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52화
소년은 위정의 안내를 받으며 인외마경 같았던 골목길을 지나 큰 대로의 시장으로 나올 수 있었다.
광활한 영토를 지배하는 제국의 수도답게 시장은 그야말로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다는 우스갯소리를 다시금 떠올릴 만큼 방대한 물산을 자랑했다.
소년이 다섯 걸음을 옮기는 동안 지나친 것만 하여도 자라에 식용전갈, 서방에서 들여온 안경사코브라)에 물방개.
심지어는 두개골을 쪼개 말간 분홍색의 뇌가 엿보이는 양의 머리마저도 진열되어 일상적으로 소비되고 있었다.
“오, 대추야자도 있군요.”
탕수육을 만들 때 사용했던 디비스의 원재료인 대추야자도 잘 익어 금방이라도 꿀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것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저것을 으깨고 졸여 한 방울의 즙으로 만들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그 떨떠름한 추억을 회상하며 소년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리고 그 모습에서 회한 서린 추억을 읽은 위정이 말없이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먹고 싶다면 사주마.”
“오, 통도 크셔라.”
“내 돈이 아니다. 태감께서 내주신것이지.”
“그렇군요. 뭐, 여기서 군입거리 찾을 시간 없으니 이만 가시지요.”
소년은 권한 위정이 무안할 정도로 상쾌하게 대추야자 상인의 앞을 지나갔다.
위정은 씁쓸한 표정으로 주머니를 갈무리하고 소년의 뒤를 따랐다. 다리를 절뚝거리면서도 식재료를 고르는데 열정을 발휘하는 소년의 표정은 후궁에선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위정은 소년이 어떤 음식을 할지 궁금해졌다. 잠시 후면 그 답을 알수 있을 텐데도 그 잠깐의 기다림을 참기 힘들었다.
소년의 솜씨는 천재적이라는 말조차 무의미할 만큼 원숙했다. 그가 죽여야 한다는 위기감을 느낄 만큼.
너무나도 뛰어난 솜씨는 위화감을 느끼게 할 정도였다.
그 뛰어난 요리와 요리에 어울리는 술. 소년은 심지어 양조에도 일가견있었다.
태감이 먹는 것을 보고 때로는 자신도 그 향락을 함께하며 위정은 어느새 소년의 요리에 중독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역시 그때 죽였어야 한다고 자책하며 어느새 소년이 이번엔 어떤 요리를 낼까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남에게 엄격한 만큼 스스로에게도 엄격한 위정은 자신을 꾸짖는것 또한 잊지 않았다.
“무엇을 만들 생각이냐?”
소년이 작심하고 실력을 보이겠다 하면 보통 요리가 아닐 것이다. 그뛰어난 칼솜씨가 돋보이는 요리를 만들까?
아니면 요리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불을 다루는 기술이 돋보이는 요리?
어쩌면 보통 요리사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고급스러운 재료를 풀어낼지도 모른다. 소년의 시선이 스쳐 지나가는 재료를 위정이 되새겼다.
청경채와 겨울에 채취해 말린 죽순. 그리고 표고버섯. 소년이 고르는 재료는 무엇 하나 대단한 것이 없는 평범하고 무난한 재료들이었다.
늘 일상적으로 오르는 재료들에 위정은 새삼 실망감이 들었다.
“무엇을 만들 생각이냐?”
“예? 뭐 그냥…… 볶음요리나 하나할까 생각 중입니다.”
“이것들로?”
“예.”
소년의 말에 위정은 표정을 숨겼지만 내심 한숨을 쉬었다. 이것들로 어찌 맛 좋은 볶음을 만들겠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과묵한 무인의 표상과도 같은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게 그는 애주가이며 그만큼 미식가이기도 했다.
다른 미식가라고 자칭하는 이들이 천박하게 음식만을 탐하는 것과는 달리 그는 음식의 맛뿐만 아니라 조리하는 법에도 해박한 편이었으며 휴일에는 아내에게 직접 요리를 해줄 만큼 나름대로 솜씨도 있는 편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소년이 만들겠다 한 볶음요리에는 육수를 낼 만한 고기가 조금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무식한 이들이야 왜 볶음요리에 육수가 필요하나 야유를 보내겠지만 그것은 그들의 무지에서 빚어진 오해이며 평소 먹을 줄만 알지 그 내막에 관심을 두지 않는 그들의 무심함을 자랑하는 일이다.
맛 좋은 볶음요리, 그것도 고기를 사용하지 않는 볶음요리라면 그에 상응하는 질 좋은 육수를 살짝 둘러맛을 입히는 것이 기본이다.
하물며 고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절간에서도 버섯을 우려낸 육수로 맛을 내니 화려한 불꽃을 자랑하는 볶음요리 맛은 사실 진득하게 우려낸 육수가 좌우하는 셈이다.
물론 고기를 좀 썰어 넣으면 육수를 보충할 만한 감칠맛이 나오겠으나 소년은 도통 고기를 파는 푸줏간으로는 발걸음을 옮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것이 못내 안타까워 위정은 소년에게 그것을 물었다.
“예? 왜 고기를 사지 않냐 굽쇼?”
“그래. 평범한 가정의 가정요리에서야 굳이 육수를 써 고급스러운 볶음요리를 낼 일이 없겠지만은 너 정도 되는 요리사가 그리 허술한 요리를 낼 거라고는 생각이 안 드는구나.”
“왜 육수가 없습니까?”
“뭐라고?”
황당해하는 위정의 앞에서 소년이 작은 호리병을 꺼내 들었다. 위정이 서둘러 그 뚜껑을 열고 맛을 확인하자 그 그윽한 풍미에 탄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오래 묵은 노계에 화퇴(火腿)를 넣고 우려낸 최고급 상탕이었다.
황당한 위정의 표정에 소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칼잡이가 칼을 챙겨 다니고 상인이 돈을 챙겨 다니듯이 저도 나름 요리사 나부랭이 인지라 평소에 밥 벌어먹을 도구는 챙겨 다닙니다. 물론 오늘은 철방에 가는 거니 칼과 철과는 챙기지 않았지만, 육수와 향신료는 항상 들고 다니지요.”
소년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혀를 끌끌 차며 웃으며 다시 육수가 들어간 호리병을 갈무리했다.
“그리고 고기도 사긴 살 겁니다. 다른 요리에 쓸 거긴 하지만…….”
소금에 절인 갓을 고른 다음에서나 소년은 푸줏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의 인파 속에서 체구가 작은 소년은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것처럼 위태로워 태감은 소년의 뒤에 바짝붙어 걷기 시작했다.
껍질이 붙어 있는 오겹살을 고른 소년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위정에게 물었다.
“전에 부탁드렸던 건 어떻게 되었습니까?”
소년의 말에 위정은 잠시 말을 곱씹었다. 마치 소년이 충격을 받지 않게 배려하려는 것 같아 소년은 가만히 위정이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렸다.
둘은 잠시 북적거리는 시전에서 멀어져 골목길의 어둠 속에서 숨을 돌렸다. 잠시 후 위정이 말을 꺼냈다.
“조사해본 결과, 너에게 명령을 내렸다는 환관, 너에게 식재료를 전달했던 나인들, 너를 기억할 만한 이들의 정보가 전부 말소된 것을 확인했다.”
“정보가 말소되었다면 사람도 함께 없어 졌겠군요.”
“아마 그럴 테지.”
어쩌면 자신의 핏줄에 대해 알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인데도 소년은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이 하품을 쩍하며 무심함을 내보였다.
그것을 담대하다고 표현해야 할지 위정은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아마 그 배후는 그 문……뭐시기 하는 사람이겠죠?”
“아마 틀림없이 그분일 테지.”
전 동창 제독 문일. 전 황궁 최고의 고수이자 최고의 정보전문가. 선황 폐하를 모시기 위해 함께 은퇴한 이의 이름이 다시금 들려오는 것은 어째서 일까?
우린 아직 선황 폐하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일까?
상념에 빠져 있던 위정을 올려다보며 소년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숨겨진 출생의 비밀을 꿈꿔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철없을 국민학교 시절의 이야기였다.
이제 반백 살이 넘은 노인에게 들이밀기에는 너무 진부하고 피곤한 소재가 아닌가.
* * *
소년이 재료를 사 들고 철방에 도착했을 때 노인장은 이미 소년이 쓸만한 철과와 식칼 한자루를 준비해두었다.
착 가라앉은 회색으로 빛나는 칼날은 예리했고 갈라진 부분 없이 매끈한 나무 손잡이는 손에 감기는 느낌이 우수했다.
애써 흠을 찾아보려 했던 소년은 흠잡을 부분을 찾을 수 없자 괜스레 짜증이 났다.
노인장은 소년이 사 온 재료가 탐탁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뭔데 순 풀떼기만 사 왔어?”
“그럼 뭐가 예쁘다고 고기를 사옵니까? 주는 대로 드쇼.”
“하여간 벼룩의 간도 아까워할 새끼 같으니.”
“그런 귀한 걸 어찌 내놓겠소? 노인네가 욕심도 많지.”
소년과 노인은 정숙한 학자라면 당장 귀가 더러워졌다며 냇가로 달려갈 만한 쌍욕을 모국어처럼 화려하게 구사했다.
평생의 절반 이상을 검날 위에서 살아온 위정조차 이렇게 다양한 욕설은 처음 들어볼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둘은 마치 죽마고우처럼 친숙해 보였다. 어쩌면서로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장인들끼리만 통하는 무언가가 있는 것일까?
위정을 뒤에 세워두고 둘은 욕설과 고함, 조롱을 뒤섞어가며 주방으로 향했다.
남자 혼자 사는 집답게 주방은 더럽고 초라했다.
소년은 혀를 끌끌 차면서 아궁이에 장작을 밀어 넣고 풍로로 바람을 불어넣어 불을 피웠다.
“흥, 그거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
“허이구 보다 놀라서 애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쇼.”
청채초동순(靑菜炒冬筍).
소년은 우선 청경채를 먹기 좋은 크기로 썰었다. 미리 쌀뜨물에 불려두었던 말린 겨울 죽순은 청경채와 비슷한 크기로 저미고 표고버섯은 단면적이 넓어지도록 비스듬하게 썰었다.
칼이 도마를 두드리는 소리는 낮고 일정한 운율을 타고 있었다. 그것을 보는 노인장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소리가 끊어짐 없이 일정한 것은 그만큼 재료의 특성을 완전히 꿰차고 있어 손질함에 막힘이 없다는 뜻이고 소리가 낮은 것은 그만큼 식재료를 손질함에 과하게 힘을 주지 않고 부드럽게 처리한다는 것이니 그 하나만으로도 노인장은 소년의 솜씨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었다.
“흥, 칼솜씨는 인정하겠지만 요리의 기본은 불 다루는 기술이지.”
“예이 예이 남들 다 아는 거 말해줘서 고오오오맙수다.”
달아오른 철과에 기름을 두르고 죽순과 표고버섯을 살짝 익혀 건져낸다. 기름을 버리고 새로 기름을 두른 다음 파와 마늘을 넣고 향을 낸다.
향이 기름에 배면 우선은 청경채의 두꺼운 흰 부분을 먼저 넣어 흰 부분이 투명해질 때까지 볶아낸다.
센 불로 빠르게 볶아내는 것이 중화에서 말하는 초(炒)의 기술이다.
그런데도 소년은 이마에 땀방울을 매달며 진득하게 시간을 들였다. 청경채의 흰 부분에 투명한 빛이 감돌고 은은한 향채의 향이 부풀어올라 주방 안을 적실 때 즈음에 소년은 청경채의 푸른 부분과 표고, 죽순을 넣고 강한 불에서 빠르게 볶아냈다.
평생을 불 앞에서 산 노인이 일순간 놀라 반걸음 물러설 만큼 큰불앞에서 소년은 철과를 휘둘렀다.
부드러운 손목의 움직임에 따라 춤을 추는 재료들 사이에 소흥주를 흘려 넣고 달콤한 향기과 고소한 기름기가 채소에 배어들자 소년은 마지막으로 준비해둔 육수를 흘려 넣고 소금으로 간을 했다.
“오래 놔두면 물기 생기니까 후딱 드쇼.”
완성된 요리는 별다른 장식 없이 질박하게 담겨 나왔다. 채소는 하나하나 기름이 둘려 은은한 윤기가 있었고 설익거나 너무 익어 물러진 것없이 균일했으며 큰불에 휘감겼는데도 타거나 한 곳이 없었다.
볶음요리를 해부하듯이 뚫어지게 보던 노인이 젓가락을 들어 올렸다.
아삭아삭하고 말랑말랑한 식감이 관능적으로 교차했다. 청경채의 은은한 풋내와 경쾌한 식감, 말린 죽순의 꼬들꼬들함, 표고버섯은 씹으면 말랑하니 육즙이 쫙 배어나와 봄비처럼 혀를 촉촉하게 적셨다.
일류의 솜씨가 아니라면 단순한 재료의 맛을 여기까지 이끌어낼 수 없을 것이다.
불과 냄비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소년의 솜씨가 여실히 드러나는 맛이 늙은 장인의 심기를 건드렸다.
“우라질! 염병하게 맛있군.”
“염병하게 맛이 있으면 이제 염병할 값을 하쇼.”
“오냐 염병할 놈아. 육시랄 놈 같으니, 말 한마디가 고운 법이 없어.”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말아시우?”
퉁명스러운 소년을 향해 으르렁거리면서도 결국 노인장은 먼저 자신의 자존심을 꺾었다.
반듯하게 서서 소년에게 손을 내밀자 멀뚱히 내밀어진 손을 보는 소년에게 노인장이 먼저 인사했다.
“백윤이라고 한다. 백노라고 부르든, 아까처럼 노인네라고 부르든 맘대로 불러라.”
“아까 소개했지만, 오운입니다. 뭐애새끼든 쌍놈 새끼든 편하실 때로 부르십시오.”
서로 간에 비릿한 웃음을 교환한 둘은 이내 더러운 것을 만졌다는 듯이 잽싸게 손을 놓고는 옷자락에 손을 문질렀다.
한결같이 성격 나쁜 둘의 모습에 위정은 둘이 꼭 닮은꼴이라고 생각했다. 둘이 그 속마음을 들었다면 위정의 머리를 깨 놓겠노라고 난동을 부렸으리라.
백윤은 온갖 욕설을 토해내면서도 꾸역꾸역 청경채 볶음을 밥도 없이 다 먹어치웠다.
기름이 번들거리는 입술을 핥으며 거나하게 트림을 한 백윤은 이내 혀를 끌끌 차며 소년의 손을 보았다.
“쯧쯧, 아직 나이가 안 차서 나이가 들 때마다 손잡이를 바꿔야겠군.”
“그때까지 노인네가 살아 있을까?”
“나 뒤지면 알아서 바꿔야지.”
“염병, 오래 사슈.”
“고맙다 개놈아.”
백윤은 소년을 끌고 창고로 들어가 수십 개의 나무를 꺼냈다. 쥐기 좋게 둥글게 깎인 봉 모양의 나무중에서 백윤은 몇 가지를 골라 비교하더니 그중 하나를 소년에게 건넸다.
“질기고 튼튼하기론 물푸레나무가 제일이지. 한번 쥐어봐라. 굵기가 손아귀에 딱 잡히는 놈을 골라봐.”
소년이 손에 딱 맞는 적당한 굵기의 봉을 고르자 이번엔 검은 먹 가루를 가져온 백윤이 소년에게 먹 가루를 묻히고 다시 봉을 잡으라고 했다.
“왜 그러는 거요?”
“먹 가루가 묻은 자국으로 네 손에 감기는 부분을 파려고 그런다. 그렇게 하면 손에 착 감기고 잘 미끄러지지 않지.”
“호오.”
백윤의 말에 소년이 이번엔 때 묻지 않은 순수한 감탄사를 터뜨렸다.
병장기의 손잡이도 아니고 그저 식칼의 자루에 이렇게까지 공을 들일줄이야.
소년은 이 늙은 대장장이가 퍽 마음에 들었다.
유심히 먹자국을 보며 본을 뜬백윤이 이내 소년을 턱짓으로 불렀다.
“이제 칼날인데, 뭘 쓸 거냐. 산동에서 나는 강철이 탄성이 좋고 가벼워서 좋지. 아니면 사천에서 나는 화극철(華極鐵)을 써볼 테냐? 단단하기로는 다섯 손가락안에 꼽는 철이지, 조금 무겁지만. 아니면 신강에서 들여온 철이 있는데…….”
“오철(鳥鐵).”
그의 말을 가로막고 소년이 던진 한마디에 백윤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철없는 어린놈이 객기를 부린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며 곰방대에 불을 붙인 백윤이 한 모금을 쭉 빨고는 한숨과 함께 담배 연기를 토해냈다.
“어린놈이 어디서 들은 건 있어가지고…… 너 오철이 무슨 철인지는 알고 하는 말이냐? 검으로 만들면 차돌을 깨고 창날로 벼리면 갑옷을 입은 사람을 꿰고도 예기가 죽지 않는다는 철이다. 황실에서 공을 세운 장수에게 내리는 검 중에서도 가장 위계가 높은 삼검 중 하나인 호국검의 주재료이기도 하지. 그런 철은 네 식칼을 만드는데 쓰겠다고? 돈이 썩어나냐? 아니, 애초에 오철은 황실에서 관리하는 철이라 돈이 있다고 구할 수 있는 물건도 아니다.”
백음의 장황한 설명에 소년은 품안에 있는 꾸러미를 더듬었다.
그 황제는 어쩌자고 그런 철은 자신에게 준 것일까? 이걸 정말 칼로 만들어도 좋은 걸까?
잠깐 망설였던 소년이 품에서 꾸러미를 꺼내 탁자에 올렸다. 황제 폐하가 자신에게 이런 철을 내린 것은 자신에게 그만한 가치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어찌 꼴사납게 그 기대가 무겁다고 뒷걸음질 칠 수 있을까.
그리고 자신은, 그런 철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자신도 생각했다.
소년이 내민 꾸러미를 끌러본 백윤이 꾸러미 안쪽의 철을 꺼내 들고는 혀로 핥으며 맛을 보았다.
“너…… 이거…….”
“오철이요. 다룰 수는 있소?”
“뭐? 다룰 줄 아느냐고? 애초에 그걸 기대하고 온 것 아니냐?”
“그건 그렇지.”
피로감과 짜증에 물들어 있던 백윤의 눈동자에 젊은 패기가 타올랐다.
그것은 도전자의 눈이었다.
“내 살다 살다 오철로 식칼을 만들게 되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젊은 날이었다면 네놈을 때려죽여서라도 검을 만들었겠지만…….”
짧은 순간 백윤의 눈동자에 스친 회한의 감정을 소년은 모른 척 묻어두었다.
대단한 실력을 갖추고도 이런 후미진 곳에 간신히 철방을 유지하고 산그의 생에 얼마나 많은 회한과 울분이 쌓였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만했다.
소년의 시선을 마주하고 백윤은 갈라진 입술을 비틀어 웃어 보였다.
“어차피 병장기야 잘 만들든 못 만들든 결국 피를 마시기 위한 물건이지. 차라리 식칼로 만들면 많은 이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으니 내세에 공덕을 쌓는 일이야. 그것을 조금더 젊은 나이에 깨달았으면 좋았을 것을…….”
“젊은 날에는 모르지. 나이가 들어야만 눈에 보이는 것이 있지 않소.”
소년의 말에 백윤은 헛웃음을 지었다. 어린놈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늙은이 같은 말을 하는 것이 우습기도 하고, 그런데도 소년의 말이 자신에 못지않은 회한에 가득 차 있어 그 삶에 찌든 표정과 기묘하게 어울렸기 때문이다.
어린놈이 뭘하며 살았기에 그 나이에 그런 표정을 짓누. 혀를 끌끌차던 백윤은 이내 관심을 철로 돌렸다.
“좋아, 어디 한번 해 보자고.”
“선수금은?”
“대충 되는대로 놓고 가라. 어디…… 일주일 후에 오고.”
“알겠수. 수고하쇼. 아, 밥 한 가지 더 해놓고 갈 건데 작업 끝내면 데워 드쇼.”
“오냐.”
백윤은 이미 철에 빠져 그들에게 흥미를 잃었는지 건성으로 대꾸했다.
그 굽은 등을 물끄러미 보던 소년은 이내 철과를 들고 주방으로 향했다. 그사이, 위정만이 멀뚱히 남아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갈피를 못잡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