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47화
도저히 식자재로 보기에는 어려운 거무튀튀함, 갈색과 회색, 검은색이 뒤섞여 있는 돌덩어리는 식재료 창고라기보다는 화단이나 정원에나 있을법한 물건이었다.
이게 식재료라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미심쩍은 표정을 짓는 태감에게 소년이 돌덩어리를 건넸다.
“암염의 일종인가? 확실히 찬드라 왕국 너머의 만년 설산에서는 연분홍색의 암염이 채취된다는 말을 들은 적 있는데…….”
“조금 비슷하지만 다르지요. 한번 향을 맡아보시죠.”
돌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그 안쪽으로 굉장히 다양한 색이 겹쳐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거무스름한 표면 안쪽으로는 연한 회색과 갈색이, 그 안쪽으로는 분홍색과 자주색도 엿보인다.
“향기는…… 어딘가 익숙한데…….”
계란이 썩은 듯한, 어딘가 희미한 금속의 느낌도 난다. 오랜 시간 퇴적되어온 향기에서 태감은 무심코 황실이 엄중하게 관리하는 전략 병기. 화약을 연상시켰다.
“황, 그래. 유황인가. 아주 거북할 정도는 아니지만, 확실히 황의 향이 난다.”
“예. 제국에서는 흑염(黑鹽)이라 부르며 위장병과 발진, 변비와 갑상선, 혈압을 다스리는 약재료 알려졌지요. 본래의 이름은 칼라 나마크라합니다. 화산호수에서 캐낸 복합무기질로 황화철, 황산나트륨, 염화나트륨 등의 다양한 무기질을 함유하고 있어 유황 같은 향이 나지요.”
황산나트륨이나 염화나트륨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소년의 말대로 약재로도 사용된다면 먹어도 탈이 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이 날카롭고 특색이 강한 소금이 과연 저 당초와 어울릴까?
저 당초는 그야말로 예술적인 작품이었다. 신맛과 단맛, 쓴맛과 감칠맛이 완벽하게 어울려 있었다.
마치 서로 다른 수십 수백까지 붉은 비단을 겹쳐 찾아낸 궁극의 빨간빛과도 같은 것이다.
겹겹이 감 쌓인 맛의 비경에서 그 이상의 맛이란 걸 찾을 수 있을까?
그는 이미 비경을 정복한 정복자였고 맛의 미지는 기지로 바뀌었다.
남은 것은 자신이 찾아낸 비밀을 애지중지하며 가꾸고 지켜야 하는 일이 아닐까?
여기서 더 손을 대면 오히려 완벽했던 작품을 망치게 되는 것이 아닐까?
태감의 애달픈 마음을 비웃으며 소년은 거침없이 칼라 나마크를 절구에 굵게 갈아 부스러트려 끌어 오르는 당초에 넣었다.
그 순간 태감은 순결하며 완벽했던 작품이 흙발에 짓밟히는 절망을 맛보았다.
비련의 슬픔이 흘러내리는 태감의 절망은 퇴폐미의 극치였다.
머지않아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은 허망한 눈동자 앞에선 어른이건 아이건 남자건 여자건, 설령 노인일지라도 그 눈동자에 기쁨을 채우기 위해 간과 쓸개 빼기를 주저치 않으리라.
유감스럽게도 소년은 그 표정에 내성이 생겨서인지 오히려 비웃음을 내뱉으며 소금가루를 듬뿍 넣었다.
굵은 소금은 녹아내렸고 톡 쏘는 유황의 향기는 열기에 누그러져 강렬한 화산의 냄새는 풍요를 약속하는 대지의 향기로 변했다.
그 향기는 당초에 들어간 대추야자 시럽의 향기와 기가 막히게 어우러졌다.
날카롭고 모난 신 향기의 각이 세월이라는 연마제를 만나 부드러워지 듯이, 푸근한 어머니 대지의 향기가 과실의 신맛을 달고 향기롭게 둥글렸다.
달고, 신선하고, 향긋하며.
근사하다.
참으로 근사했다.
그 기대, 그 동경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소년은 마치 개선하는 장군처럼 단지에 절여둔 고기를 꺼내었다. 고기는 녹말과 달걀흰자를 반죽한 것에 재워 그 녹말을 파내고 고기를 발굴해야 했다.
“갈비인가!”
“돼지의 3, 4, 5번 갈비를 토막 친겁니다. 보통은 굽거나 찌거나 삶지만 튀겨도 최고지요.”
굵고 통통한 살이 붙은 갈비는 녹말 옷은 입고 기름에 튀겨지며 자글자글 소리를 내었다.
고기가 끓어오르고 고소한 향기가 콧등을 치고 올라와 허공에서 당초와 주도권을 다투었다.
“다 튀겨지면 제 이야기를 듣지 않으실 것 같으니, 이야기를 먼저 할까요? 아니면 다 드신 다음에 할까요.”
“이야기를 남겨두면 찜찜해서 요리에 집중하지 못할 것 같으니 먼저 들으마.”
입가에 흘러넘치던 침을 추스르고 옷매무시를 가다듬은 태감은 허리를 곧게 세우고 소년을 마주했다.
깊게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눈동자. 그보다 몇 배는 더 살았을 자신이 헤아릴 수 없는 눈동자를 보며 소년은 잠시 머뭇거렸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직설적으로 말할까, 돌려 말할까.
태감은 무언의 긍정으로 소년을 받아주었다. 그 온화한 무게감이 깃든 진중한 눈빛으로 태감은 그 어떤 비밀이라도 감내할 수 있다는 포용력을 보여주어 소년의 마음의 둑을 터주었다.
“이것 참, 뭐라고 서두를 꺼내야 할지…… 튀김이 다 튀겨지려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빨리하지요.”
막상 말을 꺼내려니 망설여졌다.
한참을 고민하고 번민한 끝에 소년은 어색한 한마디를 끄집어낼 수 있었다.
“난, 이 시대 사람이 아닙니다. 아니…… 정확히는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지.”
그 해괴하기 그지없는 소년의 말에 태감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 비밀은 있을 줄 알았다, 아니. 오히려 그 정도 비밀이 아니었으면 실망했을 거라는 듯이 가벼운 투였다.
“그래, 뭔가 비밀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네 조리실력은 그렇다치더라도 범인이라면 평생 보지도 듣지도 못했을 고급 식재료를 태연하게 조리하는 것을 보면 뭐가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다.”
“기다려 준 것은 고맙게 생각하네.”
소년의 말투는 자연스레 늙수그레하게 변했다. 그 말투가 우스웠는지 태감은 코웃음 치며 소년에게 물었다.
“말투를 보아하니 퍽 연세가 있으신가 보지?”
“쉰이오, 아니, 이 몸으로 먹은 나이까지 합하면 환갑은 훌쩍 넘겼겠군.”
“……정말 많으셨……네.”
기껏해야 서른이나 좀 넘겼겠지 했던 태감의 예상은 완전히 박살이 났다.
떨떠름한 표정의 태감이 뭐라 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자 소년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나이 좀 있다고 존중해 주려는 건가? 이렇게 많았을 줄은 몰랐나 보지?
“관둡시다. 어차피 신분제 세상에서 나이 좀 먹었다고 벼슬도 아니고. 나도 젊은이처럼 말하는 게 익숙해져서 이런 늙다리 말투는 입에 붙지도 않으니, 평소 하던 대로 합시다.”
“그래, 네가 편하다면.”
소년은 말 한마디에 턱 하니 다시 말을 놓는 태감을 황당하단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이 어린놈의 새끼가…….
맥이 풀렸다는 듯이 한숨을 팍 내쉰 소년은 이내 자세를 다잡고 깊게 허리를 숙였다.
다시 태어나 단 한 번도 입에 담아본 적 없었던 자신의 이름을 처음으로 입에 담는 일이니 동작 하나하나에 자연스럽게 공경의 자세가 실렸다.
“밀양 김씨, 김승조라 합니다. 부디 이 천것의 재주로 대인의 입이 즐거우셨다면 그야말로 다시없을 큰 영광입니다. 앞으로도 미력하게나마 견마지로를 다하여 은혜에 보답하고자 합니다.”
태어나 누군가에게 이런 인사를 바쳐볼 일이 또 있을까? 살아서도 없었고 죽어서도 없었으며 다시 태어나고 나서야 소년은 누군가에게 이런 정중한 인사를 바쳐보았다.
그런데도 딱히 비굴하다거나 추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오히려 막힌 속이 뚫린 것처럼 시원할 뿐이다.
소년의 인사에 이번엔 태감이 자리에서 일어나 깊게 고개를 숙이고 포권을 취했다.
“김대인의 요리를 먹을 수 있어 이 양모야말로 다시 없을 큰 즐거움이요 홍복입니다. 이 모자란 것을 이리 도와주시니 저야말로 대인에게 삼생을 갚아도 씻을 수 없을 은혜를 입었습니다. 앞으로도 이 양모를 도와주신다면 평생 대인의 도움으로 이 자리에 올랐음을 기억하겠습니다.”
다시없을 정중한 인사로 서로에게 마음을 확인한 둘은 이내 얼굴이 다 화끈거리는 무안함에 헛기침하며 멀어졌다.
오늘따라 유난히 밤공기가 덥다.
“흠흠, 그러다 고기 타는 거 아니냐.”
“요리사도 아닌 양반이…… 다 보고 있는 겁니다. 뭐, 슬슬 뺄 때가 되기는 했군요.”
태감의 타박에 툴툴거리며 고기를 건진 소년은 기름을 뺀 갈비 튀김을 당초가 담긴 철과에 넣고 빠르게 튀김에 소스를 입혀 후다닥 접시에 올렸다.
보통 탕수육에 들어가는 채소나 과일 한 조각 없이 오직 소스와 고기만 있는 남자다움의 극치인 탕수육이 완성되었다.
“채소나 과일은 완벽한 당초의 불순물에 불과합니다. 진정 좋은 당초라면 그만으로도 고기와 완벽하게 어울리는 법이지요.”
“너무 멋져, 반해버리겠어.”
고기를 사랑하는 태감에게 고기만 들여 있는 탕수육이란 보석이 가득담긴 함을 선물 받은 기분일 것이다.
흑단을 깎아 옥 장식을 한 젓가락을 꺼내든 태감은 이제 먹어도 좋냐는 듯이 허락을 구하는 표정으로 소년을 보았다.
조금 뜸을 들일까? 태감의 간절한 표정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직 할 말도 많고 듣고 싶으신것도 많으시겠지만, 일단 먹고 합시다.”
달이 하늘 높이 뜬 밤. 달무리도 없이 희고 둥근 달아래에서 태감이 야식을 향해 달려들었다.
* * *
누군가가 둥근 달아래에서 지복에 젖어 있을 시간, 누군가는 음습한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시궁쥐처럼 은밀하게 연회장 안의 주방으로 숨어들고 있었다.
어린아이처럼 작은 체구, 그런데도 엄중하게 관리되는 연회장 열쇠를 손에 넣을 수 있을 정도의 지위를 가진 사람.
손에는 작은 호리병을 들고 있었다.
호리병은 값비싼 밀랍으로 엄중하게 봉해져 있어 그 내용물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남모르게 준비한 비법 조미료일까?
왜 여기 숨어들어온 걸까? 뭘 하러온 걸까?
싸구려 기만은 그녀의 뇌리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소묘. 그녀는 오늘 독을 타러 왔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어째서 이렇게 된 걸까?
어째서 난 이런 바보 같은 선택을 한 걸까?
달뜬 한숨을 토해내며 치밀어 오르는 분을 이기지 못한 소묘는 무심코 손에 든 병을 던져 버리고자 했다.
병을 집어 던지고 손에 잡히는 대로 내던져야만 이 분이 풀릴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이 독은 이제 그녀에게 남은 마지막 한 수였으니까.
행복해지고 싶었다. 행복할 수 없다면, 최소한 남들보다 조금 덜 비참해지고 싶었다.
그럴 생각으로 아등바등 올라온 치열했던 후궁에서의 삶의 끝은 그녀를 가장 비참하게 만드는 형태로 다가왔다.
아니, 사실 가장 비참한 것은 다가온 몰락 때문이 아니다.
그녀의 합당한 분노와 절망조차도 윗분들 정치싸움의 장기 말이 되어 버리는 이 현실에, 그런데도 납작엎드려 복종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나약함이 그녀를 참을 수 없이 나락으로 끌어내렸다.
어쩌면 여기서 멈춘다면, 사실대로 용서를 구하고 납작 엎드린다면 최소한 자리를 보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리는 포기하더라도 목숨만큼은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목숨을 구할 수 있다면 어쩌면, 다시 시작할 수도 있지 않을까. 다시 한번 도전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한번. 그날의 고난과 그날의 역경을, 다시 한번.
아득해지는 눈앞에 현기증을 느끼며 소묘는 병을 움켜쥐었다. 단단한 도기 병의 너머로 찰랑거리는 액체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이제 와서 자백은 못 할 겁니다. 이 후궁이 그리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지요.”
“그래서 독을 탈 거란 말인가?”
미심쩍다는 투로 이야기하는 안양비에게 코웃음을 치며 장 태감은 차를 홀짝거렸다.
제아무리 영민한 그녀라도 결국 아랫것들의 참담함을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이상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외국보다 몇 배는 더 치열하고 음습하며 치졸한 후궁이라는 복마전에서 윗자리를 노린다는 것이, 그 암담한 절벽을 기어오른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그런 의미에서 장 태감은 그녀의 기분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 역시 그러했으니까.
“알면서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 할 수밖에 없지요. 그다음의 일이 어떻게 될지 알면서도 실 낫같은 확률에 걸 수밖에 없지요. 사람이라면.”
“흐음…….”
장 태감 역시 그런 주사위의 농간에서 살아남아 이 자리까지 올라온 사람이었다.
후궁에서 한자리하는 이들은 다 그렇다. 하지만, 그 어린 궁인에게도 주사위의 신은 웃어줄까?
태감은 벌벌 떨며 독병을 받아든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왜 일부러 약한 독을 주문하신 겁니까?”
오늘을 위해 태감이 준비한 독은 무색무취에 무미한 것이었지만 그 효과는 약한 것이었다.
건강한 사람이라면 헛구역질이 조금 나고, 기껏해야 하루 이틀 정도 누워 있으면 털어버릴 만한 독. 병상에서 막 일어난 홍엽비라고 해도 목숨을 빼앗을 만한 것은 아니었다.
“이제 와 동정심이라도 들었을지도 모르지. 나도 사람이지 않나.”
“농담이시라면 제법 즐거운 농이군요. 오늘 이 늙은이가 크게 배웠습니다.”
태감의 목소리는 질책이나 원망이 아닌 순수한 의문이었다.
이제 와 앙양비가 일말의 동정심이나 양심의 가책 따위를 느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는다는 듯이. 실제로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안양비는 대담하게 웃어 보였다.
“그거야 뻔하지 않나. 그녀를 죽일수는 없으니까 겁만 주는 거지.”
홍엽비는 한 차례 독살의 위기를 겪으며 독에는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실제로 남양궁에는 기미를 보는 시녀의 수가 평소의 세배는 늘어났을 정도다. 조리하기 전의 식재료를 검사하는 담당과 조리과정 중간에 검사하는 담당, 그리고 완성된 요리를 검사하는 담당이 각각 달랐다.
이는 사람의 체질마다 독으로 작용하는 것과 약으로 작용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고 독 중에 상당한 시간이 지나야 그 약효를 드러내는 지효성 독을 경계하기 위함이 두 번째 이유다.
“다행히 네가 말한 그 오운이라는 놈에게는 경계심을 푼다고 하니 이 기회를 놓친다면 후궁의 안주인 될 자격이 없다 해야겠지. 그 녀석, 자네 말대로 도움이 되는군.”
“그런 의미로 도움이 된다 한 것은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장 태감은 소년의 추레한 얼굴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어쩌면 이번 기회에 소년을 영입하게 되는 기회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의가 있든 없든 독이 든 요리를 조리한 것은 소년이니 고초를 그리 쉽게 피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 기회를 잘 노려본다면…….
음험한 얼굴이 된 장 태감의 얼굴을 보며 안양비 역시 차 한 모금을 들이켰다. 음모를 꾸미며 마시기에 좋은 부드러운 향기의 차다.
오랜 세월 후궁에서 윗사람들을 모셔온 덕에 장 태감의 다도 솜씨는 천하에 이름난 다도인들과 견주어 볼만했다.
도톰한 입술이 찻잔에서 떨어지고 달콤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막연히 어딘가를 보는 안양비의 표정에선 지루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 계집애가 신경쇠약 정도가 걸려준다면 딱 맞겠군.”
“그럴 가능성도 있겠군요. 워낙 심약하신 분이니…….”
“뱀이 무서우면 뱀이 숨은 풀숲도 무서운 법이지. 뭐, 아니어도 상관없어.”
사람이 긴장을 유지하고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그 연약한 계집아이가, 목을 쥐고 손에 가볍게 힘만 주어도 부러질 만큼 연약한 계집애가 이 후궁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단조롭고 따분하다는 투로 안양비는 이야기했다.
전혀 기대가 안 된다는 듯이, 이건 그저 얻어걸리면 좋고 아니어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장 태감은 그녀의 말이 머지않아 사실로 나타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지요?”
“굳이 설명해야겠나?”
“늙으면 의심병만 늘어 그렇습니다. 이 노인네를 확실하게 납득시켜 주십시오.”
짓궂은 미소를 띠는 장 태감의 재촉에 안양 비는 어쩔 수 없이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래, 여기서 홍엽비가 낙마하면 가장 이득을 보는 것은 누구지?”
“외국인이신 라하비 님을 제외하고 연회를 가지신 난화비 님을 제외한다면 안양비 님과 부여비 님, 두 분이시겠지요. 그리고 부여비 님은 그런 암수를 쓰실 성품은 못되시니 필연적으로 안양비 님께 시선이 모이겠군요.”
태연한 태도로 악담을 하는 장 태감에게 안양비는 의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소문이 당연하다는 듯이 태연한 태도였다.
“그리고 나에 대한 악소문이 퍼지면 이득을 볼 사람은?”
“안양비 님을 제외한 다른 분들, 하지만 홍엽비 님은 독을 드신 당사자시고, 난화비 님은…….”
“그래, 그녀도 독을 먹었지. 일부러 죽지 않을 만큼의 약한 독을.”
그리고 후궁에는 뜬소문 하나가 소리소문없이 퍼질 것이다. 실제로 홍엽비에게 독을 먹인 것은 난화비다.
몸이 약해진 홍엽비를 노리고 일부러 약한 독을 풀어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는 증거를 만든 것이라는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소문이.
여기까지 말을 하고 안양비는 마른목을 축이며 입술을 핥았다. 그녀에게선 한 방울의 물로 한 방울의 독을 만들어내는 독사의 그림자가 엿보였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소문은 그녀가 범인이 아니라는 증거가 오히려 그녀의 목을 조르도록 할 것이다.
비 중 가장 다정다감하기로 소문난그녀의 평판을 깎아내리고 홍엽비와의 연대도 무너트릴 수 있으니 이정도면 나름.
“나름 일거양득의 효과 아닌가.”
“과연. 역시 이 늙은이는 범접하지 못할 만큼 사악한 계책이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 말은 조금 기분 상하는군.”
어쩐지 같은 차인데도 조금 전보다 쓰게 느껴지는 차를 입에 머금고 안양비는 창밖의 달을 노려보았다.
자신이 다할 수는 다 사용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하늘에 달렸다.
“하늘이 나의 손을 잡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다. 하늘이 내 앞을 가로막는다면 그 하늘을 죽여서라도 난 천하를 손에 넣을 것이다.”
차가운 달빛 아래에서 서리 같은 각오를 내뱉는 안양비의 기세에 장태감은 한기를 느끼며 옷깃을 여몄다.
초여름의 문턱을 넘어가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