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63화
기나긴 여정도 어느새 끝이 성큼 다가왔다. 앞으로 하루쯤 더 가면 칠성단이 보일 거라는 말에 소년은 깊은숨을 내쉬었다.
나름 편한 여행이었다고 생각했지만 여행은 여행이었는지 벌써부터 삭신이 쑤셔왔다.
분명 여정이 끝나면 몸살로 앓아누울 테지. 긴 여정에서 얻은 소중한 추억보다 여행길에 쌓인 피로를 먼저 걱정하게 되는 것은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다.
하지만 앞으로 일주일 정도는 땅에 발붙이고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소년은 자신이 후궁에 있을 자신의 방을 그리워한다는 것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느새 그 살벌하기 그지없는 공간에서도 정붙일 곳이 생겼다는 것에 인간의 적응력에 한계란 없다는 사실에 소년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소년이 그 뜨뜻미지근한 감정에 잠겨 있을 때 태감은 그야말로 종말을 눈앞에 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항거할 수 없는 재해를 눈앞에 두고 결사항전할 결연한 의지라던가, 죽음 앞에서 초탈함보다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당장 눈앞의 잇속을 챙기는 것에 급급한 탐관오리의 절박함이 엿보였다.
그것을 보다 못한 소년은 한숨을 내쉬며 손톱을 물어뜯는 태감을 보며 한소리 했다.
“거 참, 고작 하루 세끼 좀 굶는다고 죽기라도 합니까?”
신체 건강한 사람이라면 하루쯤 굶는다고 건강에 이상이 생기지는 않는다.
오히려 한 끼 정도는 주기적으로 굶어주는 편이 장 건강에 좋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 마당에, 소년은 태감의 호들갑이 그가 너무 과민반응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뭐라? 고작 하루?!”
그리고 소년의 여유는 태감의 광증에 불을 붙였다. 태감은 애절함 마저 배어나오는 표정으로 눈꼬리에 눈물방울을 매달고 고함을 질렀다.
“무려 한 끼도 아니고 하루, 세끼나 굶는 것이다. 거기에 굶는 것은 하루지만 그 전날 역시 미음만으로 식사를 해결해야 하니 실질적으로는 이틀을 내리 굶는 것이 아니냐!”
“뭔 소립니까, 미음이든 뭐든 먹었으면 먹은 거지, 먹은 거지만 굶었다가 뭔 개소립니까?”
“먹었지만 먹은 것 같지 않단 말이다!”
하긴, 평소에도 남들의 세배는 더먹는 태감에게 미음 한 그릇은 먹지 않는 것과 같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밥 먹듯이 굶어왔던 소년에겐 귀한 집 자식의 투정일 뿐이었다.
그래도 어쩌겠나, 미우나 고우나 내 주인이지. 소년은 벌써 축 늘어진 태감의 어깨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어느새 눈물이 글썽글썽한 태감을 위해 소년은 황실의 법도를 무시하기로 했다.
“그럼 까짓거 먹을 것 좀 꿍쳐둡시다. 이 삼 일 차에 잔뜩 준비해두고 몰래 꿍쳐뒀다 먹으면 될 거 아닙니까.”
태감은 마치 캄캄한 밤길을 걷다 등불을 발견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보다는 죄를 대신 뒤집어써 주겠다는 말을 들은 죄수 같은 표정에 가까웠다.
마치 눈앞에 나타난 작은 구원의 희망을 잡으려는 것처럼 손을 내민태감에게, 소년은 어린 양을 구원하는 구원자가 된 심정으로 그 곱고 가는 손을 마주 잡았다.
이런 표정을 지으니 차마 굶길 수도 없겠구먼. 평소에는 능글능글하게만 넘기는 인간이 약한 모습을 보이니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뭐, 여름철이니 장담은 못하겠는데, 저번에 했던 것처럼 찰밥을 연잎에 싸지어 서늘한 곳에 보관하면 이틀 정도는 버틸 겁니다. 찬밥을 먹게 될 텐데 괜찮겠습니까?”
“찬밥을 먹는 거야 상관없다만, 정말 괜찮겠느냐? 만약 걸린다면 보통 망신이 아닐 텐데…….”
“그걸 걱정하시면 드시질 말아야죠.”
“그건 그렇다만…….”
태감은 혹시나 소년이 그럼 먹지 말라고 윽박 지를까 봐 안절부절못했다. 그 한심한 꼴을 보며 연거푸 한숨만을 내쉬던 소년은 다시 머리를 굴렸다.
생각해 보니 찰밥은 좋은 안이 아니었던 것 같다. 아무리 연잎에 방부효과가 있다고 해도 더운 여름에 이틀이나 밖에 내두기에는 믿음직하지 못하다. 좀 더 수분기가 없는, 바싹 마른 음식이어야 할 텐데…….
“그러고 보니, 금식 기간 중에도 아주 완전히 먹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죠?”
“음? 그래, 그렇지. 정확하게는 음식으로 치지 않는 것들은 먹을 수 있다. 예를 들자면 꿀이나 차, 짐승의 젖 같은 것들이 그렇지.”
“꿀이나 차라…….”
고민하던 소년은 밖으로 나가 마차에 실린 짐을 뒤져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내왔다.
호기심에 태감이 주머니를 묶은 끈을 끄르자 안에 봉해져 있던 그윽한 곡물 향기가 물씬 새어나왔다.
“미숫가루구나.”
“예, 떠나기 전에 콩가루, 곡물가루 이것저것 섞어온 겁니다.”
태감은 검지로 가루를 콕 찍어 혀위에 올렸다. 혀 위에서 사르르 풀어지는 풍요로운 곡물의 향기와 구수한 맛, 그 아래로는 살짝 모자란듯하게 섞은 단맛도 함유되어 있었다.
확실히 미숫가루라면 멀건 차만 마시는 것보다는 훨씬 더 든든하리라.
거기에 소년은 태감의 상상에서 한 발 더 나갔다.
“그리고 젖 역시 허용된다고 하셨으니 우유를 구해다 버터를 만들어 수유차(酥油茶)를 끓이면 훨씬 더 고소하고 속도 든든할 겁니다.”
“그렇지, 짭짤하고 고소한 버터를 더한다면 맛있을 테지.”
여기까지라면 그래도 살짝 어긋나기는 했지만 칠보단식의 규율을 완전히 어겼다 할 정도는 아니었다.
소년은 태감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의견을 피력했다.
“그리고 괜찮으시다면, 저번에 드셨던 낭(攮) 을 넉넉하게 구워 보관해두었다가 차와 함께 드시면 한 끼 식사로 손색이 없으실 겁니다.”
“낭? 낭이라?”
“예, 낭은 거칠고 무더운 사막 민족이 주식으로 삼는 빵입니다. 그런 거친 곳에서 사는 이들이 먹는 음식이 으레 그렇듯이 보관하기에 용이하고 한번 먹으면 배가 쉬이 꺼지질 않지요. 이 근방은 여름치고는 그리덥지 않고 습도도 건조한 편이니 낭을 구워두면 오래 보관할 수 있을 겁니다.”
소년의 조심스러운 의견에 태감이 손뼉을 쳤다.
“네 말이 옳다. 그 빵과 구수한 미숫가루라면 아쉽기는 해도 하루쯤 속을 달래기에는 충분하겠지. 아니면 낭을 찢어 꿀에 찍어 먹어보면 어떨까?”
“그럼 확실히 풍미가 살겠지요. 한데,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비록 정식 국교로 지정된 것은 아니었지만 제국에서 금룡신앙은 절대적이었다.
황제는 나라의 지배자인 동시에 용의 피를 이어받은 살아 있는 신이자 제국인들의 신앙의 주인이기도 했다.
그런 황제가 솔선하여 금식하는 신성한 고행에 그의 심복이라는 태감이 멋대로 배를 채워도 괜찮은 걸까?
소년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태감은 콧방귀를 뀌었다.
“네가 보기엔 이 행위가 그렇게 성스러운 고행인 것 같더냐? 칠보절식이니 뭐니 거창한 이름표를 달고 거들먹거리지만 결국은 오랜 관습이 굳어진 것뿐이다. 황제 폐하께서도 사실은 귀찮아하실걸?”
“용의 아들께서 귀찮으시다면 폐기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용의 아들이시니 그만둘 수가 없지. 그분은 민중의 지배자인 동시에 민중의 노예이기도 하다. 민심에 휘둘리는 것은 결국 지배자, 위정자의 숙명이기도 하지.”
“민중의 눈을 의식하여 굳이 하기 싫은 일을 하신단 말씀입니까?”
현대에 영 그럴싸한 정치인을 보지 못하고 산 소년에게 태감의 말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런 소년의 태도가 오히려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태감은 코웃음 쳤다.
“민중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어찌 성군이 될 수 있겠느냐? 민중을 두려워하지 않고 민중을 억압하는 자를 보통 폭군, 암군이라고 하지. 그런 이들이 어찌 광대한 제국을 지배하며 대의로 나라를 이끌 수 있겠느냐?”
그 말은 소년은 감탄하게 했지만 동시에 소년의 가슴에 박힌 가시처럼 남아 있던 의문을 떠올리게 했다.
차갑고 음습한 후궁이라는 장소를 만들어 비들을 상잔하게 하는 것 또한 그 일환입니까?
태감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것이 대의다. 보기 좋게 포장해보았자 대의란 결국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지. 그렇기에 언제나 절대다수인 민중을 위하는 폐하께선 한없이 잔인하실 수밖에.”
태감의 말에 소년은 한참이나 입을 우물거렸다. 하고 싶은 말, 내뱉고 싶은 욕설을 모조리 삼키고 고르고 고른 끝에 소년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래도 전,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제가 원체 소인배에 모자란 놈이라 그런지 몰라도. 누군가를 희생시키면서까지 이루어야 할 그 대의란 것이 그렇게 대단한 것인지. 가장 아름다울 때의 여인들을 그렇게 희생시킬 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까?”
결국 얼마나 나이를 먹든 간에, 소년은 어린아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소년은 태감을 이해하면서도 그의 사상과 융화되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태감 역시 굳이 그것을 원치 않았기에 소년을 설득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태감은 낮은 목소리로 소년에게 속삭였다.
“그러나 믿어 의심치 마라. 우리가 누구에게 충성을 바쳐야 하는지를.”
태감의 말에 소년은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의를 이심하고 정의를 의심할지라도. 그는 태감의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태감이 충성을 바치는 대상이라면, 소년 역시 충성을 바칠것이다.
그것이 소년의 맹세였다.
“예, 명심하지요.”
소년의 굳은 약속을 받은 태감은 경직되었던 표정을 풀었다. 그러고는 다시 평소의 늘어진 표정으로 돌아와 어떻게 해야 미숫가루를 맛있게 먹을 수 있을지를 궁리하기 시작했다.
* * *
도착한 당일은 종일 부산스러웠다.
거대한 제단을 앞에 두고 널찍한 공터엔 지금까지의 여정에서 폈던 간이천막과는 차원이 다른 거대한 조립식 건물들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저럴 거면 차라리 미리 장원 하나를 세워 두는 편이 합리적이지 않나 싶을 정도로.
깃대에는 거대한 금룡기가 올라갔고 황제 폐하가 오르실 거대한 제단을 밝힐 화로에는 벌써 장작이 그득하게 채워졌다.
연회를 준비하는 궁인들이 고기를 썰고 불을 피우느라 야단이었고 한쪽에선 기마병들이 그동안 고생한 말들의 여물통에 콩이 듬뿍 들어간 건초를 넣어주고 있었다.
그 소란스러운 시장통의 한가운데에서 유일하게 할 일이 없는 소년과 소년을 호위한다는 명목으로 남은 장소는 오도카니 자리에 앉아 있었다.
태감이야 벌써 황제 폐하를 독대하며 보고를 올리고 있었고 위정과 이삼은 태감의 호위를 위해 자리를 비웠다.
남은 둘은 할 일도 없었고 그렇다고 나서서 뭘 하기도 껄끄러워 그저앉아만 있어야 했다.
하지만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상당히 괴로운 일이었다.
소년은 눈치를 보다 멀찍이 떨어진 나무 그늘로 장소를 끌고 들어왔다.
“아이고 하는 것도 없이 피곤하네.”
“헤헤, 그러게요.”
둘은 남은 간식 봉투에서 건과일과 육포를 나눠 먹으며 나무에 몸을 기대었다. 뜨거운 여름의 새파란 하늘아래로 칠성단의 장대한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 장엄한 광경도 이렇게 북적북적하는 사람들과 함께 보니 그저 관광지에 놀러 온 기분밖에 들지 않았다.
좀 가까이 가서 보면 좀 나을 수도 있겠다만 그랬다간 불경죄로 목이 날아갈지 모르지 소년은 얌전히 앉아 흥미를 접었다.
“그러고 보니, 그 안경 쓴 나리는 왜 안 오셨습니까?”
“안경? 아아, 백량 님은 연좌궁에서 행정업무를 보고 계실 거에요.”
“아아, 그 나리 성함이 백량이었슴까?”
“예, 산서의 금양(金羊) 백가 출신이세요.”
금양? 황금양?
이쪽도 신수인지 뭔지를 모시는 가문인 모양이었다. 장소가 속한 묘(猫)족도 그렇고 이삼의 일족인 금익(金翼)족도 그렇고, 태감의 곁에 모인 사람들은 전부 제국의 기틀을 닦았다는 쉰아홉 혈족에 속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니, 지금은 스물하고 하나였나.
태감에게 언제 한번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은데 나이를 먹으며 영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소년이 어렴뭇이 생각나는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끙끙대는 동안 장소는 나무 그늘에 딱 잠들기 좋은 온도가 된 여름의 바람을 즐기며 졸음에 함락되기 직전 상태까지 몰렸다.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또 살짝 괘씸하기도 해서 소년은 몰래 장소의 코를 잡았다.
야옹!!!
장소가 펄쩍 뛰어올랐다.
“어? 지금 ‘야옹’이라고 했어요?”
“예? 아뇨, ‘아야’라고 했는데요?”
“아닌데? 야옹이라고 한 거 같은데.”
장소는 필사적으로 변명하며 꼬집힌 코를 쓰다듬었다. 그래도 호위무사가 호위대상을 내버려 두고 잠든 죄를 아는지 소년에게 꼬집힌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혹시 다시 한번 꼬집으면 이번엔 어떤 비명을 지를까? 역시 묘(猫)족이라 꼭 고양이처럼…….
토라진 것처럼 등을 돌린 장소를 보며 소년은 새삼 의문이 들었다.
일족이 멸망하기 직전이었다던 이삼은 그렇다치더라도, 장소는 어째서 환관이 되어 태감을 보좌하게 된것일까?
소년이 듣기론 묘족은 귀주에서 꽤나 큰 성세를 자랑한다 들었다. 그런 아쉬울 것 없는 일족의 아들이 어째서 이 후궁까지 들어와 태감의 심복이 된 것일까?
물어보기는 껄끄럽고 물어보지 않기엔 궁금하다. 소년은 한참을 고민한 끝에 장소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는 조금 부끄러워했고, 난처해했지만 이내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 곤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사실 이건…….조금 부끄러운 이야긴데요, 남들한테 소문 내시면 안돼요?”
그 말을 듣기까지만 해도 소년은 장소의 가벼운 분위기에 별일 아닐것이라 생각했다.
장소가 별것 아니라는 듯이 해맑게 웃으며 이야기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소년은 입을 닫고 잠깐 고민에 잠긴 장소의 얼굴이 꼭 고양이 같다고 생각했다.
“음…… 전에 태감님께 이야기는 들으셨죠? 내전이 일어난 이야기.”
오십구 혈족이 이십일 혈족으로 줄어들 만큼 참담했던 내전, 장소는 그 시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사실 저희 묘족도 반란을 일으킨 혈족 중 하나였어요. 귀주성에선 그래도 가장 강성했던 일족이었으니까 욕심이 드셨던 거겠죠. 그리고 귀주성은 원체 경사와는 거리가 멀기도 하고, 당시 사천성 일대의 패자였던 독혈(毒血) 당족과 연계하면 충분히 금군을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셨나 봐요.”
그리고 가문 어른들의 기대는 선황의 말발굽 아래에 짓밟혀 넝마 쪼가리가 되었다.
선황은 강인한 군주였고 전쟁터에선 늘 선봉에 섰으며 그 뒤를 따르는 금린대는 무적의 군단이었다.
칼 한 자루를 뽑아 들고 금룡기를 든 금린대에게 한때 귀주제일가로 칭송받던 묘족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천년에 가깝게 이루었던 가문의 성세는 스러졌고 가문의 명패는 불에 타버렸다.
한때 귀주성을 독립시켜 묘족의 천하를 이루겠다던 가문의 어른들이 모조리 사지가 찢겨 효수당했다 한다.
그 참담한 가문의 역사를 말하는 장소는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듯 보여 소년의 얼굴을 새파랗게 질리게했다.
“그래도 당시 가주셨던 저희 할아버지가 전면 항복하셔서 다행히 가문의 대가 끊기지는 않았네요. 재산도 일부 지켜서 옛날만큼은 아니지만 귀주성에서는 여전히 힘 좀 쓰는 가문이에요.”
“아…… 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요?”
“다행이죠. 완전 씨 몰살당한 가문이 얼만데, 저흰 목숨도 건지고 재산도 건졌잖아요.”
장소는 진심으로 그 다행이라는 듯이 웃었다. 과연 같은 처지였을 때 자신은 장소처럼 웃을 수 있을까?
소년은 모골이 송연하고 피가 차갑게 식는 듯했다. 하지만 분노에 차있어야 할 장소는 아무런 원망도 원한도 없는 듯했다.
“다만, 목숨을 보전하고 재산도 지킬 수 있었지만 그래도 반란을 일으킨 가문에게 아무런 제재도 없을 수는 없잖아요?”
“그러면?”
“네, 저희 묘족은 대대로 자손금고(子孫禁錮)형을 받게 되었어요. 장사치로 돈을 벌 수는 있지만, 벼슬길은 영영 막힌 거죠.”
소년은 문득 가슴 한쪽이 시려 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연민이나 동정 따위가 아닌, 좀 더 서글픈 동시에 큰 짐을 끌어안고도 웃을 수 있는 장소라는 인물에 대한 일종의 동경심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런데 태감님이 절 받아주셨어요. 제가 열심히 봉사하면 저희 가문의 형이 조금은 가벼워질 가능성이 생긴 거죠!”
장소는 정말로 다행이라는 듯이 환하게 웃었다. 한치의 그늘도 없이 따사로운 햇볕 같은 찬란한 미소에 소년은 자신의 근심마저 녹아내리는 듯했다. 하지만, 정말 그걸로 괜찮은걸까?
“정말 그걸로, 괜찮아요?”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소년은 꼭 그 한마디를 묻고 싶었다. 정말로 괜찮냐고, 아무렇지도 않냐고.
소년의 말에 장소는 빙그레 웃으며 소년의 떨리는 손을 잡았다. 자신만큼이나 굳은살이 튼튼하게 박인, 하지만 자신과는 조금 다른 싸우는 사람의 손.
하지만 아직 어린아이다운 부드러움과 따뜻함이 서려 있는 손.
“괜찮아요. 괜찮고 말고요.”
제가 아니었다면 제 가족들이 할 일인걸요. 전 가족들 대신 제가 할 수 있어서 행복해요.
소년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대신, 장소가 소년의 손을 꼭 잡고 가볍게 그를 끌어안았다. 분명 장소 대신, 그가 울상을 지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