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53화
일에 들어간 노인은 세상 모든 것과 담을 쌓은 것처럼 자신만의 시간에 빠져들었다.
오직 그 순간만을 위해 사는 것처럼, 옹졸한 노인의 얼굴엔 신성한 사명감마저 엿보였다.
일을 그저 생존의 수단으로 삼아 마지못해서 하는 이들과는 다르게 순수하게 그 일을 좋아하는 사람만이 저렇게 웃을 수 있다.
어떤 의미로는 축복이고 어떤 의미로는 저주이리라.
자기 일을 정말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들은 모두 맹목적이고 타협할 줄을 모른다.
그렇기에 현실의 모진 풍파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부서지고 꺾이는 것이리라.
자신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실력이 있다면 인정받을 수 있는 시대에 태어나 존경할 만한 스승을 만났고 좋은 동료들을 만나 양보라는 그럴싸한 이름의 타협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자신도 저 노인과 비슷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저 자신은 조금 운이 좋았을 뿐이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소년은 저 노인이 자신과 퍽 닮은꼴이라는것을 받아들였다. 그는 저 볼품없는 노인이 퍽 마음에 들었다.
그렇기에 이번 요리는 그가 쌓아온요리사의 기교를 보여주는 요리가 아닌 백윤을 위하여, 백윤에게 어울리는 요리를 만들기로 하였다.
건채민육(干菜焖肉).
절강 소흥의 전통음식으로 말린 갓을 돼지고기와 함께 찐 음식이다.
짭짤한 것과 기름진 돼지고기가 어울리는 소박한 요리로 명나라 때 서 예와 그림에 능통했던 명인 서위(徐谓)가 만든 것으로 유명한 요리다.
말년에 궁핍한 삶을 산 그는 우연히 푸줏간에 간판을 써주고 그 보답으로 고기 한 덩이를 받았는데 궁핍한 살림에 소금 한 줌을 구할 수 없어 요리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마침 지난해에 절여둔 갓이 있어 그것으로 고기를 쪄 먹었는데 맛이 기가 막혀 그 조리법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한다.
그 맛은 실로 명불허전인지라 중국의 주은래 초대 총리도 이 요리를 무척 즐겨 절강에 방문할 일이 있으면 꼭 이 요리를 찾았다 하며 지금도 많은 중국인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솔직하고 꾸밈없는 그 맛은 꼬장꼬장한 저 노인네와 어쩐지 닮은 것 같았다.
이런, 너무 과한 찬사를 바치고 말았어. 소년은 손잡이를 깎기 시작한 노인의 등을 돌아보며 짤막하게 비탄의 숨을 내쉬었다.
비록 마음속으로 한 말이라도 이미 더해버린 칭찬을 뻘 수는 없었다.
잠시 백윤을 향해 그의 외모와 성격에 대한 욕설을 토로한 소년은 물에 담가 적절하게 소금기를 뺀 것을 집어 들어 물기를 쫙 뺐다.
돼지고기를 두툼하게 깍둑 썰어 뜨거운 물에 데쳐내고 맑은 물에 씻어 불순물을 제거한다.
이후 냄비에 고기가 잠길 만큼의 물과 간장을 넣고 고기를 십여 분정도 삶아주고, 이어 설탕과 말린 갓을 넣어 오 분 정도 국물이 줄어들 때까지 삶는다.
그러고 보니 유독 이 요리를 좋아하던 손님이 있었지. 이렇게 죽을 줄 알았으면 요리법을 알려줄걸, 괜히 인색하게 굴었어.
정말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것을 알았다면 조금 더 너그럽고 친절하게 살았을 것이다.
아마 대부분 사람은 이런 후회를 하겠지. 되새겨봐야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든다는 점을 제외하면 그 어리석은 후회에서 얻을 만한 이익은 없었기에 소년은 더 이상의 고리타분한 사색을 그만두고 다음 작업에 착수했다.
물이 펄펄 끓는 냄비에 시루를 올리고 그 위에 그릇을 올려 돼지고기 와 갓, 졸여진 양념을 끼얹은 다음 소흥주 약간을 뿌려 불 위에 올렸다. 두 시간 정도 쪄주면 기름기가 야들야들하고 달콤한 돼지고기 찜이 될 것이다.
소년은 백윤에게 두 시간 후에 불을 내리라 전하고는 나설 채비를 했다.
이른 시간에 나왔는데도 어느새 하늘은 불그스름하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경사의 명물인 밤놀이를 하기에 더없이 좋은 시간. 위정은 넌지시 소년에게 물었다.
“뭐 하고 싶은 것 없느냐?”
“글쎄요……. 아는 게 없어서…….”
“이제 슬슬 야시장이 설 시간이군. 수백 개의 노점이 늘어선 모습은 실로 장관이니 한번 둘러보는 것도 좋겠지. 아니면 조금 걸어야 하지만 경사 인근의 호수에선 호수 전체에 등을 걸어 뱃놀이는 할 수도 있다. 아니면 이번 기회에 여자라도 안아보겠느냐?”
위정의 말에 소년이 등을 돌려 위정을 보았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능글맞은 미소에선 아직 미성숙한 소년에게 올바른 교육적 지도를 해주겠다는 신념마저 엿보여 소년을 질리게 했다.
보통 이 정도 나이면 첫 경험을 하는 게 이 시대에선 당연한 일인가? 하긴, 옛날에는 다 일찍 결혼했다고들 하니……
경험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 딱히 여자가 고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옛말에 남자는 숟가락 들 힘만 있으면 여자를 밝힌다고 하지만 이미 한번 숟가락을 놓아본 경험이 있는 소년에게까지 해당하는 말은 아니었다.
“여자라…….”
“그래, 괜찮다면 좋은 기루로 안내해주마.”
“아뇨, 별 관심 없으니까 시장이나 들려서 가시죠. 태감님 저녁상 올려야죠.”
수상한 무리와 수상한 건물들의 틈바구니를 벗어나 다시 시장으로 돌아선 소년은 이제 슬슬 하루 일을 마감할 준비를 하는 상인들 틈바구니에서 당밀 한 단지와 좋은 영계한 마리를 골라 샀다.
“당밀과 영계라…… 어떤 요리를 할 생각이지?”
“예? 아…… 전에 쓰고 남은 호유(蠔油, 굴소스)가 남아서…… 좋은 노주 한 병을 사다가 찔 생각입니다.”
“그거 맛있겠구나……아, 노주를 파는 가게는 이쪽에 있다.”
오늘 태감의 저녁상에 낼 요리인 와준화조계(瓦䣩花離鷄)는 무엇보다도 좋은 노주를 사용하는 것이 맛의 비법이었다.
소년은 수백 병 늘어선 노주 중에서도 품질 좋은 화조주를 구매했다.
“가시죠.”
“정말 괜찮겠느냐? 오늘 나오고 나면 또 언제 이런 기회가 있을지 모른다.”
위정의 말에 소년은 이제 막 등이 걸리기 시작한 경사의 거리를 보았다.
밤의 어둠이 내려앉으며 그 속에 숨겨두었던 추악함과 역겨운 것들을 내보이지 않도록 사람들은 등에 욕망이라는 불꽃을 실어 거리를 밝히고 있었다.
곳곳에서 욕설과 고성, 비음이 오가고 그 틈새로 비밀스러운 거래가 오가는 거리.
그 모습에서 소년은 젊은 날의 난 잡했던 추억을 엿보고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예, 이만 가시죠.”
* * *
아침과 점심이 영 탐탁지 않아 부루퉁한 표정으로 업무를 하던 태감은 소년이 내온 닭에 화색을 하며 달려와 소년을 빈정 상하게 했다.
저 사람은 참 신기한 데 주는 대로 잘 먹는 건 좋은데 이상하게 주는것도 없이 얄밉단 말이지.
큼지막한 질그릇에는 윤기가 자르르 도는 닭 한 마리가 통째로 들어있었다.
소년이 칼과 도마를 가져와 먹기 좋게 즉석에서 썰어주겠다 하자 태감은 과연 어떻게 써는 것이 가장 먹기 좋고 맛도 좋을지 깊은 고뇌에 잠겼다.
“먹기 좋게 작게 토막을 치는 편이 손을 더럽히지 않고 먹을 수 있겠지요.”
“그렇지…….”
“하지만 다리 부분을 크게 썰어 손에 들고 뜯어먹으면 그 또한 사내의 기상이 느껴지는 호방한 식사가 되겠지요.”
“그래……. 손을 더럽히는 것은 귀찮지만 직접 들고 뜯는 쾌감은 말할 수가 없지…….”
태감의 깊은 고뇌엔 화병에 꽂아둔 꽃조차 함께 슬퍼하며 고개를 떨구는 듯했다.
밥 먹는데 저렇게까지 고민할 필요가 없을까? 그냥 어떻게 먹는 먹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소년은 태감의 갈등과 애간장을 끓이는 고뇌를 비웃으며 그를 부추겼다.
“작게 토막을 치면 밥과 함께 먹기 좋겠죠? 젓가락으로 쏙 집어 먹으면 얼마나 간편합니까?”
“그래, 네 말이 옳다.”
일순간 태감의 얼굴에 말간 미소가 폈다. 드디어 스스로의 결정에 확신이 선뜻 입가에 힘 있는 미소가 어리자 고개 숙인 꽃도 활짝 만개하는 듯했다.
그 모습은 보며 소년이 웃었다. 소년은 혼돈의 전령이며 불화와 갈등의 화신이었다.
“하지만 때로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할 필요도 있지요. 때론 불합리한 답이 정답일 때도 있지 않습니까?”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등을 흔들어 소년의 굽은 허리에 불길한 음영을 드리웠다.
심약한 자라면 그대로 게거품을 물만큼 음산한 미소가 매부리코 아래로 길게 늘어났다.
뱀처럼 사악한 눈동자가 희번덕거리며 태감을 노려보자 그 불길한 눈빛에 태감이 의자에 바삭 허리를 붙여 앉았다. 마치 불길함에 저항하겠다는 듯이 애처로운 움직임에 소년이 히죽 웃었다.
“생각해 보십시오. 손에 닭 다리를 쥐고 물어뜯는 모습을. 작은 토막으로는 차마 채울 수 없었던 입안을 가득 채워줄 풍족한 살점을.”
“크윽…….”
태감의 목울대가 크게 꿈틀거렸다.
침삼키는 소리가 소년에게까지 들리는듯했다.
소년은 다시금 태감의 마음속에서 흔들리는 저울에 무게추를 올렸다.
“하지만 손을 더럽히게 되겠지요. 이 얼마나 귀찮은 일입니까?”
손을 더럽힐 것인가. 손을 더럽히는 대신 벅차오르는 만족을 얻을 것인가.
손을 더럽히지 않을 것인가. 더럽히지 않고 손을 씻는 귀찮음을 덜것인가.
갈등에 흔들거리며 태감이 격한 숨을 내쉬었다. 입안에 열이 차올라혀가 마르는 듯했다.
하지만 시간은 그의 편이 아니었고 소년은 태감을 향해 악마적인 한마디를 내뱉었다.
“아아, 닭이 식겠군요.”
그 어떤 인질보다도 소중하고 애달픈 그 한마디는 태감에게 가슴속에서 울분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손을 더럽힐 것인가. 손을 더럽히 고서 만족을 얻을 것인가. 만족이란 무엇인가. 입안에 가득 들어찰 닭의 고기. 그저 한 토막의 고기로는 부족한가? 인간은 어째서 젓가락이라는 도구를 만들어냈는가.
그것은 손을 더럽히지 않고 깨끗한 식사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나. 어째서 이제 와 성현들의 배려를 무시하고 짐승처럼 달려들어온 입에 양념을 묻혀가며 고기를 뜯으려 하는가?
그의 안에서 단정하게 차려입은 학자의 혼이 태감을 성토했다.
그러자 이번엔 태감의 잊혀진 야성이 고개를 쳐들었다.
아니다. 우리는 진보하며 많은 옛허물을 털어냈기에 그 허물과 함께 본연의 순수성마저 잃어버린 것이다.
어째서 손을 더럽히면 안 되는가?
더러워진 손을 씻으면 되는 것 아닌가? 양손 가득 고기를 쥐고 입안을 채우면 안 되는 것인가?
그리하여 행복할 수 있다면, 그저보기 흉하다는 이유 하나로 그것을 포기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결코 가벼이 여길 문제가 아니었다. 석 달 열흘을 두고 심사숙고 하여야 할 문제였다.
가날픈 꽃잎이 지는 시간까지 모두 하례하여 태감은 그 문제를 가슴에 품고 싶었다. 그 문제를 가슴에 품고 영원토록 그 그윽한 향기를 향유하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은 결코 그의 편이 아니었다.
잔혹한 악마는 태감에게 피의 결단을 요구하고 있었다. 악마의 긴 혀에선 꿀처럼 달콤하고 비수처럼 날카로운 말이 흘러나와 태감에게 스며들었다.
“닭이 식겠군요. 시장에서 구해온 어린 닭이. 제 노력과 함께 차갑게 식겠군요.”
“넌…… 나에게 너무나도 잔혹하구나.”
“전 그저 태감에게 선택을 부탁드린 것뿐입니다. 합리적인 선택 말이지요.”
차가운 이성의 악마가 다시금 결단을 종용하자 태감은 두려운 현실에서 도망치듯이 결단을 토해냈다.
“잘라라, 손으로……. 쥘 수 있게.”
“예, 그러지요. 아아, 손을 씻을 물수건을 먼저 대령합지요.”
소년은 이미 태감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따뜻한 물수건을 가져왔다.
그 뜨거운 온기에 태감은 마치 노회한 괴물에게 놀아난 것만 같은 불길함이 꼬리뼈를 타고 기어오르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 분노와 오한은 머지않아 잊혔다. 소년이 닭 다리를 통째로 내오자 그 윤기 흐르는 다리에 태감의 분노는 기름진 살점과 함께 사르르 녹아내렸다.
당밀과 굴 소스의 강렬한 감칠맛과 영계의 과하지 않은 기름기, 보드라운 살점을 송곳니가 물어뜯을 때면 인류의 역사 아래에 잠들어 있던 야성미가 혈관을 타고 꿈틀거리는 것만 같았다.
“자, 밥도 있습니다.”
“왼손엔 닭 다리를 들고 오른손으론 밥을 먹는다. 주지육림이 따로 없구나.”
“아, 요리에 쓰고 남은 노주가 있는데 마시시렵니까?”
“밥이면 족하다.”
닭 다리를 다 뜯고 뜨거운 물수건으로 손을 씻고 나자 이제는 양념이 촉촉하게 묻어 있는 가슴살이 먹기 좋게 토막 나 있었다.
살점은 짭조름한 양념이 듬뿍 묻어있어 밥과 환상적으로 어울렸다.
태감의 기준으론 몹시 부실했던 아침과 점심을 만회하기 위해서인지 태감은 전투적으로 식사를 흡입했다. 송곳니로 살점을 씹어 삼키는 그는 아름다운 야수였다.
그 모습이 사뭇 처절하며 소년은 결코 문명적인 지성인답지 않은 태감의 식사법을 비웃을 기분마저 들지 않았다.
태감이 문명인 다운 품위를 회복한것은 식사가 끝나고 달콤한 후식마저 다 먹은 다음 따뜻한 차 한잔을 깨끗한 손으로 받아들었을 때였다.
흐트러진 머리를 빗어넘기고 찻잔을 우아하게 받쳐 든 모습은 방금전 닭 다리를 물어뜯던 사람과 동일인물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우아하고 근사했다.
“그래서 칼은 언제쯤 완성될 것 같나?”
“한 일주일쯤 걸릴 것 같다는군요. 다행히 여행 일정엔 영향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거 다행이구나. 식자재는 어떤 걸 챙길 생각이지?”
“그야 뭐……. 베이컨과 햄 종류, 향장도 이번에 직접 만들어볼 생각입니다. 그리고 두부를 만들 콩가루랑…….”
여행길에 먹는 음식은 그것만으로도 특별하다. 분명 궁에서 먹는 것과 비교하면 여러모로 흠이 많은 거친 음식일 테지만 탁 트인 야외에서 먹는 음식은 그것만으로도 운치가 있는 법이다.
거기에 소년이 만드는 음식이라면 분명 맛은 보장되어 있을 테니 태감으로서는 걱정이 없었다.
바람이 솔솔 부른 숲에서 먹으면 어떤 기분일까? 시원한 계곡을 바라보며 먹는 밥은 분명 기분 좋을 테지.
고된 여정의 피로를 풀 때는 달콤한 요리가 제격이고 무더운 여름밤에 모닥불을 피워 고기를 구우면 그얼마나 유쾌할지.
태감의 상상은 달콤하게 커져만 갔다.
태감의 상상을 짐작한 듯 쓴웃음을 짓던 소년이 망상에 빠져 있는 태감에게 물었다.
“혹시 이번 제사에 홍엽비 님이나 난화비 님은 참석하지 않으시는지요?”
“기본적으로 먼 여정이니 비들은 후궁에 남을 것이다. 그 대신 폐하께서 돌아오시면 긴 노고를 위로 하는 큰 연회가 있는데 아마 그때 자리를 가지시겠지.”
“그럼 이번 여행은 별다른 걱정 없이 다녀올 수 있겠군요.”
한시름 놨다는 듯이 한숨을 훔치는 소년을 보며 태감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노회한 소년이라 하여도 결국 살벌한 정치판에 서기에는 각오가 부족했다.
여기서 말하는 각오란 자신의 목숨을 걸 각오가 아닌 남의 목숨을 판돈으로 삼을 각오였다. 소년에게는 그것이 부족했다.
그러니 홍엽비와 난화비의 사이에서 줄타기하며 부담감에 몸 둘 바를 모르는 것이겠지.
하지만 그것은 애초에 반쯤은 타고 나는 것이다. 애초에 반백이 넘은 소년이 이제 와서 새로운 재능이 개화할 일도 없을 테니 그런 부분을 감안하여 쓰는 것은 자신의 역량에 달린 일이다.
“그러고 보면 네가 실제로는 중년인이라서 다행이다. 사실은 널 정치판에 끌어들인 것이 못내 후회스러웠거든. 내가 못 할 짓을 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그럼 제 본래 나잇대로 대접해 주시지요?”
“애석하게도 여긴 나이보다 직급이 우선인 곳이라.”
불쾌하게 일그러진 소년의 얼굴을 보며 태감은 차가 맛나다는 듯이 일부러 홀짝거리는 소리를 크게 냈다.
그 얄미운 모습에 소년은 내일 태감의 저녁상에 고기를 내지 않겠노라 결심했다.
소년의 단호한 각오가 전해졌는지 태감이 표정을 바꾸며 능글맞게 웃었다.
“아니, 김대인. 설마 이런 일로 화가 나신 것은 아니시겠지요? 이 양모가 큰 실례를 했습니다.”
“하이고, 됐습니다. 대인은 무슨…….”
그렇게 한동안 주종은 능청을 떨며 한담을 나누었다. 그리고 그들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이내 과도한 열기를 띠기 시작하며 주종을 팽팽하게 대립하게 했다.
주제는 내일 점심이었다.
“가끔은 부드럽고 속을 편하게 만드는 음식을 드셔야 합니다! 부드러운 요리로 하시지요.”
“난 아직 배가 고프다. 고기를 내거라!”
“그리는 것 못하겠습니다! 차라리 제 목을 치시지요!”
“어찌 고기는 담백하고 속이 편하지 않단 말이냐! 요리사가 되어서 어찌 그런 편협한 생각에 사로잡혀있느냐?”
아무 일도 없이 평탄하게만 흘러가는 오늘. 그리고 오늘과 다를 바 없을 내일은 소년에게 편안함을 주었다.
홍엽비와 난화비의 사이를 중재하고 남양궁에서 범인을 색출하며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긴장되었던 나날이 누그러지며 비로소 마음의 피로감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이렇게 태감과 내일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소년은 그런 안온한 나날이 계속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칠성제가 끝나고 궁에 돌아오면 본격적으로 난화비를 중심으로 파벌을 만들게 될 것이다.
안양비의 파벌과 대립하기 위해 안으로는 홍엽비와의 관계를 돈독히하고 밖으로는 부여비와 라하비를 끌어들여 사대 일의 구도를 만드는것이 최종적으로 태감의 계획이었다.
그리하기 위해선 누구보다도 실무진인 소년의 고생이 불가피했다.
닥쳐올 고난을 눈앞에 두고 소년인 잠시만 지금의 편안함을 즐기기로했다.
“아 그러니까 내일 점심은 생선 아니면 두부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