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의 요리사-46화 (46/314)

환관의 요리사 46화

마음을 잃고 방황했다. 두 번째 삶의 대부분은 그러했다.

스스로를 기만 하고 억지로 목숨을 연명한다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늙고, 지쳤으며. 귀찮다.

하지만 때때로 인생에선 가끔 정열을 불태울만한 일이 존재한다. 아니, 이미 정신을 차리고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미치도록 열중해 버리는 일이, 아무리 따분하고 지친 사람이라도 가끔은 있는 법이다.

좋아하는 게임이라던가, 엄청 재미있는 책을 무심코 읽기 시작했을 때 라던가.

가끔은. 그럴 때가 있는 법이다.

늦은 밤, 호롱불과 달빛에 의지한 채 내일 연회에올릴 장식을 만들던 소년이 굽은 허리를 두드리며 기지개를 켰다.

“이거 괜찮은데.”

문득 정신을 차리고 자신이 만든 테이플 센터피스(Center Piece, 식탁 중앙의 장식물)용 꽃꽂이를 보았을 때 소년은 무심코 감탄사를 토해냈다.

전문 플로리스트가 있었던 홍콩의 호텔에서 눈으로 배웠던 것을 되살린 것인데.

생각 이상으로 괜찮았다. 아니, 만약 자신의 레스토랑이었다면 당장 테이블 위에 올리고 싶을 만큼 훌륭했다.

아무리 이론적으로 공부하고 기술을 익히더라도, 결국 이런 장식물.

특히 생화를 다루는 것은 감각의 영역이다.

요리의 플레이팅과도 일맥상통하며 그 이상으로 미적 감각을 요구하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재능의 영역이다.

“괜찮아, 나쁘지 않아. 아니…… 썩 좋아. 정말로.”

조릿대잎, 수국에 꽃창포와 붓꽃같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동양식 꽃꽂이 재료로 만든 것인데 이상하게 눈길이 간다.

화려하게 만든 것은 아니었다. 풍성하고 크게 장식하는 서양식과는 달리 일부러 낮게 배치하여 대화를 나눌 때 거부감이 없이 했다.

그저 시선을 둘 곳을 찾을 때 슬쩍 스쳐 가기 좋은 정도의, 딱 그정도 수준으로 만든 것이다.

오늘은 유난히 일이 잘되는 것 같아.

소년은 문득 스스로 말하고 스스로가 웃었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오늘은 일이 잘 풀리는 것 같다.

이 갑갑하고 지긋지긋한 몸이 아니라 크고 힘센 전생으로 돌아온 것만같다. 그 시절에는 정말 무서운 게 없었지.

전생의 소년은 정말 대단했다. 훤칠한 키에 실지렁이 같은 핏줄이 꿈틀거리는 팔뚝으론 들어 올리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하룻밤을 꼬빡 새며 재료를 준비해도 다음 날 일할 때면 늘 누구보다 기운찼다.

젊고 패기 넘치던 시절엔 싸움에서도 져본 적이 없다.

그 시절에는 정말 무서운 것이 없었다.

지금은 어떤가?

구부정한 허리는 조금만 일을 해도 바늘로 찌르는 듯이 아프다. 절뚝거리는 왼 다리는 조금만 서 있어도 금세 힘줄이 찢어질 듯이 당겨온다.

썩은 고기를 억지로 기워놓은 것 같은 몸은 그를 질리게 했다.

가끔은 태감의 식사를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울 때가 있다. 나약한 육신은 정신마저도 나약하게 만들어 나이를 따라 부풀어 오른 자존심 따위를 흐물흐물하게 녹여 버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스스로가 아직 어린 나이라는 변명으로 도망치게 만든다.

그것이 소년을 두렵게 만들었다.

그건 추한 변명으로 어려움에서 눈을 돌리고 그것을 방패막이 삼아 도망치게 된다면, 그렇게 추한 자신을 스스로 감당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끝장이야. 더이상 요리사로서 살아갈 수 없다.

그것은 소년의 약속이자 스스로 한 다짐이었다.

그런 사소한 것으로 변명하기엔 소년의 지난 반백 년의 세월이 너무 무거웠다.

자신은 최고였으니까.

남이 추켜세워주는 명성 따위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납득할 수 있어야만 한다.

자신은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최고의 요리사였다.

화려한 커리어, 높은 연봉, 수없이 많은 트로피 따위보다도 스스로 최고라 자부할 수 있는 것.

그 말이 부끄럽지 않다는 것.

그것이 바로 소년의 자존심이었다.

그렇기에 무엇보다도 더 최고일 수 없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는 것이다.

몸만 정상이었다면, 허리만 곧게 펴지고 왼 다리만 제대로 움직였다면 어떻게든 물고 늘어질 수 있었을텐데.

어떤 상황에서라도 최고라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을 텐데.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진즉에 끝냈어야 할 장난이라는 것은. 이건 주방에서 격무를 감당할 몸이 아니다. 당장에라도 병동에 드러누워 재활치료나 받을 몸을 이끌고 자신은 너무 많은 것을 원한 것이다.

“그런데, 감이 좋아.”

손끝이 매섭다. 요리사로서, 아니 무엇을 한다고 하더라도 천부적인 감각이라는 것이 이 손에는 있다.

전생에도 타고나지 못했고, 앞으로도 알 수 없을 만큼 하늘이 내린감각. 재능이라는 것이 이 몸에는 깃들어 있다.

재능. 누구나 미치도록 갈구하고 현실의 벽 앞에 절망하는 재능이라는 것이, 하늘이 내린 감각이 이 손끝에 있다.

어쩌면 더 멀리 갈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런 희망찬 미래는 소년의 지친 몸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반백 년을 중화요리에 몸담아온 자신이, 그 너머의 세계를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생각했다.

소년은 이 어두컴컴한 회장 안에서 인생의 최고의 분기점이 왔음을 깨달았다.

태감의 등을 쫓아 정치판에 발을 들였을 때보다. 맨 처음, 자신이 환생했을 그때, 목을 매기 위해 걸었던 밧줄 앞에 선 그 날보다도.

여기에서 선택이 앞으로의 평생을 좌우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더 나잇값 못하고 자신을 속이는 것은 그만두자.

입꼬리가 제멋대로 위로 올라가서 견딜 수가 없다. 분명 보기 흉한 미소일 테지.

다리 정도는 떨어져 나가도 괜찮아. 허리가 굽으면 어때. 요리사의 무기는 혀와 손이다.

더 앞으로, 남들이 보지 못한 미지를, 자신이 가장 먼저 밟을 수 있다는 고양감이 소년을 미치게 했다.

손질한 재료들도 다 좋아.

칼의 예기를 최대한 살려 손질한지 시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신선도가 살아 있었다.

회장의 꾸민 정도도 훌륭해.

티 하나 없는 테이블 크로스에 과하지 않지만, 시선을 끄는 장식. 의자마저 소년이 직접 고른 것이었다.

너무 낡아 삐걱거리거나 너무 새것이라 딱딱하지 않은 부드럽고 사람의 손을 적당히 탄 것으로.

회장의 가장 작은 것 하나까지도 자신의 손을 타지 않은 것이 없었다.

평소였다면 격무에 지쳐 쓰러질 법도 한데 기이할 정도로 손끝 말단부까지 피가 용솟음쳤다.

그 모습을 그저 보고만 있었던, 사실은 소년의 일을 돕기 위해 왔던 장소와 소소는 벽에 딱 붙어 얼어붙어 있었다.

저것은 범인이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는 광기의 연회였음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소년은 즐거워 보였다. 즐거워 보이지만, 정말로 즐거워 보였지만.

그것은 수라의 길이었다.

아니, 수라라는 말에는 질척함이 부족하다. 마치 장대한 투쟁의 길을 걸어가는 듯한 고고한 구도자 같은 느낌이 있으니.

지옥 유부에서 기어 올라오는 나찰. 나찰이 고개를 돌려 그들을, 소소를 보았다.

“그래, 너도 요식업에 몸담고 있으니…… 소소야. 넌 이 일을 평생 직업으로 삼아 계속할 생각이니?”

“네? 그… 그게…….”

순간 대답하면 무심코 영혼을 빼앗겨 버릴 것만 같아 소소는 대답을 얼버무렸다.

“박봉에 노동강도 높고 개인 시간을 가지기 어려울 만큼 업무 시간도 길지, 정상의 자리에 올라간다 해도 다른 일보다 대접받기도 어려워. 평생을 혹사당하고 뜨거운 불 앞에서 일하다 보면 폐는 상하고 손은 굽는다. 까놓고 말해서 다른 길이 있으면 다른 길을 권하고 싶을 정도다.”

그래도, 하고 싶나?

그 기백에 눌려 숨이 막혔다. 허리가 굽어 자신보다도 키가 작은 소년이 다리를 절고, 아마 싸운다면 자신이 이길 것만 같은 소년의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자신도 모르게 그렇다고 답을 말해버렸다.

사실은 그럴 마음이 없는데도, 그저 집에 돌아가 가족들과 살고 싶은데도 그렇다. 고 대답해 버렸다.

소년이 웃었다. 입꼬리를 귀밑까지 길에 찢으며. 매부리코 아래로 흰어금니와 의외로 잘 발달한 송곳니가 드러나도록.

마치 장하다는 듯이 소소의 어깨를 짚었다.

“그럼 지금 내 표정을 잘 기억해둬라.”

너도 언젠가, 이런 표정을 짓게 되는 날이 올 테니.

격려인지 저주인지 모를 날을 남기고 소년은 칼 한 자루를 쥐고 회장을 나섰다.

태감이 있는 곳으로.

드디어 결심이 섰다.

* * *

“야식이나 먹을까요.”

괴상한 표정이었다. 웃는 표정으로 굳어져 버려 더는 다른 표정은 지을 수 없게 된 것만 같은 부자연스러움이 느껴졌다.

그것은 불쾌할 정도로 위화감이 들어 위장은 자신도 모르게 소년의 앞을 막아섰다.

“이거 이거나으리, 왜 그러십니까. 그렇게 무서운 표정을 하시고.”

“일단, 물러서라.”

“물러서요? 이거 참, 사람을 그렇게 불한당 나부랭이 보듯이 하시면……

“물러서라.”

마치 태감의 앞을 막아서듯이, 방패막이가 되듯이 소년을 가로막고 위정은 자신의 허리춤을 더듬었다.

품이 넉넉한 옷 안쪽으로 느껴지는 단단한 금속의 감촉. 수십 년을 사용해 오며 단단한 금속은 자신의 손에 맞게 변형되고 손 기름이 배어들만큼 긴 시간을 사용해 온 애병의 자루가 만져졌다.

분명한 호흡이면 목덜미를 뜯어낼 수 있을 만큼 나약한 소년임에도 위장은 손아귀에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하하- 이거 참, 사람을 잡아먹을 것처럼…….”

너털웃음을 터뜨리면서 손에 쥔 칼을 숨길 기색도 없이 소년은 걸어나왔다.

마치 무해함을 가장 하는 것처럼.

조금도 적의는 없다는 듯이 오히려 그쪽이 너무 과민한 거 아니냐는 표정은 소름이 끼친다.

역시, 그때-

“그러고 보니 슬슬 배가 고프긴 하군. 마침 오늘은 네가 연회준비로 바빠 저녁도 밖에서 사 먹었으니까.”

위정의 팔을 잡아 억지로 풀고 태감은 위정과 소년의 사이에 섰다.

소년이 자신에게 칼을 들이밀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하는 듯이 무방비한 모습.

허리가 굽어 가뜩이나 키가 작은 소년을 위해 허리를 한껏 굽혀 시선을 가까이한 태감은 순수하게 야식이 기대된다는 표정이었다.

“태감님…….”

“위정, 자리 좀 피해줄래?”

“하지만!”

“위정.”

반문을 허락하지 않는 태감의 명령에 위정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러났다.

그렇게 완전히 둘만이 남게 되고 문밖에서 서성이는 듯한 인기척도 떠나자 소년이 입을 열었다.

“주방으로 가실까요?”

“가끔은 네가 요리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별미지. 가자.”

무슨 심경변화인지, 왜 칼을 들고 있는지. 태감은 소년에게 그런 것을 물어보는 대신 시시콜콜한 잡담을 늘어놓았다.

연회준비는 어떻게 되어가는지, 오늘 사 먹은 밥은 맛이 없었다느니 하는 이야기들.

의례적인 이야기들이 오가던 그 맥을 끊고 소년이 한마디를 툭 내던졌다.

“그냥 부끄러운 비밀 이야기를 할 거라 나리를 물려달라 한 겁니다.”

“부끄러운 비밀 이야기라, 그건 분명 아주 먼 훗날 일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뭐, 어른으로서 이런 건 한발 양보하기로 했습니다.”

“뭐?”

태감은 소년이 나름 재치있는 농담을 했다고 생각했는지 새된 목소리로 웃어넘겼다. 그렇기에 태감은 앞서 것도 있던 소년의 입에 걸린 야릇한 미소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오늘 야식거리는 뭐냐? 이렇게 불러내었으니 맛있는 것이겠지?”

평소엔 야식으로 몸에 좋지 않은 튀김이나 구이류는 절대 내주지 않는 소년이었지만 오늘만큼은 다르다.

“글쎄요, 구로육(咕噜肉)이라고 해야 할지, 탕추리지(糖醋里脊)라고 해야 할지 소개한다면 탕수육이라 하고 싶군요.”

탕수육.

혹은 스윗사우어 포크. 중국 본토의 요리사들을 제외하고 한국이나 미국, 혹은 일본의 요리사들에게 가장 자신 있는 요리가 무엇이냐 물어보면 십중팔구는 탕수육이라 대답할 것이다.

소년이 가장 먼저 연습한 것도, 가 장 자신 있게 손님에게 낼 수 있는 요리도 바로 이 탕수육이었으니 소년에겐 나름 필살기 중 하나인 셈이다.

“제가 만드는 탕수육은 말입니다…… 진짜로 맛있거든요?”

장난스럽게 말하는 소년에게선 기이한 중압감이 뿜어졌다.

섬뜩한 눈동자 아래로 흐르는 광기와 어린아이의 손 치고는 굳은살이 많고 마디가 굵은 손가락은 꼭 아귀의 갈퀴처럼 어둠 속을 헤집어 양초와 등을 찾았다.

보고 있자면 소름이 돋았지만, 태감은 태연하게 웃어넘기며 소년의 뒤로 바짝 따라붙었다.

“그거 기대되는군. 말을 들어보니 당초를 끼얹은 돼지고기 튀김인가보지? 야밤에 튀김을 먹는 건 늘 배덕 감이 든단 말이야.”

“뭐, 가끔은 괜찮지요.”

태감은 익숙하게 주방에서 자리를 찾아 앉았다.

들썩거리는 엉덩이를 의자에 눌러붙인 태감은 과연 어떤 음식이 나올지 기대감에 벅차 당장에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것만 같았다.

“그럼 요리를 시작해 볼까요. 느긋하게.”

“날 말려 죽일 생각이 아니라면 빨리해다오.”

“재촉한다고 쌀이 밥이 되는 건 아닙니다. 뭐든 때가 있는 법이지요.”

철과를 불 앞에 올리고 아궁이에선 숯을 약간만 남겨 은은한 불이 오래가도록 했다.

마치 기도를 올리는 신도처럼, 책을 집필하는 학자처럼 집중하는 소년의 모습은 어딘가 경건해 보이기까지 했다.

과연 어떤 음식을 만들길래 저렇게까지 집중하는 걸까. 기대감은 최고의 조미료와 같아 태감의 허기를 부추겼다. 맑은 침이 침샘에서 넘실거려 주체하기 힘들지경이었다.

그런 태감의 무언 재촉을 받으며 소년이 국자를 들어 양념을 퍼 올렸다.

우선은, 흑초.

“오래 묵은 흑초인가. 요리에 쓰기에 아까울 정도군.”

뚜껑을 열자 그 향만으로도 태감은 그것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역시 스스로 미식가를 자처하기에 부끄러움 없는 뛰어난 감각이었다.

오래 묵힌 최고급 흑초에 좋은 밤꿀과 흑설탕, 그리고 오매(鳥梅, 훈연하여 말린 매실)을 넣는다.

알싸한 훈연 향기와 달콤한 향기가 진동하고 거기에 새큼한 향기는 너무 과하지 않고 부드러워 봄날의 하늬바람처럼 기분을 들뜨게 만든다.

우선은 여기서 한입, 태감에게 건넸다.

“호오, 이것이 너의 당초인가. 부드럽고 품위 있는 맛이야, 거기에 오매의 훈제향기는 특별함을 더해 완성도를 높이고 있군. 훌륭하다.”

“이제 시작입니다. 뭘 벌써부터 감탄하시는 겁니까?”

“……여기서 더 훌륭한 맛이 나온단 말이냐?”

태감의 감탄사에 소년은 코웃음 치며 그의 무지함을 비웃었다. 이제고작 맛의 기본 골자를 세웠을 뿐이다. 이제 맛의 깊이를 더할 시간이다.

소년은 주방의 가장 깊숙한 곳에 묵혀둔 단지들을 줄줄이 꺼냈다. 태감의 요리사가 되고 담가뒀던 자신만의 비법재료, 그리고 귀한 것이라 아까워 쓰지 못한 향신료들이 들여있는 단지였다.

“참, 돈 걱정 없이 요리할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거야.”

은은한 약한 불에서 졸아드는 당초앞에서 소년은 절구에 재료들을 곱게 으깨 한 덩어리의 페이스트로 만들었다.

우선은, 모로코식 소금에 절인 레몬으로 상큼한 새콤함과 쌉싸름함, 풍성한 과실 향기를 더한다.

여기에 레몬과는 다른 복잡한 풍미의 신맛을 더하기 위해 귀하디귀한 야생 매자(Barberry) 말린 것으로 은은한 단맛과 톡 쏘는 맛을 첨가한다.

매자는 식재료가 아닌 약의 재료로서 수입된 귀중한 것이었다.

이것들은 각각 톡 쏘고 날카로운 신맛으로 제각기 자기주장이 심한 재료들이다.

소년은 여기에 중동이 원산지인 ‘아나르다나’라는 야생 석류의 씨를 말린 것을 첨가했다.

이 역시 매자 자처럼 식자재 창고가 아닌 약방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아나르다나는 짜릿한 산미와 쌉싸름 한 맛이 난다.

이 세 가지를 으깨 검은 당초에 넣자 거무튀튀했던 소스에 희미한 붉은 기운이 돌았다.

소년은 여기서 다시 한 국자 소스를 떠 태감에게 건넸다.

“음, 아주 복잡하고 다채로운 신맛이 느껴지는군. 날카롭게 혀를 찌르는 듯하지만, 그 내면에는 복잡하게 설계된 풍미가 살아 있다. 이것은 취향은 조금 타겠지만 오히려 아까보다도 더 완성도가 높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겠어.”

“아직 안 끝났습니다. 이제 단맛을 더해야지요.”

“여기서 더 말이냐?”

당초란 신맛이 과하여도 안 되고 단맛이 과하여도 좋지 않다. 중용의 도리를 지켜 단맛과 신맛을 딱 떨어지게 하여야 좋은 당초인 것이다.

단맛. 이미 흑설탕과 꿀로 골자를 세웠으니 이제 여기에 단맛의 품격을 더해야 했다.

그 주인공은 바로 대추야자.

세상에서 가장 단 과실이자 메마른사막의 땅에서 사람을 살찌게 만드는 생명의 과실은 길고 긴 무역로를 타고 이 머나먼 제국의 땅에서조차 크게 인기를 끌었다.

그 감칠맛 나는 단맛과 진득한 풍미는 만릿길을 넘어 이제국에선 같은 무게의 금으로 값을 치른다 해도 시장에 내놓으면 삽시간에 동나버릴만큼 큰 인기를 자랑했다.

그 값비싼 대추야자를 찐득하게 조린 시럽을 소년은 아낌없이 떠 넣었다.

디비스(Dibis).

대추야자즙으로 만든 시럽의 쌉싸름한 단맛은 요리의 품격을 단숨에 끌어올렸다.

수천 년간 가장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사람들을 배부르게 한 풍요로운 대지의 그윽한 단맛은 날카로운 신맛을 누그러뜨리며 나긋나긋하고 신비로운 신의 은총이 되어 태감을 유혹했다.

“이건…… 이건…… 정말로…….”

두 번째로 당초의 맛을 본 순간 태감은 차마 말을 잇질 못했다.

마치 벅차오르는 감동을 차마 언어로 짜내질 못하는 불운한 시인처럼, 번갯불처럼 스치고 지나간 영감을 그려내지 못하는 화가처럼 태감은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수저를 잡은 채 숨을 헐떡거렸다.

그 어떤 언어로도 그 맛을 표현할 수 없기에 그 감각을 함께 공유할 수 없는 모든 이들은 불행한 이들이다.

그리고 이 숨 막히는 감동을 오직 혼자서만 누려야 하는 자신은 세상의 죄인과 다름이 없다.

“넌…… 넌 도대체…….”

뚝. 뚝.

식은 땀과 함께 투명한 눈물을 떨어뜨리는 태감을 보며 소년이 피식 코웃음을 쳤다.

아니, 이 양반은 뭐 이런 걸 가지고 울어. 참나.

“아직 요리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그러시면 요리가 완성되면 심장마비 걸리시겠습니다.”

“뭐라고?!”

“아직, 이 당초는 완성된 게 아닙니다.”

지분거리는 비웃음을 입에 건 소년의 손에는 거무튀튀하고 도저히 식자재로는 볼 수 없는 돌덩어리 같은것이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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