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49화
“오늘 협조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후궁의 불순분자들을 색출할 수 있었습니다.”
“아니요. 그동안 제가 무력하여 궁의 기강을 바로잡지 못했으니 제 책임이지요. 그것을 도와주셔서 오히려 제 쪽에서 감사의 인사를 드리는것이 옳습니다.”
식사 이후, 장소의 쪽지를 받은 태감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 배부른 만족감에 젖어 있던 홍엽비를 ‘설득’했다.
나름 사회경험이 있는 편인 소년조차 듣지도 보지도 못한 온갖 중상모락과 날조에 비방이 더해져 도저히 설득이라 부를 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홍엽비는 그들의 계획대로 ‘설득’당했고 소소의 가슴 아픈사정에 공감하고 분노했다.
거기에는 자신이 무력하여 남양궁에서 제대로 중심을 잡지 못하고 나인들에게 휘둘렸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는 죄책감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아직 암투와 모략에 익숙하지 않은 비교적 순수한 성정이 남아 있어서 인지 노회한 태감의 혀에 제멋대로 휘말린 끝에 마침내 홍엽비는 평소라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남양궁전체 나인과 궁인에 대한 전면적 수사와 체포를 허락했다.
실권이 있든 없든 간에 남양궁의 주인인 홍엽비의 허락이 떨어지자 태감과 동창은 다른 후궁세력의 견제가 들어오기 전에 즉각적으로 행동에 나섰다.
미리 심증을 가지고 범인을 특정해둔 덕에 수사는 막힘없이 진행되었고 사람의 입을 여는 역사와 전통의 방법으로 인하여 범인을 색출하는것 또한 순조로웠다.
그렇게 몇 개의 손톱과 이빨이 빠져나가고 손가락의 마디 한두 개도 없어질 때 즈음에, 결정적인 증인으로 남양궁에서 일하던 나인 중 피해자들을 증인으로 세움으로써 남양궁에서의 일은 더 이상 누구도 그 행사가 과하다고 비난할 수 없도록 완벽하게 진행되었다.
계획은 막힘없이 진행되었다. 표면 상으로는 나인들의 증언으로 명분을 쌓고 그 뒤로는 동창의 전문가들이 정보를 쥐어짜는 것.
그 사이에 남양궁의 다른 나인들은 태감의 입김이 닿은 이들도 채워졌다.
그들이 남양궁에 배치되기 전 꽤 자극적인 구경거리를 관람시켜 정신을 다 잡아주었기에 다시는 홍엽비의 권위를 의심하여 업신여기거나 무례하게 구는 이는 없을 것이다.
관련자는 전원 처벌을 피하지 못했다. 가장 형량이 가벼운 이들도 파직당하며 그동안의 급여를 모조리 환수당하였고 죄질이 중한 이들은 노비가 되었다.
그리고 이 일의 주범인 궁인 소묘는 사형을 당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소묘의 심문 도중 발작적으로 난동을 부려 증인으로 불려온 나인에게 상처를 입히는 등의 가벼운 소동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잘 마무리되었으며 죄인의 형은 아흐레 후 집행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상이 태감이 작성한 보고서의 내용이었다. 결과적으로 홍엽비 님은 불순분자를 일소하여 좋고 태감님은 홍엽비 님의 지지를 얻어 좋고 난화비 님도 이 일로 이득을 보았으니 일하던 나인 하나가 목숨에 지장이 없을 정도의 가벼운 상처를 입은 것은 눈에 들어올 만한 일이 아니다.
그러니 아랫사람의 일은, 아랫사람이 슬퍼할 수밖에.
싸구려 백주는 오직 취기만을 목적으로 만들어져 향기나 맛이라곤 조금도 없는 것으로 어린아이가 마실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백주를 물처럼 들이키는 소년을 옆에선 장소나 이삼은 말리지 않았다.
그건 취할 만한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태감의 호위라는 직책이 없었다면 그들도 함께 술을 마시고 싶었으니까.
서류상으로는 그저 나인 한 명이 상처를 입어 위로금을 전달한다고 끝났지만, 그들에게는 서류상의 먹물 한 방울이 아닌 소소였다.
나이도 어린것이 상처를, 그것도 얼굴에 흉이 지도록 다쳤으니 이를 어찌할까.
이제 궁을 나서면 한창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해야 하는데, 그 어린것의 얼굴에 흉이 졌으니 이제 어찌한단 말인가.
소년은 말없이 백주를 들이킬 뿐이었다. 누구를 탓해야 할까. 일을 계획한 태감? 이렇게까지 남양궁을 방치한 홍엽비? 고문당하던 도중 발작을 일으킨 소묘?
소소를 구슬려 증인으로 세운 자기 자신.
소년의 목구멍으로 하염없이 술이 흘러 들어갔다.
불과하게 취한 것 같은데도 목구멍은 후끈후끈하지만, 정신은 또렷했다.
무슨 일인지, 보통이면 애미 애비 못 알아보고 욕하고 토하고 드러누워야 할 텐데도 그럴 기분은 들지 않았다. 혀가 꼬이거나 하지도 않고 균형감각이 어지럽지도 않다.
젊어서 그런 걸까?
기이한 일이었지만 소년은 그런 인체의 신비에 깊이 탐구할 만큼 여유가 있지 않았다. 소년이 세 병째 백주의 마개를 뽑았을 때 태감이 들어왔다.
“대낮부터 술을 푸고 있구나.”
“이럴 때 마시지 않으면 언제 또 마시겠습니까.”
“……그렇지. 나도 한잔 다오.”
자기혐오와 비관의 늪에 가라앉은 듯한 소년의 앞에 앉아 태감은 소년이 안줏거리 삼아 가져다 둔 볶은 땅콩을 입으로 가져갔다.
짭짜름하게 소금기가 배어 있는, 그것뿐인 땅콩 한가지. 싸구려 술을 마시기에는 좋은 안주였다.
소년이 잔에 넘치도록 술을 따르자 태감이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싸구려 주정의 향기, 오직 취하기만을 목적으로 백정이나 낭인이 아니면 마시지 않을 백주를 들이켰다.
“취하기엔 좋은 술이다만, 다음부턴 조금 더 좋은 술을 마셔라.”
“취하고 싶을 땐 이런 술이 제격이지요.”
쓰레기 같은 기분에 잠기기에 좋은 술이다. 둘은 세 번째 병이 다 비워질 때까지 술잔을 기울였다.
술병에서 마지막 한 방울이 떨어지고 소년이 네 번째 병을 집어 들자 태감은 무심하게 내뱉었다. 어투가 사나워 마치 소년을 질책하는 듯했다.
“왜 네가 자책을 하고 있느냐. 계획을 입안한 것도 나고 명령한 것도 나이다. 너희들은 내 수족이었을 뿐이야. 그러니 계획에 대한 책임도 모두 나에게 있다.”
그러니 소소가 다친 것도 모두 내 책임이라는.
결국 제아무리 대단하다는 후궁의 권력자도 사람이라는 것이다.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기에 오히려 평소보다 날카롭게 대하는 태감을 보며 소년은 말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후궁에서 가장 권세 높은 동창의 제독도, 반백을 넘긴 그조차도 결국은 감정과 양심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피로와 권태에 찌든 표정으로 목을 의자에 대고 천장을 올려다보던 소년은 화제를 돌렸다.
“왜 수사는 소묘에서 끝냈습니까.”
툭 던져진 소년의 말에 태감은 시간을 끌며 생각을 가다듬었다. 소년에게 해줘도 좋을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정리하는 중이리라.
“너도 알다시피 식재료에 발린 독은 사람을 죽일 만한 맹독은 아니었다. 건강한 사람이라면 열병과 배앓이를 할 정도의 가벼운 독이지. 아마 몸이 약해진 홍엽비라도 충분히 견딜만한 독이었을 거야.”
“장 태감님을 추궁하기에는 약한 재료였군요.”
태감의 말에서 장 태감과 관련된 단서는 하나도 없었지만, 소년은 당연히 장 태감이 범인이라는 듯이 말했다. 그에 양 태감 역시 그에 반박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장 태감이라면 오히려 소묘를 중간에 암살함으로써 꼬리를 자를 가능성이 크지. 결국, 정치판도 사람과 사람의 관계인 법이다. 뭔가 하나를 받았으면 하나는 내줘야 하는 법이야.”
차라리 소묘의 목숨을 쥐고 정보를 토해내게 함으로써 남양궁의 실권을 쥐는 편이 이득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내막을 대충이나마 알게 된 소년은 그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어차피그런 것을 고민하고 계획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었으니까. 소년이 궁금한 것은 다른 것이었다.
“소소는 어떻게 됩니까.”
태감은 이번에도 말이 꺼내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이번엔 소년에게 해줄 말을 고르기 위해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아닌 어디까지나 말문이 막혔기 때문이었다.
소년은 태감의 입이 열리기를 끈질기게 기다렸다.
깊게 가라앉은 소년의 눈동자를 피하며 우물쭈물하던 태감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고향으로 돌아가게 될 거다. 물론 위로금이 전달될 거고 관할 포청에 소소의 이름을 전하여 특별관리대상으로 경호해줄 거야. 고향에 내려가서도 나쁘지는 않을 거다.”
태감은 마치 변명을 하는 듯했다.
그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여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제아무리 대단한 권력자라도 아랫사람 한 명에게 보상할 수 있는 금액은 한정적인 법이다.
본래대로라면 위로금 약간이 전부 일 것인데 그래도 포청에 청탁을 하는 것은 태감의 나름대로 성의 표시를 한 것이다.
그렇기에 소년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 이해한다는 듯이 태감을 향해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한숨을 몰아쉬며 주방 한쪽에 놓아둔 쌀독에서 쌀 한 됫박을 퍼 올렸다.
갑작스러운 소년의 행동에 다른 사람들이 궁금해하자 소년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웃었다.
“고향에 내려가 밥 벌어먹을 재주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설령 음식 장사를 하지 않는다고 해도 좋아하는 음식이니 알아두면 손해 볼 일은 없겠지. 쌀을 물에 불리던 소년이 고개를 들어 창밖에 저물어가는 태양을 올려다보았다.
분명 성공적으로 일을 끝냈고 다 잘 풀렸으니 기쁘며 축배를 들어야 했을 텐데. 지금 만드는 것이 위로의 음식이 아니라 축하연회를 장식할 음식이어야 했는데도.
결국 세상에 완벽한 해피엔딩이란없는 거야.
“최소한, 이 후궁에서는.”
모두가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 전력으로 달리고 있지만, 사실 불행에서 도망친 방향은 행복과도 떨어져 있는 것 아닐까.
술을 마셔서 그런지 유난히도 감상적으로 되는 날이었다. 물끄러미 지는 해를 보던 소년은 다시 굽은 허리를 더 숙이고 쌀을 씻었다.
* * *
“다녀왔습니다.”
“……어서 오렴.”
소소는 그들의 생각보다 훨씬 더 빨리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뺨에 날카롭게 베인 흉터는 의원이 지혈하고 실력 좋은 약사의 연고를 발라 처음 베였을 때보다는 작아졌지만 여전히 선명하게 왼뺨에 새겨져 있었다.
앞길이 구만리 같은 것이 앞으로 어찌할꼬.
남자라면 자랑스러운 훈장이라 웃어넘길 수도 있겠지만 체구도 작은 소소의 뺨에 생긴 흉터는 너무 눈에 띄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참담한 심정을 느끼게 했다.
“와, 이 량피 저 주시려고 한 거예요?”
“그래, 많이 먹으렴. 또 다른 거먹고 싶은 건 없니?”
“오운 님이 해주시는 건 다 맛있으니까, 아무거나 다 괜찮아요.”
“그래? 그럼 닭이라도 한 마리 튀겨볼까? 돼지고기는 조리고, 좋은 농어도 들어왔으니 쩌보자꾸나. 오리는 탕이 좋겠지?”
하지만 소소는 오히려 소탈하게 웃었다. 잔뜩 겁먹어 움츠러들었던 어린것이, 늘 기가 눌려 의기소침해있던 계집아이는 이제 얼굴에 흉터를 남기고도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소년은 자신이 처음으로 소소의 웃는 얼굴을 본다는 것을 깨달았다.
흉터가 남기 전에 웃을 수 있게 해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다시금 감정이 벅차오를 것만 같아 소년은 서둘러 고개를 돌려 칼을 들고 재료 손질에 열을 올렸다.
이 나이를 먹고도 자신은 여전히 철이 없었다.
헤실헤실 웃으며 량피를 먹는 소소에게 도저히 괜찮냐는 그 한마디를 물어볼 수가 없었다. 막상 물어보면 그 순간 웃고 있는 소소의 눈물샘이 터질 것만 같아, 원망의 말을 듣는것이 무서웠다.
역시, 사람이 나이를 얼마나 먹었느냐로 어른이 되는 건 아닌 것 같아. 스스로 자조하며 소년은 마침내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비틀어 열었다.
“괜찮……니?”
좀 더 의연하게 물어볼 수는 없었을까? 자기 자신에 대한 자책과 부끄러움으로 소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다행히 소년은 소소를 등지고 있어 소소는 소년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잠시 고민을 하고 생각에 잠겨 있던 소소는 이내 발그레하게 웃었다.
“괜찮아요. 원래 그렇게 예쁜 얼굴도 아니었는걸요.”
“너 정도면 꽤 이쁜 편이지.”
“에이, 궁에 얼마나 예쁜 분들이 많은데요.”
별다를 것이 없다는 담소를 나누며 매콤하게 무쳐낸 량피 한 그릇을 후루룩 먹어치운 소소는 개운하다는 듯이 기지개를 쭉 켜고는 소년의 옆으로 다가와 도마 옆에 섰다.
닭의 내장을 빼내고 오향분과 소금으로 밑간을 하던 소년에게 다가와 그것을 들여다보던 소소는 귀까지 빨간 소년의 얼굴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정말 괜찮아요.”
“……그래. 그럼 됐다.”
괜찮다는데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소년은 소소에게 다른 위로의 말 대신 밤새 적은 요리책을 내밀었다.
“너도 고향 내려가면 밥 벌어먹을건 있어야지. 만약 요리로 장사할 생각 없으면 외워만 두었다가 잔치할 일 있을 때 쓰거라.”
“……이런 걸…… 주셔도 괜찮은 거예요?”
사실은 좀 더 고급스러운 요리의 비법도 알려주고 싶었지만 곰 발바닥에 낙타의 혹, 해삼과 전복에 사슴의 힘줄 같은 요리를 앞으로 소소가 만져볼 일이 얼마나 있을까 싶어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닭과 돼지고기 요리 위주로 시전에서 팔기에 좋은 간단한 요리들을 정리해 적어넣었다.
소년은 미안한 마음뿐이었지만 소소는 마치 보물을 받아들듯이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책을 받아들여 남이 볼까 서둘러 품에 숨겨 넣었다.
“앞으로 가려면 날이 좀 남았으니 그동안 실습해서 몸에 익히도록 하자. 책으로는 백날 봐도 실제로 해보지 못하면 제 것이 안 되는 법이니. 일단은…… 량피를 만드는 법부터 익혀볼까?”
“네!”
얼굴의 홍조가 가라앉아 소년도 소소의 미소를 피하지 않고 마주할 수 있었다.
볼에 새겨진 붉은 흉터는 여전히 소년의 시선에 남아 가슴을 파고드는 통증으로 맴돌았지만, 소년은 그 통증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자아. 우선은…….”
* * *
“우선은 그럭저럭 마무리 지었군요.”
“자네답지 않게 미숙한 뒤처리였어.”
뒷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 바쁘게 뛰어다닌 듯 장 태감은 평소와 다르게 여유로운 미소에 피로의 그늘이져 있었다.
분명 노령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밤새 뛰어다녔기 때문이리라. 그런데도 안양비는 오히려 장 태감에게 타박을 늘어놓았다.
그것이 못내 억울한지 장 태감은 한숨을 내쉬며 하소연을 했다.
“설마 그 독을 알아볼 거라 누가 예상했겠습니까. 황궁의 어의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 자부할 만큼 은밀한 독이었는데 말이지요.”
“농담도 심하군. 양 태감의 시동도 알아보는 독을 그 대단하다는 어의가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지 않은가.”
한심하다는 듯이 안양비가 사실을 지적하자 장 태감은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는 억울하게 울화가 치솟았다.
약효도 약한 주제에 오직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만이 장점인 그 독을 구하기 위해 수중에 있던 재물을 얼마나 풀었던가?
같은 무게의 황금을 줘도 구하기 쉽지 않은 것을 이렇게 허무하게 날려 버렸으니 앞으로도 석 달 열흘은 속이 끓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 장 태감의 모습이 우스워 안양비는 소탈하게 웃고는 미지근하게 식은 차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무튼 잘 되었군. 일이 잘 풀리지 않기는 했지만, 덕분에 그 녀석의 솜씨는 알게 되었으니까.”
“예, 그 녀석이 여간 내기가 아닙니다. 설마 그 독을 눈치챌 줄이야…….”
“그만하게. 이미 들킨 걸 어찌하겠나.”
이번 일로 꽤나 큰 손해를 보았는데도 안양비는 오히려 대담하게 웃으며 탐욕을 들어냈다.
“포섭할 대상의 능력이 뛰어난 것은 좋은 일이지. 손아귀에 쥘 수만 있다면 무엇이 두려울까.”
“손아귀에 쥘 수 있을 때의 이야기지요. 안 그렇습니까?”
장 태감의 지적은 타당한 것이었으나 안양비는 마치 소년이 자신의 품에 들어오지 않는 일은 없을 거라는 듯이, 이미 확정된 일인 듯이 웃었다.
그 모습이 못마땅해 태감이 되묻자 안양비는 시원스레 대답해 주었다.
“어의조차 분간하지 못할 독을 찾아낼 정도의 뛰어난 재주와 만인을 반하게 할 만한 솜씨를 가지고 있는 이라면 분명 천금을 주어도 아깝지 않겠지. 그런 이를 위해서라면 마땅히 사재를 털어 포섭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이 돈으로만 행동하지는 않는 바.
“돈으로 움직이지 못할 자라면 마음으로 움직여야 하는 법. 하나 사내의 마음을 끄는 일이라면 응당 같은 남자보다는 여인이 더 쉬운 법이지. 내 다른 비들에 비해 외모가 처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
설마 황제의 총애를 받는 오상비씩이나 되어 미인계를 쓰겠다고 당당히 말할 줄이야.
장 태감은 아래턱이 허물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급히 입을 다물었다.
물론 안양비의 외모야 그 범 같은 눈과 여인치고는 기골이 장대한 점을 포함하여 시대의 보편타당한 미인상에는 조금 비켜나 있다 하더라도 누구나 입을 모아 칭찬한 만한 미인인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황제의 여인이 아닌가.
그런 태감의 반응에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안양비가 자신의 설명이 부족했음에 변명했다.
“설마 황후 후보자씩이나 되어 몸이라도 팔겠다는 뜻으로 들은 것은 아닐 테지? 어찌 격조 높은 후궁의 비가 천박하게 웃음으로 사내의 마음을 사겠는가. 자고로 진정한 미인이란 우아한 언행과 훌륭한 재주로 사내의 심금을 녹이는 법이지.”
그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태감을 표정을 펼 수 있었다. 확실히 그녀는 사람의 욕망을 부추기는데는 천부적인 자질이 있었다.
단순히 말솜씨뿐만 아니라 상대의 역량을 시험하는 듯한 그 눈빛과 분위기는 저절로 사람의 도전정신을 끌어내 안양비가 내리는 시험에 도전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험을 통과하면 넘치는 보상화 함께 더 어려운 시험이.
그리고 그 시험을 통과하면 더욱더 어려운 시험과 보상이.
그렇게 안양비에게 도전했던 사람은 어느새 안양비를 위해 일하게 되는 안양비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요괴가 내려준 인신장악술이라 평가할 만했다.
자신 또한 어느새 그녀의 등 뒤를 따르고 있었으니까. 장 태감의 입가에는 노회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젊은이 같는 패기 있는 웃음이 걸려 있었다.
“칠성제가 가까워지는군.”
“예, 양 태감님 또한 자리를 비우시겠군요.”
“만약 그 소년이 자리를 비우지 않는다면, 칠성제 기간 동안 한 번 접선해 보게. 만약 양 태감을 따라 자리를 비운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안양비는 말꼬리를 흐리며 연좌궁이 있는 방향을 흘겨보았다.
부디 널 품에 안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품에 안지 못할 자라면 죽여야 할 테니.
스산한 눈동자를 창가의 달로 돌리며 안양비는 새로운 차를 잔에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