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43화
마치 시장을 구경나온 아이처럼 들뜬 홍엽비 옆에서 소년은 마치 화장품을 판매하는 백화점 직원처럼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따라붙었다.
소년의 손에는 큼지막한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뭐…… 뭐부터 넣을까요? 뭐가 좋을까…….”
“일단 주재료부터 정하는 게 좋겠지요. 해산물, 고기, 내장, 주된 재료를 정하고 거기서 조금씩 맞춰나가면 될 것 같습니다.”
“다 먹고 싶은데…….”
지금이 아니면 언제 먹을 수 있을지 몰라. 불안하게 흔들리는 홍엽비의 눈동자를 보며 고민하던 소년은 결국 항복의 한숨을 내뱉으며 바구니를 작은 것으로 바꿔 들었다.
“그럼 조금씩 만들어서 맛을 보시면 어떨까요? 해산물 따로 고기 따로 내장 따로, 그러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될까요? 번거로우실 텐데…….”
이 비천한 몸이 번거로울 것까지 생각해 주시다니. 눈물방울을 글썽거리는 홍엽비를 보며 소년은 모든 고난과 피로가 단번에 보상받는 것 같은 만족감을 느꼈다.
뭘 해줘도 더 달라는 반응밖에 없는 태감과 살다 이렇게 작은 것에 감사하는 사람을 만나니 세상이 달라 보인다.
“우선은 양고기를 주재료로 골라보시지요.”
얄팍하게 썬 양고기를 넉넉하게 집어 바구니에 넣으며 소년이 말하자 홍엽비는 진지하고 탐구적인 태도로 진열된 식재료 사이를 누볐다.
“우선 기본이 되는 재료는 뭐가 좋을까요?”
“일단은…… 배추나 콩나물이 들어가면 달고 시원하지요. 연근도 아작아작하니 식감이 좋고…… 쫄깃한 느타리나 표고를 넣으면 또 맛이 좋지요. 청경채 같은 푸른 잎 채소는 건강에 좋으시니 조금씩이라도 드시면 좋습니다.”
홍엽비에게 집게를 건네자 홍엽비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콩나물 약간, 배추 약간, 그리고 연근을 두 개 정도 집어 바구니에 넣었다.
“건두부피는 오돌토돌한 질감이 참 좋지요. 부죽(腐竹)과는 식감이 조금 다른데, 부죽보다 얇아서 식감이 좋고 부드럽지요. 유부도 있고, 동두부(凍豆腐)를 넣으면 양념을 흠뻑 빨아들여서 입에 넣고 씹으면 양념이 쭉배어나오는 것이 일품입니다. 아 목이버섯을 또 빼놓을 수 없지요.
흰 것이든 검은 것이던 야들야들하고 아삭아삭한 식감이 또 양념과 잘 어울리지요.”
소년의 현장감 넘치는 설명에 혼이 빠진 홍엽비는 다양한 식재료에 손이 가는 것을 참으며 두부피 조금과 동두부 두 조각, 백목이 조금을 집었다.
“고기 마라향과이니 다양한 재료를 넣는 것보다는 간결하게 첫맛을 즐기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떠신지요?”
“전 좋아요.”
“그럼 바로 볶아 올리겠습니다.”
풍로로 바람을 불어넣자 아궁이에서 큰불이 솟았다. 달아오른 철과에 재빠르게 오래 익혀야 하는 순서대로 재료를 넣고 철과를 휘두르자 식재료가 불을 휘감으며 솟아올랐다.
홍엽비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롤 만큼 큰 불, 어지간한 요리사는 엄두도 못 낼 만큼 화끈한 불 쇼를 선보이며 소년은 미리 조합해둔 알싸한 마라 양념을 아낌없이 넣었다.
코끝으로 알싸하게 흐르는 고추 향기와 정수리까지 아찔하게 솟구치는 톡 쏘는 산초 향! 그 밑으로는 은근한 마늘과 생강 향기가 향기에 복잡한 풍미를 더했다.
“아아…….”
익숙한 고향의 향기, 서늘하고 건조한 경사와는 달리 무더운 날이 많은 호남의 상징과도 같은 알싸한 마라향은 홍엽비가 늘 그리워한 고향의 향기였다.
“자, 양고기 마라향과 한 그릇 나왔습니다!”
종지 그릇보다 조금 큰 그릇에 소복하게 담긴 양고기 마라향과는 밥한 숟갈과 함께 제공되었다면. 처음에는 너무 작은 양에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다음에 먹을 마라향과들을 생각하면 납득이 가는 양이었는지 홍엽비는 곳 기쁘게 젓가락을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알싸하고 톡 쏘는 향기, 혀를 저리게 만드는 산초의 맛이 혀를 짜르르 울리며 뒷목을 타고 정수리까지 빠져나왔다.
아삭아삭하고 향긋한 야채에 농후한 기름이 배어나오는 양고기, 식감 좋은 연근에 백목이버섯. 홍엽비는 금세 그릇을 비우고 그릇 바닥에 고인 양념을 아쉬운 듯이 보았다.
“자, 이번엔 조금 더 맛있게 만들수 있겠지요?”
“이번엔 해물을……. 주재료로 하고 싶어요.”
“그럼 우선…… 신선한 꽃게와 새우는 빼놓을 수 없지요. 특히 신선한 꽃게로 만들면 정말 달콤하답니다. 여기에 새우는 민물새우도 좋지만, 꽃게와 함께 볶을 거니까 신선한 바닷새우를, 통통한 보리새우정도면 좋겠군요. 껍질은 말끔하게 벗겨 드릴 테니 통통한 살만 쏙쏙 골라 드시면 먹기도 편하고 맛도 훌륭하지요.”
소년의 신묘한 화술에 빠져든 홍엽비는 집게로 꽃게와 새우를 듬뿍 골라 담았다.
“여기에 채소는…… 배추만 약간, 신선한 해물이 들어가는 거라 다른 부재료는 조금만 넣는 편이 해물의 달콤함을 즐기기에 좋을 것 같네요. 여기에 목이버섯을 약간, 파도 조금 넣고…….”
“파도 조금 넣고 목이버섯…….”
“건강에도 좋고 맛도 좋은 죽순과 표고버섯은 어떠신지?”
정신없이 재료를 골라 담아 그득하게 내밀자 소년은 서둘러 철과를 뜨겁게 달구고 기름을 넉넉하게 부어생강 향을 우려냈다.
철과가 달궈지는 동안 재빠르게 꽃게를 손질하고 새우껍질을 깐 다음, 우선은 꽃게를 바삭하게 한번 튀겨냈다.
알이 들어차기 시작한 꽃게토막들을 기름에 한번 초벌로 튀겨낸 다음 재빠르게 건지고, 새우 머리와 껍질들을 기름에 튀겨 달큰한 새우 향미유를 만들었다.
“이렇게 못 먹을 것 같은 머리와 껍질이라도 기름에 튀겨내면 향긋한 맛이 우러난답니다. 이렇게 맛을 우려낸 새우 기름은 참 달아요. 이렇게 주걱으로 머리를 부숴줘야 고소한 새우내장이 우러나오는데 그게 양념에 섞이면 고소하고 진한 바다맛이 우러나서…….”
소년의 이야기를 들으며, 소년이 요리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꼭 함께 요리하는 기분이 들었다.
요리가 유난히 더 맛있게 느껴지는것은 그래서일까? 어느새 창백했던 홍엽비의 뺨에는 발그레한 홍조가 돌았다.
늘 경직된 후궁에서의 생활에선 느낄 수 없는 생동감 있는 경험. 그리운 고향의 맛과 향기는 지루하고 숨막히는 일상에서의 도피였으며 경직된 규중의 처녀에게는 잊을 수 없는 비일상의 체험이었다.
추하고 비루한 외모였지만 홍엽비에게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충격적인 경험과 그것을 위로해준 소년은 홍엽비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했다.
친애의 감정, 만난 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어째선지 다른 이들보다 믿음직한. 의지할 수 있는.
홀로 설 수 없는 그녀에게 자신보다 어린데도 후궁이라는 복마전에서 자신의 위치를 개척한 소년은 특별하게만 보였다.
대장군의 여식으로 태어나 정치적인 거래에 의해 후궁의 비로 들어온그녀에게 그 감정은 동경에 가까웠다.
세상이 웃을 일이지, 제국의 안주인에 가까운 여인이 가장 비천한 처지의 소년을 동경한다니.
그 감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호한 웃음을 지으며 소년이 부드럽게 쐐기를 박아넣었다.
“아, 전에 파견 보내주신 소소라는 나인 말입니다. 그 친구나이가 어리대도 참 야무지고 일솜씨가 좋더군요. 덕분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네?”
어금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는 당황과 분노의 감정을 숨기느라 정신이 없을 테지. 장소는 소년의 뒤에서 시녀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홍엽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긴 시간 시녀들을 내버려 둔 채 궁에서 중심을 잡지 못한 그녀는 자신이 모르는 사이 나인들이 어떤 전횡을 일삼았는지 알고 있었다.
말려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그녀들을 처벌하고 나인들을 통제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홍엽비는 그리하지 못했다.
의지할 수 있는 시녀가 있었다면 이렇게 급속도로 소년에게 친밀감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댈 언덕 없는 고립무원의 자리에서 움츠리고 살았기에 홍엽비는 대가 없는 호의를 보여준 소년에게 너무 쉽게 매달리듯이 의지해 버렸다.
소년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해준것이다. 그런 시녀들이 없어도 내가 있다고. 언제든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주겠다고.
유약하지만 멍청하지는 않다. 홍엽비는 소년의 말에서 소년의 의도를 분명하게 알아들었다.
허리를 곧게 펴고 홍엽비는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그래서 그런데, 이번 연회를 준비하는 동안 그 친구를 좀 빌려도 될까요? 그 친구가 솜씨가 워낙 좋아서, 짧은 기간이지만 조금 가르쳐 보고 싶습니다.”
이번엔 마치 돌절구에 이빨을 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숨길 수 없는 분노와 당황의 감정에 소년은 슬며시 뱀처럼 길게 찢어지는 미소를 그렸다.
“네, 그렇게 하세요. 그 아이에게도 좋은 기회가 되겠군요.”
“감사합니다. 아, 다 드신 양념에 육수를 추가해서 마라탕으로 만들어드릴까요? 꽃게의 단맛이 잘 우러난 달콤한 마라탕이 될 텐데, 여기에 면을 넣어 먹어도 좋지요.”
“어머, 그것도 정말 맛있겠어요.”
서로 간에 소리 없는 밀약을 맺은 둘은 다시 평범한 관계로 돌아갔다.
온 정성을 쏟아 맛있는 요리를 제공하고 싶은 요리사와 다시없을 요리를 만끽하고 싶은 손님.
그 관계를 두 단어로 정의하라면, 친구라도 해도 좋을 것이다.
* * *
접시 깨지는 소리와 함께 폭언과 고성이 일방적으로 쏟아졌다. 남양궁의 나인들, 홍엽비의 전속 시녀와 주방의 나인들은 바싹 얼어붙어 있었다.
그중에는 소소를 괴롭혔던 선배 나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소소의 앞에서는 잘난 듯이 위세를 부렸지만, 더 지위가 높은 이 앞에선 그들도 어쩔 수 없는 약자였다.
궁에 고용되어 고용살이할 뿐인 나인인 그녀들과는 다르게 앞에서 호통을 치고 있는 여인은 후궁을 관리하는 궁녀들의 조직인 육국에 소속된 정식 궁인이었으며 남양궁 주방의 책임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소묘. 남양궁의 주방을 책임지는 주방관(㕑房官) 소묘였다.
작은 체구와 앳된 외모와는 다르게 벌써 십 년이나 후궁에서 구르고 구른 잔뼈 굵은 여인이었다.
그녀 역시 선배들의 모진 괴롭힘을 이겨내고 정식 궁인이된 만큼 교묘하고 현란한 말솜씨로 후배들을 못살게 구는 솜씨가 일품이었다.
“너희는 밥 먹고 하는 게 뭐니 도대체. 그 자식 말하는 거 못 들었어? 어? 소소 담당하는 애 누구야?”
“저…… 전데요…….”
마치 암탉이 마당에 꿈틀 거리를 벌레를 쪼듯이 불벼락처럼 화끈한 질책과 모욕이 떨어졌다.
제 가슴께에 나올법한 소묘를 상대로 나인들은 코가 땅에 닿을 만큼 굽실거렸다.
육국에 소속된 궁인은 소속된 나인들을 지휘하고 관리할 권한이 있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한순간에 기피보직으로 쫓겨날 수도, 아예 한 푼도 못 받고 궁 밖으로 내쫓길 수도 있기에 나인들은 마치 저승사자를 눈앞에 둔 듯이 굴었다.
“이 밥벌레들, 너희들은 밥 먹을 자격이 없어. 아니다, 너희들 나 쫓아내려고 일부러 작당한 거구나? 이미 그 곱사등이 놈한테 줄을 댄 거야. 그렇지?”
“아니에요! 저희가 어찌…….”
소묘가 나인들을 쥐잡듯이 잡을 무렵 남양궁을 빠져나가던 오운과 장소는 석양이 지기 시작한 남양궁의 경관을 보며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렇게까지 도발을 했으니 한동안은 소소의 위치가 위험할 겁니다. 일이 끝날 때까지는 연좌궁에 둘 테니 혹시 남양궁의 나인들이 보이거든 장소 님이 사전에 차단해 주세요.”
“그래도 소소를 생각해 주셨군요. 전 오운 님이 꼼짝없이 소소를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소년의 안색을 살피며 장소가 조심스럽게 속내를 털어놓자 소년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기분 좋은 숨을 내쉬었다.
“일이 좋게 풀렸으니,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요. 불쌍한 애를 괴롭히는 취미는 없습니다.”
“……저…… 그럼…….”
물론 일이 잘 안 풀렸으면.
이라는 가정은 굳이 할 필요 없을 것이다. 일어나지 않을 일을 두고 왈가왈부할 정도로 후궁은 여유로운 곳이 아니니.
그들에겐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예를 들면.
“오늘 야식은 좀 맛있는 걸 먹을까요? 일도 잘 풀렸고, 재료도 많이 남았으니까.”
“그럼 마라향과 해주시는 거예요?”
“밤에 야식으로 괜찮겠어요? 매운거 먹고 자면 속 쓰릴 텐데.”
“에헤헤, 귀주성 사람들은 매운 걸 거절하는 법이 없어용.”
고양이처럼 폴짝 뛰어 담벼락 위로 올라선 장소는 애교 있는 웃음을 지었다.
마치 담벼락 위에 고양이가 나른한 하품을 하는 것 같은 모습에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함께 웃음 지었다.
모략과 암투의 흔적이 없는 깨끗한 웃음을 지어보는 건 얼마 만인지.
“그럼 마라향과랑, 안 매운 것도 하나 해서 야식으로 하죠! 뭐. 소소는 매운 거 잘못 먹을지도 모르니까.”
“네! 제 건 화끈하게 해주세요.”
“예, 아주 화끈하게 해드릴게요.”
후궁에서 오랜 시간을 버렸을 텐데도 장소와 이삼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무 걱정 없이 웃게 하는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남아 있었다.
유연한 몸놀림으로 사뿐사뿐 몸을 놀리며 담장 위를 걷던 장소가 일순간 몸을 경직시키며 폴짝 뛰어 담장아래로 내려왔다. 저 멀리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을 보아서일까?
소년의 시야에도 잡힐 만큼 가까이 다가온 인형이 반가운 목소리로 인사하자 장소가 깊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어이쿠야. 장소 군 아닌가. 사례태감께선 잘 계시고?”
“오랜만에 뵙습니다, 장 태감님. 양태감님은 잘 계십니다.”
장소의 인사에 소년도 서둘러 허리를 숙였다. 뻣뻣하게 굳은 장소의 모습으로 보통 사람은 아닌 줄 알았지만 설마 했던 태감급 인사였을 줄이야.
깊게 허리를 숙이고 땀을 뻘뻘 흘리는 소년은 가느다란 눈동자로 보며 장 태감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참으로 사람 좋은 웃음이었다.
“이 친구가 사례태감께서 새로 들였다는 그 솜씨 좋다는 친구인가 보지? 자네 솜씨가 뛰어나다는 이야길 자주 들었네.”
“과찬이십니다.”
“과찬은 무슨, 겸양이 미덕이라지만 자네처럼 유능한 사람은 자랑 좀하고 살아도 돼.”
옆집 할아버지처럼 푸근한 얼굴로 덕담하는 장 태감의 표정에는 평온함과 여유가 넘쳤다.
보는 사람도 절로 편안한 마음이 들게 하여 소년도 마음을 놓으려 했지만, 어딘가 긴장을 놓을 수 없는 기이한 위화감에 더욱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언제 한번 자네 솜씨 좀 볼수 있겠는가? 나이가 드니 많이는 못 먹겠고, 맛있는 음식을 탐하는 버릇이 생겨서 말이야.”
구밀복검(口蜜腹劍)이라. 달콤한 말 사이에 스며든 섬뜩한 탐욕의 기세에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뒷목의 머리털이 쭈뻣 서는 것을 느꼈다.
어떤 방식으로 대답해야 책잡히지 않고 넘어갈 수 있을까? 오래 고민할 시간도 없었다.
“물론이지요. 연좌궁에 오시는 날이면 최고의 요리를 대접할 수 있도록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젊은 친구가 이 늙은이를 그렇게 생각해 준다니 고맙구먼. 이런, 바쁜 친구들을 내가 너무 오래 잡고 있었군. 어서들 가보게.”
못내 아쉬운지 입맛을 다시던 장태감은 그래도 소기의 성과는 얻었다 여긴 것인지 빙그레 웃으며 덕담을 몇 마디 더 건네고는 담벼락의 모퉁이 너머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고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장소는 가쁜 한숨을 토해내며 담벼락에 기대 주저앉았다.
“정말 잘 대처하셨어요. 깜빡 잘못했으면 화술에 넘어가서 정치적인 화근이 될 뻔했는데…….”
“……저분, 대체 어떤 분이시죠?”
“자세한 건 태감님이 설명해 주실거예요. 일단 가시죠.”
장소가 소년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마치 둘이서 사랑의 도피를 하는 것 같은 묘한 그림이 그려져서 조금 불편했지만, 식은 땀을 흘리는 장소의 표정이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어서 소년은 농담을 삼켰다.
마음이야 이미 연좌궁까지 한달음에 달려갔건만 불편한 몸뚱이는 절뚝거리며 조금만 뛰어도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마치 누군가가 악의적으로 망가트린 것 같은 신체에 욕이 턱밑까지 차올랐지만, 그 욕도 헐떡거리는 숨에 막혀 제대로 토해낼 겨를이 없었다.
“뭐야, 뭔데 그렇게 뛰어와?”
오늘 저녁밥이 늦어 신경질이 난 태감이 퉁명스럽게 맞아주자 달음박질에 심장이 터질 듯이 뛰어 정신을 못 차리는 소년을 대신해 장소가 장태감을 만난 이야기를 풀어냈다.
같은 거리를 뛰었는데도 영양처럼 가느다랗고 맵시 있는 다리로 통통뛰는 장소는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흐음…… 장 태감이란 말이지…….”
심드렁했던 태감의 검미가 굳고 옥구슬처럼 굴러가던 목소리에 무게감이 실리자 자연스레 그림자가 드리운 우수에 젖은 눈동자에는 짙은 우려감이 서렸다.
“무슨…… 일인데…… 끄어어어…….”
“……일단 좀 쉬어라. 도대체 얼마나 뛰었길래 애가 걸레 조각이 된거야?”