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58화
태감은 황급히 가면을 주워 얼굴에 쓰고 옷을 가다듬은 다음, 다리를 꼬고 위엄있는 자세를 취한 후에야 손님을 불러드렸다.
휘장을 거치고 들어선 것은 마침 찾으려 했던 금마단주였다.
들어서자마자 군부에서 무시하는 환관의 앞인데도 지극히 정중한 태도로 군례를 올리는 단주는 보기만 해도 그 강직함이 느껴지는 사내였다.
갑옷을 빈틈없이 차려입고 허리춤에는 지휘봉과 검을 패용한 단주는 지극히 절제된 동작으로 그 자리에서 있었다.
세상에, 정중하기도 하지. 발뒤꿈치를 딱 맞추고 허리를 꼿꼿이 편 채 선 금마단주를 보며 소년은 속으로 감탄사를 터뜨렸다.
그도 나름 후궁 밥을 먹으며 ‘무관나으리’들이 얼마나 콧대 높은 인종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를 숭상하는 전쟁 국가인 제국에서 상위 1%의 인재들을 거르고 걸러 모집한 그들은 말 그대로 제국 최고의 엘리트들이었다.
일컫기를, 하급 무관의 기본 소양을 보는 그 첫 번째 시험에서 말과 함께 경주하게 해 말꼬리보다 늦게 통과한 이들은 탈락이라고 하니 그것만 해도 그들의 우월함을 알 수 있었다.
심지어 위정의 말에 의하면 상급무관시험은 창을 던지고 그 창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받아내거나 맨손으로 산에 들어가 사슴을 산 채로 포획하는 등 그야말로 초인의 영역이었다.
그야말로 제국의 인재들을 거르고 걸러서, 그것들을 압축해서 얻어낸 인재들인 것이다.
그런 이들이니 온종일 주저앉아 글줄이나 읽는 문관들은 물론 거세한 환관들을 멸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그렇기에 소년은 그런 무시무시한 시험을 통과한 것은 물론 실전에서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 오늘날의 자리에 앉은 금마단주라면 제아무리 후궁의 권력자다 한들 좋은 소리는 못 들을 것이라 생각했다.
제아무리 권력자라 한들 콧대 높은 무관 나으리께서 사내구실도 못하는 놈의 말을 제대로 들을 리가 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던 차 금마단주의 공손함은 소년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거기에 금마단주는 허리를 공손히 숙이며 태감 어르신이라 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아무리 동창 제독이라 해도 어르신?
심지어 태감은 아무리 잘 쳐줘도 금마단주의 아들뻘이었다. 이것이 권력인가?
혹시 저 양반 약점이라도 잡은 거냐는 소년의 눈빛에 이것이 권력이다. 애송이라는 뜻의 눈인사로 답하며 태감은 앉아서 그의 인사를 받았다.
거만하기 그지없는 자세, 가면을 쓴 채로 손만 까닥하는 그 자세는 방만함의 극치였다.
세상에, 나였으면 직속상관이더라도 한 대 쳤다.
소년은 혹시나 저 덩치 큰 무관나으리가 미쳐서 허리춤에 찬 칼이라도 빼들면 어쩌나 싶었지만 금마단주는 지극히 정중한 태도로 태감의 허락을 받은 다음에야 자리에 착석했다.
심지어 그는 엉거주춤한 태도로 차를 내온 소년에게 눈웃음을 지으며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까지 해 소년을 놀라게 했다.
이렇게 중후하고 신사적인 사람이 무관중에 있을 줄이야. 무관이라면 허구한날 술 처먹고 싸움박질하고 말이랑 수간이나 하는 놈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무관에 대한 인식의 크게 변했음을 소년은 느꼈다.
앞으로 한 삼일정도는, 무관에 대해 좋은 인식을 유지할 수 있을 것같다.
에잇, 기분이다. 과자도 좀 좋은 걸 내가야지.
그릇에 다과를 담아 내가자 태감이 대번에 알아보았다.
“오, 초미병(炒米餠)인가. 오랜만이군.”
“보통은 명절에나 먹지요.”
초미병(炒米餠)은 볶은 쌀가루를 설탕 시럽을 섞어 땅콩이나 깨 등을 소로 넣고 틀에 찍어 구운 과자인데 겉 모습은 꼭 한국의 다식과도 비슷하게 생겼다.
아마 모양이 예쁜 틀에 찍어낸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겠지. 초미병은 볶은 쌀가루로 만들기 때문에 한 두 개만 먹어도 힘이 나고(입이 건조해지기는 하지만) 건조한 곳에서 보관하면 거의 일 년 정도는 보관이 가능하기 때문에 여행길에 제격이다.
굉장히 단단하고 뻑뻑해서 전생에서야 이제 중국 본토에서도 어르신들이나 드시는 옛날 간식 취급이지만 이곳에서야 늘 소비되는, 그것도 꽤나 고급 간식이다.
태감은 병을 하나 집어 들고 앞니로 갉작갉작 조금씩 베어먹었다. 원체 단단해서 한입에 호쾌하게 베어물 수는…….
우드득.
소름 끼치는 파쇄음이 소년이 고개를 돌렸다. 금마단주, 그의 강철같은 턱에선 초미병이 과자처럼 부서지고 있었다.
반쪽을 씹어먹고 차를 한 모금 마신 금마단주는 지긋이 눈을 감고 맛을 보는가 하더니 이내 남은 반쪽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또 다시 소름 끼치는 파쇄음이 울렸다.
대단한 치악력이다…… 저자의 어금니는 돌로 만들어지기라도 한 건가?
아래턱이 움직일 때마다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근육을 보며 소년은 치악력 또한 단련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태감이 고작 삼분지 일을 갉아먹은 사이 금마단주는 이미 두 번째 초미병에 손을 가져갔다.
“잘 만든 좋은 초미병이군요.”
두 번째 초미병을 절반쯤 씹어먹은 금마단주는 차를 한 모금 마신 후절찬을 쏟아냈다.
“달콤하고 향긋하지만, 단맛은 절제되어 있어 속과 조화롭군요. 좋은 쌀을 사용하며 묵은 군내가 나지 않고 오히려 향기로움이 느껴집니다. 거기에 속이 또 훌륭하군요. 보통 초미병의 속 재료로는 땅콩이나 깨가 보통인데 이것은…….”
금마단주는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혀에 남은 잔향으로 그재료를 가늠하고 있는 것이리라.
자연스레 태감과 소년의 시선이 그의 입술로 모였다. 예상 밖의 뛰어난 미각과 훌륭한 말솜씨를 가진 그는 그 속 재료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을까?
“개암나무의 열매로군요. 그것을 다져 꿀과 섞은 것. 그렇지요?”
“오운. 맞나?”
“예, 정답입니다.”
소년은 금마단주의 미각에 탄복하였음을 시인했다. 향이 진한 꿀에 절여 제아무리 향기 좋은 개암나무열매라 하여도 그 향을 분간하기는 어려우리라 생각했는데 그것을 멋지게 간파했다.
하지만 감탄한 것은 소년만이 아니었다.
큼지막한 눈을 끔뻑거리며 소년을 돌아본 금마단주는 추레한 소년을 보고는 웃음을 터뜨리며 가볍게 고개를 숙여 소년을 황송하게 했다.
“이거 미안하네. 난 틀림없이 자네가 태감님의 재담가(才談家)인 줄만 알았네…….”
“뭐 비슷한 일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금마단주는 태감을 향해 그의 정확한 지휘가 어떻게 되는지 물었다.
그러자 태감은 일부러 꾸며낸 것처럼 악동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연좌궁의 주방을 총괄하는 상호(尙傳) 일세.”
소년은 자신이 정식으로 후궁에 소속되어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으나 금마단주는 소년의 품계에 놀랐다.
소년을 보며 목소리를 가다듬은 단주는 조금 전보다 조금 더 고개를 숙였다.
“이거 미안하오. 견문이 짧아 무례를 저질렀구려.”
소년은 소스라치게 놀라 마주 고개를 숙였다. 금군의 기마단을 이끄는 금마단주는 최소 정오품직 이상의 장군의 위계를 받은 자인 것이다.
교위나 부위 정도였으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자신이 장군에게 인사를 받는 것은 오랜 시간 바닥을 기며 살아온 소년을 몸 둘 바를 모르게했다.
소년이 삐질삐질 식은 땀을 흘리는 모습을 보며 태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퇴폐미 가득한 사악한 미소를 지어 소년의 혈압을 높였다.
이놈, 일부러 그랬구나……!
소년의 얼굴이 흉신악살의 형태로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웃음 지은 단주는 이내 목소리를 그윽하게 깔며 소년에게 말했다.
“사실 제가 오늘 청하려 한 것은 양 태감님이 아닌 오상호, 당신께 드릴 부탁이 있어서요.”
“예? 제게 말입니까?”
“그렇소, 마차에서의 재담이 틀림없이 오상호가 한 것이라면…….”
단주는 소년에게 다시금 고개를 숙였지만, 소년에게는 결정권이 없었다.
상호니 뭐니 번지르르한 직급이 있어도 결국 그는 태감에게 매인 몸이 아닌가. 소년은 고개를 슬쩍 돌려태감을 보았다.
어찌 할깝쇼?
태감은 가면 위로 손가락을 짚으며 고민하는 척 시간을 끌더니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그 동작이 우선은 이야기를 들어보자는 뜻임을 알아듣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거 참, 어차피 허락할 거면서 괜히…….
표정으로 태감을 욕하던 소년이 고개를 돌렸을 때는 그 교활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위화감마저 느껴질 정도로 선량한 미소를 지으며 단주를 보았다.
“예, 제가 무엇을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오오, 고맙소. 이 악모가 후일 반드시 보답하겠소.”
아무래도 금마단주는 악씨인 모양이었다. 거듭 고개를 숙인 금마단주는 소년에게 가까이 붙으며 이야기를 시작해 소년을 부담스럽게 했다.
“조금 전, 상호께서 하신 이야기가 병사들 사이에서 큰 관심을 얻고 있소.”
“모자란 재주를 좋게들 봐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그 재담, 병사들 앞에서도 할 수 있소?”
“병사들 앞에서라 하시면…….”
소년의 앞에서 단주는 씁쓸함을 감추지 못한 표정이었다. 하급자와 상급자 사이에 낀 중간관리직의 비애가 느껴지는 표정은 소년의 가슴에도 사무치는 것이었다.
입을 열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고뇌하는 바위 같은 얼굴로 고뇌하던 단주는 금군의 말할 수 없는 사정을 이야기했다.
“사실 폐하의 호위는 더할 나위 없는 영예임이 틀림없소. 그렇기에 금군에서도 최정예 부대만이 선정되지. 하지만 솔직히…… 이 임무는 기피 임무요.”
단주의 말에 소년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당연히 장거리 출장 임무이니 집에서 떨어지게 되고 황궁의 행사이니 보통의 여행보다는 편하다 해도 여행 중이니 의식주가 불편할 수밖에 없다.
거기다 황제 폐하를 모시는 일이니그 중압감은 또 얼마나 심할지.
떠난 지 첫날이지만 이미 마누라가 그리운 이들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거기다 애까지 있다면 그 그리움이야…….
소년은 전생의 기러기 아빠로 가족을 외국으로 떠나보내고 혼자서 쓸쓸히 지내던 직장 동료의 얼굴이 떠올라 무심코 고개를 떨꿨다.
자신이야 자신의 선택으로 가정을 가지지 않았지만 사랑하는 가족을 만리타향에 떠나보내고 외로움에 지친 중년의 서글픔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힘든 주방일이 끝나고 나면 둘이서 가끔 야시장으로 나가 함께 맥주병을 기울이고는 했다.
그것도 가끔이었지만, 소년은 가족을 떠나온 병사들의 얼굴을 생각하며 문득 둥글둥글한 그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왜 그때 그렇게 매정하게 그랬을까. 그렇게 죽을 줄 알았으면 그깟술, 몇 번이라도 먹어줬을 텐데.
사람은 죽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이 있더라. 죽기 전에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씁쓰레한 후회를 머금고 옛 추억을 회상하는 소년에게 단주가 다시금 정중히 부탁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가능한 오락거리를 제공하고 싶소. 하지만 황제 폐하를 호위하는 입장에 여자나 술은 말도 안 되지. 그런데 마침, 오상호의 이야기를 들은 일부 병사들이 높은 전의를 내비치더군. 세 치 혀로 사람의 감정을 좌지우지하다니, 무서울 정도로 대단하구려.”
“그분들이 유난히 감수성이 예민하셨던 것 아닐까요? 솔직히 저잣거리 이야기꾼과 그리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겸양을 표하는 소년의 말에 단주는 진지하게 고개를 저으며 소년의 눈을 응시했다.
“아니오, 그렇지 않소. 오상호의 이야기에는 대단한 가치가 있소. 전술적으로 활용할 만한 가치가.”
진지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금마단주의 말에 소년은 황당하다는 표현을 숨기지 못했다.
이야기에 전술적 가치라니, 그는 지금 자신을 놀리는 것일까? 이야기 좀 한다고 전술적 이점이 생기면 연극이나 오페라 공연이라도 열면 아주 난리가 나겠군 그래?
속으로 비웃는 소년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단주는 바위를 깎아 표정은 만든 것만 같은 얼굴로 열렬하게 소년을 설득시켰다.
“확실히 이야기를 듣는다고 천재지 변이 일어나거나 호풍환우를 부릴수 있는 것은 아니지. 하지만 평소에 전의를 고양하고 전우애를 돋울수 있는 이야기를 꾸준히 듣는 것만으로 군의 사기가 변할 것이고 군의 사기가 향상되면 이기지 못한 전투도 승리할 가망이 있소. 내 장담하지.”
아아, 사상교육인가.
소년은 자신이 너무 현대전만을 대상으로 생각했다는 것을 이해했다.
현대전이야 차가운 강철과 폭약으로 이루어진 전투가 대부분이니 병사의 감정이 전쟁을 좌지우지할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직접 창검을 들고 싸워야 하는 세계라면 마음가짐에 따라 전투의 양상이 조금쯤은 변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금군의 금마대주라면 앞으로도 승승장구할 것이다. 빚을 지워둬서 나쁠 일도 없으리라. 하지만 소년은 대답을 유보하며 한 발짝 떨어져 둘은 관망하던 태감에게 허락을 구했다.
깊게 고개를 숙인 금마단주를 보며 잠시 고민한 태감은 아무래도 그를 돕는 편이 더 앞으로의 일에 이롭겠다고 생각했는지 선선히 허락했다.
“그래, 금군의 사기가 높아진다면 나쁠 일이 없지. 여행길에 힘들겠지만 수고 좀 해다오.”
“예 태감님.”
“감사합니다!”
감격해하며 태감에게 깊게 허리를 숙인 금마단주는 태감의 뒤쪽에서 있던 위정에게도 깊이 고개를 숙였다.
씁쓸한 표정으로 그 인사를 받는 위정을 보며 소년은 그도 인생이 순탄하지만은 않았겠다고 생각했다.
하긴, 이 후궁에 사연 없는 이가 누가 있으랴.
단주를 떠나보내고 태감을 돌아본 소년의 얼굴은 기이하게 일그러져있었다. 갑갑하다는 듯 가면을 벗어던진 태감은 소년의 표정을 보고는 실소를 터뜨렸다.
마치 억지로 분노를 억누른 듯한, 그 분노를 유보하겠다는 듯한 표정은 태감을 즐겁게 만들었다.
“자…… 저희에겐 아직 풀어야 할 숙제가 남은 것 같군요.”
“그렇구나. 난 관대한 상관이니 얼마든지 물어보거라.”
소년의 어금니가 갈리는 소리가 소름 끼칠 정도로 크게 들렸다. 이를 악물고 소년은 천천히 곱씹어 말했다.
“상호라는 직책은 어느 정도입니까?”
“품계로 따지면 정오품 정도는 되지.”
“정…… 오품……!”
설마 그 정도는 몰랐다는 듯이 기겁을 하는 소년을 보며 태감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참고로 금마단주의 품계도 정오품이던가? 좋겠구나. 출세했어.”
물론 무관의 오품과 환관의 오품이 같지야 않겠지만, 그래도 일단은 동격 아니냐.
좋겠구나, 좋겠어.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알입게 말하는 태감을 보며 소년은 손아귀가 부서져라 주먹을 쥐었다.
고목처럼 앙상하게 말라붙은 팔에선 신기할 정도로 근육이 솟았다.
오랜 시간 고된 노동으로 다져진 팔근육이었다.
“그럼, 왜 알려주지 않으셨습니까?”
소년의 말에 태감은 말로 더 표현할 수 없는 극상의 우아한 미소를 지었다.
더 어떠한 질문도 소용없을 것만 같은 염화시중의 미소였다. 마치 그의 배경에 연꽃이 피어나는 듯해 순간 소년마저도 말을 잃었을 정도였다.
천상의 미소를 입에 머금은 태감은 살짝 주먹을 쥐어 자신의 머리를 콩때렸다.
고개를 살짝 갸웃하는 동작까지도, 완벽했다.
“미안하구나. 깜빡했네.”
“하하하.”
“하하하하.”
하하하,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사람이 살다 보면 깜빡할 수도 있지.
마치 그 정도쯤이야. 용서한다는 듯이 아무렇지 않게 웃는 소년을 보며 위정은 한시름을 놓았다.
솔직히 자신이라도 참을 수 없었을 만한 일인데. 잘 참았구나.
그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소년이 오른쪽 다리만으로 비호처럼 뛰어올랐다. 지옥유부에서 기어올라온 나찰 같은 표정에 손이 으스러지도록 꽉 쥔 주먹은 도저히 그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홍흉한 용력이 실려 있었다.
다리를 저는, 허리마저 굽은 반병신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소년은 순식간에 탁자 위로 뛰어올라 태감에게 자신의 분노를 토해냈다.
평생을 후궁에서 싸움 한번 할 일없이 살았을 소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호쾌한 권타가 내질러졌다.
그 순간 태감의 뒤에서 있던 위정은 달려드는 소년의 앞을 막아서며 소년의 주먹을 받아내었다.
손아귀로 전해지는 심상치 않은 충격, 왼손으론 주먹을 받아내고 오른손으론 손목을 잡아 부드럽게 소년의 중심을 흐트러뜨려 충격을 완화하는 동시에 상대를 제압하는 황궁 무술 금나수 비기 포화접(抱花蝶)이 완벽한 동작으로 펼쳐졌다.
내가 상하지 않고, 내가 지키는 사람이 상하지 않으며 동시에 상대마저 상하지 않게 한다는 황궁 금나술의 비기는 그 기예를 알아보는 사람이 보았다면 탄성을 지를 만큼 정교한 것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첫 번째 목격자인 태감은 무술이라면 문외한인 사람이었지만 젊은 시절 유도나 합기도를 제법 경험해 본 소년은 조금 전 위정이 자신을 제압한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대단하구나, 보통 사람이었다면 네 주먹을 맞는 순간 기절했을지도 몰라. 몸이 멀쩡했다면 무과시험을 노려도 좋았을 정도다.”
“과연 나리십니다. 손목을 잡힌 순간 옴짝달싹을 못하겠군요.”
단 한 번 공수를 교환한 것으로 서로의 가능성과 실력을 나눈 둘 사이에는 기이한 유대감이 생겼다.
서로 주먹을 나눠본 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기이한 감정, 위정은 소년의 손을 풀어주었고 먼지를 털고 일어선 소년은 태감에게 다시 덤벼들지는 않았다.
“태감께서 고의로 제 직위를 알리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은 합니다만, 그래도 뭔가 이유가 있어서겠지요? 그렇게 믿겠습니다.”
“이거 함부로 장난도 못 치겠구나. 아무렴 동창의 제독이자 사례 태감인 내가 정말 장난이었을까.”
댁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그것은 소년과 위정, 둘의 공통된 의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