하도록 하고 특히 특별한 명절마다 한정판을 팔아치우는 거다!
소년의 말에 표자승은 위압되어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도대체 누가 그런 걸 사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금치산자의 논리도 소년의 사악한 목소리와 강렬한 어조속에선 마치 다시없을 기회처럼 느껴졌다.
“그뿐만 아니다. 우리는 가배 콩 또한 따로 판매하고 가배를 내리는 기술 또한 공개한다.”
“예?”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든 표자승이 마치 멱살을 잡을 기세로 소년에게 항변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겠다는 말이 아닌가? 하지만 소년은 냉혹한 태도로 그를 설득했다.
“언제까지 독점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돈이 되기 시작하면 너뿐만 아니라 서역과 거래하는 모든 상단이 가배를 찾으려 혈안이 될 텐데.”
“그래도 내리는 방법을…….”
“하, 기술자들의 입을 어디까지 믿지? 아니면 네가 직접 내리기라도 할 생각인가? 관둬라. 지킬 수 없는 비밀이라면 차라리 풀어.”
아니, 푸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우리는 가배에 관련된 기술을 가르치는 전문 기술원을 설립할 것이다.
소년의 어마어마한 포부 앞에선 대단하다는 상단주조차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차가운 불꽃이 타오르는 광오한 눈동자 앞에선 마치 그 허황된 꿈조차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이 들게 했다.
“그리하여 저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비명을 지르다 목이 막힌 것처럼 숨죽인 목소리도 묻는 표자승을 향해 소년이 답해주었다.
“가배의 종주라는 자리, 지킬 수 없는 독점을 대신하는 업계 1위라는 명성.”
마치 소년의 등 뒤로 거대한 태양이 떠오르는 듯해 표자승은 감히 눈을 똑바로 떠 그를 보지 못했다.
그 장엄한 포부와 광기 어린 추진력 앞에선 어떠한 장애물도 그를 가로막지 못할 것이다.
감격에 몸을 떠는 표자승 앞에서 소년은 선언했다.
“우린 세상을 바꿀 것이다. 함께 판도를 뒤집어보자.”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핏줄이 붉어진 얼굴을 들이밀며 거센 탐욕을 불태우는 표자승을 떠올리며 생각을 정리한 소년이 태감에게 구상을 보고했다.
“그런 계획입니다.”
“허어…….”
소년의 장엄한 계획 앞에선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사례태감조차 경악할 정도였다.
태감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렇게 되었을 때 그의 정치적 이득을 계산해 보았다.
“우선은…… 네가 말한 한정품 다기나 좋은 콩 등을 우선적으로 선점할 수 있겠군.”
“그리고 비싸게 팔 수 있겠지요. 원하는 세도가들이 많을 테지요.”
“특히 자신은 구하지 못한 것을 남이 가지고 있는 것을 본다면 더더욱 참을 수 없지.”
태감은 어느새 당장 운용할 수 있는 자금을 계산하고 있었다. 듣기만 해도 거대한 자금이 움직여야 하는 일이니 그 모든 것을 표가 상단에만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금뿐만 아니라 태감님의 다른 활약도 중요합니다.”
“……나의?”
“예, 미식가로 유명하신 그 명성. 이럴 때가 아니면 또 언제 써먹겠습니까?”
까탈스럽기로 유명한 태감이 가배를 칭찬한다면 큰 홍보가 될 것이다. 하지만 소년의 흉계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 부여비 님과의 면담도 얼마 남지 않았군요.”
“호오, 그녀에게도 가배를?”
“뭐, 그분이야 후궁 나서실 일 없으시지만, 편지야 자유롭지 않습니까?”
제국의 모든 행정기관에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도찰원의 우도어사가 그의 친부였다.
우도어사의 입이 가진 파급력, 그것으로 인한 홍보력.
스산한 미소를 지으며 소년이 요리를 소복하게 담아냈다. 어장으로 맛을 낸 매콤 새콤한 사천의 명물, 어향육사(鱼香肉丝)가 완성되었다.
정확히는 흰 쌀밥 위에 담아냈으니 어향육사 덮밥이라도 해야 할 것이다.
태감에게 수북하게 퍼주고 자신도 한 그릇 퍼 올린 소년이 수저를 들었다.
“앞으로 꽤 바빠질 겁니다. 바쁜 나날엔 뜨거운 가배 한 잔이 도움되겠지요.”
“후후, 쪽잠 잘 시간도 없이 뛰어다녀야겠군.”
마치 머슴처럼 밥을 욱여넣는 태감을 보며 소년이 웃었다. 그 곱상한 외모에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은 파격적인 식사법이었다.
“뭐. 한철 고생 좀 하면 좋은 날도 있겠지요.”
* * *
홍엽비의 점심상을 차린 후의 소년은 평소처럼 느긋하게 쉴 수가 없었다. 아직 상호조차 정하지 않은 표자승과의 카페에 낼 신메뉴를 고민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소년은 만들어내고 말았다. 세상에 죄를 짖은 행위임을 알면서도 소년은 하고 말았다.
하지만 소년은 그런데도 분노에 가득 찬 그것을 만들어 내고야 말았다.
페이스트리.
중국어로 하자면 소취파피(酥脆派皮). 줄여서 소피(酥皮).
바로 버터가 아닌 돼지기름, 라드로 만든 바삭바삭한 그것을 만들어내고 만 것이다.
본래 페이스트리의 기원이 기원전 중국에서 반죽에 돈지(豚脂)를 싸서 말고 펴기를 반복해 결을 낸 다음, 고기와 채소를 넣어 굽거나 튀긴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어쩌면 원점으로의 회귀라고 주장해도 될 것이다.
하지만 소년은 이것을 더욱 개량해 달걀 물을 발라 노릇노릇하게 구워내 그대로 먹어도 고소하고 맛있는 것, 거기에 설탕 아이싱을 발라 맛을 낸 것, 온갖 제철 과일을 설탕에 조려 얹은 것 등등 그야말로 악마적인 개량을 더 하고 말았다.
이것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성인병에 걸려 괴로워할 것인가? 꿈많은 청순한 소녀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할 것인가?
하지만 소년은 그것이 죄라고 한다면 기꺼이 웃으며 지옥에 떨어질 것으로 생각했다.
마치 저주받은 마검을 세상에 내놓은 분노와 절규에 찬 대장장이의 심정으로 소년은 기꺼이 죄를 범했다.
한마디로 일축하자면, 한번 X 돼봐라, 이놈들아라고.
영문도 모른 채 병신이 되어 갖은 고생을 하며 산 소년의 세상에 대한 복수였다.
태감으로 하여금 그야말로 괴력난신의 소행이며 마귀의 준동이라 할 만하다고 평 받은 페이스트리는 소년을 기쁘게 했다. 입맛 까다로운 태감을 감동시켰으니 그 결과는 불보듯 뻔했다.
그렇게 기쁨에 차 절룩거리며 달음박질치는 소년을 누군가가 그윽한 목소리로 잡아 세웠다.
“허허, 뭐 좋은 일이라도 있나?”
“어이쿠, 장 태감님 아니십니까.”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소년에게 다가온 장 태감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면서도 쉬이 놔주지 않겠다는 듯이 소년의 앞을 가로막았다.
당혹스러워 하는 소년에게 친밀하게 어깨를 두드리며, 그가 말했다.
“자네 참 바쁘게 사는구먼, 어떻게 같은 후궁에 살면서 이리도 얼굴 한 번 보기가 힘든가?”
“죄송합니다, 태감님, 제가 한번 찾아됐어야 했는데…….”
“하하 아냐 아냐, 이 늙은이가 그냥 한번 해본 소리야. 젊은 친구가 바쁘게 사는 건 좋은 일이지. 이런 하릴없는 늙은이에게 시간을 내서쓰나.”
소년은 장 태감의 깊은 눈앞에서 조아리며 그의 시시콜콜한 잡담을 받아주었다. 여행은 잘 다녀 왔는지, 몸은 괜찮은지, 뭐 맛있는 건 있었는지. 오늘 날씨가 참 좋다는 등.
사담을 나누며 시간을 끈 장 태감이 기둥의 그늘로 살짝 숨어들었을 때 소년은 그가 무슨 말을 할지 깨달았다.
“혹시, 잠깐 시간 좀 되는가?”
분명,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소년은 마음을 단단히 다잡으며 활짝 웃었다.
“장 태감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없는 시간도 내야지요!”
“허허, 자네는 참, 사람이 좋아! 그럼 말 나온 김에 잠깐 가세나!”
“예, 그러지요.”
경쾌한 장 태감을 따라 북림궁으로 향한 수록 소년은 심장을 옥죄는 긴장감을 맛보았다.
어떻게 해야 가장 비굴하고 무가치하게 보일 수 있을까? 가능하면 눈앞의 사소한 이익에 목숨을 거는 간사한 소인배로 보일 수 있으면 좋겠다.
아니면 아주 비열하고 배알도 없으며 배신을 밥 먹듯이 하는 쓰레기라던가.
최소한 외적인 부분은 조금도 꾸밀 필요가 없다는 것이 소년의 장점이었다. 소년은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의 외모가 조금은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다.
“허허, 오늘 자네가 뵐 분이 어떤 분이신지 짐작이 가는가?”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하지만 태감님께서 주선해 주신 분이시니 분명 귀인이시겠지요.”
“귀인이시지, 귀인이시고 말고. 자네에게도 분명 도움이 될 거야.”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은 북림궁의 입구에 도착했다. 소년은 그 위엄있는 자태에 넋을 잃었다.
“어떤가? 조금 살풍경하지만 나름대로 멋이 있지?”
“아주 웅장하군요.”
“북림궁은 본래 전사한 병사들의 넋을 기리는 제사장의 역할을 하던 곳이네. 화사한 면은 없지만 보고 있으면 웅혼한 힘이 느껴지지 않는가?”
수백 개의 돌기둥이 나열한 그 공간은 걷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위축시키는 힘이 있었다.
전부 같은 높이, 같은 굵기의 기둥들은 위대한 금군의 절도있는 모습을 연상시켰다.
태감은 기둥 중 하나를 가리켜 그 표면을 짚었다.
“자, 보게. 기둥 하나하나에 적힌 이름을.”
“설마, 여기 있는 기둥이 전부?”
“그래. 지금껏 전사한 병사들의 이름일세. 수백 년 전의 것도 있어. 가장 앞에 있는 기둥에 적힌 이름은 이 제국이 처음 건국될 때 적힌 것들이라네. 오직 목숨 바쳐 나라를 지킨 제국의 병사들만이 이 군령주(軍靈柱)에 이름을 적힐 수 있지.”
장 태감의 말에 소년은 가슴에 탁 틀어박히는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느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란 말인가.
이 거대한 기둥에 이름 적힐 수 있다면.
“자, 가세. 그분께서 기다리시겠군.”
소년은 벅차오르는 감동이 일순간 사그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 대신가슴에 자리 잡은 것은 부담스러운 긴장감과 실수해서는 안 된다는 압박감 있었다.
“그분이라 하신다면.”
“그래, 이제 와 무엇을 숨기겠나. 저 북림궁에 기거하시는 분은 안양비 님이시라네.”
태감의 정치적 숙적이자 넘어야 할 최대의 벽을 두고 소년은 식은 땀이 등허리를 축축하게 적시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