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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73화 (73/314)

환관의 요리사 73화

돌아오기 전 마지막 날 소년은 약속대로 이삼과 장소에게 거나한 식사를 차려주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깐풍기와 통째로 구운 돼지갈비, 달콤한 술 등 어린 이들이 좋아할 만한 달콤짭짤한 요리를 넘치도록 차려줘 이삼과 장소는 배가 동그랗게 부풀어 오를 때까지 먹고 마신 후 세상모르고 잠들었다.

흥청망청 먹고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놀았으니 이튿날 피로에 시달릴법도 한데도 다들 말짱하게 일어나 씩씩하게 여장을 꾸리는 모습을 보면 과연 어려도 호위무사는 다르다 싶었다.

정신력의 차이일까. 단련의 차이일까.

대륙의 심장, 경사로 돌아와 평생을 살아온 궁으로 돌아왔을 때 소년은 의외로 그립다거나 기껍다는 기분이 조금도 들지 않아 놀랐다.

역시 이 복마전은 도저히 정 붙일만한 장소가 아닌 모양이다.

도착하자마자 씻고 먹고 잔 끝에 소년은 다음 날 남향궁으로 가기 전까지 그럭저럭 평소의 컨디션을 회복할 수 있었다.

고작 하루 푹 쉬었다고 상태가 회복되다니. 역시 젊음은 좋은 것이다.

빳빳하게 풀 먹인 궁중 예복을 차려입고 거추장스러운 대모갑 허리띠까지 차려입은 소년이 남양궁에 들어서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시녀가 공손히 그를 맞이했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궁에서 일하는 궁인들어느 하나 경거망동하는 이가 없었다.

태도는 지극히 공손하고 예를 차리고 있었지만, 소년은 그 너머에서 심장을 옥죄는 끔찍한 공포를 볼 수 있었다.

다들 본 거겠지. 목이 잘리는 선배들을. 장대에 목이 걸려 썩어 구더기가 필 때까지 내걸리고 시체는 들판에 버려져 들개가 뜯어 먹는 모습을.

좋은 충격요법이 되어준 모양이다.

소년은 드문드문 태감이 심어 넣은 이들이 잘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며 순간 자기혐오에 빠졌다.

자신의 손녀뻘인 아이들이 끔찍한 경험을 한 것을 두고 좋은 교훈이 되었다니, 후궁 물이 너무 든 것이 아닌가.

어느새 사람을 숫자나 가치로 따지게 되었음을 실감하며 소년은 마치 누군가에게 변명하는 헛기침을 했다. 목 안쪽 깊숙한 곳에서 혐오감이 삐져나올 듯했다.

하지만 개인의 사적인 감정이 업무에 지장을 줄 수는 없는 법. 속으로는 씁쓰름한 감정을 삼키면서도 겉으로는 웃으며 소년은 시녀들의 안내를 따랐다.

그 웃는 표정에 시녀들이 질겁을 했다는 것은 개의치 않기로 했다.

자고로 비와의, 그것도 후궁의 정점에 앉은 황후 후보자를 만나는 것은 상당한 기다림을 요구하는 일이다.

특히 직급이 낮으면 낮을수록 그 기다림의 시간은 길어지는데 소년의 관직인 상호라면 족히 두 시간은 기다려야 허가가 나올 지경이었다.

무의미한 일이었지만 관습이 그러하니 무시할 수도 없었다.

보디 고귀한 계급의 여식에게는 몸치장할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그것이 아무리 천한 자 앞이라도 할지라도.

하지만 오늘은 그런 관습을 깨고 홍엽비가 먼저 뛰듯이 들어왔다.

‘뛴다!’라고 기세 좋게 표현해 봤지만 실은 무거운 옷과 장신구에 빈약한 체력이 겹쳐 좋게 말해도 총총걸음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얼굴에 떠오른 그 열의 만큼은 전해졌다.

이제는 황실의 예가 완전히 몸에 익어 경건함 마저 느껴지는 자세로 인사를 올리면서도 소년은 고개를 슬쩍 들어 홍엽비가 걸친 옷을 찬찬히 살펴봤다.

왜소하고 가녀린 홍엽비에겐 어울리지 않는 것이 아닌가 싶은 겹겹이 쌓인 황금색과 붉은색의 비단에 각종 장신구, 틀어 올린 머리를 고정하는 것은 네 개의 금과 옥으로 만든 비녀였다.

몇 겹이나 되는 비단옷에 장신구를 전부 합하면 꽤나 무겁겠지. 그러나 저것만큼은 소년이 뭐라 할 수도 없었다. 엄연히 황실의 전통 예복이니 그것을 몸이 불편하다 하여 가볍게 입을 수는 없는 법.

홍엽비는 창백한 뺨에 발그레한 홍조를 띄우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래 보여도 이 사람은 현재 제국의 황후에 가장 가까운 절대권력의 총아였다.

문득 소년은 자신의 기억 속의 헌헌한 미장부인 황제와 그녀가 나란히 서면 아무리 좋게 봐주어도 부녀관계로나 보이지 연인이나 부부관계라고는 믿을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가 본 홍엽비는 귀엽기는 하지만 도저히 색기와 관련된 부분은 찾을 수 없었기에 소년은 황제의 성취향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이런 애로 선다고?

이거 개새끼구만.

홍엽비의 외모는 분명 아름다웠지만, 그것은 아직 피지 않은 소녀로서의 귀여움이지 사내의 성적 욕구를 자극하는 풍만함이나 색기 따위와는 조금도 연관이 없었다.

물론 세상에는 어릴수록 좋다, 소녀일수록 사랑스럽다고 하는 독특한 성취향의 소유자들도 존재했다.

다만 그런 성취향을 이해해주기에 소년은 지극히 보수적인 중년이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세계에는 당연히 존재해야 할 윤리와 규범이 미약한 편이었고 홍엽비는 자신의 육신보다 나이가 많은, 이 세계에선 엄연히 성인 대접을 받는 나이였다.

소년은 마음속으로 황제에게 물리적 거세가 필요하다고 강력하게 하늘에게 빌었으나 개인의 바람이 기적적으로 이루어진 사례는 늘 없었다.

소년은 속으로 구시렁대는 것을 삼키며 겸허하게 홍엽비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럼…….”

“예, 오늘부터 삼 일간 제가 홍엽비 님의 식사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아……!”

될 듯이 기뻐하는 홍엽비를 두고 소년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왜 이세계에는 마마나 전하 같은 호칭을 비에게는 허락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껄끄럽게 느껴졌다.

뭐, 세계가 다르면 문화도 다른 법이겠지. 소년은 기뻐하는 홍엽비에게 사흘간의 식단을 설명했다.

홍엽비의 구미를 당기는 맵싸한 음식과 속을 달래줄 부드러운 음식을 적절히 배치했다고 생각했지만 홍엽비는 생각보다 매운 음식의 가짓수가 적었는지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홍엽비는 조심스럽게 소년에게 제안했다.

“매운 음식을 한두 가지 더 늘려도 괜찮지 않을까요?”

눈가가 살짝 촉촉하게 젖어 들며 애원하듯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는 남녀노소를 불문하는 강력한 호소력이 있었다.

하지만 소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목소리로 불가함을 말했다.

“이 또한 홍엽비 님의 건강 상황을 생각하여 최대한 타협한 것입니다.”

“그래도…….”

“홍엽비 님.”

아직 변성기가 지날 나이가 아닌데도 쇠를 긁는 것처럼 쉰 소년의 목소리는 강렬하고 절도있게 홍엽비의 요청을 거절했다.

“설령 홍엽비 님이 제 무례함을 탓하시어 목을 베신다 한들 식단은 변경할 수 없습니다. 만약 제 언동이 불쾌하셨다면 이 천한 것의 목을 베어 주십시오. 하지만 식단만큼은 변경할 수 없습니다.”

이제는 자신의 목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소년의 단호함에 홍엽비는 그나마 매운 요리가 있다는 것을 마음의 위안으로 삼으며 소년의 제안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소년이 그나마 있는 매운요리도 빼버리겠다 할 것 같아서였다.

홍엽비가 내원에 마련된 정자에서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소년은 군기가 바싹 든 시녀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주방으로 향했다.

어쩐지 오늘 유난히도 기뻐 보였던 홍엽비의 표정이 조금 이해가 될 것도 같았다.

태감이 홍엽비의 시녀 증 상당수는 젊은이들로 배치한 것은 그녀가 난화비처럼 시녀들과 친밀한 관계가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그녀의 소심함과 시녀들에 대한 공포증을 이기는 계기가 되기를 바탔건만.

그에 앞선 시녀들의 정신교육이 너무 잘 먹힌 탓인지 누구하나 홍엽비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 만한 기개있는 시녀는 보이지 않았다.

외로웠을 테지.

이 넓은 궁에서 누구하나 자신의 편이 없으니.

소년은 계획을 앞당길 필요성을 느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우선은 요리가 먼저였다.

* * *

여름의 화사한 꽃들이 만발한 정원에서 기묘한 그늘을 드리운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햇살은 정원에 몽환적인 느낌을 더했다.

나뭇가지 사이를 오가며 숨바꼭질 하는듯한 바람이 여름의 무더위를 식혀주었기에 정원은 의외로 식사하기에 괜찮은 기온이었다.

동그란 식탁에 눈부시게 하얀 식탁보가 깔리고 옥을 깎아 만든 수저받침과 크고 작은 접시, 식초와 고추기름 등이 담긴 작은 종지 그릇이 차례로 올라왔다.

희고 깨끗한 백자에 푸른 무늬를 그려 넣어 보기만 해도 시원해지는 그릇이었는데 그릇의 무늬는 대부분 물고기나 연잎, 난초 같은 것들이었다.

오늘의 테이플 센터피스는 연두색 호접란이었다.

두근거림을 숨기지 못하고 눈을 반짝이는 홍엽비의 앞에 드디어 첫 번째 요리가 올라왔다.

“첫 번째 요리는 송이금탕(松栮金湯)입니다.”

보통 입맛을 다실 만한 첫 번째 요리 후에 탕을 내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오늘은 위장이 약한 홍엽비의 위장을 보호하기 위해 첫 번째로 탕을 내었다.

그리고 동시에 홍엽비에게 맵지 않은 음식도 충분히 맛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소년의 도전이기도 했다.

금탕이라는 이름이 어울리게 닭을 푸욱 고아내 진득한 황금빛의 탕은 보기만 해도 입술에 쩍쩍 달라붙을 것처럼 진했다.

여기에 가늘게 채를 썬 송이버섯을 넣어 고아냈으니 보기만 해도 위장이 비명을 지를 지경.

보고 있던 홍엽비도 입맛이 당기는지 마른침을 삼키며 소년이 탕을 뜨기를 기다렸다.

식사의 시작이니 너무 과하지 않게, 소년이 그릇을 올리자 홍엽비가 사기 숟가락을 들었다.

긴 시간 고아낸 닭의 맛이 농축되어 있는 진한 감칠맛에 입안이 아릴 지경이었다.

혀가 맛의 홍수를 다 감당하지 못하고 진동하는 듯했다.

그 농밀하고 비단처럼 부드러운 감촉, 혀 안에서 올올이 펼쳐지는 맛의 실타래를 따라가다 보면 향긋하고 나긋나긋한 버섯의 향기가 비강을 점령하고 뇌리로 파고들었다.

송이였다.

쫄깃쫄깃한 버섯을 씹을 때마다 처음에는 연하게, 그리고 점점 진하게 향기가 깊게 스며들었다.

깊은 산속 비가 내려 죽죽하게 젖은 흙, 소나무 뿌리 아래의 젖은 흙향기, 그 향기 아래에서 움트고 올라오는 소나무 향. 결코 과하지는 않았다.

그저 농밀한 감칠맛에 젖어 방황하는 혀에 따끔한 충고처럼, 따스한 조언처럼 잠시 맴돌다 잡지 못해 떠나가는 사람처럼 아릿하게 떠나갈뿐.

눈물 흘리기에는 너무 짧고 미련없이 떠나보내기엔 너무나도 아쉬운.

홍엽비가 침잠하는 동안 소년이 두번째 요리를 내왔다. 이번엔 그녀가 바라 마지않던 요리였다.

구수계(口水鷄).

직설적인 이름이었다. 그 이름만큼이나 호방한 요리이기도 했다. 그저삶은 닭에 고추기름과 생강 향을 낸간장, 참기름 약간으로 향을 낸 요리일 뿐이다.

하지만 이 간단한 요리는 사천요리의 자존심이었으며 사천요리의 정수를 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이름 그대로, 입에 침이 마르지 않는 요리였다.

산초와 고추의 향이 완벽하게 배어나온 고추기름에 생강의 산뜻한 향기가 살아 있는 간장소스, 그리고 향이 좋은 참기름이 톱니바퀴처럼 완벽하게 물려 있었다.

그것이 닭고기를 촉촉하게 적시고 있었으니 매운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염통이 달아오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홍엽비는 잠깐의 감동을 잊고 젓가락을 빼들었다.

맛있게 삶아 찬물에 담가 껍질을 응축시켰기 때문에 기름진 닭의 껍질은 놀라울 만큼 쫄깃했다.

그 아래로 야들야들한 속살은 산초와 고추의 매콤한 이중주에 춤을 췄고 그 너머에선 코끝을 참기름의 고소함이 간질거렸다.

다음 닭고기를 집던 그녀가 탄성을 내질렀다. 고기만으론 너무나도 아까운 귀한 양념을 위해 닭고기 아래에는 투명한 분피(粉皮)가 깔려 있었다.

분피란 녹말로 만든 얇은 두부껍질 모양의 묵으로 이중 고구마나 감자 녹말로 만든 것을 양분피(洋粉皮)라하며 한국인에게 친숙한 양장피의 재료가 된다.

얄팍하고 매끈매끈한 분피가 깔려있는 것을 보며 홍엽비는 기쁨의 비명을 질렀다. 이 맛 좋은 고추기름을 먹기엔 최적의 식재료였다.

쫄깃하고 감칠맛 나는 닭고기와 매끈하고 낭창낭창한 분피는 환상적인 조합이었다.

술을 좋아하는 이라면 분명 술 한잔이 없는 것에 복장이 뒤집혔으리라.

하지만 술을 즐기지 않아도 충분히 즐길 수 있었다.

“아…… 이거예요…… 이걸 원했어요.”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군요.”

“매일 먹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안 되겠지요?”

“건강이 좋은 사람이라면 매일 매운 음식을 즐겨도 괜찮겠지요.”

그 말엔 건강해진다면 매일 매운음식을 먹어도 좋다는 은유적인 허락이 깔려 있었다.

그 속뜻을 눈치첸 홍엽비는 말없이 자신의 건강한 모습을 상상했다.

건강한 자신. 과연 될 수 있을까?

도저히 상상되지 않았다. 고향에서도 그리 건강한 편이 아니었던 그녀는 이 차갑고 경직된 경사로와 완전히 망가졌다.

입에 맞지 않는 음식, 냉혹한 후궁의 정치, 불편한 시녀들. 건강을 망치기에는 최고의 조건이었다.

이미 포기해 버린 소망을 입에 담기 두려웠던 홍엽비는 그래도 아직 버리지 못한 미련을 담아 소년에게 말했다.

“건강해질…… 수 있을까요?”

“밥 잘 먹고 운동 열심히 하면 모든 인간은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만약 그러고도 건강해질 수 없다면 그것은 의원이나 신의 영역이다. 결국 요리로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소년은 최소한 무균수술실은 커녕 마취조차 서툰 이 세계의 의원보다는 차라리 자신이 낫다고 확실했다.

“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전 태감님의 요리사입니다. 그분께 말씀해 주시면 언제든지, 어느 때라도 달려오겠습니다.”

그것은 정치적인 거래였다. 소심하나 우둔하지는 않은 그녀가 그 말뜻의 속내를 알아차리지 못할 리는 없었다.

자신의 건강과 즐거움을 대가로 태감의 정치적 지지자가 되라는 말에 홍엽비는 고민했다.

최소한 다음 요리가 나오기 전까지 그녀는 아무리 달콤한 대가라도 외가에 정치적 압박이 갈 수도 있는 제안은 거절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고뇌하는 홍엽비를 보며 소년은 홍엽비가 볼 수 없는 각도로 미소 지었다. 입이 귀밑까지 찢어지는 그 미소는 그야말로 흉계를 꾸미는 악마의 미소였다.

꿀에 절인 사과처럼 달콤하고 영원한 사랑의 약속처럼 배덕적인 계략.

그리고 인간은 악마의 계략에 결국 영혼을 빼앗기게 된다.

소년이 들고 온 것은 커다란 질그릇이었다. 두툼한 장갑을 끼고 있는것을 보아 방금 전까지 불 위에 올라가 있었던 것이었다.

“야균육립시유판(野菌肉粒豉油炒飯) 입니다.”

쫄깃한 식감 좋은 야생 버섯과 사천식 향장(香腸, 소시지)를 굵직하게 다져 올린 솥 밥이었다. 뚜껑을 열자마자 가둬져 있던 향기는 폭발적으로 정자 안을 잠식했고 홍엽비의 흔들리는 이성을 본능이라는 강판에 그대로 갈아버렸다.

“그, 그것은…….”

“아, 잠시만요. 아직 마무리 공정이 남아 있습니다.”

소년이 들어 올린 것은 작은 종지 그릇에 담긴 간장이었다. 짠맛이 덜하고 달콤하고 향긋한 노추(老抽)에 산초 등의 향신료를 우려낸 것.

그것을 밥의 둘레에 흘려 넣자 아직 뜨거운 솥에서 치이이익 소리가 나며 간장이 타들어가는 극상의 향기가 스며 나왔다.

그것을 잘 비벼줘서 소복하게 퍼내자 홍엽비에게는 더 이상 이성적인 판단력이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시녀들 마저 죽음의 공포라는 올가미를 벗어던지고 달려들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홍엽비 님.”

매정하게 접시를 탁자에 내려놓지 않는 소년에게 홍엽비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홍엽비의 앞에 밥공기가 오르고 숟가락을 든 홍엽비는 세상 모든 굴레를 벗어던진 자유로움 속에서 그것을 퍼 올렸다.

짭조름한 향장을 잘근잘근 씹다 보면 향장과는 다른 쫄깃한 야생 버섯의 향긋함이 혀 위로 번졌고 그 위를 간장의 감칠맛을 한껏 빨아들인 밥이 볼이 미어지도록 채워졌다.

군데군데 느껴지는 바삭함은 솥에 눌어붙은 누룽지였다. 일부러 솜씨 좋게 누룽지를 남긴 소년이 그것들을 밥에 섞어준 것이었다.

맵지 않아도 좋았다. 태생이 입이 짧고 소식하는 홍엽비였지만 이런요리라면 얼마든지 배부르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배가 터지도록 먹어도 좋으리라.

그 순간 그 자리에 있는 것은 그저 배고픈 한 명의 소녀일 뿐이었다.

입에 맞지 않는 요리, 과도한 중압감에 짓눌려 먹는 둥 마는 둥하며 지나갔던 식사 시간. 몸이 마르고 기력이 떨어질수록 그녀가 입에 대는 식사량은 줄어만 갔다.

이렇게 배부르게 먹어본 것이 얼마만이었을까. 이렇게 자유롭게,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먹어본 것이.

풍요 속의 기아에서 해방된 그녀가 밥공기를 내밀었다.

“한 그릇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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