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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68화 (68/314)

환관의 요리사 68화

며칠간은 앞으로 다가올 두근두근 집단린치를 기다리는 소년에게는 상당히 심심한 시간이었다.

일부러 기세 좋게 외궁의 요리사 나부랭이들 근처를 어슬렁거려 보았는데도 외궁의 요리사들은 그를 죽일 것처럼 노려보기는 했지만, 섣불리 손을 드는 놈은 없었다.

불알 두 쪽 달고 있는 놈들이 이토록 배짱이 없는 것을 보니 나라의 장래가 어두운 듯했다.

태감의 요리를 하는 것 또한 음식이 점점 검소해졌기 때문에 소년은 장소와 이삼이 마치 미션 임파서블을 연상시키는 은밀 작전을 펼치며 미숫가루와 육포 따위의 보존식을 태감의 천막으로 나르는 것을 보며 나른하게 늘어져 있는 것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그렇기에 소년은 자신에게 할애된 대부분의 시간을 대자연과 하나 되어 우주의 진리를 깨닫는 참선 활동에 활용할 수 있었다.

비록 대자연의 진리를 깨달아 해탈하지는 못했지만, 낮의 대부분은 그늘에 돗자리를 펴고 드러누워 있었던 덕분에 소년은 이 지방이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건조한 곳임을 알게 되었다.

도저히 비가 내릴 만한 하늘은 아니었다. 하늘은 여전히 구름 한 점없이 청명했고 건조한 공기를 타고 날아오른 새들은 높이 날고 있었다.

고양이가 세수를 하는 것도 아니었고, 이렇다 비가 올 만한 증거를 찾지 못한 소년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황제께서 거하시는 용궁이 있는 방향을 보았다.

남들이 보았다면 그 시선만으로도 충분히 불충하다며 심문을 당할 만한 표정을 짓던 소년은 이내 그 작은 관심마저 털어내고는 다시 돗자리에 누워 혹시 자신이 놓친다른 징조는 없는지 고민했다.

하지만 그 어떤 민간신앙에 의거한 비가 올 만한 징조도 찾을 수 없었고 공기는 여전히 건조했다.

도저히 비가 올 하늘이 아니다. 하지만 오늘, 비는 온다.

전국에, 전 국토에 비가 내린다.

모두가 그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표정으로 경건하게 제를 올릴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소년은 마치 외눈박이 세계에 표류 중인 두눈박이가 된 기분을 느꼈다.

비는 오는가.

서서히 나인들이 뒤로 물러나는 모습이 보였다. 경건하게 치르는 제사를 앞두고 부정한 이들은 모조리 물러나야 한다.

그것은 여인들은 물론 거세한 환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난 생에서였다면 차별적이라고 난리가 났겠지만, 시대가 시대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소년은 귀찮은 제사에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기껍게 느끼며 돗자리를 정리했다.

지금쯤 고명하신 무관 나리들, 종일 책상 앞에서 경전이나 외우셨을 문관 나리들은 돌바닥에 꿇어앉아있을 테지.

그에 비해 자신들은 멀찍이 떨어져서 제사가 끝나고 금식령이 해지되면 무엇을 먹을 지나 고민하면 되니이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가.

물론 금식령이 끝났다고 아무 음식이나 양껏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제사를 끝낸 후에는 한동안 음식을 대지 못해 쪼그라든 위를 부드럽게 풀어주기 위해 죽을 먹는 것이 관례였다.

황제에게도 돼지고기를 먹인 소년이었지만 이런 합리적인 관례라면 따르지 못할 것도 없었다.

물론 태감이야 틈틈이 먹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한동안 기름진 것을 끊었던 사람 앞에 동파육 따위를 내놓으면 대번에 설사할 것이 뻔했다.

부드럽고 뭉근하게 끓인 죽만이 굶주린 위장을 따스하게 채워줄 수 있으리라.

소년은 고민 끝에 여덟 가지 곡물을 끓여 만든 랍팔죽(腊八节)을 끓이 기로 했다.

맛도 좋을 뿐만 아니라 경사스러움을 죽하하기에도 어울리는 죽이니 제를 올리고 난 후에 먹기에 제격이었다.

소년의 의견을 태감은 콧방귀를 뀌며 거절했다. 마치 들을 가치도 없는 소리였다는 듯이.

“말도 안 되는 소리. 가뜩이나 죽을 먹는 것도 마땅치 않은데 여덟가지 곡물 죽? 고기다. 고기를 넣어죽을 끓여라. 마음 같아서는 새끼돼지 통구이 정도는 먹어야 성에 차겠지마는, 이것도 많이 양보한 거야.”

태감은 뻔뻔한 표정으로 당연하다는 듯이 고기를 요구했다. 그 결연한 의지가 전해져 오는 듯해 소년은 이번엔 순순히 태감의 요망에 응하기로 했다.

“뭐 그렇게 하지요. 어려운 일도 아니니.”

“네가 웬일로 이렇게 순순히 내 말을 따르느냐?”

“뭐, 저도 사실 좀 든든한 죽이 먹고 싶기는 했습니다. 온종일 굶는건 오랜만이라 꽤 힘들군요.”

구더기로서 후궁의 밑바닥을 길 때야 밥 먹듯이 굶었으니 굶주림을 참는 것은 익숙하다고 생각했지만 한등안 풍족하게 잘 먹어서인지 오랜만에 경험하는 굶주림은 꽤 힘들었다.

굶주림을 벗어난 것이 얼마나 되었다고 이리도 간사한 것인지. 사람의 적응력을 놀랍다고 생각하며 소년은 자조적인 미소로 스스로를 꾸짖었다.

그런 소년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뚱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태감은 어느 순간 기이하게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짜증스럽게 했던 공복과 약간의 피로, 지루함 따위를 모조리 벗어버린 그는 그 순간 그런 사바세계의 너절한 것들은 침범할 수 없는 신성한 존재라도 된 듯이 보였다.

그것은 그저 소년의 개인적인 감정이었을까?

어떠한 징조도 없이 태감은 그렇게 변화했다.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아니, 변화했다는 표현은 이 현상에 어울리는 단어일까? 하지만 그럴싸하게 지금 태감을 치장할 만한 다른 단어를 생각해낼 만큼 소년은 학식이 풍부하지 않았다.

그저 표정이 없어지고 자리에서 일어선 것뿐인데 태감은 마치 무기질 적이고 신성한 존재가 된 듯했다.

무기질적이다는 것과 신성하다.

양립하기에는 조금 미묘한 단어들이었지만 소년은 달리 표현할 방도가 없었다.

차라리 무감정해 보인다고 할 걸 그랬나? 하지만 무감정하다고 하기엔 태감은 너무나도 ‘무기질’적이었다.

아름다웠다. 생기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그 표정, 대리석을 깎아내 만든 것만 같은 그 미모에 소년은 눈길을 빼앗겼다.

마치 얼어붙은 것 같은 태감은 인세에 존재할 수 있는 최고의 미술작품이나 다름없었다.

사람의 손으로 빚었다고는 믿을 수 없는 천상의 조각상이 말없이 천막을 나섰다.

이대로 속세를 벗어나는 것은 아닐까. 소년이 무어라 말을 걸기도 전에 위정이 조용히 태감의 가면을 집어 들고는 뒤를 따라나서며 소년에게 말했다.

“잠깐 일을 보고 오마.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테니 그 전에 식사를 준비해 두어라.”

“예? 아…… 예. 알겠습니다.”

방금 전 태감의 변모에 당황한 것은 소년 한 사람뿐이었다. 장소와 이삼은 익숙하다는 듯이 대수롭지 않게 행동해 소년으로 하여금 참을 수 없는 위화감을 느끼게 했다.

이젠 아주 대놓고 광고를 하는구만?

소년은 황당하다는 심정이 되었다.

이렇게 대놓고 여기 비밀이 있소 하고 광고하는 것은 눈치껏 알아차리라는 것일까? 소년은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한숨을 토했다.

자신 만큼이나 태감 역시 복잡한 혈연에 묶여 있다는 사실은 이미 전부터 짐작하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리 용모가 빼어나다 한들 후궁의 이인자 자리를 꿰차지는 못했으리라.

분명 그의 높은 자리만큼이나 무거운 혈연의 사슬이 그의 발목을 잡고 있을 것이다.

도망칠 수도, 벗어던질 수도 없는 핏줄의 짐. 그것도 가장 고귀한 핏줄과 연관이 있는 것이겠지.

고민 끝에 소년은.

“죽이나 끓여둬야겠다.”

태감의 비밀을 무시하기로 했다.

상사의 사적인 비밀이란 묻어두는것이 현명한 선택인 법이다.

우연히 발견한 상사가 대머리라는 비밀이라던가, 지나가던 길에 상사가 부인이 아닌 다른 여성과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사건이라던가.

알아봤자 괜히 껄끄러워지기만 하는 비밀은 묻어두는 것이 바로 사회인의 처세술인 법이다.

소년이 태연하게 죽을 끓일 준비를 하자 오히려 어색해진 것은 딴청을 피우던 장소와 이삼이었다.

짧은 시간 시선을 마주치며 무언의 대화를 나눈 끝에 평소에 이삼에게 신세 진 것이 좀 있던 장소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소년에게 물었다.

“저……안 물어보세요?”

“뭘 말입니까?”

이제 소년의 목소리는 시큰둥하기까지 했다. 그 모습에 장소는 뒷덜미를 축축하게 적시며 다시 물었다.

“그…… 아까 태감님 나가실 때…….”

“예? 뭐 화장실이라도 가셨나 보죠.”

“에…….”

“아무리 직장 상사와 부하 관계라도 사생활은 존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극히 정론으로 받아치는 소년의 말에 민망해하던 장소는 결국 우물쭈물하다 화제를 돌렸다. 서로가 편한 주제였다.

“어떤 죽을 끓이시는 거예요?”

“아아, 복건성의 명물인 묘자죽(猫仔粥) 입니다.”

“네? 묘자죽이요?”

직역하면 새끼고양이 죽이라는 뜻이니 그 이름을 들은 장소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그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잠깐 더 놀려줄까 했지만 벌써 눈물이 그렁그렁한 장소의 눈을 본 소년은 정중하게 대답해 장소의 오해를 풀어주었다.

“네, 바로 고양이 고기로 끓이는 죽입니다.”

이성을 배신하고 본능적으로 입이 못된 말을 토해냈다. 하여간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을 텐데 어찜 이리도 철이 안 드는지.

소년은 바들바들 떠는 장소를 어찌 달래줘야 할지 고민하며 황급히 변명을 시작했다.

“농담이에요 농담. 세상에 어느 누가 고양이 고기를 먹겠습니까.”

사실 잘 먹지만. 소년은 용호냉채라는 고양이 고기와 뱀고기로 만드는 냉채 요리를 만들 줄 안다는 사실을 죽을 때까지 비밀로 하기로 했다.

한참 후에야 눈물방울을 소매로 훔친 장소 앞에서 소년은 식은 땀을 닦으며 묘자죽의 어원에 관해 설명했다.

“흠흠, 오래전 옛날에 복건성에 실력이 뛰어난 요리사가 한 명 살았다고 하더군요.

어느 날 한 집에 가서 혼례피로연 요리를 만들게 되었는데 한참 일하고 나서야 애를 금방 낳고 산육기를 지내는 아내가 아직도 식사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난 겁니다.

하는 수 없이 부랴부랴 쌀밥 반그릇과 요리하다가 남은 생선, 육류, 버섯, 채소 등을 가마에 넣고 물을 더해 큰불에 익히는데 주인이 들어와 또 무슨 요리를 하느냐고 묻자 요리가 바빠 경황이 없어 ‘새끼고양이에게 줄 죽을 만듭니다’라고 대답한 겁니다.

그런데 주인이 보아하니 죽이 새우며 낙지며 닭고기 돼지고기 온갖 채소가 들어가 보기에도 고급스럽고 푸짐해 보이는 겁니다.

주인이 맛을 보며 ‘아니, 당신네 고양이는 이런 고급스러운 죽을 먹는단 말입니까?’하며 자신에게도 그 죽을 한 그릇 달라 했다는군요.”

소년은 잠시 식은 차로 목을 축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날 결혼식 피로연에 참가한 손님들은 이 묘자죽을 맛보고 나서 ‘육류와 채소도 있고 맛도 좋고 색깔도 산뜻하고 너무 상큼하다’ 고 하나같이 입을 모아 칭찬을 했다합니다. 그리고 그 요리사는 자신이 개발한 죽으로 큰돈을 벌었고 묘자죽이라는 이름의 죽은 아직도 복건성 남부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고 합니다.”

소년이 이야기를 끝맺자 소맷자락으로 눈물방울을 훔친 장소가 코를 훌쩍거리며 되물었다.

“그럼 고양이 고기는 안 쓰는 거죠?”

소년은 되묻는 장소의 모습이 애교있고 귀여워 자신도 모르게 조금 더 그를 놀려주고 싶어졌다.

이런 손주가 있으면 얼마나 살맛이날까. 가정을 꾸리지도 않은 놈이 과분한 복을 원한다고 생각하며 소년은 진지하게 고양이 고기 이야기는 농담이었다고 이야기해 장소의 기분을 풀어주었다.

“아무튼 죽을 끓일 준비를 해야겠군요.”

묘자죽은 고두밥을 미리 준비해 두었다가 손님이 오면 즉시 준비해 둔 육수와 밥을 끓여 만드는 죽이었다.

육수는 보통 뽀얀 돼지 사골을 쓰는데 돼지 사골로 죽을 끓이면 진득하니 찰기가 있고 맛이 구수하고 부드러워 먹기에 훌륭하다.

거기에 속 재료로는 보통 돼지고기와 닭고기, 각종 채소에 신선한 새우와 낙지와 생선을 쓰는 것이 보통인데 이는 바다가 밀접한 복건성이기에 가능한 요리였다.

얼마 전 황제 페하의 상을 꾸릴때야 돈을 아끼지 않고 파발마들을 보내 최고급 해산물을 공수해 왔다지만 지금은 그럴 수도 없는 상황.

소년은 어쩔 수 없이 황제의 상을 차릴 때 꿍쳐두었던 건해산물을 꺼내었다.

크고 훌륭한 말린 전복(鮑魚)에 돌기가 선명하고 검은 해삼과 말린 민어의 부레(魚肝), 그리고 말린 가리비의 패주(干貝)까지, 그야말로 황금이 줄줄이 쏟아져 나오는 광경에 장소와 이삼은 현기증을 느꼈다.

궁에 들어오기 전까지 궁핍한 떠돌이 생활을 했던 이삼은 차치하더라도 귀주성에서 꽤나 큰 상가를 일군묘족의 아들인 장소조차도 깜짝 놀랄 만한 양의 건해산물이었다.

보통 이 정도 품질의 건해산물이라면 같은 무게의 황금으로 값을 치르는 것을 생각하면 상 앞에 쌓인 해산물의 값어치는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어…… 이걸 다 쓰시게요?”

“예. 신선한 해물을 구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죠.”

대수롭지 않게 미지근한 물에 건해산물을 뭉텅이로 집어넣는 소년을 보며 둘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전율을 느꼈다.

둘이 천천히 불어나는 가리비 관자 와 해삼을 관찰하는 동안 소년은 닭과 돼지 뼈로 육수를 냈다. 이것들을 합친 다음 여기에 건해산물을 불린 육수를 더하여 육수를 진하게 할 생각이었다.

불 앞에서 뻘뻘 땀을 흘리며 육수를 고아내던 소년이 문득 굽은 허리를 두드리며 힘겹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하늘은 떠다니는 구름을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푸르렀고 공기는 건조했다.

여전히, 하늘은 물기 한 방울 없이 투명했다.

“오늘은 용께서 영 컨디션이 안 좋으신가 보군.”

맹목적인 믿음이 자연현상과 어떠한 관계도 없다는 것은 이미 증명된 사실과 다름이 없었다.

물론 현실에서도 진실한 기도가 어떠한 초자연적인 신비한 힘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라 굳건한 믿음을 가지는 이들은 있었다.

한때 그런 부류의 사람들에게 집요하게 시달린 경험이 있는 소년은 이 비이성적이고 무가치한 행위를 비웃었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전생과는 달리 미성숙한 문명과 지식수준을 가진 이 세계에서도 현실과 같은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불공평한 일이었다.

소년은 시대상황을 고려하여 더욱 관용적이고 관대한 마음을 가지기로했다.

무지몽매한 이들에게 어려움이 닥쳤을 때 그들이 매달릴 수 있는 것은 신밖에 없을 것이다.

다른 여러 구제조치가 마련되어 있는 현대에서조차 신의 이름을 부르짖는 이들이 부지기수인데 이런 시대였다면 그 처절함은 말할 수 없으리라.

그런 소년의 마음에 화답한 것인지 칠성단 너머에서 가슴을 뛰게 하는 북소리와 울림이 깊은 골적(骨笛)의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제사가 끝났음을 하늘에 알리는 소리였으나 하늘은 애타는 하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하늘에선 물 한 방울 떨어질 기미가 없었다.

지난날 나인들이 애쓴 성의를 봐서라도 소나기라도 한번 내려줄 법도 한데, 소년은 허탈함을 금치 못했다.

“거 참 야박하기도 하지. 이 정도 성의를 보였으면 비 내리는 시늉이라도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소년은 김이 식었다는 듯이 입술을 비죽이며 뒤돌아 육수를 끓이는 솥앞으로 갔다.

그렇기에 소년은 점차 동녘 하늘너머에서 밀려오는 시커먼 짐승을 보지 못했다.

끝없이 체구를 부풀리며 하늘을 질주하는 거대한 짐승은 천둥과 번개라는 송곳니를 번득이고 있었다.

이윽고 거대한 짐승이 포효하는 소리가 천하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다시 태어나 처음 들어보는 어마어마한 폭음에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소년은 한참 후에야 그것이 천둥소리였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정말로 천둥이었을까? 사실 용이 울부짖는 소리 아니었을까? 그 웅장한 소리는 소년의 귓바퀴에 선명하게 감돌아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소년은 더 이상 불 앞을 지키지 못하고 서둘러 천막 밖으로 나섰다.

처음엔 한두 방울 떨어지던 빗방울은 이내 천막 안까지 들이닥칠 만큼씨알 굵은 장대비가 되어 쏟아져 내렸다.

마치 자잘한 곡식 알갱이를 탈곡하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눈앞의 시야는 완전히 물방울의 장막에 가로 막혔다.

산맥의 등허리에 걸린 먹구름은 끝없이 비를 쏟아내었고 그 기세는 세상을 자욱한 물안개로 집어삼키겠다는 자연의 열망마저 느껴졌다.

소년은 더 이상 눈앞의 현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엄연한 결과 앞에서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소인배나 할 법한 일이었다.

아마 조금 더 냉철한 사람 같았으면 단 한 번의 결과 만으론 그것이 우연인지 아닌지를 입증할 수 없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년은 그러지 않기로 했다.

지금 눈앞에 비가 내리고 있는데, 참인지 거짓인지가 무엇이 중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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