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의 요리사-57화 (57/314)

환관의 요리사 57화

스마트폰을 포함한 각종 매체에 점령당한 현대인에게 아무것도 없는 여행이란 얼마나 지루한 일인지.

그리고 활발하고 호기심 많은 소년둘을 양옆에 앉혀둔다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오락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오랜만에 평화를 하기로 한 소년은 자신의 의외의 재능을 깨달았다.

“내 이름은 막시무스 데시무스 메르디우스. 북부군의 총사령관이자 펠릭스 군단의 군단장이었으며 진정한 황제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충복이었다. 불타 죽은 아들의 아버지이자 능욕당한 아내의 남편이다. 반드시 복수하겠다. 이생에서 안 된다면 저 생에서라도!”

날카롭고 거친 목소리는 웅장한 패기를 뿜어내며 마차의 내부 공기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형형하게 빛나는 눈동자에는 섬뜩한 복수심이 깃들고 카랑카랑한 목소리에는 고결한 긍지가 서렸다.

소년의 손동작과 표정, 목소리로 어느새 러들리 스콧의 영화 글라디에이터의 명장면이 재현되었다.

“그러자 소스라치게 놀란 콤모두스는 막시무스를 제거하려 합니다. 하지만 콜로세움에 모인 오만명의 관중들이 소리를 치기 시작합니다. 살려라! 살려라! 지지기반이 약한 콤모두스로서는 군중들의 함성을 거부하지 못하고 막시무스는 다른 검투사들의 존경을 받으며-”

그저 내용이 심심한 편인 고전 평화만으로는 조금 지루할 듯하여 전생에 감명 깊게 본 영화를 말로 풀어내 보았는데 그것이 예상 밖의 대호평이었던 것이다.

감수성이 풍부해 보이는 이삼과 장소는 물론이고 그리 관심 없어 보이던 태감도 봉투에 넣은 손을 뺄 생각을 하지 못하고 소년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근엄한 표정으로 창 너머를 경계하던 위정조차 은근히 소년의 말이 이어지기만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여 소년을 놀라게했다.

아니, 이런 재주가 있는 줄 진작 알았으면 요리 말고 연예계로 진출할걸! 괜히 피똥 싸는 중화요리 배웠네!

소년은 속으로 지난날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은 아닌가 되짚으면서도 배에 힘을 주고 눈을 부라리며 연기에 몰입했다.

그저 눈앞에서 있는 것은 왜소한 소년일 뿐이건만, 그 목소리, 그 힘있는 눈빛은 틀림없이 사자를 눈앞에 두고도 흔들림 없는 검투사의 그것이었다.

혀는 검이었고 목소리는 갑옷이었으며 그 눈빛과 기백은 오만명 관중의 것을 대신했다.

그의 동작 하나하나가 검투사들의 검무가 되었고 그들의 마차는 콜로세움이 되어 그들을 열광하게 만들었다.

덜커덕거리던 마차의 진동이 멈추고 밖에서 부산한 소리가 들리자 소년도 잠시 이야기를 멈추고 목을 가다듬었다.

아마도 점심을 먹기 위해 멈춘 것이리라. 바깥을 슬쩍 내다보고 하나둘 천막이 세워지는 것을 확인한 소년은 일행을 돌아보며 이야기는 여기까지라고 잔인한 선고를 내렸다.

“네? 여기까지라고요?”

“예, 밥 먹어야죠.”

“하지만…….”

자신의 옷소매를 잡고 놓지 않는 두 소년의 손을 뿌리치며 그는 굽은 허리를 툭툭 치며 몸을 일으켰다.

아무리 좋은 수레라고 해도 기껏해야 철판을 덧대 만든 조악한 판스프링 서스펜션이 전부였기 때문에 몸이 불편한 소년에게는 상당히 고된 여행이었다.

아니지, 생각해 보면 서스펜션을 달 생각을 했다는 것부터가 대단한 거겠지.

아직 제철기술이 충분히 성숙하지 않아 그 효과는 미비했지만, 현대까지도 사용되는 판스프링 구조를 이시대에 발견했다는 것이 어딘가?

그러고 보면 로마에서도 목제 판을 덧댄 장치를 단 수레를 사용했었다고 하던가?

이렇게 생각해 보면 현대인이라고 뭐 대단한 게 하나도 없다. 오히려 이 시대에 미성숙한 기술로 이 정도까지 만들어냈다는 것에 감탄사가 나올 지경이다.

“역시 머리 좋은 놈들은 어느 시대에나 뭔가를 해내는구만.”

나 같은 놈들은 어디를 가나 노동자일 뿐이지. 머리 좋은 놈들은 뭔가 우리 같은 놈들이랑은 머리 구조가 조금 다른 거 같아.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던가, 그, 아인슈타인이라던가.

하긴 난 예전부터 공부할 머리는 아니었어. 일찍 요리하길 잘했지.

그렇게 구시렁대며 요리를 준비하는 소년에게 으슥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 넓은 그림자는 바로 듬직한 사내들의 어깨였다.

“이보게, 잠시 시간 좀 되는가?”

“……아이고, 금군의 나리들 아니십니까. 여긴 어쩌신 일로…….”

제국 제일의 정예병이라는 명성답게 금군의 병사들은 하나하나 어깨가 떡 벌어지고 키가 훤칠한 장부들이었다.

그리고 그중 가장 앞에서 소년에게 수줍게 말을 건 이는 다른 병사들보다도 머리 하나가 크고 어깨는 남들보다 두 뼘은 더 넓은 거구의 병사였다.

거기에 덥수룩한 수염과 얼굴의 이마에서부터 왼쪽 뺨까지 가로지르는 흉터는 가뜩이나 흉악한 사내의 얼굴에 노련한 인간 백정과도 같은 풍모를 더해주었다.

소년은 젊은 날의 자신과도 좋은 비교가 될 것 같은 그 어깨에 짙은 향수를 느꼈다.

한때는 자신도 저들에게 밀리지 않는 어깨와 키, 터질 것 같은 팔뚝과 허벅지를 가지고 있었던 적이 있었다. 지치지 않는 체력과 배를 한 손으로 쪼개는 악력.

소년은 자신의 야리야리한 손목을 내려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예…… 어떤 일이신가요?”

“그게 말일세…… 큼…….”

소년이 손으로 무릎을 짚으며 일어서자 거구의 병사는 남들이 볼까 부끄럽다는 듯이 흉터까지 벌겋게 물들이며 소년에게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 막시무스는 그래서 어떻게 되는 건가?”

“왜요?”

참으로 뭐라 말하기 난해한 소년의 대답에 역전의 영웅 같은 풍모의 병사는 진땀을 흘리며 소년에게 다시 귓속말을 했다. 마치 철 수세미 같은 수염이 닿아 따끔따끔했다.

“그러니까, 막시무스는 어떻게 되냔 말일세…….”

“……아…… 아아. 그, 마차 옆에서 호위하시던 분들이시군요. 금마단(金馬團) 의…….”

“그렇네.”

금마단이라면 금군에서도 서열이 높은 기마병단이었다. 값비싼 말을 탈 줄 알고 심지어 그 위에서 싸우기까지 하는 기마술을 배웠다는 것은 무과에 합격한 정식 관인이라는 뜻이었다.

한국으로 치면 장교급의 인사가 이렇게 수줍게 물어온 것이 이야기의 뒷 내용이라니…….

놀 거리가 부족하니 사람들이 별거에 다 관심을 가지는군. 소년은 매부리코 아래로 온화하고 선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차피 점심시간이 끝나고 다시 이동할 때가 되면 또 이야기할 터인데, 그때 들으시는 게 더 재미있지 않겠습니까?”

“으으, 내 도저히 못 참을 것 같아 그러네.”

“뭐…… 그러시다면야.”

다만 유감스럽게도 글라디에이터는 통쾌한 복수극이지만 결코 해피엔딩은 아니었다.

뭐, 애도 아니고 다 큰 어른이 설마 이야기가 해피엔딩이 아니라고 뭐라 하겠어? 소년은 그렇게 섣불리 판단하며 막시무스의 장렬한 최후를 이야기했다.

헌헌한 장부들에게 둘러싸여 무용담을 풀어놓으니 꼭 내가 뭔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은걸.

“그게…… 이렇게 되어서, 아무튼 그렇게 됩니다.”

“그런가? 그렇게 되는군.”

병사의 선량한 웃음에 소년도 따라 웃음 지었다. 자신의 이야기에 이렇게나 관심을 가지는 이가 있을 줄이야.

저녁에는 조금 더 열심히 이야기를 풀어내야겠다고 생각한 소년은 입꼬리가 일그러지기 시작한 병사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이런 이야기가, 이런 현실이 있단말이냐……!”

병사의 퉁방울 같은 눈에선 남자의 뜨거운 눈물이 터져 나왔다.

주먹을 그러쥔 손은 금방이라도 난 동을 부릴 것처럼 떨렸고 사내는 더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오열하여 소년을 당황스럽게 했다.

내 이야기가 그렇게나 그의 심금을 떨리게 할 만큼 감동적이었단 말인가?

아니면 이 사람이 그냥 남들보다 감수성이 풍부한 편이라서 그런가?

소년은 서둘러 주변의 다른 병사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다른 이들도 대놓고 고함을 치지는 않았지만 다들 눈시울이 불거져 있었다.

“왜…… 왜 막시무스는 행복할 수 없는 것이냐!”

“진정하십쇼 나으리. 그냥 이야기 아닙니까.”

“그냥 이야기라니! 그 뜨거운 무용담이 어찌 그냥 이야기될 수 있는가!”

그냥 이야기든 뜨거운 무용담이든 뭐가 다릅니까?

병사들은 소년을 사이에 두고 각자가 느낌 감상과 막시무스와 콤모두스에 대하여 토론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 틈바구니에 끼인 소년은 핼쑥해진 표정을 지었다. 아직 여행 첫날인데 벌써 이렇게 피곤하니, 앞으로의 여정은 어떻게 되는 걸까.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야설이나 푸는 건데…….”

그냥 남자도 아니고 치마만 두르면 다 좋다는 군바리들이니 효과는 분명 발군이었으리라.

소년은 어느새 다른 이들까지 모이며 심도 깊은 토론의 장이 열린 우물가를 탈출했다.

* * *

“고생 많았다.”

“금군 나리들은 왜들 저리 감수성이 예민하십니까? 다들 사춘기라서 그런 건 아니겠죠?”

소년의 짓궂은 농에 위정이 헛기침을 했다. 소년은 위정의 안색을 보며 그가 어디 출신인지를 짐작했다.

“아무튼, 식사하시죠. 점심이니 가볍게 차렸습니다.”

그리 말하며 소년이 상 위에 올린것은 광주리에 가득 담은 오리 알이었다. 장소나 이삼은 혹시 삶은 오리 알인가 싶어 멀뚱멀뚱 들여다보기만 했지만, 미식가인 태감은 대번에 그 정체를 알아차렸다.

“함압단(咸鸭蛋)이군, 소금에 절인오리 알…… 맞지?”

“예, 여행길에 가져오기 좋아 한 달 전쯤에 만들어두었지요.”

함압단(咸鸭蛋)만드는 법.

가장 좋은 오리 알을 고른다. 깊은 산에서 캐온 황토를 소금물에 섞어 황토 진액을 만들고 여기에 오리 알을 묻어 항아리에 숙성시킨다.

“이것을 진흙이 묻은 그대로 짚을 태운 재에 굴려서 재를 입히죠. 이렇게 하면 신선함이 오래 유지되고 쉽게 깨지지 않아 여행길에 가져가기도 좋습니다. 이것 말고도 장판압(醬板鸭)도 있습니다.”

장판압(醬板鸭)은 호남의 별미로 오리를 삼십여 가지 약재에 절여 판자 모양으로 누른 다음 건조시킨 것을 구워 먹는 요리다.

바삭바삭하고 속은 진하게 응축된 오리의 풍미가 환상적이라 술안주로도 좋고 밥반찬으로도 일품이다.

하지만 태감의 시선은 오리보다도 흰 오리 알에 꽂혀 있었다.

“그럼 한번, 쪼개 볼까요?”

작은 나무 도마를 가져온 소년이 도마 위에 알을 올리고 칼을 집어들었다.

예리하게 빛나는 새카만 오철 칼날은 백윤의 솜씨를 부린 명작이었다.

그의 솜씨를 아는 위정은 오리 알을 쪼개는데 쓰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천하에 둘도 없을 장인이 오철을 가지고 만든 것이 식칼이라는 사실을 다른 이들이 알면 바보짓이라며 손가락질을 할 테지.

쩍 소리를 내며 갈라진 오리 알은 노른자가 두 개로 갈라진 쌍란이었다. 쌍란은 이곳에서도 기쁨과 경사의 상징인지 태감의 입가가 흐늘거리며 기쁨을 감추질 못했다.

“쌍란이라, 오늘은 내 운수가 꽤나 괜찮은 모양이구나.”

“글쎄요, 다른 분들의 운수도 한번 볼까요?”

그다음은 위정의 것. 소년이 막힘없이 칼을 내려치자 쩍 갈라진 오리알의 노른자가 드러났다.

“아니, 이번에도 쌍란이라니?”

“다음 것도 갈라볼까요?”

다음에 갈라진 오리 알도 쌍란이었다. 소년이 무슨 마술을 부렸길래 보기 드문 쌍란을 이렇게 연속적으로 찾아낸 것일까?

노른자가 두 개라고 껍질에 별다른 표시가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소년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양주의 명물 쌍황압단(雙黃鸭蛋)입니다.”

소년이 마지막으로 자신의 것도 갈랐다. 그 역시 선명한 두 개의 노른자가 있는 쌍란이었다.

소년은 보란 듯이 그것을 펼쳐 보이며 자리에 앉았다. 모두가 마치 신비한 체험을 한 듯이 자신의 그릇을 보고 있었다.

“양주지방은 대대로 물이 좋고 모이가 넉넉하여 알에 쌍란이 드는 경우가 흔하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제생각엔 단순히 모이가 넉넉해서 그렇다기보다는 오리의 품종 자체가 쌍란이 잘 드는 품종이라 그런 게 아닌가 합니다.”

“그거 신기하구나. 양주지방의 오리라…….”

태감이 오리 알을 집어 들고 젓가락으로 그 촉촉한 노른자를 집어 올렸다.

삶은 것과는 다른 감촉의 진한 노른자의 맛. 달콤하고 기름진 그 맛 안쪽으로는 섬세한 짠맛이 있어 식욕을 불러일으켰다.

“아, 흰자는 염분이 과하게 배여있으니 드시지 마시고 노른자만 드십시오.”

소년의 말에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태감은 혀에서 미끄러지는 기름진 노른자의 맛에 빠져들었다.

한참이나 그 감칠맛에 빠져 있던 그는 침묵으로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 거렸다.

마치 그 맛이 입에서 빠져나갈까 입을 열 수가 없다는 듯이, 태감은 그 맛이 완전히 혀 너머로 넘어가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묵직하니 풍요롭고, 혀가 녹아내릴 만큼 진한 감칠맛이 기름지다. 내 생전 이토록 훌륭한 함단(咸蛋)은 처음 먹어보는구나.”

“좋은 곳에서 자란 좋은 오리 알이 제맛을 낸 것뿐이지요. 제가 한 게 뭐가 있겠습니까.”

소년은 겸양을 떨며 다른 요리도 권하였다.

장판압에 가벼운 채소볶음, 시간이 오래 걸리는 탕 대신 국물이 자박한 볶음요리도 한가지, 그리고…….

“이것은 뭔가요?”

장소가 집어 든 것은 둥글넓적하고 평평한 원반 모양의 음식이었는데 겉보기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다.

“먹어보니까 맛은 있는데…….”

겉보기엔 반질반질하니 윤이 나고 간장으로 조려 연한 갈색이 나는 그것.

딱딱해 보이는 외견에 비해 의외로 질감은 부드럽고 살짝 질긴듯한 것이 신기한 맛이었다. 도대체 무엇일까? 고기는 아닌 것 같고, 채소로 만든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소년은 장소의 궁금증에 대답해 주었다. 답은 두부였다.

“그것도 양주의 명물인 말린 두부요리, 과수차간(果首茶幹)입니다.”

“아아, 두부였구나. 어쩐지.”

궁금증을 해소한 장소가 다시 식사에 열중했다.

때때로 미지근한 차를 담은 주전자가 오가고 멀리 놓인 요리를 그릇을 들어 옮겨주는 등 마치 여염집과 다름없는 평범한 식사 풍경에 소년은 슬며시 미소 지었다.

좁은 상에 둘러앉아 식사하니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평소에는 겸상할 수 없는 높으신 분과 상을 함께 써서 그런 것일까?

그 사실을 가지고 소년이 농을 하자 태감은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오냐, 평소라면 모를까 이런 여행길에 내 상만 따로 차리라 하면서로 힘들지 않겠느냐? 나의 가슴에 사무치는 배려에 감탄이 절로 나오겠지만 가슴에만 묻어두거라. 난 괜찮으니.”

“어이구 이것 참 하해와 같은 큰 은혜에 혀를 내두르게 만드시는군요. 거 참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려.”

“허허, 알면 되었다. 앞으로도 그마음 잊지 말아라.”

역시 설전은 정치판에서 단련된 태감의 승리였다. 소년 역시 노련미를 과시해 보았지만, 태감에게는 도저히 상대되지 않았다.

그렇게 식사를 끝내고 장소와 이삼이 뒷정리를 하는 동안 태감은 간이 천막에 놓은 의자에 몸을 기대앉아 소년이 내온 차와 마른 다과를 먹었다.

“세상에, 이렇게 팔자 좋은 여행은 처음이군요.”

“돈과 권력이 있으면 못할 것도 없지.”

“참, 역시 좋기는 좋은 모양입니다.”

“좋다마다. 그러니 다들 아등바등하며 기어오르려 애쓰는 것이지.”

다과를 베어 물며 은근하게 미소짓는 태감의 표정에선 그 원초적인 욕망의 탑을 정복한 자에게서만 볼수 있는 품격이 스며 나왔다.

대제국의 경영자의 심복. 도대체 그는 젊은 나이에 어떤 길을 걸었길래 저 자리에 올라야 했던 걸까?

소년도 이제는 안다. 후궁에서 환관들이 벌이는 그 저열한 암투를.

치졸하고, 무자비하며, 살벌한 암투를 소년은 안다.

어린 날 거세를 하고 부모에게 팔려 들어온 이들이 가지는 충족되지 않는 욕망을 소년은 이제 알게 되었다.

원치 않게 거세당한 이들의 영원히 충족되지 않을 남근에 대한 애증을, 거기에서 비롯된 끔찍한 탐욕은 외궁의 관리들은 도저히 상상도 못 할 만큼 음습하고 처절하다.

그의 혈통과 그의 배경을 짐작할 수록 소년은 그가 이 복마전을 기어올라야 했던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소년은 도저히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끔찍한 추억을 공유해야만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만큼 삭막한 사이도 아니었다.

그들의 대화 주제는 폭넓었다.

태감이 먼저 화두를 던졌다.

“밖에 호위병들은 어찌할 생각이냐?”

“그게 고민입니다. 이것 참…… 목소리를 작게 할까요? 근데 그럼 느낌이 안 살 텐데…….”

“여름용 마차라 통풍은 잘 되고 시원한데 문제는 방음이 잘 안 되는구나.”

“아니면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요? 병사들은 별 관심 없을 것 같은 걸로…….”

병사들이 관심 없는 분야라면……

솔직히 소년도 별 자신은 없었다.

소년은 전생에도 지금도 무척이나 단순 무식한 사내였고 사실 감성적으로도 이성적으로도 저 바깥의 사내들과 별다를 점이 없는 사나이였다.

저들이 관심 없을 만한 것은 소년도 관심이 없었다.

“……아니면 내가 금마단주에게 한 번 이야기를 해보지. 어차피 여행길은 길고 네 이야기를 들을 날도 많을 텐데 앞으로도 계속 그러면 너도 힘들 것 아니냐.”

바깥에서 병사들이 웅성대는 소리는 얼굴을 가려야 하는 태감에게도 썩 편치 않은 것이었는지 태감은 흔쾌히 자신이 해결을 보겠다고 장담해 소년은 안심시켰다.

“자, 그럼 식후 운동 삼아 한번 나가볼까? 어디…… 금마단주는 지금쯤…….”

천막 입구에 쳐둔 휘장을 걷으며 위정이 안으로 들어왔다. 마침 일어서려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한 태감을 향해 위정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태감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