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45화
태감의 식사를 차리고 뒷정리를 하고 다음 요리준비를 끝내고 나면 소년은 의외로 한가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사방이 아름다운 연꽃 연못으로 둘러싸인 연좌 궁은 곳곳에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아름다운 장소가 많았고 조금 으슥한 곳에서 편히 시간을 보낼 장소도 많았다.
연못 한가운데에 띄운 작은 정자는 소년이 자주 오후에 시간을 보내는 장소였다.
특별히 하는 것은 없었다. 그저 멍하니 앉아 가끔 연못 위로 뛰어오르는 잉어를 보거나 할 뿐.
하고 싶은 일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은 중년다운 시간 보내기였다.
“이런, 이런. 자네 나이 때의 취미가 아니지 않나.”
“장 태감님 아니십니까, 여긴 어쩌신 일로…….”
“괜찮아 앉아 있게. 몸도 성치 않은 친구가 억지로 일어나면 내가 더 불편해.”
여전히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온 장 태감은 불편한 다리를 짚고 일어서려는 소년을 만류하며 오히려 소년의 옆에 주저앉았다.
“오, 그 떡은 뭔가?”
“이번에 새로운 팥소를 개발하며 만들어본 시제품입니다. 한번 드셔보시지요.”
“이거 염치 불고하고 잘 먹겠네. 난 사실 이런 쫄깃한 찰떡을 좋아하거든.”
새삼 감탄하게 되는 친화력으로 너털웃음을 지으며 장 태감이 떡에 손을 가져가는 동안 소년은 차를 새로 우려냈다.
양 태감이야 성정이 급해 뜨거운 차보단 미지근하거나 차가운 차를 선호하지만, 보통의 제국 인에게 미지근한 차를 내는 것은 큰 실례였다.
장 태감은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건치를 가지고 있었다. 혹여나 찰떡이 질겨 목에 걸릴까 노심초사했던 소년을 비웃듯이 장 태감은 떡을 한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어 삼켰다.
“오 좋구먼 좋아. 팥소는 묵직하고 피는 얇은 게 감촉이 비단결 같군. 그리고 이 팥소에서 은근한 계피 향이 나는데 맛이 참 독특하단 말이야 예상이 맞다면 아마도……?”
아련하게 혀끝에 남은 맛의 잔향을 찾기 위해 눈을 지그시 감은 장 태감에게 소년이 차를 건넸다.
값비싼 서호의 용정차나 군산의 백호은침은 아니었지만, 떫은맛이 적고 향이 부드러워 마시기 좋은 계림(溪林)의 우도(雨薄)라는 찻잎이었다.
장 태감은 맛을 탐미하는 척하면서도 차를 우려내는 동작, 따르는 동작, 그리고 자신에게 차를 건네는 동작 하나하나를 면밀하게 뜯어보고 있었다.
허리가 굽어 모습은 볼품없지만, 차를 우려내는 동작 하나하나에는 기품이 있고 막힘없이 능숙하다.
좋은 교육을 받았거나 아니면 엄격한 훈련을 통해 다져진 것이 틀림없으리라. 장 태감은 입꼬리를 정돈하기 위해 다시금 입을 크게 멀리고 떡을 베어 물었다.
“흠, 혹시 흑설탕인가?”
“그렇습니다. 흑설탕과 계피로 맛을 냈습니다. 그리고 이쪽은 흑설탕과…….”
“말하지 말아보게, 내 이번에도 맞춰볼 테니.”
입안에 향긋하게 감도는 계피 향을 씻어내기 위해 장 태감은 차를 한 모금 머금고 신중하게 입안에서 우물거리며 계피 향을 목 안으로 넘겼다.
단맛이 깨끗하게 정돈되고 입안에 향긋한 차 향이 감돌면 자연스레 다음 떡은 어떤 맛일까 기대감에 침샘에서 침이 우러나온다.
이렇게 맛있는 떡을 먹어보는 것은 얼마 만일까? 고희를 넘긴 그에게도 이런 떡은 쉬이 만나기 어려운 것이었기에 그의 입에는 꾸밈없는 소박한 미소가 걸렸다.
과연 그 미소도 꾸며낸 것일까?
소년은 이성적으로는 그 미소 역시 꾸며낸 것이니 더욱더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미소는 진짜일 거라 믿고 싶은 스스로 실소를 금치 못했다.
나이를 이만큼 먹었는데도 여전히 사람의 선함에 긍정하고 싶어 하는것은 여전히 철이 들지 않았다는 증거다.
“오오, 이건…… 이건 쉽군. 이 달콤한 귤 향기…… 진피(陳皮)인가?”
소년은 실소를 감추고 감탄사를 터뜨리며 장 태감의 빼어난 미각을 칭찬했다. 후궁에서 기어 올라온 장태감에 비할 바는 못되겠지만, 소년도 중년의 나이까지 긴 시간 사회생활을 해온 경험으로 입안의 꿀처럼 달콤하면서도 거북하지 않은 사탕발림으로 그를 즐겁게 했다.
장 태감 역시 원래 칭찬에 인색하지 않은 사람인지, 아니면 무언가 뜻하는 바가 있어서인지 소년의 빼어난 솜씨를 칭찬하는 온갖 미사여구를 쏟아냈기에 둘의 덕담은 상당히 긴 시간이어졌다.
“허허, 자네와의 대화는 참 즐겁군, 젊은 친구가 참 재치가 있어. 근데 이상한 게, 어째 자네와 이야기하면 패기 넘치는 젊은이와 대화하는 기분이 아니라 나와 나이가 비슷한 노인과 이야기를 하는 기분이 든단 말이지?”
어딘가 조금 떠보는 듯한, 은밀하게 밑밥을 까는 형태의 질문이었다.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려 한다는 것을 눈치첸 소년은 굽은 허리에 힘을 주며 입가에 힘을 주어 미소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했다.
작은 꼬투리 하나만 잘못 잡혀도 상당히 피곤해질 테니, 그걸 무마하라면 분명 양 태감이 후일 한 발짝물러나 준다는 형태의 거래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
“몸이 좀 불편하다 보니, 자연스레 뛰어놀 시간보다는 앉아서 책을 보거나 하는 일이 많아 그런가 봅니다.”
“호오 그렇구먼, 책으로 옛 성현의 말씀을 배우다 보면 자연스레 어른스러워지는 법이지. 혹시 특별히 관심을 두는 분야가 있나?”
“요즘은 주로 서방의 요리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겸손한 태도로 대수롭지 않게 한 말에 장 태감은 크게 기꺼워하며 소년의 어깨를 두드렸다.
“호오, 그거 참 대단하군, 서방의 요리라! 자네처럼 어린 친구가 자문화중심주의에 물들지 않고 폭넓은 시각으로 공부하는 것은 무척이나 훌륭한 일일세.
고리타분한 학자들은 제국이야말로 문화의 중심지라 여기며 오만한 문화 우월주의에 빠져 다른 나라의 문화에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향이 강하지만 실제로 서방의 많은 나라는 치열하게 경쟁하며 자신들만의 문화와 기술력을 나날이 향상하고 있지.
제국도 언제까지나 평화에 취해 안온함만을 누리고 있다면 언젠가 서방의 국가들에 크게 망신을 당하는 일이 있을 거야. 자네 같은 어린 친구들이 나라의 동량이 되어준다면 제국은 분명 올바른 역사의 흐름을 탈 수 있을 걸세.”
장 태감의 장황한 말에 소년은 적지 않게 놀랐다. 실제로 현 제국과 유사한 전생의 중국은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이라 자부하다가 망신이란말로는 부족한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후궁이라는 사방이 막힌 감옥 같은 공간에서 이 정도 식견을 가진 사람이 있을 줄이야.
소년은 떠보는 듯하던 바로 전에의 눈빛과는 다르게 나라의 앞날을 토론하고 서방의 문화에 대해 궁금해하는 장 태감의 눈동자는 강한 학구열에 빛나고 있었다.
저것이 그의 본모습일까? 확신할 수 없지만, 소년은 그 모습이 보기 좋아 무심코 장 태감과의 이야기에 깊게 빠져들었다.
소년이 알고 있는 이야기, 장 태감이 궁금해하던 것에 대한 대답과 소년이 모르는 제국 고유의 문화에 대한 장 태감 나름의 견해. 이야기를 나눌 거리는 끝이 없었다.
“허허, 이거 늙은이가 너무 시간을 뺏은 게 아닌지 모르겠군. 덕분에 즐거웠네.”
“제게도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네 그려. 다음에 올 때는 내 좋은 차라도 들고 찾아올 테니 박대하지 말게나.”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떠나는 장태감의 등을 보며 정자 바닥에 주저앉은 소년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야기를 나누며 한 마디 한 마디를 조심스럽게 한 탓에 장 태감이 떠나자 긴장이 풀리며 몸이 물에 불린 미역처럼 늘어졌다.
“아…… 씨, 오늘 밥하기 싫다.”
그냥 짜장이나 한 그릇 시켜 먹으면 안 되나?
* * *
어둠이 내려앉은 북림궁은 다른 궁보다 더 장엄하고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겼다.
아름다운 정원과 연못에 감 쌓인 다른 사방궁과는 달리 본래 용의 아들이 병사들의 영혼을 위로 하는 위령제를 지내던 장소였던 북림궁은 수백 개의 돌기둥과 금룡기를 내건 깃대에 둘러싸여 마치 거대한 신전처럼 느껴졌다.
궁 역시 다른 곳보다 석재를 많이 사용하여 묵직하고 단단한 안정감이 느껴졌다.
마치 궁의 주인인 비의 성향을 따르는 듯하다.
나인들이 뒷정리하고 주인의 잠자리를 준비하는 시간, 외궁의 관료들도 모두 퇴청하는 시간에도 북림궁면회실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이런, 밤이 늦었군요.”
능청스러운 태도로 하품을 하는 장태감을 앞에 둔 이는 키가 훤칠하고 눈매가 날카로운 여인이었다.
키가 보통의 남자보다도 크고 호랑이 같은 눈을 가진 여인. 그녀가 바로 북림궁의 주인인 안양비였다.
수려하고 아름다운 미모임에도 불구하고 기개 넘치는 범눈과 장신은 이 시대의 미인상과는 어긋났지만 그런데도 그녀는 보는 사람이 입을 모아 감탄사를 터뜨리게 할만한 미인이었다.
장 태감은 하품을 본 체도 안 하고 여전히 그가을린 보고서에 시선을 집중한 그녀를 보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안양비 님이시야 아직 젊으시니 괜찮으시겠지만, 이 늙은이는 눈도 침침하고 허리도 뻐근한 것이.
“피로하다면 먼저 침소에 들어도 좋으니 푹 쉬시구려.”
“아이고, 모시는 주인을 앞에 두고 어찌…….”
앓는 소리를 하자 안양비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대의 주인은 위대하신 용의 아들이시자 이 나라의 주인인 황제 폐하시지. 내가 아니지 않소.”
“예, 그렇지요.”
태감은 좀 전에 소년과 담소를 나눌 때와는 다른 음습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와는 더 숨기고 감출 만한 비밀이나 인격적 결함 따윈 없었다.
그녀가 자신을 아는 만큼 그 또한 그녀를 잘 알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편한 상대. 그렇기에 장 태감은 남들이 보기에 거북할 비웃음을 입에 걸면서도 거리낌이 없었다.
한참을 더 서류를 들여다보던 안양비는 이내 서류를 접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예법에 어긋나는 행동이었지만 안양비 없이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거기에 안양비는 한숨을 내쉬는 거로 모자라 곱게 정돈된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리며 머리를 긁었다.
“이것 참, 도저히 정보가 없군.”
“예, 정보가 없더군요.”
“양 태감이 손을 쓴 건가?”
“그럴 가능성도 있지요.”
“자네가 태만했을 경우는?”
“그럴 수도 있지요. 요즘은 저도 눈이 침침한 것이 영 예전만 못함을 느낍니다.”
둘은 주거니 받거니하며 마치 선문답을 하듯이 말했다. 친근한듯하면서 또 서로를 견제하는 듯한 대화는 결국 영양가 없는 대화에 흥미를 잃은 안양비가 스스로 중단하며 끝이 났다.
무의미한 대화는 시간을 좀먹는다.
그리고 좀먹힌 시간은 다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 만큼 그녀는 현명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장 태감과 대화할때는 항상 일체의 미사여구를 떼어내고 핵심만을 남긴 직설적인 화투를 즐겨 사용했다.
“그래, 포섭할 수 있겠는가?”
안양비의 직설적인 말에 장 태감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 불가능은 아니겠지만…….
“힘들 것 같군요. 솔직히 저희 쪽에서 제안할 수 있는 보상은 뻔한 것이지요. 돈, 여자, 권력이나…….”
안양비 측에서 내줄만한 보상을 양태감이 마련하지 못할 리가 없다.
그리고 후일 보상하지 못할 공수표를 날리는 것은 훗날의 적을 키우는법.
그리고 일을 마친 개를 너무 쉽게 삶아 먹는 군주는 부하들의 인망을 잃으니 안양비는 진퇴양난에 빠진 듯 밀려오는 두통에 고개를 저었다.
“몸이 불편하다고 하는데, 고칠 방법은?”
“제가 전문가는 아니지만…… 어릴때 다쳐 뼈가 완전히 굳어진 듯하니 쉽게 펴지는 못할 듯합니다. 화타나 편작이 아니고서야……
“그런 전설 속의 인물을 들먹일 필요는 없지. 현실적인 대안은 없는가?”
황제의 총애를 받는 비와 후궁에서 가장 큰돈을 움직인다는 내관감의 주인이라도 결국 사람 하나에 움직일 수 있는 돈은 한정적인 법이다.
궁 밖의 사람들에게야 나랏돈을 물쓰듯이 쓰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결국 그들도 현실적인 금액의 한계 내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나름대로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보았지만, 도저히 후궁의 실세이자 정점인 양 태감을 능가할 만한 보상은 생각나지 않았다.
안양비는 피로감을 얼굴에 드러내며 목이 젖혀지도록 의자 등받이게 기대고 남자도 깜짝 놀랄 만한 걸걸한 한숨을 토해냈다.
“아무리 늙은이 하나 있다 하지만 너무하십니다.”
술 취한 장정도 비켜 갈 만한 한숨은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그냥 넘기기 어려웠는지 장 태감은 점잖은 목소리로 좋게 타일러보려 했다.
“뭐 어떤가. 자네와 나 사인데.”
“하아, 이 노구를 그리 믿어주시니 감개가 무량합니다그려.”
떪은 감을 씹은 표정의 장 태감을 보며 안양비는 그림 같은 미소를 지었다.
호랑이처럼 기세 좋은 날카로운 눈동자 아래로 오뚝하니 보기 좋은 코와 앵두처럼 붉은 입술.
지극히 아름다운 미녀임에도 기상이 담대하고 강렬해 짙은 남성미가 눈에 띄는 미인이었다.
남자인데도 여성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한 태감과는 좋은 대비가 되는 중성적인 미인.
만약 그녀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분명 십 년 안에 정치판의 판도가 뒤집 혔으리라.
남아가 아닌 것이 천추의 한이라는 이조판서의 술주정은 이 음습한 후궁에도 널리 퍼진 것이었다.
장 태감은 그녀가 남자가 아님을 진심으로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여인인데도 이렇게 서릿발처럼 날카롭고 위엄은 추상과 같은데 남자로 태어났다면 어찌 되있겠는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냐며 칼을 뽑아 들지는 않았을까?
실패하면 역적이나 성공하면 왕인법. 눈앞의 범 같은 여인은 실로 그리 자부할만한 여인이었다.
눈을 지극히 감고 탁자를 톡톡 두드리던 안양비는 이내 감았던 눈을 뜨고 자신을 타이르듯이 말했다.
“그래, 남 주기는 아깝고 품을 수는 없다면. 어쩔 수 없지.”
화근을 지우는 수밖에.
평탄한 듯 기복 없는 목소리는 고희를 넘긴 장 태감조차 등허리 위로 쭈뻣 소름이 돋을 만큼 소름 끼치는 것이었다.
그녀는 결코 사람의 목숨을 두고 농을 하는 일이 없었기에 그 짧은 고민의 순간에 그녀가 얼마나 각오를 다지고 이익을 저울질했을지 상상이 갔다.
하지만 그리 두기에는 아까웠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장 태감은 그 어리숙하면서도 애늙은이 같은 소년이 꽤 마음에 들었다.
그 재주가 탐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 폭넓은 식견은 분명 언젠가 크게 쓰일 날이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장 태감은 참으로 오랜만에 그녀의 의견에 제동을 걸었다.
“남 주기 아까워지우기에는 너무 아까운 녀석입니다. 분명 품에 드시면 크게 쓰일 날이 있으실 테니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품어보시지요.”
“자네가 그리 말할만한 인재인가? 솔직히 그깟 요리, 잘하는 자라면 장강의 모래알처럼 많지 않은가.”
“장강의 모래알은 많으나 그중 특별한 원석은 하나뿐인 법입니다. 백번 말해봐야 이 늙은이 입에 침만 마를 터이니, 한번 드셔보시지요.”
장 태감은 소년이 싸준 떡 꾸러미를 꺼내 들었다. 사실은 본인이 처소에 돌아가 내일 아침으로 먹으려남겨둔 것이었다.
보기에는 그저 보잘것없는 찰떡.
저잣거리에서 구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이런, 떡을 먹으려면 차라도 한잔있어야겠는걸.”
“제가 한잔 우려오지요.”
장 태감이 일어나 찬장을 열고 찻잎을 고르는 동안 안양비는 유심히 떡을 검사하듯이 살펴보다 이내 기미를 보는 시비도 부르지 않고 그대로 떡을 한입에 집어넣었다. 그들에게는 그럴만한 신뢰 관계가 있었다.
우물우물.
마치 짐승이 고기를 씹듯이 앞니부터 송곳니와 어금니를 전부 사용하여 떡을 씹어 삼킨 안양비는 찰나의 순간에 아이 주먹만 한 떡 한 덩어리를 전부 씹어 삼키고 다음 떡으로 손을 가져갔다.
“괜찮네, 팥소가 향긋한 게 계피인가?”
“예, 향이 무척 좋더군요. 거기에 계피는 소화기관에 좋고 여인들에게 좋은 재료가 아닙니까.”
“이건 진피가 들어갔군. 향긋하고 상큼해.”
우물우물, 우적우적.
평소 연회에서 검소하게 먹고 소식을 즐기는 식습관으로 덕이 높다 평해지는 안양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차를 우려내며 장 태감은 부디 거나하게 트림만은 하지 않기를 기도하며 혹여나 누가 듣기라도 할까 두번 세 번 고개를 돌리며 주위를 살폈다.
쥐도 굴로 돌아가고 새들도 둥지에 내려앉을 시간, 혹시나 해 나인들도 전부 물린 것이 다행이었다.
태감이 차를 우려내었을 때는 이미 떡은 다 사라지고 없었다. 손가락에 묻은 가루마저 핥아먹던 안양비는 장 태감이 차를 내오자 한 손으로 턱 쥐고 찬물 들이키듯이 들이켰다.
“좋군, 아주 좋네. 과연 아까운 재능이야.”
“거기에 약선요리에 능하고 솜씨가 하늘에 닿아 마음의 병마저 고친다하니 그리 쉽게 내치시면 다시 구하기 어려운 인재입니다.”
“아아, 홍엽비일 말이지…….”
그녀로서는 정적을 낙마시키지 못한 씁쓸한 일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그녀의 유약한 성정은 마음에 안 들다 못해 실소가 나을 지경이었지만 적이라면 그보다 더 믿음직한 자도 없다.
기회가 있을 때 떨어뜨리지 못한것은 아쉽지만, 그것은 기회가 있을 때 낙관하여 기회를 잃은 그녀의 실책이다.
“자네도 아깝게 되었어. 그 소묘라는 나인에게 상당한 공을 들이지 않았나.”
“예, 지원을 많이 했는데 안타깝게 되었지요.”
그 어리석은 남양궁의 주방관을 떠올리며 장 태감은 혀를 찼다. 그녀를 지원하기 위해 보통 노고를 들인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괴질인 척 독을 풀기 위해 한 고생, 나인들이 끌려갈 때 그녀를 주방관 자리로 올리기 위해 한 고생을 생각하면 영 적자입니다. 적자.”
“그럼 적자가 더 생기기 전에 그 친구를 제거해야겠는걸?”
안양비의 소탈한 말에 장 태감은 손을 내저으며 만류했다.
“아직 쓸 방도가 남아 있습니다.”
“호오, 방도가 남아 있다고?”
“예, 이번에 양 태감님께서 안양비님의 수하들에게 눈을 붙이셨다 하셨지요?”
그 때문에 안양비는 좋은 기회를 뜬 눈으로 놓쳐야 한다며 안타까워했었다.
“제게 좋은 방책이 있습니다. 그 친구를 한 번 더 써 보시지요.”
분명, 아직은 쓸모가 있을 겁니다.
차가운 말에 안양비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잡을 수 있는 기회라면, 어찌 마다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